퀵바

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18,250
추천수 :
289
글자수 :
301,785

작성
14.08.07 07:04
조회
1,169
추천
20
글자
24쪽

2화

DUMMY

항복을 하러 가는 길은... 은근히 멀었다.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물론,


잉글랜드의 진지는 화살이 닿는 수준이 아닌 그 훨씬 너머에 있으니 한참을 걸어야 했다. 살짝 웃음이 났다.


나름 예쁘게 꾸미고 아무리 봐도 프라이팬으로 밖에 안보이는 열쇠를 들고 적진에 걸어가는 젊은 여자라...


전쟁의 종결이 아닌 피크닉의 시작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남아있던 긴장감도 풀어질 무렵, 저너머에 잉글랜드의


진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 내 눈앞에 발치에 화살이 한대 꽂혔다.





순간 긴장감이 다시 몸을 감돌았다. 나는 그대로 멈춰선채로 어지할지 고민했다. 곧, 고민은 쉽게 끝났다. 저


너머에서 일단의 기병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니깐. 좋은 말과 갑옷을 장비한 그들은 순식간에 창을 앞세우고


나를 둘러쌓다. 나는 그런 그들의 위협적인 행동에 조금 불안해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일행의 리더인 듯한


기사가 정면에서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넌 누구냐? 길을 잃은 매춘부냐? 아니면 앙주를 빠져나온 시민이냐? 설마하니 항복하러 온 시장은 아닐테고."





셋 다 맞는데요. 하지만 나는 농담 대신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앙주의 시장입니다. 잉글랜드의 국왕폐하에게 항복하러 왔습니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푸하하하하!!! 이거 참 재미없는 농담이군. 너같은 계집이 시장이라고? 그럼 손에 들고 있는 그 프라이팬도


앙주의 성문 열쇠겠구나."





역시나... 이 열쇠 만든 열쇠공, 주방용품도 같이 만든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나를 비웃는 그들에게 설명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앙주의 시장입니다. 이것은 말씀하신 대로 앙주의 성문열쇠가 맞습니다. 국왕 폐하에게 저를


안내해주십시오."





"허튼소리 하지 마라! 앙주의 시장은 조슬랭이다. 그 모략꾼 조슬랭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모르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친 장난이군."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신임 시장입니다."





"폐하께서 찢어죽이고 싶어하는 자는 조슬랭이다. 조슬랭이 아니라면 용무는 없다. 성으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려라. 전장에서 더 돌아다니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간자로 간주해 처형할 뿐이다."





역시나... 처음부터 만만치는 않았다. 사실 조금은 예상한바였다. 나같은 어린 계집애가 시장이라고 우겨봐야


믿어줄리가 만무하지. 하지만, 나도 거리 생활을 온실의 화초로 한건 아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준비해둔


방법을 써야 할것 같다.





"알겠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저를 막아서신 기사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 나는 영광스러운 잉글랜드 왕립 8경기병 연대의 5중대장, 에라드 위체다. 내 이름은 왜 묻나?"





"더 못가게 하시니 서면으로 라도 전하는 수밖에요. 국왕폐하에게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분명히 공시하신 날짜에


앙주의 시장이 성문의 열쇠를 들고 항복하러 갔는데... 에라드 위체 라는 사람이 아무리 간청해도 보내주질 않아


항복하지 못했다고요. 내일까지 화살에 묶어 진지로 쏘아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뒤돌아 앙주로 향했다. 열걸음 걸을때까지는 침묵, 스무걸음째는 분노와 욕설, 서른걸음째는 다급함과


경고, 마흔걸음째가 되었을때는... 잠시후 나는 제법 공주같은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가장 좋아 보이는 말에


태워져 기사 한명이 고삐를 쥐고 말을 이끌었고 내 주변에 백여명의 기사들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이동하였다.


동화속에 나오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공주님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잠시금 즐거운 기분에 젖어들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거냐?"





에라드 위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난처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흥, 그렇게 죽고 싶다면 좋을대로 해라. 폐하에게 데려가주긴 하겠다. 하지만 내가 너라면 그대로 내뺐을꺼다.


