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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생 님의 서재입니다.

참룡기(斬龍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진효생
작품등록일 :
2019.07.09 15:26
최근연재일 :
2019.08.16 19:53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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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3
추천수 :
98
글자수 :
279,987

작성
19.07.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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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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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22쪽

5. 만보산에서의 생활

고려의 마지막 왕자 왕경의 일대기 입니다.




DUMMY

왕경이 삼배(三拜)를 하고 자리에 앉자 장원계가 미소를 띠고 왕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구한 것은 돌아가신 황상의 인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무공 자질도 쓸 만 하고, 인간 됨됨이도 나쁘지 않은듯 하니 이 녀석을 잘 키워 반드시 한(漢)제국을 재건(再建)하리라!)


왕경 역시 장원계를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사부님께 구원을 받은 것은 필시 태조 대왕께서 인도하신 일이리라. 비단 내 한목숨만 구하려 하셨다면 사부님 같은 분과 인연을 만드시진 않았을 터! 이는 분명히 조선을 멸하고 고려를 부흥시키라는 태조 대왕님의 뜻이리라!)


수십 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힘써 왔던 일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 싶어 장원계는 매우 기뻤다.


[자 자..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자고 내일 정오 정도면 내가 기거 하고 있는 만보산(萬寶山)에 도착할 테니 자세한 건 내일 말해주겠네! 이만 자세나.]


셋은 한방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한동안 이성계의 추격을 경계하며 노숙을 해왔던 왕경은 오랜만에 푹신한 이불에 몸을 뉘이니 뼈마디가 노곤해지면서 금세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새벽 셋은 간단히 요기를 한 뒤 바삐 걸어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만보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만보산일세!]


장원계의 말에 왕경은 산 전체를 둘러보았다. 산 정상이 그리 높지 않아 보였고, 산세도 험해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느낌은 왕경이 숨어 살던 광덕산과 비슷했으나 규모는 좀 더 큰 편이었다.


만보산 입구에서 정상 쪽으로 반 시진을 더 걷자 작은 초가가 한 채 보였다. 왕경은 장원계의 안내로 초가로 들어와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렸다.


[어떤가? 왕궁에 비하면 초라하지?]


굳이 왕궁에 비할 것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과 비교하더라도 형편이 나아 보인다고 할 수는 없는 집이었지만 왕경은 웃으며 말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줄곧 두문동에 갇혀 지냈습니다.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야 처음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게 되는군요!]


장원계는 안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새로운 제자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상위에 몇 가지 제품(祭品)을 올려놓고 향을 피운 뒤 왕경을 불러 절을 시켰다.


뒤이어 장원계도 절을 한 뒤 외쳤다.


[제자(弟子) 장원계가 새로이 문호(門戶)를 열어 왕경을 다섯 번째 제자로 맞아들이려 합니다. 명존화성(明尊火聖)이시여! 불길을 비추어 제자들의 앞날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간단한 의식이 끝난 뒤 장원계는 자신의 문파에 대해 설명하였다.


[나는 원래 소요파(逍遙派)에 입문하여 무공을 익혔으나 추후 강호에 나가 백련교(白蓮敎)에 가입하여 명존화성을 모시게 되었네. 원래 정사(正邪)는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 정파 출신인 내가 백련교에 가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원나라의 학정(虐政)에 반발하여 중원 영웅들이 백련교를 중심으로 뭉쳐 싸울 때라 별문제가 되진 않았지.]


장원계의 말을 듣고 왕경은 생각했다.


(설마 고려를 침범한 홍건적 무리 중에 사부님도 계셨을까?)


왕경의 속을 알 수 없는 장원계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서수휘(徐壽輝) 장군님 휘하에서 싸우게 되었고, 장군님이 전사 하신 뒤에는 진우량 폐하를 모시게 되었다네. 그 후 대한(大漢) 제국을 폐하와 함께 세웠고 원나라 놈들을 변방으로 몰아냈으나 결국 파양호(播陽湖) 전투에서 주원장에게 패해 폐하는 전사하고 나만 이렇게 늙어 가고 있다네.]


