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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 님의 서재입니다.

신선행!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오동
작품등록일 :
2022.05.11 17:45
최근연재일 :
2022.10.21 11:40
연재수 :
1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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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8,436

작성
22.05.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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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글자
10쪽

제 12화

DUMMY

태승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주변의 기(氣)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변화하는 기(氣)를 감지하고 진은 더 강력한 환상을 일으켰다.


썩어서 내장을 드러낸 강시, 눈 코 없이 날카로운 이빨만 있는 유귀(幽鬼), 긴 머리와 더 긴 혓바닥을 늘어뜨린 처녀 귀신, 시뻘건 눈빛의 해골에, 우두귀(牛頭鬼)와 마두귀(馬頭鬼) 등등.


마지막에는 불을 뿜은 거대한 용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멈칫했지만 여전히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태승은 손쉽게 길을 찾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하는 기분이었다.


천옥미환진은 들어온 사람의 기억을 조작해서 환상을 만든다.

하지만 태승은 어린 나이라 무서운 것을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다.

기억 속 재료가 많지 않으니 혼란시키기 어려웠다.


태승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상하게 생긴 동자 하나가 멀찌감치 따르고 있었다.


안개가 워낙 짙어 가끔 뒤를 돌아보는 할머니의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금관 같은 뿔이 달린 동자는 알몸에 비늘과 꼬리가 달렸다.

움직임은 마치 뱀이 풀 위를 스쳐지나가는 것 같이 은밀했다.

흔적도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동자는 붉은 눈으로 태승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직 어린데도 첫 관문을 수월하게 넘네. 하지만 다음 관문도 그럴까?]



꼬불꼬불한 산길이 끝나고 평탄한 길이 나왔다.


주변은 유난히 나무가 많고, 안개도 무척 짙었다.

안개가 움직일 때 마다 나무들이 파도치듯 세차게 흔들렸다.

주변의 공기가 크게 요동치며 태승을 향해 몰려갔다.

차갑고 거센 바람에 옷자락이 마구 날렸다.


마음 놓고 길을 가던 태승은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둘째 관문은 쉽지 않아. 과연 넘을 수 있을까?]


동자는 오랜만의 장난감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태승은 죽을 맛이었다.


보이는 것은 암흑 같은 하늘과 완전히 얼어붙은 땅 뿐이었고, 그 공간에 움직이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갑자기 칼바람이 닥쳐왔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태승의 눈을 가린 천 조각이 날라 갔다.

태승은 눈을 떴다. 그런데 눈을 뜨거나 뜨지 않거나 똑같았다.


"설마, 이건 진짜인가 봐."


추위 때문에 전신이 얼어붙었고, 칼바람은 피부를 도려내는 것처럼 차갑고 너무 아팠다.


태승은 살길을 찾기 위해 살기를 느끼려 했지만, 살기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눈보라가 일더니 눈 폭풍이 몰아쳤다.


눈 폭풍은 집채크기의 얼음덩어리들을 마구 굴리며 태승의 정면으로 부딪쳐왔다.


태승은 다리가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면으로 닥쳐오던 얼음덩어리가 방향을 살짝 틀어 스치듯이 지나갔다.


태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것도 헛것이었네. 그런데 추위는 진짜야."


추위는 절대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눈은 손에 잡혔고, 입에 넣으면 물이 되었다.


환상과 실체가 교묘히 섞여 있어 더욱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이었다.


목적은 죽음도 이기는 인내심을 기르는 것.


태승은 할머니의 넷째 구결이 생각났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잠잠해 질 때까지 기다려라.

피하려고 자리에서 벗어나면 죽는다.>


"으, 추워 죽겠는데. 빌어먹을."


태승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추워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덜덜 떨리고 위아래 이빨이 마구 부딪쳤다.


"할머니, 얼어 죽겠어!"


"신.수.결."


할머니도 간신히 말했다.


태승은 죽을힘을 다해 모든 기운을 다 끌어올려 필사적으로 신수결을 운용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원활하던 몸 속 기운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의 힘이 몸 속 기운의 움직임을 눌러버린 것.


끔찍한 추위는 죽기 직전까지 태승을 몰아붙였다.

태승은 진짜 얼어 죽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벗어나면 죽는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자."


태승은 이 말을 되뇌며 의식이 희미해 질 때 까지 버텼다.



태승이 짊어진 배낭 안에는 부도탑이 들어있었다.

부도탑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태승의 상황을 걱정했다.


[얘가 못 버티겠는데. 도와줄까?]


[안 돼. 제자들은 도움 없이 이 관문을 통과해냈어.]


[제자들이야 최소 연기경 이었으니까 추위를 견딜 수 있지만, 얘는 입문도 못했잖아. 그건 감안해야지.]


[그렇긴 해. 하지만 우리가 나가봤자 뭘 어떻게 도와? 육체도 힘도 없는데.]