폐하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시니... 너는 이제 내일 해를 보기 어려울것이다."





그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나를 협박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다. 나는 희미한 미소로 그에게 답했고 그는


질렸다는 듯이 나에게 멀어졌다. 곧, 잉글랜드의 진지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여기저기서 알수 없는 적의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닭을수 있었다. 나는 곧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해 보이는 막사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제법 넓은 장소였다. 작은 궁전같은 기분이 들만큼. 가운데에 있는 화려한 의자에 앉은 중년남자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그를 둘러싸듯 시립해있었다. 명백한 적의... 그리고 약간 섞여 있는 의아함... 나는


그 모든것을 받으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잉글랜드의 국왕이 분명한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앙주의 모든 시민이 국왕폐하에게 항복합니다."





나의 말에 그의 음성이 무겁게 울렸다.





"너는 누구냐?"





"앙주의 시장입니다."





"네가 앙주의 시장이라고? 그럼 조슬랭, 그 개자식은 어디간거냐?"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돌아가셨습니다."





"뭣이! 그 내손으로 찢어 죽여야 직성이 풀릴 놈이 자기 멋대로 죽어버렸다고? 이 망할 개자식은 내 복수마저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군. 개자식, 더러운 자식, 주님이 용서하지 못할 놈... 으아아아악!!!"





그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장을 욕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한참동안을 그를 저주하던 국왕은 문득 내가 생각난듯


나를 보며 말했다.





"조슬랭을 대신해서 온 너는... 조슬랭의 딸이냐? 아님 다른 친척이냐?"





"아닙니다."





"그럼, 앙주의 귀족가문 자제냐?"





"저는... 그냥 앙주의 시민입니다."





"지금 네가 왕을 우롱하는구나. 그냥 앙주의 시민인 네가 왜 시장이 되었느냐? 내가 내린 명을 모르는 것도


아닐터인데. 너같은 어린 계집이 오면 내가 자비를 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느냐?"





"아닙니다... 전 다만..."





"듣기 싫다! 이 망할 조슬랭의 백성들... 네놈들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너희들이 나의 자비가 어느 정도


인지 궁금한가 본데... 똑똑히 보여주마. 전시에 왕의 이름으로 발표된 군명은 법으로 집행될것이고 그 법에


자비란 없으리라. 어서 이년을 데려가서 참수하라."





나는 한편으로 겨우 안도했다. 이제야 내가 바라던 대로 모든게 끝날것이다. 말은 험하게 했지만 그는 생각만큼


과격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말하자면 소심한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거친


흉내를 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가 공표된 명령을 거두진 않겠지만 그것을 어기고 날 죽이고 다른 앙주의


사람들까지 몰살시키는 짓을 하지는 않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책임은 끝난다.





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밖으로 끌려갔다. 이미 진지안에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처형을 위한 참수대와


처형인이 도끼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곧


엄마를 만날수 있다는 기대감에 참수대의 계단을 올랐다. 곧 수많은 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군인들이 나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처형대를 가득 둘렀다. 얼굴을 고깔모양 가면으로 가린 참수인은 나를 모루처럼 생긴 참수대에


엎드리라 가리켰다.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고 무릎높이의 모루에 엎드려 목을 올렸다.





사람들이 긴장감이 사형장을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잠시후 왕의 비서인듯한 사람이 왕의 칙령과 나의 죄, 정확히


말하면 전임 앙주 시장의 죄를 고하며 처형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나는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못내 아쉬운듯


노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처형당할거 거짓말이라도 시장의


딸이라고 해줬으면 복수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을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곧 긴 비서관의


연설이 끝나고 동의를 구하는 요청이 있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형인이 도끼를 들어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엄마... 이제 곧이야. 곧 만날수 있어. 그리고 누군가 소리쳤다.





"집행하라!"





처형인이 높이 올린 도끼를 내려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 때였다.





