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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생 님의 서재입니다.

참룡기(斬龍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진효생
작품등록일 :
2019.07.09 15:26
최근연재일 :
2019.08.16 19:53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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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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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글자수 :
279,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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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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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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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1쪽

9. 연경의 고려인들

고려의 마지막 왕자 왕경의 일대기 입니다.




DUMMY

왕경이 맹세하는 것을 보고 송무영이 나섰다.


[그래 그 마음을 잊으면 안 되네. 장사백은 자네를 친아들 이상으로 아꼈어!]


이정산도 나서서 거든다.


[그래 먼저 백련교 교주 자리를 차지하고, 고려를 세운 뒤 명을 멸하세나!]


조용히 있던 안진이 한마디 한다.


[자네가 고려를 세우면 왕비는 화령이로 해야 하네. 그 이유는 첫째로 장사백의 은혜를 갚는 것이요. 둘째로는 우리 한나라 중신의 자손과 혼약을 함으로써 양가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것이네!]


안진은 속이 깊은 인물로 혼자 남은 장화령이 걱정되어 이참에 못을 박을 참이었다. 왕경 역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처를 맞이하게 된다면 장화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하고 있었다.


장화령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직 상(喪)중이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장화령의 말에 정견이 허허 웃는다.


[누가 지금 당장 혼례를 올리자고 하나? 우리 같은 무림인들은 사사로운 예법은 크게 신경 안 쓰니 지금 혼례 이야기가 나온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


[자자 혼례를 올리는 것은 큰 일들이 마무리된 뒤에야 가능한 것이니 먼저 영웅대회에 대해 논의를 해봅시다.]

 

연백수의 말에 정견이 주도하여 각자 일을 분담했다.


송무영과 이정산은 한나라 쪽 백련교도와 접촉하여 중추절로 영웅대회를 연기하고 그 준비를 하기로 했다. 소명왕 쪽 백련교도는 사람 됨이 차분하고 인망이 높은 구명관이 설득하기로 했다. 장사성과는 다들 크고 작게 싸운 적이 있어서 제일 배분이 높은 정견이 직접 설득하기로 했으며, 나머지는 연경에 머물며 명나라의 동태를 감시하기로 했다.


큰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왕경이 말했다.


[사형님들은 영웅대회 준비로 바쁘실 테니 저 혼자 유정협을 제거하러 가겠습니다.]


왕경이 당장에라도 유정협을 죽이러 나갈 듯한 모습을 보이자 정견이 달랬다.


[이보게 경이!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게나.]


[네 사숙.]


[장 사형의 원수를 갚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는 더 큰 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봤을 땐 장사형의 무공이나 유정협의 무공이나 별반 차이가 없네. 유정협이 뒤에서 암습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장사형이 유정협을 쉽게 제거하진 못했을 거야.]


장원계의 유서를 보고 왕경도 유정협의 무공이 어느 정도 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왕경이 조용히 듣고 있자 정견은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무공은 무척 뛰어나서 동 세대 인물 중 자네를 능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아직 유정협의 상대가 아니야.]


[음..]


[거기다 유정협은 광동성의 제독으로 수하에 수많은 군졸이 있고, 개인적으로 끌고 다니는 친병 중에는 고수들도 많이 있네. 그런데다 장사형에게 독수를 가했기에 우리가 복수하러 올 것이라 생각하여 경계를 잔뜩 하고 있을 터인데 자네 혼자 어떻게 유정협을 제거하겠나?]


[그러면 사부의 원수를 이대로 놓아 보내자는 이야기십니까? 연경에 있을 때 처치해야지 제독부로 돌아가고 나면 더욱 제거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연백수가 나서서 이야기했다.


[자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네. 하지만 작은 원한에 연연해 하다가 대업에 차질을 빚으면 안 되니 일단 이번엔 유정협을 놓아 보내세. 지금 유정협을 치려면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거야. 그랬다가 자칫 일이 잘못되면 백련교 연경지부가 괴멸될지도 모르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안진이 소리쳤다.


[차도살인!(借刀殺人)!]


진의 말에 송무영이 궁금하여 물었다.


[뭐가 차도살인이란 말이요? 누가 유정협을 대신 죽여준다고 합디까?]


[유정협은 명나라 황제더러 죽이라고 합시다.]


다들 안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구명관이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거 묘안일세! 역시 안 사제는 머리가 비상하구먼!]


구명관의 말에 안진이 빙긋 웃자 성질 급한 송무영이 답답한 듯 성화를 부린다.


[거참! 속 시원히 말을 해보시오. 둘이서만 실없이 웃지 말고!]