그때, 부도탑 일층의 한쪽 면에서 푸른 빛이 번쩍 일어났다. 청설호가 그려져 있는 벽면이었다.


청설호 그림이 살아난 듯 꿈틀대더니 벽면 밖으로 뛰쳐나왔다.


[맞아, 청설호라면 가능하겠다.]


청설호는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으며 제 세상을 만난 듯 기뻐했다.


그리고 바람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눈 폭풍 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눈 폭풍 사이 사이에 푸른 몸체가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빛처럼 움직였다.


청설호가 지나가자 순식간에 눈 폭풍이 잠잠해졌다.


청설호의 눈 폭풍을 부리는 신통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눈 폭풍이 가라앉았다.


청설호는 고향에 온 것처럼 바닥에서 뒹굴며 눈 더미에 몸을 마구 비볐다.


[청설호도 힘의 일할 밖에 쓰지 못하네. 그래도 다행이다. 눈 폭풍이 사그라졌어.]


갑자기 청설호가 움직임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태승의 등 뒤, 멀리 동자가 있는 쪽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영수가 숨어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알고 있다.

저 놈은 함정을 파서 처리할 것이니 걱정 말고 어서 들어와.]



[저게 어디서 튀어나왔지?]


청설호를 보는 동자의 시뻘건 눈동자는 식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자의 입가에 침이 주르르 흘렀다.


난생 처음 보는 영수.

그러나 직감적으로 자신보다 아래라는 것을, 맛있는 먹이라는 것을 느꼈다.


[꿀꺽. 다음에는 반드시 먹고 말거야.]



눈 폭풍이 가라앉으니, 기온이 상승했다.

따뜻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움직일 만 했다.


정신이 든 태승은 앉아서 몸을 풀었다.


"아승, 괜찮으냐?"


"괜찮아. 할머니는?"


"괜찮다.

아승, 무조건 앞으로 가야 한다."


태승은 다섯째 구결이 생각났다.


<천재지변이 끝나면 반드시 눈을 뜨고 무조건 앞으로 가라.>


몇 발자국 떼던 태승이 깜짝 놀랐다.


발 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있었다.

낭떠러지 벽은 거대한 얼음을 깎아 만든 듯 투명했다.

햇빛이 반사된 백색 광채에 눈이 시렸다.


"이것도 헛것이겠지."


태승이 한 발을 들었다.


낭떠러지 밑에서 올라오는 냉랭한 바람이 바지 속으로 마구 들어왔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태승은 시퍼렇게 질렸다.


"하, 할머니. 길이 없어. 앞은 얼음 절벽이야."


"헛것이겠지."


"아니야, 진짜라니까."


태승은 낭떠러지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궁리 끝에 태승은 땅에 엎드려 낭떠러지 밑을 만져보았다.


분명히 환상은 아니었다.

흙은 하나도 없는 차가운 바닥.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

자신의 앞은 허공이었다.


셋째 관문은 대부분이 실제였고, 낭떠러지 길이만 헛갈리게 눈속임을 했다.


태승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 여기서 어떻게 앞으로 가. 그냥 떨어져 죽으라는 거 아냐?"


"아승아, 믿어.

선조님 말씀을 믿고 앞으로 가라.

여태까지 선조님 말씀이 틀린 것이 있었느냐?

어서 일어나."


"아, 싫은데."


"이 녀석아. 어서 가.

이제부터 눈은 떠야 한다. 눈 감으면 안 돼."


"아, 진짜.

처음에는 눈 감으라더니, 지금은 눈 뜨라고."


태승은 구시렁거렸다.

이걸 들은 할머니가 악을 썼다.


"이 놈아, 눈 뜨라니까."


"떴다고."


태승은 몸을 일으켰다.

한 발만 앞으로 내딛었다.

환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밑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승은 다시 주저앉았다. 할머니가 재촉했다.


"아승!"


"나중에. 배고파."


태승은 볶은 콩을 꺼내 한 알씩 천천히 입에 넣었다.

오래오래 씹으며 시간을 끌었다.


눈은 앞을 봤지만, 태승의 신경은 등 쪽으로 집중되었다.

조금 있으니 잠이 들었는지, 할머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태승은 결심했다.


'나는 혹시 떨어져 죽을지 몰라도, 할머니는 여기 남아야 해.'


태승은 고개를 뒤로 돌린 채 배낭의 끈에서 팔을 뺐다.

혹시라도 할머니가 깰까 천천히 조심스레 움직였다.

태승의 두 눈은 배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배낭에서 몸을 뗀 태승은 할머니를 보고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할머니. 갈게.'


그런데 막상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승은 멍하니 앉아 배낭을 바라보았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무한정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낭떠러지 반대편도 도끼로 자른 듯 매끈하면서도 거대한 얼음벽이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얼음벽 표면에 작은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태승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은 곧 아래로 흘러내려 뺨에 두 줄기 길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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