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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생 님의 서재입니다.

참룡기(斬龍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진효생
작품등록일 :
2019.07.09 15:26
최근연재일 :
2019.08.16 19:53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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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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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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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28. 파양호 대전

고려의 마지막 왕자 왕경의 일대기 입니다.




DUMMY

왕경과 이단은 호해산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호해산인의 방은 상당히 넓었지만 가운데 책상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책으로 가득 차 있어 셋이 앉게 되자 몸을 움직일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평소 독서를 많이 하여 학문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이단 조차도 호해산인의 방에 쌓인 서적을 보고는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분의 학식은 정말 엄청나구나..)


호해산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둘을 쏘아 보았다.


[너희는 처음에는 연경의 상인이라고 했다가 조금 전에는 백련교도라고 했다. 어느 것이 사실이냐?]


호해산인의 말에 왕경은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백련교 연경지부의 왕경이라고 합니다. 동생은 상인으로 백련교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입니다. 우연히 강호에서 만나 의기투합하여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네놈도 나에게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염탐하러 온 것이지?]


호해산인의 말에 왕경은 극구 부인했다.


[아닙니다. 저는 우연히 사장주를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벽라춘이 차 중의 제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맛보고자 동정산으로 오던 중 흑묘파 사람들이 사해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찾아오게 된 것 뿐입니다.]


왕경은 그동안의 일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호해산인은 오해가 풀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들은 순전히 나를 돕기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이야기로군. 내가 오해해서 미안허이. 재난을 피하게 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어려움을 보고 모르는 척 한다면 어찌 대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어르신과 저는 같은 백련교도인데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하지요.]


[같은 백련교라.. 수십 년간 은거하면서 내가 백련교였다는 사실도 잊고 살았었네.. 허허..]


호해산인은 오해가 풀리자 둘에게 차를 내주었다.


[산에 혼자 사는 노인이라 대접할 게 별로 없네.]


이단은 노인이 내준 차에서 과거에 마셨던 벽라춘의 달콤한 향기가 나자 즉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렇게 귀한 차를 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오호.. 이차가 무엇인지 아는가?]


[전에 마셨던 벽라춘과 같은 향기가 나는데 이 차의 향이 조금 더 깊고 맑은 느낌이 드는군요.]


이단의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젊은 친구가 차 맛을 아는군. 지금 내놓은 벽라춘은 청명절 이전에 만들어 이제 막 상품으로 내놓은 것일세. 아무래도 멀리 팔려가게 되면 처음의 향보다 조금 떨어지게 되지. 게다가 차 맛의 반은 물맛인데 이곳 동정산의 물은 중원 천하 어디를 가도 얻을 수 없는 청명한 물이기에 아마 이런 차는 여기서 밖에 맛볼 수 없을 걸세!]


왕경은 차 맛이 좋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단처럼 과일 향과 꽃향기를 구분하여 음미할 정도로 미각이 뛰어나진 못했기에 그냥 훌훌 불어 마셨다.


노인은 왕경과 이단이 차를 다 마시길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는 왕경이라고 했고, 이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되나?]


[제 이름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둘을 잠시 살펴보다가 말했다.


[나는 성이 나(羅)요 자는 관중(貫中)이라고 하네. 호는 호해산인이라고 하지..]


이 노인이 바로 동양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지은 나관중이었다. 나관중은 장사성 밑의 관료로 파양호 전투에 참여했으며, 오나라의 멸망 이후 고향에 은거하며 삼국지연의, 수호지(시내암과 공저), 수당연의등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 역시 나관중이 직접 참가했던 파양호 대전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이었다.


이때는 아직 삼국지연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이라 왕경과 이단은 나관중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자네는 한나라의 백련교도라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 오나라 백련교도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이 없을 텐데 왜 나와 사문병의 손자를 도와주었는가?]


나관중의 말에 왕경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백련교의 근본은 억압받는 백성을 위한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비록 나중에는 지도자에 따라 서로 반목했지만, 그 근본만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계열의 백련교도라 할지라도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같은 백련교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괴롭힘을 받는 사람을 본다면 당연히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경의 말에 나관중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과거 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했다면 주원장 같은 포악한 인물에게 멸망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것은 제 개인의 생각이고 한나라의 왕이 된다면 또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었네. 그래서 삼국시대의 고사에서 착안해내어 몽고놈들을 몰아낸 후 천하를 넷으로 나누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주장했네만 천하 통일의 욕심에 눈이 먼 장군들이 듣질 않았지..]


