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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동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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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회색물감
작품등록일 :
2010.10.23 22:38
최근연재일 :
2010.10.23 22:38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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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17
추천수 :
276
글자수 :
222,022

작성
10.08.30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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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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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3쪽

[공포]행복동 아파트(1.추락하는 사람들)-9

DUMMY

준철은 딸애를 방에 눕히고는 마루로 나왔다. 아내 구영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준철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연기라면 질색팔색하던 아내도 이날만큼은 잠잠했다.

"후유."

준철은 담배연기를 한숨과 함께 내뿜었다.

"아까 연지가 한 말 어떻게 생각해?"

구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애잖아. 죄책감 때문에 그런 망상을 한 거야. 죽은 귀신이 나와서 사람을 해친다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

그것도 싸구려 삼류영화. 요새 영화에서는 귀신을 즐겨 다루지 않는다. 귀신보다는 산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는 영화에서는 연쇄살인마가 활약하고 있다. 준철은 다시 한 번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준철은 조심스럽게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내 생각에는 연지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치료라니?"

"왜 심리 치료 같은 거 있잖아."

준철은 구영의 옆에 털썩 내려앉았다.

"저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아. 생각해봐. 며칠 전에는 어느 여대생이 자살하는 광경까지 봤잖아? 충격이 컸을 거야. 게다가 친구들도 연달아 죽었지. 모두 죽기 전에 연지에게 전화를 했다며?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당신은 우리 애가 미쳤다는 거야?"

구영은 사나운 시선으로 준철을 노려보았다.

"응? 그런 거냐고? 그래서 정신병원에 보내려는 거냐고!"

"쉿. 조용히 해. 애 깨겠어."

준철은 연지의 방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정신병원에 보내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내 말은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아보자는 거지."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구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구영은 '심리치료사'라는 세련된 명칭에 속지 않았다. 아무리 돌려 말해도 결국에는 연지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구영은 그런 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해! 우리 딸이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어?"

"당신만 부모야? 나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정신병원에 보낼 필요는 없어. 그냥 통원치료만 하면 될 거야. 그곳에서 의사와 상담하고...."

"당신은 연지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당신 딸인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안 그래? 당신은 연지가 태어날 때도 다른 여자와 놀아났잖아!"

구영의 말에 준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구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연지를 가졌을 때, 준철은 일시적으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일이 있었다. 흔한 일이었다. 아내는 임신 중이지, 섹스는 하고 싶지, 준철보고 어쩌란 말인가? 포르노 비디오나 수음은 준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매춘부를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준철은 그러지 않았다.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정도면 자상한 남편 아닌가? 준철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준철은 아내가 임신 8개월이던 무렵에 직장에서 알고 지내던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다. 여자는 소위 "노는 여자"였다. 남자보다 섹스가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올리는 여자였다.

불행히도 준철이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구영에게 모든 일을 들키고 말았다. 구영은 준철에게 이혼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준철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이 끝내 이혼하지 못한 것은 갓 태어난 연지 때문이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산부인과 병실. 구영은 준철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 눈빛에서 준철은 알 수 있었다. 구영이 이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끝까지 준철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겠지. 듣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어쩌지? 난 하고 싶은걸.

당신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봐. 당신은 연지가 태어나지 않길 바란 거지? 응? 연지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 여자랑 살림을 차렸을 텐데. 정말 아쉬워서 어쩌나."

구영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제발, 여보...."

준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 동안, 구영은 툭하면 이 이야기를 꺼냈다. 준철은 그간 구영의 입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화를 내보기도 했고,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리기도 했으며, 잘못했다고 빌어보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준철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구영은 광분해서 날뛰었다. 칼로 자해를 하기도 하고, 집안에 있는 그릇을 모두 깨부수기도 했다. 준철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구영을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지를 정신병원에 보내서 없앨 생각이지? 그러고 나서 이혼도장을 찍을 생각인 거지?"

"여보, 그 여자와는 헤어진 지 벌서 20여년이 다 되어가. 게다가 그 여자는 헤픈 여자였다고.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와 잤을 거야. 그렇게 진지한 관계도 아니었다고."

이런 말이 씨가 먹힐 리 없었다. 준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영은 길길이 날뛰었다.

"헤픈 여자?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중요한 건 당신이 그 여자와 잤다는 거야!

그것도 내가 임신을 했을 때! 무거운 배 때문에 걸어 다니지도 못할 때, 발이 퉁퉁 붓고 변비로 고생할 때, 곧 있을 산통으로 두려워서 어쩔 줄 몰랐을 때, 내가 밤에 목이 말라 눈을 떴을 때, 그 때 당신은 내 옆에 있지 않고 그 여자에게 갔어! 그 여자와 웃으면서 잤어!

내가 그 일을 잊을 것 같아? 내가 그 일을 용서할 것 같아? 천만에. 난 죽을 때까지 이야기할 거야. 당신이 임종하게 될 때도 그 귀에다 대고 속삭여줄 거야. 내가 먼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계속 이야기할 거야.

연지는 내 딸이야! 당신 마음먹은 대로 되게 내버려둘 것 같아?"

"나, 난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야."

준철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준철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준철은 미친 듯이 날뛰는 아내가 무서웠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할 때마다 오싹해졌다.

