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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생 님의 서재입니다.

참룡기(斬龍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진효생
작품등록일 :
2019.07.09 15:26
최근연재일 :
2019.08.16 19:53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5,652
추천수 :
98
글자수 :
279,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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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8 15:00
조회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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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1쪽

25. 흑묘파 (1)

고려의 마지막 왕자 왕경의 일대기 입니다.




DUMMY

이현종과 헤어진 둘은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산에서 내려왔다.


왕경은 아직도 울고 있는 이단을 달랬다.


[누이 그만 울어요. 사부님을 다시 못 볼 것도 아니고..]


[제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어찌 뵐 수 있단 말인가요?]


평소의 이단은 장난기가 많으며 적을 상대할 때는 잔인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는데 이렇게 여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왕경은 내심 놀랐다.


(누이에게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그러면 사부님의 말대로 하면 되잖아!]


평소와는 다른 이단이 신선하게 느껴져 왕경은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꺼내고 말았다.


[어떻게 말인가요?]


이단은 대답해놓고 바로 그 의미를 깨달았다.


[흥!]


이단이 콧방귀를 뀌자 왕경이 웃는다.


[울다 말고 왜 콧소리를 내지?]


[흥! 그대의 령누이나 사소저는 어쩌고 저한테 그러십니까?]


[사소저는 누이에게 반해 있지 않아? 누이야말로 사소저를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요? 사부님이 내가 여자라는 걸 아셨으니 옥화장에 가셔서 말해주시겠지. 나중에 혼나기 전에 조선으로 빨리 도망가야겠네요!]


[누이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왕경은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이단은 그런 왕경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우리 한 달 동안 무예를 익히느라 태호 구경을 제대로 못 했잖아요? 내일부터는 천천히 유람이나 해요. 사부님 말씀 기억하죠? 서두르지 말라고!]


[그래 알았어. 안 그래도 한번 긴장을 풀어야겠다 싶었어. 요즘 열심히 수련했으니 잠시 유람이나 하지. 대신 홍영루 말고 다른 객점에 묵자고]


[그래요. 한 달이나 대접을 받으니까 너무 미안하네요. 태호 동쪽으로 더 들어가서 객점을 잡고 근처 유람을 하지요.]


왕경과 이단은 객점으로 내려와 하루를 더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홍영루를 떠났다. 둘은 태호를 끼고 천천히 말을 달려 동쪽으로 나아갔다.


홍영루의 주인이 숙박비를 받지 않아 그냥 나온 것이 영 찜찜한지 이단이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방안에 숙박비를 놓고 나올 걸 그랬어요.]


[그러게 안 받겠다고 펄펄 뛰니 강제로 쥐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번에는 좀 작은 객점에 묵도록 해요. 아니면 일반 여염집을 빌려서 한동안 묵던가.]


이단은 최근 이현종과 왕경의 점심을 만들면서 요리에 재미를 붙였기에 당분간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하고 싶어 객점보다는 여염집을 빌려 묵기를 원했다.


그런 이단의 뜻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왕경 역시 이단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나도 객점의 요리보단 누이가 해주는 음식이 더 맛있으니까.]


[피. 누가 오라버니 식사 챙겨주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이단의 말에 왕경은 그저 웃기만 했다.


둘은 천천히 태호의 풍경을 감상하며 말을 몰아갔기에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홍영루에서 백 리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마땅히 묵을 만한 객점은 없을 것 같군.]


[그러게요. 일단 오늘 묵을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저는 노숙은 싫습니다.]


[하하. 알겠어.]


마침 선착장에서 어구(漁具)를 걷는 노인이 왕경의 눈에 들어왔다.


왕경은 힘들게 어구를 배에서 내리는 노인에게 다가가 도와주며 말했다.


[어르신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노인은 갑자기 젊은 사내가 나타나 힘쓰는 것을 도와준다고 하자 깜짝 놀랐으나 이내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이고. 고맙소 젊은이. 안 그래도 힘이 달려 어구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왕경이 힘을 몇 번 쓰자 삽시간에 배 안의 어구와 그날 잡은 물고기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젊은이 덕분에 일이 금방 끝났네. 정말 고맙소.]


노인의 말에 왕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혼자 고생하시는데 도와드려야지요.]


노인은 어망에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꺼내며 말했다.


[가진 것 없는 늙은 어부라 뭐 사례할 것도 없고 이놈이나 한 마리 가져가시오.]


