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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생 님의 서재입니다.

참룡기(斬龍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진효생
작품등록일 :
2019.07.09 15:26
최근연재일 :
2019.08.16 19:53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5,656
추천수 :
98
글자수 :
279,987

작성
19.07.1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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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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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8쪽

8. 장원계의 죽음

고려의 마지막 왕자 왕경의 일대기 입니다.




DUMMY

셋은 하루를 꼬박 달려 연경 북쪽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자 버드나무가 서 있는 객점 뒤로 작은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끝에 장원계 등이 숨어있는 은신처가 있었다.


은신처에 도착하자 왕경은 급한 마음에 눈물부터 솟아올랐다.


[사부님!]


반쯤 잠긴 목소리로 장원계를 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장원계는 방 한가운데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고 다섯 명의 백련교도들이 침통한 얼굴로 장원계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왕경의 목소리를 듣고 좌중은 일제히 왕경 일행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왕경인가?]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도사(道士)가 말했다.


[네. 제가 왕경입니다. 사부님은 의식을 차리셨습니까?]


왕경의 말에 송무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 사부는 마지막까지 자네 걱정뿐이었네!]


송무영의 말에 장화령이 오열하며 장원계의 시신 앞에 쓰러진다.


[할아버지!]


왕경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정오성도 죽었다. 사부도 돌아가셨다. 부모님도 그렇고 조의생을 비롯한 두문동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었다! 나에게 사신(死神)이라도 붙어있는가! 나와 관계된 사람은 모두 죽는구나!)


정견은 장원계의 상태를 알고 만보산으로 출발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형은 언제 돌아가셨나?]


송무영이 겨우 대답을 했다.


[사백(師伯)께서는 한 시진 전에 돌아가셨소. 우리 다섯이 밤새 진기를 불어넣어 하루는 버텼으나 더 이상은..]


송무영의 목소리에서 장원계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기를 소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견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송무영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넷의 몰골도 초췌하기 그지없는 것이 장원계를 살리기 위해 각자 연마해온 평생의 공력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구나! 조금만 일찍 도착해서 나와 왕경의 공력이 더해졌다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정견은 밤새 달려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맥이 탁 빠져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형.. 고생 했소. 몽고 놈들을 몰아내기 위해 한평생을 바치고, 또 한(漢)나라의 재건을 위해 말년까지 고생만 하다 가시는구려. 부디 편히 쉬시오.]


장원계의 다리 쪽에 앉아있던 체구가 작아 보이는 사내가 멍청히 서있는 왕경을 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자네 괜찮은가?]


왕경은 멍하니 장원계를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네. 사숙(師叔)]


그때 수염이 긴 도사가 말참견했다.


[여기서 자네 사숙은 정 사숙 한 분 뿐이시네. 우리는 모두 자네랑 같은 항렬이니 사형(師兄)이라 부르게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내 이름은 구명관(具明官)일세, 저기 스님은 송무영이라고 하고..]​


구명관이 나서서 다섯 사람을 소개했다. 키가 작은 사람은 안진(安進)이라고 하고 백련교의 하부조직인 뇌문(雷門) 출신이었다. 안진 옆에 있는 사람은 이정산(李正山)으로 소림사의 속가제자 출신이며, 후에 백련교에 가입하여 장원계의 부관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마지막 사람은 연백수(燕百壽)로 무공도 높고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어 백련교도들에게 의선(醫仙)으로 추앙받는 자였다.​


왕경은 일일이 포권을 하며 예를 갖췄다.


[소제(小弟)가 여러 사형님을 뵙습니다. 저희 사부님을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왕경은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눈앞에 놓여있는 장원계의 시신을 보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장화령은 반쯤 실신한 상태로 장원계의 시신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동안 장화령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그중 제일 신중한 안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다섯은 내공이 고갈되었고, 왕 사제와 정 사숙은 먼 길을 오느라 크게 지쳐 있을 테니, 지금 유정협이나 관군(官軍)이 들이닥치면 큰일이오!]


성질 급한 송무영이 버럭 화를 낸다.


[까짓 거 들이닥치면 시원하게 한바탕 싸우다 죽으면 그만 아니오!]


왕경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제 놈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일장에 쳐 죽여 사부님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복수심에 흥분한 왕경을 달래며 구명관이 말했다.


[유정협은 매우 신중한 자로 아마 오게 되면 많은 군사를 데리고 올 테니 우리만으로 상대하긴 힘들 걸세! 게다가 우리들이 싸우다 죽는 건 상관없으나 조선 땅에 유배가 계신 폐하께 폐가 간다면 안되지 않겠는가?]


