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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물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동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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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회색물감
작품등록일 :
2010.10.23 22:38
최근연재일 :
2010.10.23 22:38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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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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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글자수 :
222,022

작성
10.08.3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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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공포]행복동 아파트(1.추락하는 사람들)-11

DUMMY

지애의 어머니는 커피와 쿠키를 가지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지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들이 지애를 그리워한다는 약간의 거짓말도 했다. 주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지애의 장래희망이 간호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연예인들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는지,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만약에, 만약에 내가 지금 지애의 어머니와 이렇듯이, 그 애와도 이런 대화를 나눴더라면...'

한순간 이런 생각이 주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사실, 지금까지 주희는 어떤 학생과도, 어떤 학부모와도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주희는 생각할수록 자신은 좋은 선생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주희는 얌전히 놓여있는 핸드백에 시선을 주었다. 게다가, 자신은 방금 전 도둑질까지 했다. 지애의 어머니가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때 좀 이상했던 것 같아요. 지애가 자꾸만 그랬거든요. 소음이 들린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지애의 엄마가 흘리듯이 말했다.

"소음이오?"

주희역시 흘리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며칠 새 소음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들'. 아마 '그들이 온다'고 했었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내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 가세요."

지애의 어머니가 앨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주희는 몇 번이나 배웅 나올 필요 없다고 들어가시라고 손사래를 쳤다. 결국 지애의 어머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희는 지애의 어머니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는 거의 15층에 가까워져 있었다.

'15층'

주희가 사는 곳도, 연지가 사는 곳도 15층이었다. 주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등을 돌려 층계로 걸어갔다.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지만...주희는 엘리베이터를 흘깃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주희는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주희는 집에 돌아와서 지애의 졸업앨범을 펼쳐들었다. 지애의 집에서 보았던 3학년 2반의 페이지를 펼쳤다. 주희는 단체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장에는 그룹사진이 나타났다. 그룹사진이라는 것은 서너 명이서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뜻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어깨동무를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손으로 하트모양을 그리면서 모여 있기도 했다.

주희는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란 정말 티가 난다니까. 어떻게 저렇게 유치할 수가. 주희의 웃음이 가셨다. 이번 장에도 여지없이 누군가의 얼굴이 오려져 있었다. 주희는 장을 넘겼다. 개인사진이 죽 이어졌다. 이번에도 한 아이의 얼굴이 동그랗게 오려져 있었다.

주희는 얼굴이 오려진 사진 밑에 있는 글씨를 읽었다.

"이현아."

주희는 잠시 얼굴이 없는 사진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이 아이만 이렇게 오려져 있을까? 주희는 거친 손길로 책장을 넘겼다. 그때 무언가 툭하는 소리와 함께 졸업앨범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희는 바닥에서 그것을 주워 올렸다. 평범한 공책이었다. 공책을 넘기자, 부드러운 필체의 글이 나타났다. 여자아이다운 필체라고 생각하면서 주희는 공책의 글을 읽었다.

"날씨 맑음...일기인가?"

주희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글을 읽어 내려 갈수록 주희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주희는 공책을 팽개치고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주희는 변기를 붙잡고 욕지기를 했다. 지애의 집에서 먹었던 귤 조각이 양변기의 수조 속으로 가라앉았다.

공책에 적혀 있는 건 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네 명이서 한 아이를 괴롭히는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 첫째 날은 단지 때리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점점 날이 지나갈수록 학대의 내용은 심해지고 있었다. 체육시간에 교복을 사정없이 찢어버리거나 죽은 쥐를 책상서랍에 집어넣은 일, 신발속에 압정을 집어넣은 일등을 지애는 담담한 필체로 적고 있었다.

심지어는 두 사람이서 현아를 잡고 뜸을 뜬다면서 담배빵(담뱃불로 살을 지지는 것을 뜻하는 은어)을 놓기도 했다.

"이번에는 침을 놓자."

이들 무리 중 은혜라는 아이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는 뜸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침이어야지, 안 그래?"

지애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고 적었다. 이제까지의 담담한 필체와 달리, 무척이나 들뜬 필체였다. 현아를 발가벗기고 핀을 박았다. 손등에서부터 겨드랑이, 유두, 다리 등등...약 이십여개의 침을 놓았다고 지애는 자랑스럽게 적었다.

주희는 미친 듯이 욕지기를 했다. 토사물속에서 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디 신 신물만이 넘어올 뿐이었다.

지애와 연지처럼 얌전한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자기 또래 소녀를 고문하고 자살할 때까지 괴롭힐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필체로 일기에 적어놓을 수 있을까? 주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 말만이 입가를 맴돌았다.

한차례의 토악질을 한 뒤에야 주희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방바닥에 눌어 붙어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 자기 방으로 가는 걸음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다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학원에 가는 모양이었다. 주희는 안방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30분. 학원에 갈 시간이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정중한 목소리가 호주머니에서 울려 퍼졌다. 주희는 지친 손길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엄마, 오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느라고 좀 늦어. 저녁은 먹고 갈테니 걱정마."