왕경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보답을 바라고 도와드린 것도 아닌데요. 그냥 오늘 묵을 수 있는 객점이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경의 말에 노인은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면 멀리 객점 찾을 것 없이 우리 집으로 갑시다. 누추하긴 하지만 아들놈이 쓰던 방이 있으니 거기서 묵으면 될 것이오.]


[아닙니다.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객점 위치만 알려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노인이 왕경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여기는 작은 촌락이라 객점이 없다오. 우리 방을 내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빈방 쓰라는 건데 뭐가 폐가 된다는 말이오? 갑시다! 노인 둘이 사느라 적적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오면 시끌벅적하고 좋지 뭘.]


왕경이 난감해서 이단을 쳐다보자 이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어르신께서 이렇게 권하시는 데 따르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요. 어르신 댁에 하루 신세 집시다.]


이단의 말을 듣고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급하게 가는 것이 아니면 며칠 묵으며 태호를 구경해도 좋다오. 하하]


왕경은 노인의 어구와 잡은 물고기를 말에 싣고 천천히 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의 집은 태호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일각(一刻) 정도 걷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인은 집에 들어가며 크게 외쳤다.


[이것 봐. 할멈! 손님이 왔어. 나와보시오!]


노인의 말에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던 노파가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기대어 힘겹게 나왔다.


[우리 집에 올 손님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오?]


[이 젊은이들이 객점을 찾고 있길래 마침 우리 대정(大正)이가 쓰던 방이 남아 있어서 데리고 왔지. 내가 어구를 못 들어 올려 끙끙 댈 때 도와준 고마운 청년들이야.]



노인의 말에 왕경과 이단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께서 초대해 주셔서 염치 불구하고 하루 신세 지러 왔습니다. 저는 연경에서 온 왕경이고 이 친구는 제 동생인 이단입니다.]


왕경의 말에 노파가 난처해 하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 집엔 손님 대접할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를 어쩌나..]


노인의 집은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작은 초가집으로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해 보이진 않았다.


[아닙니다. 하루 묵을 수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주방을 빌려주시면 식사도 저희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단의 말에 노인이 펄쩍 뛴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떻게 손님한테 주방일을 시키나? 자자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쉬시오. 아들은 없지만 매일 같이 청소해 놓았기에 둘이 쉬기에 불편하진 않을 거요.]


노인은 왕경과 이단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노파에게 잉어를 한 마리 건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이걸로 당신이 솜씨 좀 부려보시구려.]


노파는 노인에게서 잉어를 한 마리 받아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왕경과 이단이 방에 들어간 지 반시진 정도 지났을 때 노인이 불렀다.


[젊은이들 저녁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리 나오시오.]


둘은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다가 노인의 말에 퍼뜩 잠이 깨어 방에서 나왔다.


노인은 안방에 저녁 식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할멈이 잉어찜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오. 많이 차리진 못했어도 음식이 맛이 없지는 않을 것이오.]


왕경과 이단은 노파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저희 때문에 고생하셨네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둘은 식사를 하면서 노인에게 마을의 이름과 근처 관광지를 물어보았다.


[이 마을은 호개촌(湖開村)이라고 한다네. 태호로 흘러들어 가는 강의 모양이 마치 호수가 입을 열어 맞이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네.]


[호개촌에는 어떤 명승지가 있나요? 형님과 저는 중원 천하를 유람하고 있는 중이라 태호에 한동안 머물면서 근처를 둘러 볼까 하고 있거든요.]


이단의 말에 노인은 신이 나서 자신의 마을을 자랑했다.


[자네들이 태호의 서쪽부터 보아 온 것들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당장 이 호개촌만 해도 앞쪽으로 수도 없이 많은 섬들이 있고 각기 섬마다 특유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지. 그리고 남동쪽으로 오십 리 정도 가게 되면 오흥현에 동정산(洞庭山) 이라고 있네. 그곳은 벽라춘(碧螺春)이라고 하는 천하제일 명차(名茶)가 생산되는 곳이지.]


차를 좋아하는 이단은 벽라춘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저희 상단에서 벽라춘을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모양새는 마치 고동처럼 구부러져 있고, 그 향과 맛은 여러 가지 화향(花香)과 과실의 풍미(風味)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정산에서만 난다고 들었는데 이 근처에 있었군요. 반드시 가봐야겠습니다.]


이단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노인이 옆에서 부추긴다.


[마침 청명절(淸明節)이 지났으니 올해 나온 명전차(明前茶-청명절 이전에 만드는 차로 벽라춘이 대표적이다.)를 마시기에 딱 좋을 시기 아닌가? 나는 육십 평생을 이곳에 살아왔는데 그 귀한 차는 구경도 못 해 봤네. 자네들이 참 부럽구먼.]