과거 전장(戰場)을 누비며 웅심(雄心)을 키우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지 장원계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다시했다.


[따라서 내 몸에는 정파인 소요파의 무공과 사파라 불리는 백련교의 무공이 존재한다네. 사실 정사의 구분은 모호한 것으로 아무리 무공이 광명정대 하더라도 그걸 사용하는 자가 간악하면 사악한 무공이 되는 것이고, 사파의 무공일지라도 올바른 일에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무공이 되는 것이네. 그러니 나는 앞으로 정사 구분 짓지 않고 자네에게 내가 가진 무공 모두를 전수해 줄 터이니 자네 역시 정사에 연연해하지 말고 필요한 건 다 받아들이도록 하게나!]


왕경은 장원계의 말을 듣고 다부지게 대답했다.


[네! 사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중원 무림세가(武林世家)에서 태어났거나 일찍이 문파에 가입해서 무공을 수련했다면 정사(正邪)의 구분은 엄격하고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왕경은 나이도 어리고 더욱이 중원 무림 출신이 아니라 정사(正邪)의 개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장원계의 당부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나 어차피 무공을 수련 하기로 한 이상 처음부터 가리지 않고 강한 무공은 모조리 배우고자 했기에 장원계의 당부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흘려 넘겼다.


그날부터 장원계는 낮에는 무공을 전수하고, 밤에는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일 년이 지나 한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각종 병법서와 한비자(韓非子)까지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왕경에게 쏟는 장원계의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왕경 역시 태생이 총명하며,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사명감이 투철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주야로 노력하니 무공과 학문의 성취가 날로 깊어만 갔다.


다시 일 년이 지나 만보산에 겨울이 왔다. 만주의 겨울은 개경의 겨울과는 그 추위가 비교 할 수도 없이 매서웠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에도 추위에 떨지 않는 왕경을 보고 장원계는 말했다. 

 

[이 정도 추위에는 꿈쩍도 않는 것을 보니 이제 너의 내공 기초가 탄탄해진 것 같구나.]


왕경도 최근 힘이 부쩍 는 것을 느끼고 있던지라 즉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모두 사부님이 돌보아 주신 덕분입니다. 사부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의주에서 진작에 목이 잘렸겠지요.]


왕경의 말에 장원계는 빙긋 웃었다.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겠나. 나 역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후 하루하루가 새롭고 희망차구나. 허허.]


장원계의 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혼천공(混天功)을 전수할까 한다. 이 혼천공을 너에게 전수를 해야 하는지는 참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혼천공은 우리 소요파의 고심(高深)한 내공(內功) 심법으로 그 수행법이 다른 문파와는 크게 다르기에 잘못 익히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니라. 하지만 요 몇 년 너의 무공 성취가 남다르게 뛰어나며 잡념이 적어 우리 문파가 추구하는 무상(無想)의 이념과 네가 잘 맞는 듯하여 전수를 결심하였는데 잘 생각한 건지 모르겠구나.]


장원계의 말에 왕경은 크게 감격하여 말했다.


[제자를 그토록 애틋하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혼천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고려를 다시 세울 수도 없고 또한 사부님의 한(漢)나라를 되찾는데도 크게 지장이 있을 테니 감히 제가 한번 배워보고자 합니다.]


왕경의 말에 장원계는 미소를 띄웠다.


[혼천공은 지고무상한 내공 심결임에 틀림없고 나 역시도 겨우 오 할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리 강한 무공을 익혔다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야.]