딸이었다. 도서관이라고 했지만, 딸이 공부를 할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애인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일찍 오라고 메일을 보낼까 생각했지만 주희는 그만두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남편이 이틀간 집을 비우고 있는데도, 자식들 중 누구도 그걸 묻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만약에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똑같을 것 같았다. 주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희는 잠에 빠져들었다.


주희는 자신의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다. 아파트앞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은 성냥갑보다 더 작아보였다. 아직 새벽이라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희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주희의 눈에 체크무늬 치마가 보였다. 가슴에 달린 "이현아"라는 명찰도 보였다. 주희는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주희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못하겠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약하고 여린 목소리였다. 주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하겠단 말이야."

주희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주희의 뺨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주희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난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는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다들 날 괴롭히는 거야?"

대체 왜? 왜? 인생이라는 교수대에 매달려있는 기분이었다. 목에는 밧줄이 걸려 있고 발판은 없었다. 발밑에는 깊은 어둠만이 있었다. 목에 밧줄을 매단 채 허우적거리다가 어둠속으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죠?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알려주세요.

하지만 제게 잘못이 없다면,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주희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대상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켜보기만 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시선도 무서웠다. 과연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이대로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를 따라서 주일마다 나가는 교회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잠깐만. 나는 교회에 나간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 나는 기독교도도 아니라고. 굳이 종교가 있다면, 무속정도가 되겠지. 그렇다고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한다는 건 아니야. 새로 이사를 간 동네에 떡을 돌리고, 새차를 사면 북어와 막거리앞에 절을 하고, 장례식장에서 다녀오면 소금을 뿌리는 정도지.'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만 주십니다."

그렇지만 목사의 말은 틀렸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도 존재한다. 마른하늘의 날벼락. 그렇게나 선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벼락을 맞고 죽는 일도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죽을 만큼 심한 죄를 지었던가? 아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어느 해인가는 동남아의 휴양지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기도했다. 그 사람들이 대체 무슨 죄인가. 사망자들은 그저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려던 가족단위의 관광객들과 선량한 현지인들이었을 뿐이었다. 좋은 풍광이라고 셔터를 눌러댄 게 죄인가?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인력거에 관광객들을 태운 게 죄인가?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도 내려진다. 그런 고통에 처한 사람이 신과 세상을 모욕한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글쎄,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욥인 건 아니니까.

'욥? 욥이 누군데?'

"제발 제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주세요."

주희는 흐느껴 울었다. 그때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주희를 잡아 올렸다. 주희는 눈을 크게 치떴다. 주희는 믿을 수 없었다.

"그들. 그들이야."

주희가 한 마지막말이었다. 그것 혹은 그들은 주희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내던졌다. 주희의 몸은 옥상 난간을 넘어 날아갔다. 곧 찢어지는 듯한 바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니, 바람소리가 아니라 물소리였다. 그것도 세찬 물소리였다.

그 순간, 주희는 알아차렸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허공을 날아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현아"라는 어느 여학생이라는 것을.


따르릉. 자명종 소리가 시끄럽게 방안을 울렸다. 주희는 식은땀이 배인 이불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희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나갈 수 없다고 전했다. 전화를 끊고 주희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곧 주희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주희는 연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주희는 세차게 초인종을 울렸다. 문이 열렸다. 문에 건 걸쇠는 여전했다. 연지는 경계어린 눈초리로 주희를 올려다보았다. 주희는 웃는 낯으로 연지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학교에 나가지 않을 모양인가 보구나."

"죄송해요, 선생님. 오늘 몸이 좋지 않아요."

"부모님은? 부모님을 만나야겠다."

주희는 다소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계세요."

연지는 그 말을 하고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했다. 쾅하고 닫히는 소리대신, 퍽하는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연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앨범이었다. 졸업앨범이 문틈 사이에 끼어 있었다. 주희였다. 주희가 문이 닫히려는 찰나 졸업앨범을 밀어넣은 것이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연지의 화난 얼굴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오늘은 몸이 아프다고 못가겠다고 했잖아요?"

연지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얘기만 나누려는 거란다."

주희는 담뿍 미소를 지었다. 문틈에는 여전히 앨범이 끼워져 있었다.

"이현아."

주희가 이 이름을 내뱉자 연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지애가 남긴거란다. 한번 펴보겠니?"

연지는 천천히 앨범을 펴보았다. 앨범을 펼치자 공책이 한권 책갈피 속에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에요?"

"일기장이란다."

연지는 주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희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전의 것과는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싸늘하고 엄격해보였다. 연지는 공책을 펼쳤다. 몇장 읽기 무섭게 연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공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너희들 정말 대단하구나."

주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셨다. 연지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어, 어어어, 언제 제 뒷조사를 하신 거예요? 정말 웃기네요.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연지는 화난 듯이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겁을 먹고 있었다. 주희의 얼굴에 날카로운 예기가 어렸다. 주희는 문손잡이를 잡고 낮으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협박이라고?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야. 당장 문 열지 못하겠니? 경찰을 부르기 전에!"

주희는 연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뒤에 말을 덧붙였다.

"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웃는 얼굴로 하는 게 아니라. 알겠니? 자, 얘기 좀 해볼까?"

주희는 싱긋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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