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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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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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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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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69화. 진의(眞意) (3)

DUMMY

설총은 득구가 아니라 성채의 눈을 보려 애를 썼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검을 뽑아 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감히··· 내 꿈을 모독해? 이 노비 새끼가!”

“여보쇼, 도련님. 한현보가 무슨 도련님의 꿈을 이뤄주려고 있습니까? 한현보는 도련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뭐, 꿈의 나라라도 된답니까? 무슨 개똥 같은 소릴 하고 자빠지고 계세요?”

“너는···!”


득구는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었다. 이 지경에 와서 웃어? 이 새끼가 정말 돌았나?


“이 씨발, 거 진짜 적당히 좀 하십쇼. 뭐 노비 새끼는 옘병, 저잣거리 똥개 새끼, 아니 뭐, 어물전에 널어 논 생선 대가리 위를 윙윙 날아댕기는 똥파리만도 못한 목숨이랍니까? 높으신 양반네들이 야, 오늘 내 기분이 좀 꿀꿀 하니 너 와서 좀 이케 대굴빡 좀 내밀어 봐라. 니 대가리 좀 깨게. 이럼 어이쿠, 어서 내 대가리 깨십셔, 하고 내밀어야 맞는 겁니까?”

“···뭐라?”

“아니 씨바, 외원의 무사들은 뭐 내당에서 수련하시는 도련님네들 장난감예요? 왜 지가 못 해서 수련하다가 처맞은 걸 왜 무사 아저씨들한테 풀어요? 니미, 송 여사가 밥해주는 아지매지, 뭐 욕 받으러 온 아지매예요? 왜 씨이발, 밥 차릴 때마다 사람이 울 때까지 온갖 쌍욕에 모욕을 들어 처먹어야 하는 건데요?”


숨을 씩씩, 몰아쉬던 득구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그 눈은 마치 칼날 같았다.


“그래, 썅. 좆같지만 우린 뭐 겁나 미천한 버러지 새끼들이라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아가씨는 뭔 죄예요? 말 못 하는 죄? 그 염병할 개새끼가 무슨 짓을 했냐고요?”

“···.”

“거, 아가씨한테 귀한 감자 하나 줄 테니 어디 좀 가자고 합디다. 나한테도 좀 달라고 했더니 노비 새끼 먹일 감자는 없다 그러는데, 뭔가 기분이 얄딱구리 하데요? 그래서 몰래 뒤를 좀 밟았는데 씨발, 아니나 다를까 그 개새끼가 아가씨를 겁나 때리더라고요?”

“···성채를 때렸다?”

“이윤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십셔. 씨이이발,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개새끼 그거 바짓단 끌러 놓고 꼬추도 덜렁덜렁 내밀고 있던데. 오짐이라도 매렸나. 아, 맞다! 썅, 그 새끼 그거 정갱이가 아니라 꼬추를 기냥 물어뜯어서 아주 고자 새끼를 맹글어 버렸어야 했는데.”


쩍!


설총의 머리에 박이 하나 들어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선명한 박 터지는 들릴 수가 없다. 이제 고작 예닐곱 살인 득구는 홍위윤의 행동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열두 살인 설총은 달랐다. 설총은 득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 득구가 본 상황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채아는··· 채아가 몇 살이었지?’


설총의 눈이 성채를 향했다. 득구의 어깨를 붙잡고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윗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어린아이. 아니, 또래보다 더 가냘픈 아이이니, 이제 갓 젖 뗀 아이로 보일 정도다.


‘채아가··· 벙어리라서?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게···. 그게 무슨···?’


그 뒤로도 득구가 뭐라뭐라, 떠들어댔지만, 설총은 녀석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저 어린 것을 뭘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 애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저 어린 성채를···?


한참이나 멍한 채로 성채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던 설총이 제정신을 차릴 즘이었다.


“말 못 하는 애도 지 꼴리는 대로 막 때리고, 기분 좀 나쁘다고 썅, 저보다 못한 사람을 개, 돼지 취급해가면서 짓밟는 그런 육시랄 개새끼들 똥꼬나 핥아가면서 천하제일이 되시겠다고요? 씨이이이바, 거, 꿈 한 번 오지게 대단하십니다!”

“···.”

“그렇게 해서 천하제일 되면 조오온나 신나겠습니다. 아주 난리 나겄네, 지랄 난장 나겄어.”


이렇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아 본 적이 언제였던가? 설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금까지 설총의 인생은 당연하게 모두의 동의를 얻는 삶이었다. 이렇게 통렬한 비판 같은 건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러면 썅, 도련님이랑 그 개새끼들이랑 다를 게 뭡니까? 예? 뭐가 다르냐고요!”


쾅!


