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27 베일 속 여인, 왕마담
“뭐야?”
“뭐가요?”
피식.
“너 지은 죄가 있을 때면 동그랗게 입을 모으잖아! 지금처럼. 딴 수작 부릴 생각 말고 다 불어. 나중에 정말로 혼난다.”
‘에그.. 내 주제에 저 인간 앞에서 잔꾀를 늘어놔야 뭔 소용이랴.. 그냥 확 불자.“
그와의 수 싸움은 제갈량과 조조를 합쳐 놓은 어벤저스와 힘만 쓰는 여포가 상대하는 꼴이니 이쯤에서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
“솔직히 다 풀어놓을 건데 말릴 생각은 말아요. 나도 오기가 있는 뇨~자라구요.”
“일단 풀어. 판단은 내가 해.”
“으이그.. 독불장군!”
불법이 난무하는 내 작전을 듣는 순간 기겁할 그의 표정을 상상하니 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웃음부터 나왔다.
그간 내가 저 인간한테 단련이 되긴 됐나보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도 피식 나오고.
“잘 들으세요. 웰컴투 IP 월드! 크크큽”
내 장난기 어린 표정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젠 그런 모습에 오금이 저린 게 아니라 다음 전개도 예측 가능했다.
크크큽.
’크크. 나 미쳤나 봐. 자꾸 웃음이 쏟아지네.‘
그런 내 모습에 무리의 수장인 용맹한 수사자와 같은 날카롭고 완고한 그의 눈매가 일자가 됐다.
내가 그의 화를 돋우고 있으며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가느다란 눈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는 그의 속내를 간파할 수 없는 눈빛이 어른거렸다.
가끔 상대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인형 눈알 같은 건조한 눈빛.
’에그. 이쯤에서 자숙!‘
“흐음.. 시작할게요.”
대화 시작 전 잠시 그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지만, 여전히 그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묘한 눈빛이었다.
’포기. 저 사람 의중을 간파할 수 있는 내공이 내게 장착됐을 리 없지.‘
“우선 제 미션 수행이 불법이란 건 이미 눈치챈 거죠? 법적인 증거 자료로 사용할 순 없겠지만 그 재수똥 검사의 동향 파악은 가능해요. 방법은 묻지 말아요. 몸으로 때우는 위험한 시도도 아니에요. 난 몸으로 위험에 노출될만한 깜도 안 되는 사람이잖아요.”
분명 한 소리 들을 거란 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적이 방안에 흐른 지 3, 4분 된 것 같은데 영겁의 시간처럼 길고 지루했다.
큰 호흡과 함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 걸리고.. 잘 버텨낼 자신은 있어?”
“네에?”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개깜놀! 이런 상황을 두고 개놀람이라고 하는 거겠지?!!
크게 혼나며 한소리 들을 것이란 예측을 한 나는 철벽 방어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만 맥이 풀리며 당혹스러웠다.
“안 걸릴 자신이야 있죠. 그 방법이라는 게 나 같은 전문가도 아니고 컴 지식만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인터넷에서 버젓이 해킹하는 방법도 가르쳐주는데, 뭐..”
“꼬리가 길고 실력 없는 놈들은 언젠가 걸리겠지만, 넌 안 걸릴 자신 있는 거 맞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말린다고 고집 꺾을 것 같지 않아 봐주는 거야.”
그래도 머릿속이 제 고집과 곤조로만 가득 찬 꼰대는 아닌 남자다. 그게 왜케 또 멋져 보이던지..
‘참 가지가지 한다. 강보람..’
어쨌든 다행이었다. 내 편이 동지가 하나 늘어난 셈이니까. 물론 그는 반쪽 동지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왕마담 제인 뒤는 캐고 다니지마.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내게 맡겨. 그 여잔.”
“그렇게 무서운 여잔가요?”
“그래. 그냥 네 머릿속에서 그 여자 관련 사항은 전원을 꺼. 관심 갖지도 말고.”
‘글세.. 그게 가능할른지 모르겠네..’
일단 대답은 고분고분 예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앞으로의 행보가 평탄할 수 있을 테니.
“알았어요.”
더욱 가늘어진 눈매에 파묻힌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날 믿는 것인지 믿지 못하는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배제된, 아무런 느낌이 없는 맛 간 고등어 눈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살기와는 다른 영민한 빛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지닌 무서운 인간이다.
내가 저런 인간과 한동안 연애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다른 포스를 지닌 내 마음속 무리의 수장, 심바.
그는 그런 믿음직스럽고 겉보기에도 거칠고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다. 해서 내 남자 별무리만큼이나 자신의 조직 내부에서, 외부에서 적이 많은 외톨이, 고독한 아싸다.
비록 능력이 한참 부족한 조력자이지만 난 이제 그와 한배를 탄 동지가 되려고 한다.