나관중의 말을 듣고 왕경은 장원계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 사부님이 말씀하신 지인분이 바로 나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한 왕경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르신! 혹시 어르신께서는 한(漢)나라 인물 중에 친분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나야 백련교도들이 본격적으로 파벌을 형성하기 전부터 활동했으니까 몇 명 아는 사람이 있지. 왜 그러나?]


[저의 사부님께 어르신이 하신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서 여쭤보았습니다.]


왕경의 말을 듣고 나관중이 물어보았다.


[혹시 자네 사부 이름이 장원계.. 장 군사(軍師)인가?]


[네 맞습니다. 제 사부님이십니다.]


그때 이단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 현자 종자 쓰시는 분도 저희의 사부님이죠!]


이단은 처음으로 모신 사부가 매우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단의 말에 나관중은 혀를 내둘렀다.


[장형과 이형의 제자라니.. 허.. 자네는 참 복이 많구먼! 그래 장형과 이형은 잘 지내시나?]


나관중의 말에 왕경은 조용히 대답했다.


[사부님은 얼마 전에 사악한 자의 해침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부님은 건강하게 잘 계시고요.]


[허.. 시골에 은거하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산다네. 장형이 먼저 떠났구먼..그래 흉수는 누구인가? 복수는 하였는가?]


왕경은 유정협의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직 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반드시 복수하고 말 것입니다.]


파양호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본 나관중은 은혜니 복수니 하는 세속적인 일에는 감정이 무뎌져 있었다.


[흠.. 자네 무공이라면 복수는 그리 어렵지 않겠구먼..]


나관중의 말투에서 복수에 큰 의미를 두는 듯한 느낌을 받지 못한 왕경은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어르신께서는 파양호 대전 이후 계속 이곳에서 차밭을 일구며 사셨습니까?]


[다른 곳에도 좀 있었지만 거의 이곳에서 살아왔네. 그렇게 큰일을 겪고 나니 세상사에 관여하기가 싫어지더군!]


이단은 중원 천하의 주인을 결정한 파양호 전투가 몹시 궁금했다.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파양호 대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나관중은 본래 민간 설화를 수집하고, 찻집에서 다박사(茶博士-찻집에서 손님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돈을 받던 직업)의 일을 한 적이 있기에 남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비록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처참한 경험이었으나 나관중에게는 좋은 이야깃거리이기도 했다.


[파양호 대전이라.. 당시 중원의 정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백련교 출신의 여러 군벌이 있었다는 것밖에는..]


[음.. 당시에는 명옥진의 하나라나 절강성의 방국진 같은 자잘한 세력들은 제외하고라도 크게 네 개의 군벌이 있었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진우량, 한림아, 장사성, 주원장이 바로 그들이지.]


나관중은 이야기를 시작하자 자신의 황제였던 장사성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서쪽의 진우량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동쪽의 장사성은 풍부한 재력이 있었지. 더군다나 주원장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한림아는 원나라와 총력전을 벌이고 있을 때니 남쪽의 상황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네. 그사이에 낀 주원장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처럼 보였지.]


나관중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는 포악해졌어도 당시에는 자신을 낮추고 사방에서 인재를 모으며 덕을 베풀었기에 강남에서 그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다네. 그에 위협을 느낀 진우량은 주원장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손을 쓰려고 했지. 그래서 우리 오나라에 사람을 보내 양쪽에서 주원장을 쳐서 없애자고 제안했다네.]


나관중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라도 진우량에게 협조했어야 했는데.. 소주와 항주를 장악하고 있던 우리 오왕께서는 풍부한 산물에 취해 주색잡기에 빠져 있어서 진우량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네. 말로는 협조한다고 해놓고 정작 보낸 것은 나 같은 문관이 전부였으니.. 본인의 턱밑에서 호랑이 새끼가 커가는 줄도 모르고.]


나관중의 말에서 주원장 보다 진우량을 더 위로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은 이단이 말을 했다.


[그때 오왕이 진우량을 도와 주원장을 쳤다면 천하의 주인은 진우량이 됐겠군요?]