"중지하라!" '챙!'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난 이미 죽은건가? 아니다. 살아있다. 하지만 처형인의 도끼는?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처형인의 도끼를 내 목위에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검으로 막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처형대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한듯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 남자는 힘을 주어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처형인의 도끼를 밀어내고 중심을 잃은 처형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처형대에서 나뒹굴어지게 해버렸다. 마치


싸구려 희극의 몸개그 같은 그 장면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있었고 지금까지 내 뒤로 등을 돌리고 있던 그 남자는


몸을 돌려 나와 국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 위대하신 잉글랜드의 국왕폐하시여! 어찌, 이런 재밌는 일에 왕의 광대를 빼시고... 아니, 왕의 처형 명령에


왕국의 사법관 동석 없이 일을 진행하시나이까?"





그리고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친 왕자가 또 시작이군..."





아, 미친 왕자... 나는 그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소년의 티가 역력한 나보다 몇살 연하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년이 칼을 뽑아들고 마치 무대위의 배우처럼 처형대의 관객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국왕의 여덟번째


아들로 재능이 출중하고 무예가 뛰어나 이번 전쟁에서 앙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그 천재 소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 이상으로 어린 소년이었다. 나는 그의 과장된 행동에 잠시 눈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이 난봉꾼 녀석, 지금까지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다 늦게와서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은 안도감과 다정함이 스며져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왕의 총애를 받는 왕자인듯 했다.


왕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늦게 온건 죄송합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체한 랍비가 고기를 판 비잔틴 환관장의 아들들에게 고소를 하는


송사를 맡아달라 해서 좀 늦었습니다. 근데 와보니 얘기가 참 재밌게 돌아가는 군요. 서둘러 오길 잘한듯 합니다."





유대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환관에게 자식이 있을리 없다. 그래서 그런 그의 농담에 다들 키득거렸다.


분위기가 살짝 온화하게 변하자 그가 왕에게 말했다.





"단언컨데, 이 처형은 진행되서는 안됩니다. 이는 폐하를 망신주려는 앙주의 장난입니다."





"무슨 소리냐? 설명해보아라."





"생각해보십시오. 다리를 짓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 현자의 이야기를... 악마는 다리를 지어주는 조건으로 다리를


첫번째 건너는 자의 영혼을 받아가기로 하죠. 그래서 아무도 다리는 건널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개 한마리를 사서 다리를 건너게 해 악마에게 개의 영혼을 건내줍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개를 받으신 겁니다."





살짝 화가 나는 기분이다. 개라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왕자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부친을


악마로 묘사해서 돌려서 비난한것이다. 뭐 비유는 그렇다 쳐도... 개라니... 조금 화가 났다. 왕이 말했다.





"그 여자는 분명 자신이 앙주의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앙주의 성문 열쇠를 가지고 항복했고. 처형을 집행함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하? 앙주의 시장이요? 이봐, 여자! 일어서봐."





왕자는 내게 손을 뻗어 목을 늘어뜨리고 있는 나를 자신의 품에 안듯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팔목을 쥐고 왕에게


보란듯이 내보이며 말했다.





"딱 보아하니, 거리의 여자입니다. 잡초로 만든 싸구려 향수에 못먹어 비쩍마른 몸매 하며... 그것도 엄청 싸구려


매춘부겠군요. 이런 여자가 앙주의 시장이라구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이건 다 앙주의 비겁한 쓰레기들이


저지른 농간입니다. 딱 보아하니 몇푼 찔러줬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몸파는 여자 한명 사다가 해야할 것


알려주고 절대 죽을 일이 없다는 거짓말도 좀 섞어서 해줬겠죠. 이 한심한 여자는 멋도 모르고 돈 몇푼에 자신을


팔고 와서 지금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보니 아니란 말도 못하고 얼어있는 겁니다."





화가 많이 났다. 뭐? 싸구려 매춘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다니... 그리고 난 분명 내 자의로


이곳에 왔다. 누군가의 강요나 매수가 아니라... 나는 분노하여 나를 연인처럼 뒤에서 끌어안은 왕자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왕이 짜증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어쩌나는 거냐? 그럼 살려주라는 거냐? 널 왕의 사법관으로 임명한건 왕명과 왕법을 준수하라고 한것이지 어기라


한것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너의 말은 그저 가설일 뿐이다. 그걸 누가 입증한단 말이냐?"