이단은 벽라춘 이야기를 들으니 호개촌에서 며칠 묵으면서 실컷 차를 음미(吟味)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호개촌이 참 좋은 곳 같은데 이곳에서 며칠 있으면서 유람을 하지요.]


왕경은 이단이 이미 마음을 굳혔음을 느끼고 웃으며 말했다.


[나야 상관없네만 이곳에는 객점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어르신들께 오래 폐를 끼칠 수도 없으니 내일 좀 더 큰 마을로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왕경의 말에 노인이 말했다.


[이곳에 오래 묵어도 되네. 할멈과 둘이 사느라 적적했는데 젊은 친구들이 머물러 주면 좋지.]


[어찌 오래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아드님 방을 오래 쓰는 것도 죄송스럽고..]


왕경의 말에 노인이 한숨을 푹 쉰다.


[아들놈은 돌아올 일이 없으니 그냥 젊은이들이 써주면 좋겠네..]


노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이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드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왕경은 노인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이단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보게 아우. 사람은 각자 다 사연이 있지 않은가? 어르신 연세 정도 되면 가슴에 묻고 꺼내지 않는 일도 많이 있는 법이야.]


그래도 궁금증이 밀려오자 이단은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왕경이 손짓으로 제지 시켰다.


노인은 잠시 이마의 주름을 잔뜩 잡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는 이곳 호개촌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살았지. 호개촌은 조(趙)씨들이 모여 살아서 조가촌이라고도 한다네.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이곳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산물이 풍부한 태호가 옆에 있어서 우리는 산에서 나물을 캐고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네.]


조 노인은 목이 마른 지 물을 한잔 들이키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젊은 애들이 살기에는 답답한 곳이지. 자네들은 연경에서 왔다고 하니 잘 알겠지? 어떤가? 연경과 이곳 호개촌을 비교해보니?]


[아무래도 연경은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지요.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고. 한인, 만주인, 조선인, 왜인.. 심지어 색목인들까지 북적대는 곳이니..]


이단의 말에 조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우리 부부는 아이가 안 생기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사내아이를 하나 낳을 수 있었는데, 늦게 낳은 아들놈이라 없는 살림에도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그만 버릇없는 망나니가 되고 말았네..]


조 노인의 말에 노파는 언성을 높인다.


[그만하시오. 손님에게 쓸데없는 소리는..에잉..]


[내가 답답해서 하소연하는 것이니 임자는 듣기 싫으면 나가 있구려.]


이단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아드님이 옥에 갇혀 있나요?]


이단의 말에 조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조 노인의 언성이 높아지자 이단은 즉시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억측을 해보았습니다. 죄송하네요.]


이단이 사과하자 조 노인은 씁쓸히 대답했다.


[아닐세 아니야. 어쩌면 옥에 갇혀있을 수도 있겠지.. 휴.. 아직 살아나 있으면 다행이고..]


조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놈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호개촌을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네.. 큰 도시에 나가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자신은 이곳 호개촌 같이 작은 마을에서 살 인물이 아니라는 거야. 누구나 그 나이 때는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나도 그랬고..]


[에휴..]


땅이 꺼질 듯한 노파의 한숨 소리에서 그들 부부가 얼마나 아들 때문에 속이 썩었는 지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놈이 스물이 되던 해에 마을에 도적놈들이 들어 왔는데.. 그놈들이 마을에 피해를 준 것은 없었지만 칼차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들놈이 마음이 동했나봐.. 그놈들을 보고 마을을 떠났어.. 그놈들 처럼 멋지게 살고 싶다고..]


[그럼 아드님은 그 도적들과 함께 있는 건가요?]


이단의 질문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네. 그놈들을 쫓아가 같이 한패가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큰 도시로 갔는지.. 그놈들과 함께 떠난 것이 아니고 도적놈들이 떠난 후 우리랑 한바탕 싸우고 나갔으니까..]


왕경과 이단은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벌써 오 년이나 지났는데 아무 소식이 없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원..]


조 노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 고였다.


[하여튼! 오랜만에 젊은 친구들이 온 것이니 맘 편하게 있다 가게나. 아까 자네가 어구 정리를 도와줬을 때 마치 아들놈이 돌아온 것 같아서 매우 기뻤다네.. 그러니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얼마든지 머물다 가게나!]


이단은 왕경을 한번 쳐다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왕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은 품에서 열 냥 정도 되는 은자를 꺼내 노인 앞에 내놓았다.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며칠 묵었다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머물게 되면 저희도 염치가 없으니 숙박비라고 생각하시고 은자를 받아 주십시오.]


