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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내가 제일 정상인인 것 같아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라이트노벨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20.05.11 22:02
최근연재일 :
2020.06.15 22:37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1,381
추천수 :
82
글자수 :
134,605

작성
20.06.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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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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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03화 - 7

DUMMY

어쨌든 광란의 점심시간은 지나가고, 지루한 오후수업이 시작된다. 아무리 재미있는 선생님이 와도, 아무리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와도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의 수업은 무리다. 선생님들도 그것을 알기에, 애들이 졸고 있어도 엄청 크게 혼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선생님들도 졸리겠지. 그런 시간이다.



“······흐아아─”



나는 견디지 못하고 거의 다 잤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청소시간. 그 짧은 30분 정도의 청소시간도 잠을 깨는 데엔 꽤나 유용한 시간이다. 실제로는 청소는 10분만에 끝내고 20분 정도는 쉬거나 놀거나 하지만. 아예 청소 안 하는 애들도 있어. 나는 슬금슬금, 내 청소구역으로 가볼까 하며 복도로 나섰다.



“······?!”



무언가 엄청난 걸 본 것 같은데. 잠깐만. 졸린 눈을 꿈뻑꿈뻑. 분명 봤다. 지나가는 여자애 남자애. 하늘이와 민영이다. 화들짝 놀라 다시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확인한다. 뒷모습만이지만 분명 그들이 맞는 것 같다. 오늘 아침, 보민이가 하늘이에게 도발을 했지. 그리고 민영이에게 고백도 했고. 근데 두 사람이 청소시간에 지나간다? 다음 중 하늘이의 심정으로 알맞은 것은? (2점).



보나마나 고백하는 거잖아! 아아, 무서운 아이. 도발을 했으니 행동이 빨라지겠지, 하고 지레짐작은 했지만 대체 행동이 얼마나 빠른 거야. 단 몇 시간만에 고백을 하려 하다니. 나는 얼른 그들을 따라간다. 미행이지 이거?



“그래가지고 그래가지고~”

“응.”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은·엄폐를 철저히 하며 미행한다. 하늘이와 민영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강당 뒤편을 걸으며 얘기한다. 오히려 그러니까 미행하기 더 힘들어. 재잘재잘 시덥잖은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하늘이가 적당히 얘기를 꺼내려 하는 눈치이다.



“아, 이렇게 부른 거는~”

“고백하려고?”

“어머.”



철벽남 이민영. 철벽 수준이 아니라 철의 장막이야 이 정도면. 커트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고백의 당사자인 하늘이는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문이 막힌다. 미행하고 있으니 자세하게 표정이나 이런 걸 볼 수가 없으니. 아, 멈춰섰다. 얼른 숨을 자리를 찾는다.



“눈치가 빠르네, 민영이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오늘부터 알았지.”

“콕 찝어서 오늘?? 왜?”



이제 멈춰 서서 얘기하는 두 사람. 옆모습이나마 얼굴이 보인다. 좀 멀어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나는 적절하게 풀숲에 숨어서 두 사람의 상태를 몰래 쳐다본다. 민영이의 대답에 살짝 놀란 표정의 하늘이. 민영이는 아까와 같은 잘생기고 묵묵한 표정이다.



“오늘 다른 애한테 고백 받았거든.”

“아······ 고백 받았어?”

“응.”



흠칫. 괜히 내가 찔린다. 그거 진짜 고백도 아니었어. 보민이♀의 계략이었지. 하지만 어쨌든 민영이한테는 제대로된 고백이었을 테니. 하늘이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하긴, 고백하려고 했는데 누가 먼저 고백했다고 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지. 만에 하나라도 먼저 받은 고백을 받아들여서 이미 사귀고 있는 거라면─ 버스는 이미 떠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민영이는 보민이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누구?”

“그······ 아, 이름을 모르네.”

“응?”



고백은 받았는데 이름은 모른다. 기괴한 대답에 하늘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보니 무턱대고 고백만 했다 뿐이지 보민이, 이름도 말 안했어. 그나마 나만 통성명 했지. 그게 뭐야. 완전 엉망진창이네.



“조그맣고 귀여운 애?”

“어······ 응.”

“쌀쌀맞게 생겨서 말투도 쌀쌀맞은 애?”

“응. 맞아. 그런 애야. 아는 애야?”



문제가 있다면 하늘이가 보민이를 봤다는 거지. 고백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었으니.



“그래, 그러면 고백, 받아줬어? 그 애랑 사귀는 거야?”