"오오... 성자 루카여, 우리 꼰대... 아니 폐하에게 지혜의 축복을... 간단한 방법이 있죠. 그녀가 앙주의 시장인지


아니면 싸구려 창부인지는 물어보면 알겠죠. 바로 당사자한테! 이제 상황이 그냥 장난이 아닌걸 알게되었으니


이 여자의 입에서도 진실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죠."





그리고 그는 나를 안은 팔을 풀고 내 눈을 맞추고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묻겠다! 여자여. 그대는 앙주의 시장이 맞는가?"





그리고 조용히 읖조리듯이 말했다.





"아니라고 해. 당신 살려주려고 그러는거야."





아름다운 얼굴... 동화속의 왕자님이 현실에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얼굴을 분노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아름다운 얼굴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살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모두를


배신하고 살수 있는 방법을...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앙주의... 시장이..."





그가 여전히 속삭였다.





"그래 계속해. 당신은 살수있다고. 바보짓은 그만하라고. 이대로 죽긴 너무 아깝잖아."





그 말이 내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난 엄마 없는 세상을 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날 살라고 하지? 내가 선택한 죽음을 왜 네가 맘대로 부정하지? 난 그만 마치고 싶다. 그러니깐... 그러니깐...





"나는... 앙주의... 시장이다! 이 개자식아!!!"





"뭐... 꾸엑!!!"





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은 왕자의 면상에 여전히 들고 있던 성문 열쇠를 들고 내리쳐


버렸다. 왕자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던듯 그대로 나뒹굴어 처형대에서 떨어져 조금전 자기가 떨어뜨린 처형인의


위에 굴러떨어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듯 다들 그대로 아무말도 없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나에게 다시 왔을때 나는 소리쳤다.





"이 병신같은 잉글랜드 사내놈들아, 고작 여자 하나 죽이는데 재잘재잘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으냐? 오늘 아침에


나올때 너희 엄마가 젖주면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디? 죽으러 오라고 해서 죽으러 와줬잖냐. 그럼 썅! 수다나


떨지말고 화끈하게 죽일 사내놈들이 여긴 한놈도 없는거냐? 다들 비잔틴에 가서 거세당한놈들만 여기 모인거냐?





비겁한 놈들, 모자란 놈들, 겁쟁이들, 계집애들 같으니... 너희 같은 녀석들이랑 있다보니 내가 목이 잘려 죽는


것보다 먼저 늙어죽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아니면 감히 죽일 용기도 없는 놈들이니 내 손으로 자결까지


해줘야 직성이 풀리겠냐? 여기 모인 모든 주님조차도 한심해하실 병신들아... 이거나 먹어라."





거리의 여자로 살면서 배운 욕들이 나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린


중지를 왕에게 치켜드는 퍼포먼스도 괜찮았다고 나름 뿌듯하게 생각했다. 이제 바로 처형이 집행될것이다. 더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다. 엄마... 이제 곧 만날수 있어.











사람이 자기가 생각한것 보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을때 사고가 정지되고 멍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가끔 손님들에게 바가지 요금 씌우던 언니들의 계산서를 본 손님들이 그러는 걸 본적 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도 비슷한 상황인듯 했다. 뭔가 처형이 중지될것 같아 다급하게 외친 말들은 그들에게 상상 이상의


충격을 줘버린것 같았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일생 모욕이라곤 들어본적도 없는 귀족들이다보니 밑바닥 거리의


언어며 도발이 그들이 수용할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버린듯 했다.





곧바로 화가나서 길길이 날뛰며 처형을 소리칠줄 알았던 것과는 달리 뭔가 잉글랜드의 국왕과 귀족들은 영혼이


빠진듯 멍해져서 일단 나를 가두라고 명하고 그날은 그대로 처형이 멍하니 중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복잡한 회의와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이 시작된다고 해서 뭔가 고문이나 폭행이 이어지리란 생각과는 달리...