두 눈을 빛내며 듣고 있는 왕경의 어깨를 토닥이며 장원계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네가 혼천공을 익히고 안 익히고는 우리의 대업(大業)에 큰 영향이 없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강한 군대와 백성들의 지지 그리고 충분한 군자금이 필요하며, 그 정도 규모가 되면 개인의 무공은 큰 의미가 없지. 오히려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用人術)이 더욱 중요한 게야. 그것이 내가 너에게 밤마다 군사를 다루는 병법과 나라를 이끌어갈 사상인 한비자 등을 가르치는 이유이니라.]


왕경은 장원계의 사려 깊음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자신을 장원계의 비원(悲願)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일국을 이끌어갈 제왕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왕경은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 하고 장원계 앞에 꿇어 엎드렸다.


[사부님. 제게 혼천공을 전수해 주십시오! 제가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여 반드시 익혀 보이겠습니다!]


장원계는 왕경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녀석아!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전수해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날 추운데 어서 일어나거라!]


왕경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장원계는 마음속 한 구석에 있던 망설임이 말끔히 사라졌다.


[사실 조사(祖師)께서 전수해 주신 혼천공이 내 대(代)에서 실전(失傳)되는 게 아닌가 싶어 죄스러운 마음에 고민이 많았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장원계의 말에 왕경은 의아하여 물었다.


[사부님 제 사형들께는 혼천공을 전수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들놈과 큰 제자인 석만경(石滿敬)에게는 전수하였으나 죽고 말았지.. 둘째 놈은 성질이 급하여 제대로 무공을 전수하지 못했고 역시 파양호 전투에서 전사했지, 마지막 놈은.. 물욕(物慾)이 많은 녀석이라 혼천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아 소무상공을 가르쳤다. 그놈은 그놈대로 내가 혼천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었지만 어쩌겠나.. 타고난 천성이란 것이 있는데 그놈과 혼천공은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


왕경이 장원계에게 무공을 배운진 2년이 되어가지만 다른 제자들에 대해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원계가 말끝을 흐리고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이자 왕경은 더는 묻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직 대업을 이룰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 소일 삼아 천천히 익혀보도록 하여라!]


다음날부터 장원계는 왕경에게 혼천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혼천공은 일반적인 중원 무림의 무공과는 크게 다르다. 네가 지금까지 배웠던 무공을 모조리 잊어야만 비로소 혼천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야.]


혼천공은 소요파의 지고무상(至高無上)한 비급으로 그 내용이 무척이나 심오했다. 일반적인 중원의 내공 심법은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서 부터 단련하여 단전(丹田)에 기를 모으거나, 장심에서 시작하여 견정혈(肩井穴)을 지나 대추혈(大椎穴)을 거쳐 명문혈(命門穴)을 통해 단전(丹田)으로 기를 모은다. 아니면 호흡을 통해 직접 전중혈(田中穴)을 거쳐 단전(丹田)으로 기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혼천공의 시작은 단전에 있는 기를 사지 백해로 보내는 데서 시작한다. 즉 단전을 공허하게 텅 비우는 작업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는 내공 수련에 있어 커다란 금기로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이어서 타고난 자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전수할 수 없는 무공이다. 


왕경은 첫 번째로는 장원계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있어 가르쳐 주는 대로 의구심 없이 열심히 익혔고, 두 번째로 기초 입문 무공인 태상무결을 제외하고는 무공을 접해본 적이 없어 특별한 선입견 없이 배우기 시작하니 배움의 속도는 오히려 빨랐다.​


혼천공을 익힌 지 일 년이 지나자 왕경은 단전을 항시 공허(空虛)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년이 지나자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자유롭게 기(氣)를 보낼 수 있었다. 삼 년째에 이르러 십이경락(十二經絡)까지 단련하니 전신에 기가 넘쳐흐르고 몸이 가벼워 가파른 절벽도 손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무릇 진기(眞氣)는 사용할수록 고갈 되어, 어느 이상 내공을 사용하면 반드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통해 진기를 회복하여야 하는데 혼천공은 처음부터 단전을 비우고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으로 기를 흘려보내 놓으니 그 끝이 무궁무진하구나!)​


혼천공을 익힐수록 그 신묘한 힘에 매료되어 왕경은 더욱 더 무공에 정진하게 되었다. 이미 중요한 구결은 모두 전수한 뒤라 장원계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수개월씩 중원과 조선을 오가며 정세를 파악하고 영웅들을 규합하며 거사를 위한 밑 작업을 차근차근 해나갔다.