“아니.”

“음?”

“안 받았어.”



다소 긴장한 얼굴이었던 하늘이의 표정이 환히 밝아진다.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급격한 표정의 변화. 조마조마했겠지. 하지만 적어도, 본인이 고백을 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민영이 이 자식, 엄청 부러운 녀석이네. 여자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한테 하룻동안 고백을 받다니.



“그러면~~ 흐흥♪”

“······.”



콧소리를 내는 하늘이. 고백을 하려고 하는 모양. 민영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좋아해.”

“음.”



소녀다운 하늘이의 고백. 미행하면서 몰래 쳐다보는 주제에 나는 또 내 안의 작은 소녀감성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처럼 귀여운 여자애한테 고백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설령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좋을 거 같아. 반면 민영이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 뭐,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아마 거절하겠지.



“미안, 고백해준 건 고마운데. 받아줄 수는 없을 거 같아.”

“아······ 그래?”



표정이 굳는 하늘이. 나도 같이 표정이 굳는다. 뭔가 나는 남자인데 민영이 쪽보다는 하늘이 쪽에 더 감정이입이 잘 되네. 무언가 말하려는 하늘이.



“왜?”

“다른 좋아하는 사람 있다거나 사귀는 사람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네가 싫은 것도 아니야. 그냥······ 나는 그다지 누굴 사귀거나 그럴 생각이 없어.”

“······.”



본인이 그렇다는데 거기에 뭘 더 말할 수 있겠어. 하늘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안타까운 눈으로 민영이를 바라본다. 이쪽은 사귈 생각이 없다는데, 이쪽은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엇갈림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래, 그러면······ 알았어.”

“응. 미안.”



씁쓸하면서도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 제 3자인 나조차 그 분위기에 압도돼 몸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다. 이쪽으로 걸어올 때엔 굉장히 좋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느낌이다. 하늘이가 먼저 횅, 천천히 걸어간다. 민영이는 가만히 서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하늘이를 바라볼 따름이다.



“여보쇼.”

“???”



불쑥 풀숲에서 나오며 말을 꺼내는 나. 나도 보민이 욕할 거 없다. 하지만 너무 빡쳐서, 너무 짜증나서 한 마디 해야될 것 같아서 나왔다. 움찔 놀라는 민영이. 누가 보고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어쨌든.



“왜 고백을 안 받아주는 겁니까. 키 크고 잘 생기면 다야 엉?! 얼마나 많은 여자애들의 눈물을 봐야 만족하겠어. 그냥 사귀어주면 안 돼?! 누구는 고백 한 번 못 받아보는 게 일상인데!”

“······음.”



딱히 하늘이를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걔를 뭘 안다고 걔를 대변해서 항변을 하겠어. 그냥 내 자격지심이다. 잘 생긴 놈들은 다 죽어야 돼. 게다가 이 녀석 키도 크다고. 내 공허한 외침에 민영이는 아까도 곧잘 보이는 무언가 생각하는 느낌으로 잠깐 말문이 막힌다.



“나는 누구랑 사귀거나 그럴 수 없어.”

“왜??!”

“내가 잘해줄 자신이 없어.”

“아니 그런 건! 그냥 사귀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잖아!”



여자애들은 그냥 너를 원하는 거라고! 잘생긴 네 옆에서! 같이 걸으면서 손 잡고 하하호호 웃고! 왜 찐따인 나보다 모르는데, 이 잘생긴 녀석은! 젠더감수성이 하나도 없어! 좀 여자의 마음을 헤어려봐라! 하지만 민영이는 계속 똑같은 대답을 쳇바퀴 돌 듯 말한다.



“그건 그 여자애한테도 실례야. 나는 아무 마음도 없는데 그냥 사귄다니.”

“아니······ 그······ 원론적으론 그렇겠지만······ 사귀다보면 마음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안 생겨.”

“하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잘생긴 데다가 지 철학 확고한 녀석이라니. 여자애들이 더욱 박차를 가할만한 먹잇감(?)인데. 하지만 나는 그저 답답할 뿐이다. 말이 안 통하네. 잘생긴 놈이 이러면 더 재수없다구. 민영이는 힐끔 나를 보며 묻는다.



“너는 아까 그 애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늘이는 왜 대신 변호해주는 거야. 하늘이 좋아해?”

“좋아하는 건 아닌데! 안쓰럽잖아! 기껏 고백했는데.”