송무영의 채근에 안진이 설명했다.


[사람을 풀어 연경에다 소문을 냅시다. 장사백과 유정협이 내통하여 명나라에 반기를 든다고! 명 황제는 의심이 많은 인물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신(功臣)을 잡아 죽였소? 유정협은 원래 장 사백의 제자였으니 조금만 긁어 주면 알아서 제거할 것이오. 유정협이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반란이라도 일으켜주면 더 좋고!]


안진의 말에 왕경이 꺼림칙 한 듯 말했다.


[괜히 그런 소문을 퍼트렸다가 우리가 거사를 준비하는 것을 명 황제가 눈치채면 어떻게 합니까?]


[괜찮네! 우리와 명나라가 서로 적대시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아닌가? 지금도 각지에서 크고 작게 명나라 관군과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으니 알려진다 한들 크게 상관은 없을 거네.]


왕경의 속내를 눈치챈 정견이 왕경을 달랬다.


[이보게 경이 자네 속을 왜 모르겠나? 유정협을 직접 단죄(斷罪)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도 똑같네. 다만 일의 효율을 생각하면 안사질의 의견이 더 효과적이니 이번엔 우리의 뜻을 따르도록 하게나.]


왕경이 망설이자 연백수도 나서서 거든다.


[이보게. 주원장이 얼마나 잔인무도했는지 아나? 지금 황제도 주원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네. 아마 우리가 단칼에 죽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야.]


손 윗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니 결국 왕경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네. 사형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왕경이 유정협을 제거하러 가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릴까 봐 내심 걱정했던 장화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정산이 짓궂게 놀린다.


[왜? 서방이 유정협에게 당할까 봐 걱정했느냐?]


속내를 들킨 장화령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큰일을 앞두고 경 오라버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도 안 계신 마당에 오라버니까지 잘못되면 수십 년간 쌓아온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신중히 움직여야지요.]


장화령의 입에서 장원계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숙연해졌다.


송무영이 분위기를 바꾸고자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자. 각자 할 일이 정해졌으면 여기서 시간 죽일 것 없이 빨리 움직이자고!]


송무영의 말에 각자 길을 떠날 준비를 하러 돌아가니 은신처에는 정견과 구명관 그리고 왕경과 장화령만이 남게 되었다.


아직 어린 장화령이 걱정이 되어 정견이 말했다.


[화령아 강남에 내 지인의 장원이 있으니 그곳에 머물면서 기다리도록 해라. 마침 장사성의 옛 부하들도 강남에 은거하고 있으니 나와 같이 가면 되겠구나.]


[경 오라버니와 함께 가는 것인가요?]


장화령의 말에 왕경이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백련교 일을 배우려고 해. 시간이 되면 개성에도 한번 다녀오고. 백련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교주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긴 일이잖니?]


장화령은 왕경과 떨어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장화령은 젖먹이 시절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이리저리 유랑하고, 만보산에 은거하느라 또래 친구가 전혀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그러다 왕경과 함께 살게 되면서 요 몇 년간 조석(朝夕)으로 붙어 있으며 친오누이 이상의 정을 쌓았는데, 수개월간 떨어져 있으라니.. 더군다나 이제는 장원계도 없지 않은가? 


왕경은 장화령의 표정을 살피며 달랬다.


[누이! 교(敎)의 일만 익숙해지면 바로 누이를 데리러 갈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요.]


장화령은 왕경이 데리러 온다는 소리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간다는 뜻으로 들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장화령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알았어요. 항시 몸조심하시고, 감정이 앞서서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장화령의 말에 정견이 허허 웃는다.


[그래 그래 경이는 이곳에서 연사질이 잘 돌보아 줄 터이니 걱정말거라.]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구명관이 갑자기 생각난 듯 끼어들었다.


[참 왕사제! 자네는 나와 내일 가볼 곳이 있네. 자네가 오면 데려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구먼.]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근처에 고려촌이 있다네. 원나라 때 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정착해 사는 곳이지. 그곳 촌장과 잘 아는 사이니 내일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왕경은 고려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는데 그들은 아직 고려인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새 나라 조선에 충성을 바치며 조선인으로 살고 있을까? 왕경은 반가운 마음과 함께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왕경의 속내를 헤아린 구명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아직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하고 있네. 이성계 일당에게 충성을 바칠 거였으면 진작 조선으로 돌아갔겠지. 그곳 촌장은 이성계에게 고향을 빼앗겨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고 한탄하더군.]