[아무렴. 사실 진우량이 파양호 대전에서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네. 진우량이 천하를 거머쥐었다면 비록 그가 상관을 살해했다는 도덕적 결함이 있을 순 있겠으나 백성들은 지금보다는 더 편했겠지.]


나관중의 말에 왕경은 의아해서 물었다.


[상관을 살해했다니요?]


[자네 몰랐는가? 진우량이 예문준(倪文俊)과 서수휘(徐壽輝)를 차례로 죽이고 황제 자리를 빼앗지 않았는가? 교주의 성화령도 그때 진우량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네만..]


나관중의 말에 왕경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연경의 사형들은 자신에게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지 않았는가? 자신은 한나라야말로 몽고를 몰아낸 중원의 정통성이 있는 유일한 국가라 믿고 지금 백련교의 교주가 되어 한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서수휘 장군을 죽이고 찬탈한 나라였다니!


그제서야 왕경은 이현종이 자세히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보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저.. 저는.. 서장군께서 성화령과 함께 장군 직위를 넘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관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사실 진우량이 서수휘를 죽인 것을 누가 본 것은 아니니까. 예문준이야 진우량이 죽인 것은 맞지만, 그때는 예문준이 원나라에 투항하려 한다는 밀고가 있었으니 사실 여부를 떠나 그를 제거한 것이 용납되나 서수휘를 죽인 것은 얘기가 다르지.]


[그렇다면 진우량 황제가 서장군을 죽였다는 것은 떠도는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예문준이야 배신자니까 죽여도 상관없는 것이고요.]


왕경의 말에 나관중은 피식 웃었다.


[자네도 참 순진하구먼. 나는 예문준이 배신했다는 것 역시 진우량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서수휘가 죽은 이후 빠르게 그의 세력을 흡수한 뒤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大漢) 제국을 건국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 거로 봐서는 서수휘의 죽음에 진우량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킬 수 없지.]


왕경은 자신이 들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사실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뭐 자네들 한나라 계열의 백련교 말고는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네. 게다가 서수휘의 부장들과 진우량이 전쟁까지 벌여 그들을 제거하자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었지.]


왕경의 표정을 한번 살펴보고 나관중이 조심스레 말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네.. 당시 진우량 진영의 최고 고수였던 장원계가 은밀히 서수휘를 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왕경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단은 왕경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손을 뻗어 왕경의 손을 붙잡았다.


왕경은 신음하듯이 나직이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럴리가 없습니다. 저의 사부님은 정인군자이시며 당대의 영웅호걸이신데 어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괴로워하는 왕경을 힐끗 본 후 나관중은 차갑게 말했다.


[사람이 신념을 갖게 되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법이지. 충의라는 신념 아래 부모마저 죽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나관중의 입장에서는 서수휘의 죽음의 진실이 어떤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더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다 떠도는 설이네. 그만큼 서수휘의 죽음은 뜻밖이었던 것이지. 하여튼 성화령을 받아 각 군벌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서수휘가 진우량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각 군벌들은 더욱 반목이 심해졌다네. 서수휘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교주의 전권을 위임받은 총사령관이기에 겉으로는 그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는데 그가 죽고 나니 천하를 갖겠다는 군벌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지. 때마침 양 교주마저 죽고 교주직이 공석이 되었으니 당시 혼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가나? 중원 천하는 그 전체가 욕망으로 가득 찬 용광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네!]


나관중의 이야기를 듣고 왕경은 생각했다.


(그래 다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부님이 그랬을 리도 없고, 진우량 황제가 서장군을 죽일 정도로 의(義)가 없는 사람이라면 사부께서 그를 모셨을 리도 없다!)


나관중은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어쨌거나 진우량은 주원장의 그릇을 알아보고 더 늦기 전에 그를 치려고 했지. 무려 육십만 이상의 군을 모아 파양호로 내려갔다네. 응천부(應天府-지금의 남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주원장은 이십만의 군을 이끌고 파양호로 갔다네. 아.. 그때 장사성이 응천부를 쳤더라면..]