“그건 걔 마음이고. 나도 내 마음이 있는데. 고백하면 무조건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 그래 잘나셨네요! 누구는 고백 한 번 안 받아봤는데. 부러워서 그럽니다 부러워서! 어휴. 나중에 그 여자애들이 다 엄청 잘 사귀고 엄청 잘 돼서 거들떠도 안 봐야 아~ 내가 그 때 사귀었을걸~ 하면서 후회하겠지. 엉?!”



나 이런 성격 아닌데. 뭔가 재잘재잘, 여자애가 따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구 토해내곤 대답은 듣지도 않고 홱 돌아서서 교실로 돌아간다. 실은 내가 화낼 자리가 아닌데. 무례한 건 내 쪽이잖아? 아 모르겠다. 저 자식 짜증나. 누구는······ 누구는 평생 한 번 여자애한테 고백 들어본 적 없는데. 하루에 두 번을 고백을 받고 그걸 다 거절해?! 뭐 저딴 자식이 다 있어!








//








“드디어 오늘은.”

“오. 오늘은 남자애네?”

“그렇지.”



평화로운 등굣길. 나랑 보민이는 늘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하게 등교하기에, 만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나오는 건 아니고, 만나면 같이 가는 거고 아니면 그냥 따로 등교하는 거다. 그래서 오늘도 만났다. 오늘은 남자애인 보민이. 의기양양한 표정인 그를 보고 있으니 내가 알던 보민이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편안해진다.



“가자마자 이민영 만나러 갈 거야.”

“왜 또, 뭘 망치려고.”

“망치는 게 아니야. 내 큰 그림이지.”

“그 빅 픽쳐 한 번 말씀해보시죠.”



나도 어제 민영이한테 한 짓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막기에는 명분이 모자라다. 보민이는 남자인 주제에 귀엽게 안경을 올려 쓰며 말을 잇는다.



“가서 바로 말을 할 거야. 내가 어제 고백한 그 여자애라고.”

“아, 너 어제 위장고백 할 때 민영이한테 이름도 안 말했더라.”

“아.”

“그래도 너인 건 알 테니까 뭐.”

“그래그래. 어쨌든.”



태클이야 그렇다고 하고. 보민이는 자기 말을 들으라는 듯 눈을 치뜨며 말을 강요한다.



“내가 『고유』였다고 말하고, 왜 고백을 안 받아줬는지. 어떤 여자가 이상형인지. 이런 걸 자세하게 물어볼 거야. 동아리 활동이라고 하고! 동아리 활동은 맞잖아.”

“뭔가 사기 치는 거 같은데.”

“사기는 아니지. 어쨌든 이게 우리 동아리 활동이잖아. 남·여를 번갈아가면서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듣는 거니까. 들어서 희정이한테 말하겠지만.”

“그러니까 사기 치는 거 같다고.”



민영이한테 거짓고백 한 것부터 사기 치는 거 같고. 결국에 우리가 그런 활동을 하는 건 희정이를 이어주기 위함인데 그걸 숨기고 접근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 뭐, 내가 뭘 어쩌겠나. 그냥 보민이 하자는 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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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04화 - 2 +2 20.06.09 48 1 11쪽
20 04화. 개 같네 증말! 20.06.06 28 1 12쪽
19 03화 - 9 20.06.05 25 1 14쪽
18 03화 - 8 20.06.04 24 3 11쪽
» 03화 - 7 20.06.03 28 1 11쪽
16 03화 - 6 +4 20.06.02 39 2 12쪽
15 03화 - 5 20.05.30 32 1 10쪽
14 03화 - 4 +2 20.05.28 30 1 13쪽
13 03화 - 3 20.05.27 27 2 10쪽
12 03화 - 2 +4 20.05.26 35 3 12쪽
11 03화. 그거 스파이짓 아니야?! +2 20.05.25 47 3 11쪽
10 02화 - 5 20.05.24 34 1 12쪽
9 02화 - 4 +2 20.05.23 41 4 11쪽
8 02화 - 3 20.05.21 41 4 12쪽
7 02화 - 2 +2 20.05.20 37 4 13쪽
6 02화. 손님이 없다면 손님을 만들어야지 20.05.19 52 6 15쪽
5 01화 - 5 +4 20.05.18 59 7 12쪽
4 01화 - 4 20.05.14 53 6 12쪽
3 01화 - 3 20.05.13 63 6 12쪽
2 01화 - 2 20.05.12 93 7 12쪽
1 01화. 여기에 정상인은 없어. +4 20.05.11 441 1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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