구명관의 말에 다들 흥분을 가라앉혔다.


구명관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을 했다.


[장 사백께서 이리 오시고 벌써 사흘이 넘었는데도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장 사백께서 유정협을 잘 따돌리고 오신 것 같네. 당장 위험은 없을 것 같으니 천천히 장례 절차와 앞일을 생각해 보기로 하세나.]


정견은 몇몇 교도들에게 지시를 내려 조용히 장례 준비를 시켰다. 남의 주목을 끌지 않도록 간소하게 치를 예정이어서 금방 장례 준비가 끝났고, 백련교 일부 간부만이 참석한 채 조촐히 장례식을 치른 후, 한 교도가 소유하고 있는 산에 장원계의 시신을 묻었다.


장례가 끝난 뒤 백련교의 간부들은 은신처에 모였다.

정견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사형이 주최하는 영웅대회가 이제 몇 개월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정견의 말에 송무영이 대답했다.


[이번에 모이기로 한 사람들은 거의 다가 장 사백의 위명을 듣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 사백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요.]


[사실 우리가 다 같은 백련교도 이긴 하나, 우리 한(漢)나라 쪽 교도들이나 소명왕을 따르던 교도들 그리고 장사성을 따르던 교도들은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사이 아니었습니까? 말이 같은 교인이지 사실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지요.]


안진이 씁쓸히 말하자 구명관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처음에는 몽고 놈들을 몰아내고자 똘똘 뭉쳐 싸웠으나 각자 세력이 강대해지니 이번에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견제하고 급기야는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치렀지 않습니까?]


송무영이 이야기를 듣다 흥분해서 말했다.


[그렇소! 교주님을 비롯한 교의 간부들이 각각의 수령들에게 서로 반목하는 것을 자제하고 협동할 것을 권했지만 황제 자리에 눈이 멀어서 말을 듣지 않았지! 그나마 우리 서수휘 장군께서는 교주님의 신망이 두터워 교의 보물인 성화령까지 받아 다른 군벌들과 힘을 합치려 했으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소!]


이정산 역시 흥분해서 맞장구 쳤다.


[맞소이다! 교주님께서 서수휘 장군님을 총사령관으로 해서 다른 군벌들이 협력해 몽고 놈들을 몰아내라고 명하셨는데 결국 자기들 욕심만 차리려 했지. 그러다 서장군이 전사하시고 진우량 장군께서 뒤를 이어 결국 한나라를 창업했으니 우리 한나라야말로 교주님께 정식적으로 인정받은 정통 국가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 한나라 교도들을 중심으로 다시 힘을 합쳐야 할 것이오!]


중인(衆人)들이 흥분하여 목소리가 커지자 정견이 나섰다.


[자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 우리는 우리 입장이 있는 것이고, 소명왕이나 장사성의 후인들은 또 자기만의 이유를 들어 자신들이 적통이라 우길 터인데.. 각자 자신들의 주장만 고집할 거면 영웅대회는 뭣 하러 여나? 열어봐야 싸움만 할 것을..]


정견의 말에 송무영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사숙님. 어느 나라를 중심으로 명에 대항할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영웅대회에서 소명왕의 후인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자고 하면 순순히 따라야 합니까?]


[원칙을 따질 것이면 원래 황제 자리는 교주께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견의 말에 좌중은 할 말을 잃었다.


처음 백련교도들이 의군(義軍)을 일으킬 때는 교주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하지만 각 지역의 군벌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백련교 총단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서로 견제하며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교주 직속 조직인 뇌문(雷門) 출신의 안진이 침묵을 깨며 변명을 했다.


[당시 장 교주께서는 황제 자리에 욕심이 없었고, 교단 운영에 어려움을 느껴 양 좌사께 교주직을 양보하셨습니다. 헌데 후임 양 교주께서는 연로하시어 더이상 대국을 이끌어 가실 수가 없었죠. 그래서 소명왕이 황제로 추대하였으나 고사하셨던 것 아닙니까?]


안진의 말을 듣고 이정산이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소명왕 한림아가 양교주를 황제로 추대하였으나 거절하시고, 성화령을 서수휘 장군께 보내며 다른 군벌들은 서장군의 지휘를 받으라 하셨으니 이는 곧 황제 자리를 서 장군에게 준다는 뜻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진우량 장군께서 서장군의 뒤를 이어받았으니 우리에게 정통성이 있는 것이 맞습니다. 이점을 영웅대회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최소한 소명왕쪽 사람들은 스스로 황제를 내세울 명분이 없습니다.]