왕경은 가슴 속 깊이 그리운 마음이 솟구쳐 올라 당장에라도 고려인 마을로 가보고 싶었다. 그런 왕경을 보고 구명관이 말했다.


[자자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점심쯤 가세나. 나도 소명왕 쪽 사람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해야 하니 내일 오전에 이곳으로 오겠네.]


구명관이 떠난 뒤 정견은 왕경과 장화령이 서로 할 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자리를 피해줬다.


왕경은 부쩍 수척해 보이는 장화령이 안쓰러워 말했다.


[누이 사부님이 돌아가셔서 힘들 텐데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오빠는 할 일이 있잖아요. 또 그게 할아버지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왕경은 장화령이 자신과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장화령을 다독였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한 일에 휘말릴지 모르니까 누이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는 것이 좋을 듯싶어]


[흠.. 혼천공을 완성했다고 나를 무시하는군요! 오라버니가 처음 만보산에 왔을 때는 나보다 무공이 한참 아래였던 것은 기억도 안 나시나 봐요?]


만보산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왕경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왜 기억이 안 나겠어? 그때 누이가 나를 참 많이 때렸었지!]


[누가 들으면 불쌍한 아이를 학대한 것처럼 들리겠네요! 무공 수련하다가 본인이 못해서 얻어맞은 걸 가지고는!]


[그럼 어릴 때 맞았던 복수를 해볼까?]


왕경은 왼손을 뻗어 장화령의 우측 맥문을 잡아나갔다. 공력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공격이어서 장화령은 쉽게 떨쳐낸 뒤 사패장(蛇覇掌)의 초식을 사용해서 왕경의 가슴을 쳤다.


왕경은 장화령의 장력이 가슴에 닿자 마치 장화령의 일장에 날아간 듯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뒤로 크게 뛰었다.


[으..누이의 장력이 매섭군.. 난 내상을 크게 입어 사부님의 유훈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니.. 쿨럭.. 누이도 나를 잊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사시오..]


왕경이 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말을 내뱉자 장난인 것을 알면서도 장화령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빠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이제 세상에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오빠밖에 없는데..]


장화령의 놀란 얼굴을 보자 왕경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신의 뺨을 때리며 자책했다.


[이 녀석! 장난이 지나쳐 누이를 놀라게 했구나! 혼내줘야겠군!]


왕경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한대 더 올려붙이려 하자 장화령이 잽싸게 팔을 붙잡는다.


[그만하세요. 얼굴에 상처 생길라]


왕경은 장화령의 어깨를 보듬으며 말했다.


[누이 강남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요. 이곳 일이 마무리되면 곧 데리러 가리다.]


[걱정 말고 몸조심하세요. 연경은 적진 한가운데이니 항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는 누이가 더 걱정이오. 강남에는 준수한 미남들이 많다고 하던데 내가 데리러 갔을 때 나 같은 우락부락한 사내는 잊고 멋진 풍류남아와 혼담이 오고 가는 것은 아닌지..]


왕경은 농담으로라도 우락부락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턱선이 곱고 몸매 또한 호리호리해서 문약한 서생으로 보였지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오빠가 미남이 아니라면 그 누구를 미남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장화령은 생각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흥! 그러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몸 성히 오라고요!]


[알았어. 내 두 번 세 번 조심하리다!]


둘은 늦은 밤까지 정담을 나누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 다음날 떠날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니 구명관이 찾아왔다. 정견과 장화령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기에 구명관이 도착하자 바로 강남으로 길을 떠났다.


[사숙님. 화령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오냐 걱정 말거라. 네 신부를 무사히 강남의 장원까지 호송해 줄 터이니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거라.]


신부 소리에 장화령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면 할아버지랑 말 안 할 거에요!]


정견에게 한마디 쏘아붙인 뒤 왕경에게도 당부의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도 몸조심하시고 일이 정리되는 대로 강남으로 와요. 강남은 참으로 놀기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 급한 일만 끝나면 나도 강남으로 가서 중추절까지 누이와 지내겠어!] 


왕경은 정견과 장화령을 떠나 보낸 뒤 구명관과 함께 고려인 마을로 출발했다. 고려인 마을은 연경의 동북쪽에 위치한 작은 촌락으로 고려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송나라 때부터 조금씩 고려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원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고려에서 왕자나 귀족의 자제들이 볼모로 오게 되어, 그 수가 많아지자 아예 고려인만 사는 정착촌이 생겼다. 이들은 고려 지배층의 후예이거나 그들과 함께 들어온 시종들로 조선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둘은 반 시진 정도를 달려 고려촌(高麗村)에 도착했다.