이단이 많은 돈을 내놓자 노부부는 깜짝 놀라서 사양했다.


[아니 이게 뭔가? 괜찮네. 우리가 좋아서 손님을 초대한 것뿐이니 이러지 말게!]


[객점에 묵게 되면 숙박비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마침 이곳에 객점이 없다고 하셔서 곤란해 하던 참인데 방을 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 사정을 봐주신 겁니다. 어찌 그냥 머물 수 있겠습니까?]


조 노인은 이단이 내놓은 은자를 보더니 다시 손사래 친다.


[무슨 객점에서 이렇게 큰돈을 받나? 우리 부부가 한 달 일해도 이 돈의 반도 못 벌 텐데.. 이렇게는 못 받네!]


이단은 은자를 조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대신 맛있는 저녁밥을 해주세요. 저희가 객지로 나온 지 오래 되어 부모님의 손맛이 그리웠던 참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어머니가 해주신 밥맛은 안나니까요.]


노파는 아들이 생각나는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내.. 내가.. 정성껏 차려주겠네.. 그.. 그런데 그래도 이 돈은 너무 많네..]


왕경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워낙 많이 먹으니 나중에 가서 다른 소리 하시면 안됩니다. 그냥 받으세요.]


[많이 먹게. 많이 먹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먹어야지. 나도 우리 아들 먹인다 생각하고 준비하겠네..]


다음날부터 왕경과 이단은 호개촌에 머물면서 태호 주변을 유람했다. 이레 정도 지나니 태호 주변의 어지간한 섬들은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


이단은 벌써부터 동정산으로 가 벽라춘을 마시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라버니. 이제 태호도 질릴 만큼 돌아보았으니 슬슬 동정산으로 출발하는 것이 어떨까요?]


왕경 역시 며칠 전부터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저녁마다 반가이 맞아주는 조 노인 부부가 눈에 밟혀 차마 떠나겠다는 소리를 못하고 있었다.


[누이가 벽라춘을 마시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먼! 그럼 청죽도(靑竹島)를 마지막으로 보고 내일 아침 떠나도록 하지.]


[그래요. 청죽도는 섬 전체가 대나무로 덮여있어 아주 고고(孤高)한 섬이라고 하더군요. 지금 바로 가요!]


둘은 배를 저어 청죽도를 향해 갔다. 이각(二刻) 정도 배를 저어가자 눈앞에 넓고 편평하게 펼쳐진 섬이 하나 나타났다.


[온통 대나무로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저 섬인 것 같군.]


[태호의 섬들은 참 신기하네요. 같은 호수 안에 있는데 어떤 섬은 온통 바위로만 덮여있고, 어떤 섬은 꽃과 나비가 가득하고.. 청죽도는 오로지 대나무만 잔뜩 있으니..]


청죽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 따로 선착장이 없었다.


왕경은 섬의 모래사장에 배를 대고 섬에 올랐다. 이단 역시 왕경을 따라 내렸는데 이전보다 확실히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누이의 경공이 장족의 발전을 했군. 한 달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몸놀림이야.]


[사부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렇죠.]


이단은 이현종을 생각하니 그리워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그리 빨리 떠나셨는지..]


왕경은 자신 때문에 이현종이 서둘러 떠났다는 것을 알기에 이단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중추절 영웅대회는 사부님도 알고 계실 테니, 사부님이 계시면 백련교도와 일을 도모해야 하는 내 입장이 난처할까봐 서둘러 가신 것이겠지..)


[사부님을 뵙고 싶으면 옥화장에 가서 소식을 전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하]


[시끄러워요. 자꾸 이상한 소리 하면 나 혼자 갈 거예요!]


이단은 쏘아붙이고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왕경은 싱글싱글 웃으며 이단을 따라갔다.


섬이 온통 대나무 천지라 신기해서 여기저기 돌아보던 이단은 금세 질렸다.


[섬이 아름답고 고고해 보이긴 하나 그뿐이네요.]


[그러게 같은 풍경이 계속되니 금세 질리는군.]


둘은 천천히 숲을 헤치고 배를 대 놓았던 호숫가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대나무 사이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갑자기 이단이 좋은 생각이 나서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 우리 저놈을 잡아가요!]


왕경도 이단의 저의를 짐작하고 대답했다.


[저놈을 잡아다 어르신들께 드리자는 거지?]


[네. 오늘은 제가 저놈으로 저녁을 차릴게요. 나머지 고기는 훈제해서 어르신들 드시게 남겨드리고요.]