기어코 이 노비 놈이 일을 내버린 모양이다. 설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자부심이다. 아니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존감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아니,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셋 모두 스스로(自)에게서 비롯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설총이 한현보에, 무심결에, 무신경과 거기 기재된 각종 무공과 병법, 그리고 시우십결(時雨十結)에 품고 있는 기대와 꿈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천검’이라는 천하제일의 검객을 사사한 후계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래, 긍지였다.


‘그런 내가··· 채아를, 이 어린아이를··· 이런 아이를 겁탈하려는··· 그런 불온한 생각을 품은 놈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아버지 하남제현은 강호에서 무인으로서 존경받지는 못할지언정, 인품과 성정으로는 명망이 높은 사람이다. 천하디천한 노비에게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외야 있지만, 어떤 상황이든 품위와 예절을 잃지 않는 인격자다.


아니, 설총은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의 명예는 아버지의 것이고, 설총은 설총이다.

그럼, 한설총이란 인물은 어떤가?


무(武)에 대한 자세는 아버지 하남제현보다 한결 올곧다. 제자들도, 한현보의 하인들도 설총을 싫어하는 이가 없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공평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그럼, 그들이 설총에게 보이는 신뢰와 덕망, 평판이 설총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가?


‘그야 당연하다! 그래,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내가 도대체 이 노비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나는··· 한현보의 모두를 위해···!’


설총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한 쌍의 시선에 닿았다. 울먹임을 간신히 참고 있는 저 여린 아이. 어쩌면 자신의 세상이 끝나버릴 뻔했는데도, 울부짖는 소리 한 번 낼 수 없었던 그런 아이. 또 그런 자신을 보듬어주는 부모조차 없는 아이.


그러고도 자신보다 자신을 위해 상처 입은 노비를 위로하러 달려온 아이.


“내가··· 나는··· 내가 꿈꾸던 것은···.”


파삭!


설총은 깨달았다. 이제는 그의 말이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남아 있던 긍지는 한 톨의 먼지조차 남기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설총은 두 눈을 감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도피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세운 뜻을 꺾지는 않으리라.’


얄궂게도, 눈을 감은 설총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천검의 음성이었다. 그가 일러준 시우십결의 구결, 단운이 천하의 천검이 되게 만들어준 그 비오의(秘奧義)의 구결이.


‘네 안의 「신」은 항상 네 안에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설총은 항상 궁금했었다. 「신」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문을 어찌 열어서 「신」을 맞이할 것인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 빌어먹을 마음이란 걸 어떻게 활짝 열어젖힐 수 있단 말인가?


‘왜 무심결(務心結)일까?’


힘써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라서? 무엇을 다스리며, 무엇을 정결케 하며, 무엇을 닦는단 말인가? 마음이 거울이라도 되는가? 수건으로 닦으면 깨끗해지게? 마음이 무슨 수면(水面)이라도 되는가? 돌만 던지지 않으면 조용한 수면처럼, 그저 아무런 동요 없이 고요하게, 저 하늘에 뜬 달을 비춰주기만 하면 되는 거냔 말이다!


“···도련님.”


득구의 부름에 설총은 눈을 떴다. 충혈된 두 눈의 시야는 닦지 않은 거울처럼 흐렸다.


-오라버니,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설총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울먹이는 성채의 수화를 본 순간, 설총은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사과를 받아야 할 네가 어찌 내게 긍휼을 구하느냐?


‘신(神)을 찾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라.’


결국 깨닫지 못한 구결의 진의를 물으러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하남제현이 내놓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모자란 무재(武才) 탓에 결국 깨치지 못한 무공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불편한 감정이 담긴 미봉(彌縫)의 답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이─

설총의 가슴을 꿰뚫었다.


‘긍휼을 알지 못하는 이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는 이가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설총은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엎어졌다.


“미안··· 미안하다. 내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에? 아, 아니··· 그게 도련님 잘못이란 게 아니라, 그, 그··· 아니 그게···!”

“나의 책임이었다···!”

“아니, 그···.”


사과를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 득구는 허둥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성채는 그런 득구의 어깨를 짚고 앞으로 나아와 설총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머리까지 산발한 채 엉망인 얼굴로 어린 누이의 얼굴을 마주한 설총은 와락, 그녀의 작은 동체를 끌어안았다.


‘그래, 이것이··· 나의 소명(召命)이었다.’


바르르, 마치 작은 새처럼 떨며 흐느끼는 누이의 온기를 느끼며 설총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이유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 * *



“···그렇게 해서, 저는 득구의 목을 내놓으라는 홍위윤의 명령을 거절하고 소가주의 위를 받는 위임식 날에 아버님과 대판 싸웠더랬지요. 문파의 확장을 위해 군문세가의 길을 걸은 아버님과는 다른 길을 걷겠노라고 말입니다.”


양성진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전하는 설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 한 잔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지나친 사치를 누리는 기분이었지만─ 아니, 아니다. 도리어 이런 이야기에 술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지러운 기분으로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다.