[이곳이 고려촌일세]


구명관의 말에 마을을 살펴보니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집들이 수십여 채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고려의 풍습대로 지어진 집을 보니 왕경은 왈칵 향수(鄕愁)가 밀려왔다.


구명관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 그중 가장 큰 집 앞에 서서 크게 외쳤다.


[이보시게 용수(容受) 내가 왔네!]


구명관이 소리를 지르자 안쪽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오셨소?]


대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덩치 좋은 중년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나왔다. 그의 이름은 박용수(朴容受)로 그의 증조부가 개경 인삼을 대도(당시 연경을 대도라 불렀다.)에 파는 무역을 하다가 이곳 고려촌에 정착하였다.


둘은 박용수가 개경에서 명나라로 인삼을 가져올 때 여진인 도적을 만나 크게 낭패 보던 것을 구명관이 지나가다 구해준 인연이 있어 그 후 구명관을 형님으로 모시며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오니 이러다 형님 얼굴도 못 알아보겠습니다. 하하.]


구명관을 반가이 맞이하던 박용수가 옆에 서 있는 왕경을 보고 말했다.


[이 청년은 누구입니까?]


[이 청년은 나의 사제이네. 이름은 왕경이라고 하고 고려 충선왕의 5대손일세]


구명관의 말에 박용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조선에서는 왕 씨를 모두 몰살 시켜 단 한 명의 왕 씨도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눈앞에 고려의 왕자가 나타났으니!


박용수는 잠시 의구심을 품었지만 구명관이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즉시 왕경 앞에 꿇어 엎드렸다.


[왕자마마를 뵈옵니다.]


마당에 꿇어 엎드린 박용수를 보고 왕경은 다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이러지 마시게! 망국의 왕자에게 너무 과한 예(禮)이네!]


[왕자마마 이곳 고려촌 주민들은 스스로를 고려의 백성이라고 하지 조선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성계에게 나라를 찬탈당한 뒤 분한 마음에 잠도 못 들었는데 이렇게 마마를 뵈오니 정말 꿈만 같사옵니다.]


박용수의 진심 어린 말에 왕경은 크게 감격했다.


[그대가 근본을 잊지 않고 있다니 정말 고맙구먼.]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구명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자 보는 눈이 많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우릴 이렇게 계속 세워둘 건가?]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형님, 왕자님 이리로 드시지요]


박용수의 안내로 둘은 안채로 들어갔다. 간단한 주안상을 마련한 뒤 상석에 왕경을 앉히려 하자 왕경이 극구 사양한다.


[사형이 앉으셔야죠]


[허허. 이 사람아! 용수가 자네에게 권하는 것이고, 중추절이 지나면 나 역시도 자네의 부하가 될 것인데 그냥 편하게 자네가 앉게나!]


둘이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구명관이 상석에 앉고 왕경은 옆에 자리했다.


왕경이 자리에 앉자 박용수는 다시 큰절을 올린 후 구명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은 이십 년 전 제 목숨을 구해주시고 이번엔 왕자님을 구해서 이곳까지 모셔다 주셨으니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허허 왕 사제를 이곳으로 안내한 것은 내가 맞지만,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나의 사백(師伯)이시네]


[형님의 사백을 찾아뵙고 꼭 감사를 표하게 해주십시오. 이곳 고려촌 사람들이 왕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할지..]


왕경은 장원계를 생각하자 슬픔이 가슴에서 복받쳐 올랐다.


[나를 구해주신 사부님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오.]


[아!]​


왕경과 구명관은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박용수는 장원계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직접 찾아뵈어야 하는데 나중에 묘라도 알려 주십시오. 저와 고려촌 사람들이 예를 갖추겠습니다.]


[신경 써줘서 고맙네. 후일 같이 한번 찾아뵈도록 하세.]


둘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구명관이 말했다.


[오늘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왕 사제를 소개하려는 것도 있지만, 앞으로의 일을 부탁하기 위함도 있네.]


[부탁이라니요. 명령을 내리십시오. 형님 명령은 무엇이든 듣겠습니다.]

 

박용수의 말에 구명관은 가볍게 웃었다.


[내가 그동안 자네에게 자세히 설명은 안 했네만 사실 나는 명나라의 반적(叛賊)일세!]


[반적이라니요? 형님이 무슨 역모라도 꾸몄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역모를 꾸몄었고, 지금도 역모를 꾸미고 있네.]


구명관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자신의 사부가 과거 한(漢)진영의 장군이었으며, 자신 또한 장원계를 따라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명나라와 수없이 싸워왔다는 것을 설명한 뒤 박용수의 눈치를 살폈다.