"알았어. 미안해. 다시는 꺼내지 않을게."

준철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준철이 이 말을 꺼낸 뒤에야 아내는 잠잠해졌다. 구영은 거의 탈진한 모습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준철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몇 대 태운 후, 안방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준철은 몰랐다. 마루에 불이 꺼질 때, 스르르 연지가 걸어 나왔다는 것을. 연지는 분명히 침대에 들었었다. 구영이 날카롭게 소리쳤을 때, 정신병원에는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말할 때, 연지는 눈을 떴다. 연지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문가로 다가갔다. 연지는 문에 귀를 대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끝까지 모두 들었다. 연지는 준철이 힘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일단 이렇게 마무리 지어진 모양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다. 연지는 두려워졌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설득할 지도 몰랐다. 분노한 어머니를 달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통원치료라고 했지만, 연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정신병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감금"이었으니까.

감금되면....연지는 영화에서 정신병자들이 입는 압박복을 떠올렸다. 감금되면 그런 옷을 입을 지도 몰랐다. 연지가 압박복을 입고 감금된 상태에서 그들이 찾아오게 된다면...연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연지는 어둠속에서 부모님이 잠든 안방을 노려보았다. 무슨 수를 써야했다. 다시는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연지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문을 열자 먹다 남은 김치찌개가 든 냄비가 보였다. 연지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연지는 약병을 품에서 꺼냈다. 어머니가 가끔씩 잠이 오지 않을 때 먹는 수면제였다. 하얀 분말이 찌개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세 사람은 평상시처럼 김치찌개를 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준철과 구영은 김치찌개를 먹었다. 두 사람은 몇 숟갈 먹기 무섭게 식탁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연지는 싸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준철을 의자에서 끌어냈다. 준철은 굉장히 무거웠다. 연지는 낑낑대면서 준철과 구영을 차례차례 마루로 끌어냈다. 그런 다음 연지는 김치찌개를 버리고 차분하게 아침을 들었다.


준철과 구영이 눈을 떴을 때 연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준철은 일어서려다가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준철은 자신과 아내가 긴 의자의 다리에 꽁꽁 묶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내가 백화점에서 르네상스풍이라는 글자에 혹해서 산 긴 의자였다. 특히 다리부근에 정교한 아라베스크무늬가 세공되어 있었다. 준철은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투덜거렸지만, 아내는 이 긴 의자를 자랑스러워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꼭 "이게 그 르네상스풍 의자에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 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준철은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의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준철은 이 의자를 맨 처음 들여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장정 서너 명이 낑낑대면서 옮겼다. 이제 마흔을 넘긴 자신이 의자를 움직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어머,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연지가 환하게 웃으면서 준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너무나 정중한 그 어투에 준철은 소름이 끼쳤다.

"너, 너...이게 무슨 짓이냐?"

준철은 간신히 힘들여서 말했다.

"우음...."

구영도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구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묶여있는 것을 보고 꽥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야? 뭐냐고?"

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연지는 곧 인상을 바로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 아침에 먹은 김치찌개에 약을 탔어요. 어머니가 가끔씩 잠이 안 올 때 먹는 그 수면제 말이에요. 정말 효과 좋던데요."

"너,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어?"

구영은 빽 소리 질렀다.

"네, 네. 잘 알아요, 어머니. 그러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되요."

연지는 리모컨의 볼륨을 높였다. 연지는 소파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준철은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자신의 딸이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내 딸 연지가 아니다. 어쩌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괴물이다. 준철은 뼈저리게 그 사실을 느꼈다.

"우,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니?"

"왜요. 겁나세요?"

연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요?"

하하하. 연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요? 시체 두 구를 이 15층 꼭대기에서 어떻게 운반한다고..."

준철은 덜덜덜 이빨을 떨었다. 연지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두 아버지 때문이에요. 날 병원에 보내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 다 너를 위해서 한 소리였어. 절대로 나쁜 뜻에서 한 소리는 아니야."

"닥쳐!"

연지는 차갑게 말했다. 꾹꾹꾹. 연지는 리모컨의 볼륨버튼을 계속해서 눌러댔다.

"김 기사~"

"네, 사모님."

"내가 사장님을 어디서 만났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요."

"사장님이 우리 아버지야~~"

"와하하하하."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개그 프로는 준철과 구영이 즐겨보던 것이었다. 항상 이시간만 되면 나란히 앉아서 보곤 했다. 아무리 싸우고 다투더라도 꼭 이시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 때문이라고! 날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아버지 뜻대로 될 것 같아! 내가 죽게 내버려두려는 거죠? '그들'이 날 찾아내게 하려고, 나도 '그들'처럼 만들려고!"

"아, 아니야."

준철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연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다음순간 연지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하기로 해요. 학원에 가야하니까."

연지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지야, 연지야, 어서 풀어줘. 풀어달란 말이야."

구영이 연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연지는 구영이 하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학원 가방을 챙겨들고 거실로 나섰다.

"미안해요, 어머니. 하지만 지금은 학원 갈 시간이에요. 내가 가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 한다고요. 그건 곤란하죠."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으아아아아악!"

그 뒤로 구영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텔레비전도 그에 못지않게 큰 소리로 CM송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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