그 사이 왕경은 무공에 매우 큰 진보가 있었으나 혼천공의 마지막 관문을 아직 통과하지 못해 서서히 조바심이 났다. 서두르는 왕경을 보고 장원계는 누차 달랬으나 상승무공 앞에서 조급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인들이 무공비급을 얻게 되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비급에만 매달리는 것처럼 왕경 역시 혼천공의 효과를 보자 온 신경을 혼천공에만 쏟게 되었다. 


급기야 혼천공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서자 장원계가 걱정이 되어 말했다.


[경아 혼천공은 하늘이 내린 무공이다. 인연이 없는 자가 억지로 이루려 한다고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너무 조급해 말아라. 더욱이 우리는 무공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무리해서 혼천공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져 몸이라도 상하게 되면 본말전도(本末轉倒)아니겠느냐? 혼천공은 우리의 대업을 위한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네]


왕경은 대답했으나 어찌 그리 쉽게 마음이 바뀔 수 있겠는가? 무공 비급을 얻은 뒤 그것을 익히기 위해 거세(去勢)까지 하는 무림인도 있는 마당에 닿을 듯 닿지 않는 혼천공을 눈앞에 두고 마음을 쓰지 말라니!


하루하루 말이 없어지며 수심에 차있는 왕경을 보고 장화령은 노심초사했다. 둘은 수년간 같이 자라면서 이미 친 오누이 이상의 정이 들어있던 터였다.


[왕경 오빠! 매일 그렇게 수련만 하면 몸 상해요. 오빠는 혼천공 보다 이루어야 할 더 큰 것이 있잖아요?]


장화령의 말에 왕경은 씁쓸하게 웃는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다만 눈앞에 있는 이 혼천공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장화령은 왕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오늘은 수련하지 말고 나와 놀아요!]


왕경은 자신의 속도 모르고 놀자고 하는 장화령이 귀찮아서 거절하려다 장화령의 기대에 찬 눈을 보고 마지못해 나섰다.


[그래 오늘은 누이와 같이 놀도록 하자!]


둘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만보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나이는 어렸으나 둘 다 상승무공을 익힌 터라 경공을 펼치니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오를 수 있었다.산 정상에 올라서니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만주벌판이 보였다.


[만주는 지평선이 보이는구나. 고려는 땅이 좁아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고려가 그리우신가요?]​


장화령의 말에 왕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도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고, 오빠도 열심히 무공과 학문을 익히고 있으니 이제 곧 고려를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장화령의 말에 왕경도 맞장구쳤다.


[그래 누이의 말이 맞아. 압록강을 건널 때만 해도 복수심에 증오만 가득할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사부님께 무공과 학문을 배우고 또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니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뤄질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라!]


왕경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장화령이 물었다.


[고려를 되찾으면 무엇부터 하실 건가요?]


[당연히 우리 왕 씨들을 몰살시킨 이성계 일당을 주살해야지! 그리고 사부님과 약조한 대로 군을 일으켜 북원과 함께 명나라를 치러 가야 하지 않겠나!]


엄숙하게 말하는 왕경에게 장화령은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오빠의 머릿속엔 싸울 생각만 가득하네요!]


[사부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하늘과 같은데 내 어찌 고려를 되찾았다고 안주할 수 있겠어? 당연히 명을 멸망시킬 때 까진 싸울 수밖에 없지!]