심문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고위급 귀족들과 사제들이었고, 그들은 내게 말을 건내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말걸까봐 무서워하는 눈치를 보이며 심문의 분위기가


험악하지 않게 일상적인 일만 물어보는 수준이었다. 간혹 내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명예로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대가 감히 그런 폭언을 함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그런 폭언을 한뒤에 그들에게 어떤 심경인가?"





"좀... 미안할까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고 몇가지 질문 한두개만 하고 심문을 마치며 밖으로 나가며 환호성을 치는


소리가 안에까지 들려왔다.





"다들 들었어? 내가 저 마녀한테 사과를 받아냈어."





"오오오... 너 진짜 대단하다. 다들 또 욕할까봐 엄청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사과를 받다니..."





내가 무슨 병균, 악마, 맹수 쯤 되는 취급을 받고 있는 걸까? 아무튼 이건 그냥 훈훈한 경우였고 대부분의 경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와 관련된 처우의 회의가 다들 괴롭게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제때 식사와


수면과 갈아입을 옷가지까지 주어졌지만 일주일동안 다른 심문관들은 밤새 회의를 하면서도 뭔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게 그렇게 복잡한 일인가? 내 의아함도 잠시 낯익은 사람이 나를 데리러 왔다.





"아, 에라드님 오랜만이시네요."





"따라오시오. 폐하께서 당신의 처우를 통지하실것이오."





무언가 결정된것 같다. 물론 그것이 사형외에 다른것이길 상상하긴 어렵다. 사형이 아니라면 더 심각한 일일뿐.


나는 조금 따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일주일전 성문을 나설때의 각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뭐든 언제쯤 되나?라는


지리함으로 변해버렸다. 우스운 일이다. 죽음이라는 것을 지루해하면서 기다리다니. 나는 그래서 되려 반가운


기분마저 들며 에라드의 안내로 왕에게 갔다. 처음 내가 도착해서 왕을 알현한 막사였다.





들어가자 모든 귀족들이 다들 피곤에 쩔고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생기있는 사람이라고는... 한명이었다. 미친 왕자.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치며 내게 맞은 사실을 상기시켜 줬다. 솔직히 미안했다. 당신도


악의를 가지고 그런건 아니었을텐데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심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왕의 알현이 먼저다.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왕의 앞에 엎드렸다. 왕이 말했다.





"그대의 처우에 대해 우리는 많은 논의를 가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결론이


나질 않았다. 피고인의 속죄를 전혀 부관한 제3자 대리인이 할수 있느냐의 법리적 부분과 시장을 언급한 전시


명령의 소급성을 직무에 두느냐 직인에 두느냐의 문제, 그리고 그 법리 해석을 잉글랜드 실정에 두느냐


프랑스 실정에 두느냐 등의 세세한 부분에서 그 어느것도 하나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해결을 위해 간과할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사항 한가지에 주목하기로 했다."





"그건... 저에게 모욕당하신 것 말씀이신가요?"





"무슨 소리냐? 짐은 모욕같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엄청난 일을 그냥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리기로 한건가? 이걸 좋은 생각이라 해야 할지 나쁜 생각이라 할지.


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앙주의 진짜 시장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저는 진짜 시장입니다."





"증언 외에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못한다. 물론 목숨이 걸린 상황에 증언이라 증거로서의 수준은 높다고


판단하지만, 시장의 직무는 개인의 증언을 통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여러사람이 입만 맞춰서 시장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우리는 그대에게 실질 증거에 대한 제출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무슨 말슴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시장인데 더이상 무슨 실질적인 증거를 내놓으라는 말씀이시죠?"





"네가 정말 시장이라면 너는 시장으로서 앙주를 통치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앙주의


시민들도 아무런 불만없이 너의 통치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시장이 아니라면 너는 앙주의 시정을


살피는데 혼란과 문제만을 가져오겠고, 앙주의 시민들은 너를 시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짐은 기존에 공지한 전시 명령에 수정안을 내놓겠다. 여자여, 네 이름이 무엇이냐?"