나관중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진우량은 파양호에 진을 치고 함선을 만들게 했는데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그 함선은 모두 삼 층으로 되어있고, 위층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래층에 안 들릴 정도로 거대했다네. 게다가 각 함선끼리 쇠사슬로 엮여있어 그야말로 물 위에 떠 있는 성(城)과 같았지. 주원장의 군사들은 진우량의 함선만 보고도 겁을 먹고 도망가는 자가 나올 정도였으니..]







-명사(明史)에서는 파양호 대전 당시 진우량의 배의 높이는 십여 장이 훌쩍 넘고, 쇠사슬로 서로 이어져 있어 길이가 수십 리에 달했으며, 배에 꽂혀있는 깃발이나 창 방패 등을 보면 마치 거대한 산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라고 기술되어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단은 삼 층으로 건조된 배의 규모가 어떤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우리 조선에는 그만한 배가 한 척도 없는데 중원사람들은 수십 년 전에 그와 같은 배를 수도 없이 만들었구나.. 더군다나 바다도 아닌 호수에서의 수전(水戰)을 위해 만든 배가 그 정도라니!)


어안이벙벙해 하는 이단을 보고 나관중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말일세 주원장은 훨씬 숫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전력은 파양호 동쪽 입구인 호구라는 요충지에 주둔시켰고, 일부 병력을 나누어 양자강으로 통하는 길목에 복병을 배치 시켜놓았다네. 파양호 깊숙히 들어온 진우량의 퇴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지.]


상대보다 아군의 수가 훨씬 적은데도 군사를 나누다니, 장원계에게 병법을 배워온 왕경은 나관중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군대를 총동원해서 막아도 불리한 상황인데 거기에 또 군을 나누어 퇴로를 막았다고요?]


[그렇다네 주원장은 이길 생각이었던 것이지. 단순히 이기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참에 진우량을 끝장내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배치를 한 것이야.]


왕경과 이단은 주원장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긴 어차피 지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 상황이었고, 이긴다 하더라도 진우량 황제가 도망친다면 서쪽의 광활한 영토에서 또 금세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올 테니.. 반면 주원장은 이긴다 하더라도 세력을 회복할 만한 기반이 크지 않아 다시 붙게 되면 그때야말로 끝장이니 한번의 싸움에서 진우량 황제를 꼭 잡아야 했겠네요.]


왕경은 병법서에 적혀있는 것과 실전은 크게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병법의 기초를 무시하면 안 되지만 상황에 따라 병법서에서는 금기로 치부하는 전법도 묘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왕경의 말에 나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미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 조차도 이렇게 놀라는데, 당시 주원장의 선택에 다른 무장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짐작이 가겠지? 다들 병력을 나누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주원장과 그의 부장 유기만은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런 결단을 내렸다네.]


[천하를 손에 쥐는 사람은 역시 뭔가 특별한 것이 있군요!]


이단이 감탄해서 말을 하자 나관중이 맞장구쳤다.


[그렇고 말고.. 진우량 역시 주원장이 군을 나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 당시 진우량의 함선을 보면 그 자신감이 충분히 이해가 가네. 3층 높이의 거대한 배 수천 척이 서로 쇠사슬에 묶여 파양호에 떠있었으니.. 마치 호수 안에 커다란 섬이 하나 생긴 것 같았네..]


나관중은 눈을 감고 당시의 전경을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진우량이 질 것이라는 의심은 털끝만큼도 해보지 못한 그였다.


[그러면 주원장은 어떻게 진우량을 격파하게 된 것인가요?]


이단의 말에 나관중은 과거의 회상에서 눈을 떴다.


[진우량이 압도적이긴 했지만, 주원장이 마냥 약한 것도 아니었네. 주원장에겐 진우량보다 뛰어난 것이 세 가지가 있었지. 첫째는 소형선 위주라 기동성이 월등히 좋았다는 것, 두 번째는 주원장의 군대는 자신들의 근거지가 가까워 보급이 원활했지만 진우량의 군대는 보급선(線)이 길어졌기에 그렇지 못했다는 점. 셋째는 진우량은 군대의 규율을 너무 엄격히 했기에 부하들과 반목이 있었으나 주원장은 당시만 해도 덕을 베풀고 있어서 부하들의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네.]


왕경은 두 영웅의 대결에서 조선과의 전쟁에 도움이 될 전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이야기에 집중했다.