[그럼 오빠는 한평생 전쟁만 할 건가요? 이제 천하에 왕 씨라고는 오빠 하나밖에 없는데 후사도 없이 전쟁터만 돌아다니면 태조 대왕께서 퍽이나 좋아하시겠네요!]


장화령은 왕경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왕경은 장화령이 왜 토라진 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장화령은 왕경이 고려를 되찾고 복수가 끝나면 자신을 신부로 맞이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사실 장화령은 그저 정을 준 사내 곁에 있고 싶을 뿐 고려의 부흥이니 복수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의 입으로 어떻게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장화령은 눈치 없는 왕경이 못내 못마땅했다.


달려가는 장화령을 따라 왕경도 급히 쫓아갔다. 왕경이 공력을 돋우며 쫓아오자 장화령은 경신술을 펼쳐 더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이! 영매(玲妹)! 천천히 달려 그러다 넘어지면 크게 다쳐!]


장화령은 왕경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발에 공력을 더욱 올렸다. 왕경 역시 공력을 끌어 올리며 쫓아갔다. 왕경의 혼천공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팔다리가 가벼워 쉽게 장화령을 잡을 수 있었지만, 동심(童心)이 발동하여 바로 잡지 않고 잡을 듯 말듯 거리를 두며 쫓아갔다.


장화령도 왕경을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쳤다. 한껏 내공을 끌어올려 산을 두어바퀴 돌았더니 장화령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되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왕경이 쫓아 오며 소리쳤다.


[누이! 이제 도망가는 것을 포기 한 건가? 하하.]


뛰어오면서 말을 하는데도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왕경을 보고 장화령은 놀랐다.


[오라버니 혼천공을 완성하신 건가요? 산을 두 바퀴나 돌았는데도 전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네요?]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 만일 완성했다면 두 바퀴 돌기 전에 영매(玲妹)를 붙잡았겠지!]


왕경이 일부러 잡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화령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피!]


왕경은 장화령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누이 아까는 왜 그렇게 토라진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왕경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뿌리쳤다.


[토라지긴 누가 토라졌다고 그래요? 그냥 오빠 앞에서 할아버지께 새로 배운 경신술을 자랑하려고 한 건데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격이네요!]


[하하 누이의 경신술은 정말 훌륭했어. 나도 혼천공을 한껏 끌어올려 쫓아갔지만 쉽게 잡을 수 없었는걸!]


둘은 바위에 앉아 간식을 꺼내 먹으며 잠시 쉬었다. 그때 사슴 한 마리가 낳은 지 며칠 안돼 보이는 새끼와 함께 풀을 뜯으러 바위 뒤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장화령이 말했다.


[오빠 저길 좀 봐요. 새끼 사슴이 매우 귀엽네요]


[잡아다 오늘 저녁에 먹을까?]


왕경의 말에 장화령은 눈을 흘겼다.


그때 사슴 뒤로 늑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왕경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저녁 식사를 저 녀석이 가로채 가려고 하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구해 주도록 해요!]


왕경은 자신의 무공으로 늑대 한 마리  쫓아내는 것 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늑대가 어떻게 사냥하는지 보고 싶어 그냥 숨죽이고 지켜보기로 했다.


왕경이 나서서 도와줄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장화령이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때 왕경의 손이 급히 장화령의 입을 막았다.


[누이 잠시만 저 녀석이 어떻게 사냥하는지 지켜보자고!]


늑대는 왕경과 장화령이 자신을 방해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슬금슬금 사슴의 뒤로 돌아갔다. 바람을 정면에 두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단 한 번의 뜀박질로 덮칠 수 있는 거리까지 간격을 좁혀간 뒤 늑대는 사슴을 향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경계심 강한 사슴은 늑대가 뛰어오르자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미 사슴을 따라 새끼 사슴도 같이 달려갔다. 늑대가 새끼를 노리는 것을 알고 있는 어미는 늑대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늑대 앞쪽에서 좌우로 크게 뛰며 늑대를 혼란 시켰다.