"조안입니다."





"좋다, 조안. 짐은 너의 처형을 1년간 유예한다. 그 1년동안 그대는 정식 앙주의 시장으로서 시정을 살피고 전쟁에


휩쌓인 참화를 수습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네가 진짜 시장임을 나에게 증명하여야 한다. 1년 후에 시정을


점검했을때 훌룡히 수행한것으로 판정되어 그대가 시장임을 입증한다면, 칙령대로 그대는 처형될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시장이 아닌것으로 판정된다면, 나를 기만한 앙주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새해를 맞이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이것은 왕의 사법관인 에드워드 왕자의 제안을 기초하여 발하는 바이다."





순간 멍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깐 1년동안 진짜 시장이 되서 앙주를 운영하라고? 내가?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졌다.





"만약 그대가 죽거나 실종될 경우 이는 시장으로서 역활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마찬가지로 앙주의


모든 시민들이 대가를 치루게 될것이다. 그리고 물론 앙주는 잉글랜드의 영토로서 잉글랜드와 대적할 음모를


꾸미거나 프랑스와 내통하려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일대의 병사를 주둔시켜 그대의 시정을


감시하게 할것이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하오나 폐하, 저는..."





"이의가 있다면 시장으로서 1년 후에 결과로 답하라. 이 지긋지긋한 논의는 이제 여기서 끝내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것을 왕명으로 고한다. 이제 더이상 오랜 전쟁도 그만 마쳐야 할 시간이다."





퇴근시간 다됐으니 접수 안받겠다는 말투로 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신료들도 그제서야 마쳤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갔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상황일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때 나는 막사 뒷편의 문으로 나가려다 잠시 멈춰선 에드워드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왕자는 미소지었다. 너무나도 온화하게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웃어주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성자를 보는 듯 하여 말없이 일어나 그에게 감사의 목례를 보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71 무진(無盡)
    작성일
    14.08.11 00:17
    No. 1

    능력치가 궁금하네요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Berthold
    작성일
    19.07.22 06:40
    No. 2

    프랑어로 대화가 이뤄지고 있을 테니 '나는 oo입니다'는 'Je suis'로 시작하고 '나는 oo가 아닙니다'는 'Je ne suis pas'로 시작할 테니 오류가 좀 있네요. 하지만 재밌습니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Berthold
    작성일
    19.07.22 06:53
    No. 3

    위에 오타: 프랑어 => 프랑스어

    그리고 전 시장의 죽음에 왕이 납득하려면 전 시장의 시체를 조안이 가져왔어야 자연스러울 거 같네요.

    찬성: 0 | 반대: 1

  • 작성자
    Lv.44 해현
    작성일
    20.04.05 01:51
    No. 4

    전 시장의 죽음은 이미 납득한 것 같은데요. 다만 후임시장에게 전임시장의 죄까지 소급할 지의 문제, 그 이전에 얘가 후임시장은 맞는지의 문제를 보는 듯...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16화(완) +8 14.08.21 1,386 21 32쪽
15 15화 +4 14.08.20 1,034 15 52쪽
14 14화 +3 14.08.19 1,163 14 78쪽
13 13화 +2 14.08.18 1,048 15 48쪽
12 12화 +3 14.08.17 867 15 52쪽
11 11화 +3 14.08.16 968 18 37쪽
10 10화 +4 14.08.15 940 19 33쪽
9 9화 +3 14.08.14 967 20 53쪽
8 8화 +4 14.08.13 1,073 15 30쪽
7 7화 +2 14.08.12 1,029 18 33쪽
6 6화 +3 14.08.11 1,174 18 35쪽
5 5화 +3 14.08.10 1,146 20 45쪽
4 4화 +3 14.08.09 1,012 20 28쪽
3 3화 +2 14.08.08 998 19 32쪽
» 2화 +4 14.08.07 1,170 20 24쪽
1 1화 +3 14.08.06 2,276 22 3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