[우리는 그렇게 삼십육일 간이나 배 위에서 싸웠다네. 주원장이 작고 날쌘 배로 우리를 치고 도망가기를 반복했지만 사실 우리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 거대한 배로 조금씩 조금씩 주원장의 수군을 압박해 갔으니... 오히려 우리는 주원장의 군사보다 원활하지 못한 보급이 더 문제였다네.]


(사부님도 전쟁에서 보급이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역시 그렇구나..)


[보급이 생각대로 되질 않자 우리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네. 우리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주원장은 정면으로 우리와 싸우려 들지 않았으니 전선은 교착되고 말았지. 헌데 누가 알았겠나! 주원장의 원군이 다가오고 있을 줄이야!]


[원군이라니요? 한림아는 북원에게 발목이 붙잡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원군은 사람이 아닐세!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왕경과 이단은 의아해서 물었다.


[하늘이요?]


[그래! 하늘이네. 그래서 황제를 천자(天子)라 하는지도 모르겠군!]


알 듯 말 듯한 나관중의 말에 왕경과 이단은 숨죽여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전선이 교착되고 며칠 지났을 때 하늘에서 동북풍(東北風)이 불어왔다네.]


이단은 잠시 생각해 본 뒤 크게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아!]


이단의 감탄사를 듣고 나관중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는 눈치 챘나 보군!]


[서로 묶여있는 거대한 배, 동쪽에 진을 치고 있던 날렵한 배를 가진 주원장.. 그리고 동북풍..]


[그래 자네 생각이 맞네. 바로 화공(火功)이었네.]


나관중은 그날의 참상을 다시 떠올리자 미세하게 손을 떨었다.


[그날 나는 진우량의 바로 옆에 있었다네. 거대한 배를 앞세워 주원장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 전쟁의 결과를 자세히 보고 그 결과를 장사성에게 상세히 보고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겠지.]


나관중은 목이 타는지 차를 한잔 더 따라 마시고 난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잔잔하던 호수에 갑자기 동북풍이 불어올 줄이야! 동북풍이 불어오자 주원장은 즉시 화공에 나섰네. 날랜 배를 이용하여 쇠사슬로 엮여있던 우리의 거대한 함선들에 마구잡이로 불을 붙이고 다녔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주원장은 자신들의 배에 유황과 기름을 가득 실어 불을 붙인 뒤 우리 배에 부딪혀 왔다네.]


왕경은 눈앞에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배가 보이는 듯했다.


(사부님은 그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살아나오신 걸까?)


[우리들의 배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그 커다란 덩치가 오히려 짐이 되었다네. 서로 쇠사슬에 묶여 있어 방향전환도 불가능했고,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의 배에 불을 질러 부딪혀 오는 적들을 그냥 눈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육십만이 넘어가는 우리 군이 단 한 번의 화공으로 모조리 불타 죽었다네. 일부는 살아서 퇴각했으나 주원장이 매복해 놓은 부대에 괴멸되고 말았지. 그때 일부라도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부대를 정비해서 다시 한 번 재기할 수 있었을 텐데 주원장이 처음에 둔 그 한 수 때문에 한(漢)나라가 괴멸된 것이지.]


거대한 전쟁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하자 이단은 입이 바짝 말랐다.


[그렇다면 어르신은 어떻게 탈출하셨습니까?]


[진우량 옆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나는 매우 당황했지. 눈앞에서 수십만의 병사들이 타죽는 것을 보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는 것 같더군. 그때 진우량의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불경에 나오는 나찰귀 같았다네.]


이단은 자신의 부대가 괴멸되고 야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상황에서 절망이 아닌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는 진우량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우량의 큰아들과 동생까지도 그 전투에서 모조리 죽고 말았으니 그렇게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 했네. 어쨌거나 우리가 탔던 함선까지 화마에 삼켜지자 나는 살길을 찾아봤네만 거대한 함선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가라앉기 시작하니 꼼짝도 못 하겠더군.]


왕경은 나관중의 이야기를 들으니 장원계가 무사히 살아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긴장이 되어 손에 땀이 맺혔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진우량의 눈에 꽂혔다네.]


[아!]


왕경과 이단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천하를 놓고 싸우던 희대의 간웅 진우량의 최후가 유시(流矢)에 의한 것이었다니!