[자자 흥분들 하지 마시게나. 어차피 우리의 세력이 가장 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명왕이나 장사성이나 모두 일족이 몰살당해 마땅히 내세울 후인도 없다는 것이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조선땅에 폐하께서 살아계시지 않나? (진우량의 아들 진리(陳理)가 공민왕 때 고려로 유배 보내졌다) 그쪽 사람들은 주원장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원한을 갚고자 함이니 굳이 누가 황제가 되고 말고로 서로 감정싸움을 할 필요는 없네.]


정견은 말을 멈추고 차를 한잔 들이켰다.


[게다가 이번 영웅대회의 명분은 수십 년간 공백으로 있는 교주를 추대하자는 것이니 쓸데없이 분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는 할 필요 없을 거네. 교주가 추대되어 사분오열된 백련교를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명나라와 한바탕 겨뤄 볼 만하지 않겠나?]


정견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


[지금 장 사형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면 영웅대회 자체가 무산될 것이 뻔하네. 그렇다고 사형의 죽음을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영웅대회를 중추절(仲秋節)쯤으로 연기하고, 그 사이 백련교 각 지부의 지부장들과 소명왕, 장사성 쪽 사람들을 설득하여 영웅대회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정견이 말을 마치자 송무영이 물었다.


[장 사백께서 안 계시는데 영웅대회를 열어 어쩌겠습니까? 장 사백 없이 우리 의도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이 아이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네.]


정견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좌중은 미심쩍은 눈으로 왕경을 쳐다봤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고 장 사백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해도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은 아이가 무공이 대단하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성질 급한 송무영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왕사제! 이번 영웅대회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네가 백련교의 교주가 되는 일이네. 원래는 장 사백께서 뒤를 봐주어 자네를 교주로 추대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자네 혼자 힘으로 차지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네. 반드시 교주 자리를 차지해야 해! 그것도 다른 파벌 사람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말일세!]


교주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사부가 한평생 노력해온 일들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왕경은 마음을 다잡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네! 반드시 교주 자리에 오르겠습니다.]


[그래 자네 말을 믿겠네!]


송무영은 왕경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왕경도 얼른 오른손을 내밀어 송무영의 손을 맞잡았다. 송무영은 왕경의 공력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오성의 공력을 돋우어 왕경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공력이 왕경의 장심에 닿자마자 한순간에 빨려 들어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일반적인 내공은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반탄지력이 생겨 서로 대응하다가 약한 쪽 공력이 사그라지면서 밀리기 마련인데 혼천공은 평소 단전을 비우고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으로 기를 흩트려 놓으니 외부의 공격을 받자 자연스레 전신경락으로 외부의 기를 흩어 버린 것이었다.


평소 무거운 철추를 무기로 사용하는 송무영은 완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기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자 몹시 당황하였다. 송무영은 더 이상 힘겨루기를 해봐야 왕경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힘을 거둬 들이려 했으나 이번엔 자신이 손이 왕경의 손에 달라붙어 뗄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난감해 하는 송무영을 보며 왕경은 빙긋 웃고 혼천공의 운행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손을 놓을 수 있었던 송무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 자네..]


왕경은 포권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왕경과 경공을 겨뤄 본 적이 있는 정견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어 빙긋 웃었다.


[어떤가? 내 안목이 틀림없지?]


[하하하. 자네 보통내기가 아니구먼!]


송무영은 성격이 급하긴 했지만 소탈한 사람이라 왕경의 내공 수위가 자신보다 월등히 높음을 깨닫고 허허 웃었다.


그중 정견을 제외하면 가장 내공 수위가 높은 구명관이 품 안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며 왕견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자네 사부가 내게 맡긴 유서라네.]


구명관 역시 왕견의 공력이 궁금하여 서찰에 내공을 실어 보냈다. 하지만 서찰이 왕견의 손에 닿자 자석에 끌리듯 자신의 내공이 쏟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명관은 깜짝 놀랐으나 송무영과 달리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띄우진 않았다.


서찰의 겉봉에는 왕경 친전(親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글씨가 둥글둥글하며 힘이 넘치는 것이 장원계의 친필이 맞았다.


왕경은 서찰을 사이에 두고 내공을 겨루다가 사부가 남긴 유서가 훼손될까 두려워 즉시 내공을 거두었다. 구명관은 손끝으로 빨려 나가던 내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내공을 싣기도 어렵지만, 내공을 겨루다 한순간에 거두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심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건데 왕경 저 녀석은 자유자재로 내공을 거둬드리는구나!)