어떤 풍랑과 비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눈앞의 내 전 남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한배를 타도 될만한 듬직한 심바다. 우리의 수장. 무조건 믿고 따를 수 있는 대장님이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봐?”
“아.. 그냥..”
피식
‘왜겠어? 이 아재야! 멋있어서 그러지!’
현 남친이 별무리라고 해서 다른 남자를 멋있어하지 말라는 현행 법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맘껏 반할 예정이다. 편하게 고기 먹던 사이인 저 오지게 무뚝뚝한 남자에게. 크큽.
그때 머릿속에 노란 전구가 두둥 떠올랐다.
“참! 혹시 오 박사님 아는 사이예요? 범죄 심리 분석관이신..”
그는 머뭇거림 없이 즉각 대답했다.
“알아. 대학교 후배야. 같은 동아리를 한 적 있어서 지금도 가끔 안부 연락와.”
‘오호라.. 그런 인연이 있었구나.’
그는 쉴드라도 치듯 다음 질문에는 철벽을 치는 낌새였다.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고 뭔진 정확한 감은 안 잡혔지만 들쑤시고 싶어졌다.
“저기 혹시?..”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에엥? 갑자기?”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왕마담 뒤는 캐고 다니지 말라고 못 박았다!”
그런 협박이 날 더 지극했고 잠잠했던 내 세포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대체 왜 저렇게 강조 또 강조하는 걸까?’
지나침은 늘 의구심을 불러온다.
그 여자를 둘러싼 진실이 무엇이길래 저렇게까지 내가 들춰내려는 걸 꺼려하는 걸까?
내가 상상도 못 한 판도라 상자 위에 그녀가 앉아 있는 걸까?
그게 뭘까?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 걸까?
호기심은 의구심이 되고 의구심은 강렬한 탐사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자석처럼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클럽 메두사의 안주인, 왕마담 제인.
과연 당신의 정체는 뭘까?
필시 단순한 클럽의 안주인만은 아닐 거라는 작두 탄 내 촉이 꿈틀거렸다.
‘분명 뭔가가 더 있는 거야?’
그런 내 눈빛을 읽은 것일까? 내 전 남자는 날 믿지 못하고 다시 한번 다짐을 받으려했다.
“너 눈알 굴리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왕마담 캐고 다니지마. 그러다 다쳐. 그건 컴 앞에 앉아 해킹하는 거하곤 차원이 다른 문제야. 알아 들었지?”
“네.”
‘문 아재야.. 알아는 들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구미가 당기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정말 어쩌면 좋으냐? 갑자기 입맛이 확 돌며 무지하게 그 여자를 뒤지고 싶어졌다.
문 검사야.. 당신 때문에 그 여자의 속옷 취향까지 낱낱이 캐내고 싶어졌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마음이 급해졌다. 할 일이 태산처럼 켜켜이 쌓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 여자의 양파 껍질을 한 겹씩 벗기려면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김 형사가 좋아하는 숯불갈비 사먹이며 김 형사에게서 슬쩍 그녀 관련 첩보를 캐봐야겠다.
그 덩치가 갈비라면 사족을 못 쓰니 먹는데 정신 팔려 내 질문의 의도 등을 의심할 위인은 아니지.
술 한 잔 걸친 그와 나는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헤어졌다.
당장 김 형사에게 수작질을 걸었다.
“네. 내일 뵐게요. 갈비 양껏 드셔도 돼요. 요즘 잠도 부족하다면서요.”
그 말은 수작질이 아닌 진심이었다. 요즘 오빠 관련 수사로 그는 며칠째 잠복근무 중이었다.
“오빠 때문에 저리 개고생인데 무한 갈비라도 사 먹여야지.”
벌써 붉은 노을이 거리를 덮칠 시각이라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나도 이젠 밤에 무지하게 바쁜 여자가 됐다.
“서두르자. 왕마담이 출근하기 전 자리를 잡고 오늘부턴 더 세심히 살펴봐야지.”
그간 건성으로 관찰해 왔다. 지금부턴 세세한 부분까지 면밀하게 현미경 관찰을 할 셈이다. 그녀의 속옷 색깔까지 알아내는 순간까지.
디링
조민이었다.
-- 오늘 나 조금 늦을 거예요.
-- 네. 알아서 잘 하고 있을게요.
조민도 이미 장기 투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우린 어쩌다 보니 별 거부감이나 진지한 상의도 없이 룸메이트가 되어있었다.
오늘은 왕마담 심층 탐사 건으로 다른 데 정신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었다.
“왕마담이 도착할 시간인데. 그렇취!”
그녀의 럭셔리한 비엠이 물결 위를 달리듯 미끄러지며 아방궁 뒷문 앞에 정차했다.
“늘 같은 놈이었어.”
그녀의 운전기사는 매일 동일 인물이었다.
“저놈이 저 여자의 호위무사 겸 비서실장인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