[진우량이 죽고 난 후 내가 있던 지휘실까지 화마에 휩싸였네. 문관인 나는 마땅히 불을 뚫고 나갈만한 병장기도 없었는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마침 눈앞에 진우량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지휘봉이 있더군. 그걸로 불붙은 나무들을 정신없이 부수며 겨우겨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 천만다행으로 진우량의 지휘봉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튼튼해서 불붙은 나무들을 부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네.]


나관중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한번 했다.


[지휘실 밖으로 나오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더군. 불타 죽는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머리 위로는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네. 물속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파양호 호수변에 피 뭍은 지휘봉을 들고 혼자 살아 서 있더구먼. 그 피가 적의 피인지 같이 가자고 나를 붙잡는 아군을 내려친 피인지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


왕경과 이단은 나관중의 얼굴에서 당시의 참상을 읽어내고 몸서리를 쳤다.


(전쟁이란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로구나!)


나관중은 처연하게 이야기했다.


[당시에는 그저 주원장이 운이 좋아 이긴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원장은 그 계절이면 파양호에 동북풍이 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네. 그의 근거지가 그 근처이니 파양호 주변의 지리나 날씨 변화는 꿰고 있었겠지. 그러니 적은 수의 군사를 나누는 대범함을 보이고, 또 언제 장사성이 자신의 뒤를 칠지 모르는데 빨리 전쟁을 끝낼 생각을 안 하고 동북풍이 불 때까지 버티며 지구전을 한 것이었겠지.]


나관중의 말에 왕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장은 적을 알고, 자신을 알았으며, 싸울 장소를 숙지하고 있었네. 거기다가 바람이 불 때(時)까지 꿰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파양호 대전은 이미 주원장이 이겨놓고 시작을 했던 것이야!]


왕경은 병법에 있어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이겨놓고 전쟁을 시작한다라.. 반드시 가슴속에 새겨 놓아야겠다. 전쟁은 단순히 전력의 차이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적을 알아야 하며, 싸울 땅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길 때(時)도 선택해야 한다. 전쟁이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겨 놓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이날을 기점으로 왕경은 유명한 전투가 있었던 곳을 찾아다니며, 기존에 외웠던 병법서와 실제 전투를 비교해 가며 실전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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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복건삼호(福建三虎) (2) 19.08.16 73 2 32쪽
29 29. 복건삼호(福建三虎) (1) 19.08.14 85 2 25쪽
» 28. 파양호 대전 19.08.13 84 2 26쪽
27 27. 흑묘파 (3) 19.08.12 100 2 21쪽
26 26. 흑묘파 (2) 19.08.09 101 2 21쪽
25 25. 흑묘파 (1) 19.08.08 104 3 21쪽
24 24.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2) 19.08.07 103 3 18쪽
23 23.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1) 19.08.06 109 3 29쪽
22 22. 태호의 노인 (2) 19.08.05 95 3 17쪽
21 21. 태호의 노인 (1) 19.08.02 106 3 18쪽
20 20. 옥화장의 위기 19.08.01 108 3 22쪽
19 19. 이단의 무술 실력 19.07.31 120 3 18쪽
18 18. 남경으로 19.07.30 125 3 20쪽
17 17. 사해방 19.07.29 198 3 23쪽
16 16. 산중생활 19.07.26 144 2 14쪽
15 15. 야반도주 19.07.25 140 3 13쪽
14 14. 연경을 떠나다. 19.07.24 156 3 20쪽
13 13. 모함 19.07.23 164 2 17쪽
12 12. 구출 19.07.22 171 2 21쪽
11 11. 습격 19.07.20 204 3 18쪽
10 10. 조천사(朝天使) +1 19.07.19 244 3 20쪽
9 9. 연경의 고려인들 +2 19.07.18 250 3 21쪽
8 8. 장원계의 죽음 19.07.17 238 3 18쪽
7 7. 연경으로 19.07.16 244 4 20쪽
6 6. 혼천공을 완성하다. 19.07.15 285 4 18쪽
5 5. 만보산에서의 생활 +2 19.07.13 296 7 22쪽
4 4. 사부를 모시다. 19.07.12 329 4 20쪽
3 3. 추격자들 +2 19.07.11 297 7 23쪽
2 2. 두문동(杜門洞)의 참화(慘禍) 19.07.10 32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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