구명관이 손을 놓고 물러나자 왕경은 즉시 유서를 뜯어 읽어 보았다.


-경이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면, 아마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오늘 밤 유정협을 만나러 갈 것이다. 유정협은 의심이 많은 자라 쉽게 설득하긴 어렵겠지만, 영악하고 계산이 빠르며 물욕 또한 많은 놈이기에 오히려 쉽게 넘어올 수도 있을 것 같구나.


만일 유정협이 내 말을 따른다면, 고려를 되찾고 명(明)을 멸하는 일은 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유정협이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지금 고려 땅에 계신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비밀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유정협을 제거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유정협이와 두 차례 겨뤄 봤으나 둘 다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늙고 유정협의 무공은 더욱 정순해졌을 것이니 아마 이번에 손을 쓴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따라서 유정협이 내 제안을 거절하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각오로 덤빌터이니 아마 둘 다 죽지 않을까 싶다.-


여기까지 읽은 왕경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부님은 애초에 유정협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셨구나!)


-경아 나는 한평생을 싸워 왔다. 어릴 때는 무공을 익히느라 세상의 즐거움을 몰랐고, 철이 들었을 무렵엔 백련교에 가입하여 몽고 놈들을 몰아내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몽고 놈들을 몰아낸 뒤에는 우리 폐하를 위해 한나라를 세우고 지키고자 모든 것을 바쳐왔다.


나는 한(漢)민족의 사내대장부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오던 때가 아니었다. 사부님께 무공을 배울 때도, 몽고 놈들과 싸울 때도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바로 너를 만나고 너에게 무공을 전수해주던 요 몇 년이었다.


아들과 제자들을 잃었기에 내 인생에 있어 남은 것이라고는 한나라의 재건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매달렸었지. 하지만 너를 만나고 너에게 무공과 학문을 전수해 주면서 조금씩 삶의 보람을 되찾았다. 경이 네가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모른다.-


왕경은 거기까지 읽고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장원계의 깊은 애정이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북돋아 올랐다.


(사부님!)


-내 너에게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살아보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더라. 무공을 성취해서 무림지존이 되어도 한목숨이요. 황제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고 살아도 한번 사는 것이 인생이구나. 너는 부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못난 사부처럼 대의(大義)를 세우니, 원수를 갚겠느니 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라. 열심히 노력은 하되, 안되면 부질없이 매달리지 말고 너의 행복을 찾아가라-


장원계는 오직 왕경의 행복만을 빌 뿐 마지막까지 본인의 손녀에 대한 부탁은 하지 않았다. 왕경의 성격상 굳이 구차하게 말하지 않아도 잘 돌봐 줄 것임을 알기에 따로 유서에 적지 않았던 것이다.


왕경은 장원계의 유서를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연경에 들어온 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버텼는데 결국은 참지 못하고 울부짖고 말았다.


[사부님! 사부님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제가 어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명나라를 멸하고 한을 세워 사부님의 비원을 이루겠습니다.!]


왕경은 내공을 끌어올려 방바닥을 후려쳤다. 쩍 소리가 나며 방바닥에 금이 가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어린놈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나!)


왕경은 바닥을 후려친 뒤 맹세했다.


[만일 내가 사부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바닥처럼 쪼개져 죽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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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1) 19.08.06 109 3 29쪽
22 22. 태호의 노인 (2) 19.08.05 95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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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 옥화장의 위기 19.08.01 108 3 22쪽
19 19. 이단의 무술 실력 19.07.31 120 3 18쪽
18 18. 남경으로 19.07.30 125 3 20쪽
17 17. 사해방 19.07.29 198 3 23쪽
16 16. 산중생활 19.07.26 144 2 14쪽
15 15. 야반도주 19.07.25 140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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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구출 19.07.22 171 2 21쪽
11 11. 습격 19.07.20 204 3 18쪽
10 10. 조천사(朝天使) +1 19.07.19 244 3 20쪽
9 9. 연경의 고려인들 +2 19.07.18 250 3 21쪽
» 8. 장원계의 죽음 19.07.17 238 3 18쪽
7 7. 연경으로 19.07.16 244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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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 만보산에서의 생활 +2 19.07.13 296 7 22쪽
4 4. 사부를 모시다. 19.07.12 329 4 20쪽
3 3. 추격자들 +2 19.07.11 297 7 23쪽
2 2. 두문동(杜門洞)의 참화(慘禍) 19.07.10 32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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