늑대와 사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어서야 사슴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은 무사히 늑대의 이빨로부터 벗어나 산등성이를 타고 유유히 도망쳤고 지친 늑대는 잠시 엎드려 쉬다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장화령이 좋아라 한다.


[늑대는 무리 사냥을 하는데 운 좋게 한 마리만 있어서 사슴들이 도망갈 수 있었네요!]


왕경은 새끼 사슴이 무사히 도망친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어미야 그렇다 쳐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는 잡힐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칠 수 있다니!)


왕경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다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래 사슴에게 뜀박질이란 곧 생명과 직결된 것으로 그것을 따로 단련한다거나 할 필요가 없이 타고나는 것이다. 타고남과 동시에 늘 하고 있는 것이니 저렇게 작은 새끼조차 능숙하게 늑대를 따돌릴 수 있었으리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머릿속에 광명이 드는 것 같았다. 

 

(나도 저 사슴처럼 평소 늘 혼천공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연습한다고 해도 글을 읽고, 잠을 자며 일상생활을 하는 시간을 빼면 결국 두세 시진(時辰) 밖에 혼천공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 이후로 왕경은 일상생활에서도 혼천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도 손끝으로 기를 보내 그 기의 움직임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여 밥과 반찬을 먹었다. 걸음을 걸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는 것이 아니라 운기를 하여 기를 끌어 올린 뒤 발로 보내어 내공의 힘으로 발을 들어 움직이게 했다. 글을 쓸 때 역시 손끝에서 붓으로 내공을 보내어 붓을 움직였다.


그렇게 매 순간 순간 운기를 하여 행동을 하니 모든 움직임이 둔해지고 옆에서 보기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는 장원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장화령의 속은 타들어 갔다.


(혹시 고려 부흥이라는 너무 큰 짐 때문에 실성한 것은 아닌가? 혼천공 따위는 익히지 못해도 상관없는데 어찌 사람이 저리되었는가? 마치 백치(白痴)와 같구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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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파양호 대전 19.08.13 83 2 26쪽
27 27. 흑묘파 (3) 19.08.12 100 2 21쪽
26 26. 흑묘파 (2) 19.08.09 101 2 21쪽
25 25. 흑묘파 (1) 19.08.08 104 3 21쪽
24 24.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2) 19.08.07 103 3 18쪽
23 23.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1) 19.08.06 109 3 29쪽
22 22. 태호의 노인 (2) 19.08.05 95 3 17쪽
21 21. 태호의 노인 (1) 19.08.02 105 3 18쪽
20 20. 옥화장의 위기 19.08.01 108 3 22쪽
19 19. 이단의 무술 실력 19.07.31 120 3 18쪽
18 18. 남경으로 19.07.30 125 3 20쪽
17 17. 사해방 19.07.29 198 3 23쪽
16 16. 산중생활 19.07.26 144 2 14쪽
15 15. 야반도주 19.07.25 140 3 13쪽
14 14. 연경을 떠나다. 19.07.24 156 3 20쪽
13 13. 모함 19.07.23 164 2 17쪽
12 12. 구출 19.07.22 170 2 21쪽
11 11. 습격 19.07.20 204 3 18쪽
10 10. 조천사(朝天使) +1 19.07.19 244 3 20쪽
9 9. 연경의 고려인들 +2 19.07.18 250 3 21쪽
8 8. 장원계의 죽음 19.07.17 237 3 18쪽
7 7. 연경으로 19.07.16 244 4 20쪽
6 6. 혼천공을 완성하다. 19.07.15 285 4 18쪽
» 5. 만보산에서의 생활 +2 19.07.13 296 7 22쪽
4 4. 사부를 모시다. 19.07.12 329 4 20쪽
3 3. 추격자들 +2 19.07.11 297 7 23쪽
2 2. 두문동(杜門洞)의 참화(慘禍) 19.07.10 32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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