박용수는 구명관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형님 백련교도라면 혹시 홍건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명관은 과거 백련교중 일부가 고려를 침공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박용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해명을 했다.


[맞네! 백련교가 일부에선 홍건적으로 불린 적이 있지. 하지만 우리 한제국 백련교도들은 결코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네!]


사실 고려를 침공한 백련교는 소명왕 한림아의 아버지인 한산동(韓山童)이 이끄는 무리와 주원장이 이끄는 무리로 공민왕 8년과 공민왕 11년에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홍건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서경과 개경이 홍건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그들의 만행이 극에 달해 고려는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고려왕실은 복주(福州, 현재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하였고 20만의 군사를 모아 정세운, 이성계, 최영 이방실등의 무장으로 하여금 개경을 탈환하도록 시켰다. 이성계는 이 전투에서 홍건적 두목인 사유(沙劉)를 잡아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왕경은 구명관의 설명을 듣고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꺼림칙한 생각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고려를 약탈하지 않으셨구나!)


박용수 역시 구명관의 설명에 크게 안도하였다.


[다행입니다. 형님! 당시 우리 개경 사람들이 너무나 큰 피해를 봤기에 형님 역시 같은 무리였으면.. 하하]


[우리 진우량 황제께서는 백성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말라고 하셨네. 군율이 엄했기에 그런 날강도 같은 짓은 하지 않았네!]


당시 진우량은 근거지가 중국 내륙이어서 고려까지 노략질을 하러 갈 여력이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한나라 백련교들이 고려를 침공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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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0 관내위
    작성일
    19.07.22 14:54
    No. 1

    본문에 보면 "주원장이 얼마나 잔인무도 하였는지 아는가, 지금 황제도 주원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러면 지금 황제는 홍무제가 아니고 건문제인가요? 그러면 잔인무도하다는 말과는 안 맞고...그러면 영락제인가요? 영락제라면 조선은 태종 때로 아는데 그럼 연대가 좀 안 맞지 않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 진효생
    작성일
    19.07.23 10:42
    No. 2

    댓글 감사드립니다. 현재 설정은 영락제 ㅡ주체 , 시대입니다. 조선에서는 왕자의난이 끝난후 이방원이 즉위한 시점입니다. (왕경이 만보산에서 몇년 수련을 하는 동안 조선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13편에서 목자단이 생각하는 부분에서 현재 시점을 유추할 수 있는 대사가 나옵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를 가공하여 소설을 진행하다보니 연대를 맞추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제대로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관내위님 댓글에서 정말 보람을 느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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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 복건삼호(福建三虎) (1) 19.08.14 85 2 25쪽
28 28. 파양호 대전 19.08.13 83 2 26쪽
27 27. 흑묘파 (3) 19.08.12 100 2 21쪽
26 26. 흑묘파 (2) 19.08.09 101 2 21쪽
25 25. 흑묘파 (1) 19.08.08 103 3 21쪽
24 24.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2) 19.08.07 103 3 18쪽
23 23. 대하천명장(大夏天冥掌) (1) 19.08.06 109 3 29쪽
22 22. 태호의 노인 (2) 19.08.05 95 3 17쪽
21 21. 태호의 노인 (1) 19.08.02 105 3 18쪽
20 20. 옥화장의 위기 19.08.01 108 3 22쪽
19 19. 이단의 무술 실력 19.07.31 120 3 18쪽
18 18. 남경으로 19.07.30 125 3 20쪽
17 17. 사해방 19.07.29 198 3 23쪽
16 16. 산중생활 19.07.26 144 2 14쪽
15 15. 야반도주 19.07.25 140 3 13쪽
14 14. 연경을 떠나다. 19.07.24 156 3 20쪽
13 13. 모함 19.07.23 164 2 17쪽
12 12. 구출 19.07.22 170 2 21쪽
11 11. 습격 19.07.20 204 3 18쪽
10 10. 조천사(朝天使) +1 19.07.19 244 3 20쪽
» 9. 연경의 고려인들 +2 19.07.18 250 3 21쪽
8 8. 장원계의 죽음 19.07.17 237 3 18쪽
7 7. 연경으로 19.07.16 244 4 20쪽
6 6. 혼천공을 완성하다. 19.07.15 285 4 18쪽
5 5. 만보산에서의 생활 +2 19.07.13 295 7 22쪽
4 4. 사부를 모시다. 19.07.12 329 4 20쪽
3 3. 추격자들 +2 19.07.11 297 7 23쪽
2 2. 두문동(杜門洞)의 참화(慘禍) 19.07.10 32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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