왕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멧돼지는 사람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듯 왕경을 본체만체 하며 땅바닥을 파헤칠 뿐이었다. 멧돼지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왕경은 바닥에 있는 돌을 가볍게 차 멧돼지에게 날렸다.




머리에 돌을 맞은 멧돼지가 왕경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자 왕경은 몸을 왼쪽으로 살짝 돌려 피한 뒤 멧돼지의 목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왕경의 일장을 맞은 멧돼지는 몇 번 꿈틀대다 이내 움직임이 멎었다.


[오라버니의 무공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군요!]


[이 정도 멧돼지는 전에도 쉽게 잡을 수 있었어!]


왕경은 멧돼지를 호숫가로 끌고 나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발라냈다.


[이 정도면 두 분이 한동안 드실 수 있겠지?]


[날이 더워져 오래 못 드실 테니 집으로 가서 훈제해 드리죠. 필요할 때 꺼내서 끓여 드시게.]


[그래 오늘 먹을 것만 놔두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서 보존식으로 만들어 드리자!]


둘이 멧돼지 고기를 가지고 조 노인의 집으로 돌아가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왕경이 멧돼지 가죽에 고기를 잔뜩 싸온 것을 보고 조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놈을 어떻게 잡았나?]


[청죽도에 놀러 갔다가 형님이 잡았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저녁을 차려드릴 테니 편히 쉬세요.]


[아니 어떻게 손님에게 저녁을 차리라고 할 수 있나? 이리 주게 우리가 차려 올릴 테니.]


이단은 조 노인을 방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이레 동안이나 할머니께서 해주신 밥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고기를 굽고 요리를 만들 테니 푹 쉬세요.]


조 노인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듯 주저하자 왕경이 노인의 어깨를 감싸고 말했다.


[어르신! 오랜만에 아들이 와서 저녁 차려드린다고 생각하시고 편히 쉬고 계세요. 맛이 없더라도 정으로 드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경의 말에 이단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제가 언제 요리를 맛없게 했나요? 어르신! 맛있게 해서 올릴 테니 마음 푹 놓고 계십시오.]


[누.. 동생의 솜씨는 내가 잘 알지! 하하. 자 동생이 요리를 하게. 나는 고기를 훈제하겠네.]


조 노인과 노파는 왕경과 이단이 부산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우리 대정(大正)이가 저 청년들 만할 때 집을 나갔는데.. 살아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구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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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복건삼호(福建三虎) (2) 19.08.16 73 2 32쪽
29 29. 복건삼호(福建三虎) (1) 19.08.14 85 2 25쪽
28 28. 파양호 대전 19.08.13 83 2 26쪽
27 27. 흑묘파 (3) 19.08.12 100 2 21쪽
26 26. 흑묘파 (2) 19.08.09 101 2 21쪽
» 25. 흑묘파 (1) 19.08.08 104 3 21쪽
24 24.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2) 19.08.07 103 3 18쪽
23 23.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1) 19.08.06 109 3 29쪽
22 22. 태호의 노인 (2) 19.08.05 95 3 17쪽
21 21. 태호의 노인 (1) 19.08.02 105 3 18쪽
20 20. 옥화장의 위기 19.08.01 108 3 22쪽
19 19. 이단의 무술 실력 19.07.31 120 3 18쪽
18 18. 남경으로 19.07.30 125 3 20쪽
17 17. 사해방 19.07.29 198 3 23쪽
16 16. 산중생활 19.07.26 144 2 14쪽
15 15. 야반도주 19.07.25 140 3 13쪽
14 14. 연경을 떠나다. 19.07.24 156 3 20쪽
13 13. 모함 19.07.23 164 2 17쪽
12 12. 구출 19.07.22 170 2 21쪽
11 11. 습격 19.07.20 204 3 18쪽
10 10. 조천사(朝天使) +1 19.07.19 244 3 20쪽
9 9. 연경의 고려인들 +2 19.07.18 250 3 21쪽
8 8. 장원계의 죽음 19.07.17 237 3 18쪽
7 7. 연경으로 19.07.16 244 4 20쪽
6 6. 혼천공을 완성하다. 19.07.15 285 4 18쪽
5 5. 만보산에서의 생활 +2 19.07.13 295 7 22쪽
4 4. 사부를 모시다. 19.07.12 329 4 20쪽
3 3. 추격자들 +2 19.07.11 297 7 23쪽
2 2. 두문동(杜門洞)의 참화(慘禍) 19.07.10 32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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