어쩌면 이 사내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익힌 무공이 천검의 무공이었기 때문이라거나, 그가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 사내는─ 사람의 심장을 가진 사내였다. 피와 눈물이 흐르고, 그 안에 온전한 정과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심장을 가진 사내였기에···.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거로군.”

“예?”

“아닐세. 나도 모르게 감상이 입으로 나와 버렸군.”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양성진의 손짓에 설총은 작게 웃음을 짓고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뭐 있겠습니까? 이게 다지요. 그저 무심코, 무심결에 동의하게 되는 이 세상의 법도와 관습에 대해, 무신경하게 저지르게 되는 악과 죄업에 대해··· 그것들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겠다고, 그렇게 해내겠노라고··· 그것 말고는 그 작은 아이들에게 속죄할 다른 길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무심결에 동의하는 세상의 법도에,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악이라···.”


양성진은 이맛살을 찡그리고서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꽤 불편한 진실이로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고, 또 알 만한 사람일지라도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그런 종류의 불편함 말일세.”

“신경을 쓰면 쓸수록 손해를 보니까요.”

“그렇지. 결국 그것이 진짜 문제 아니겠는가?”


양성진은 무척이나 술이 당기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표현이 재밌군. 자네 문파의 무서 이름이 무심결(務心結), 무신경(武身經) 아니었나? 누가 무서(武書)의 이름을 그렇게 짓나 싶지만···. 흐흐, 재미난 우연 아닌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설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설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 얼굴을 보면서 양성진은 깨달았다. 지금 이 사내는 자신의 ‘껍질’을 다시 한번 깨는 중이다. 양성진은 씩, 입꼬리를 말고서 앉은 그대로 조용히 창을 뽑아 들었다.


이런 순간을 누가 훼방을 놓게 둘 수야 없지. 이 사내가 성장하는 것을 양성진은 지켜볼, 그리고 지켜줄 생각이었다.


이 사내가 성장하는 만큼 자신도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 * *



설총은 쓴웃음을 지었다.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이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언젠가 숙부가 했던 말대로 자신의 발로 찾아가 발견하게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서동천이란 이가 불쑥 나타나 무심결과 무신경의 진의와 그것을 한현보에 전한 이유까지 멋대로 알려줘 버린 이상에는─


‘진의(眞意)?’


그게 다인가? 설총의 눈썹이 어긋맞았다.


‘정말 그게 다였나?’


서동천은 말했었다. 무심결은 문 너머에서 훔쳐 온 것이라고.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아니, 설총에게 보여주었다. 무심결, 무신경, 그리고 그 안의 시우십결과 한현보의 의미를.


무심결은 백련교도들의 이능과 그들의 대호법에게 주어지는 ‘아스트라(神技)’, 그 아스트라의 근원이 되는 ‘아카샤’를 제어하기 위한 심법이다.


아니, 애초에 심법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무신경 역시 그렇다. 병법들이야 한현보가 군문세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에 한주윤이 직접 붙여 놓은 것들이고, 서동천이 넘겨줄 때 기재되어 있던 무예들은, 말하자면 아스트라를 개방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서동천은 이것들을 ‘도구’라고 불렀다. 성화에 의해 ‘탐랑(貪狼)’, 곧 ‘문’으로 간택될 자를 한정해놓기 위한 도구. 문이 될 준비를 미리 갖춘 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문파. 말하자면, 한현보는 일종의 ‘과녁판’이었던 것이다.


‘탐랑’으로 지목받을 이들을, 그 명운(命運)을 한곳에 모아놓기 위한 과녁.


그럼, 한현보의 의미는? 그날, 성채를 끌어안고 울며 깨친, 설총의··· 삶의 의미는? 그가 깨친 소명(召命)은? 그게 다 무슨 의미였단 말인가?


‘그래, 절대··· 다일 수 없다. 그게 다여선 안 된다. 단지 과녁판이어선 안 된다! 그렇게 끝나선 안 된다!! 그게 끝일 리가 없다···!’


내면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몽롱해진 시야에도 걸리는 사내가 있었다. 창을 비껴들고 앉아 설총의 호법을 자처하고 있는 양가장의 젊은 소가주. 이 사내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덕분에 좋은 깨달음을 얻었었다. 그가 말한 성령독요(性靈獨耀)란 구절이 설총이 본 빛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 그날 설총은 신의 편린(片鱗)을 맛보았다.


“신(神)!”


설총은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파삭,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득구의 이야기와 성채의 시선을 통해 깨졌던 무언가가, 오늘 새롭게 허물을 벗는다.


설총의 입술이 달싹이며 무심결의 구결을 아주 작은 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반개한 두 눈은 어딜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고르던 호흡은 천천히 그 소리가 잦아들고,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세밀하지만 길게 이어졌다.


무심결의 진의. 흩어지는 공력은, 실은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경팔맥에 숨겨진 여덟 개의 용문(龍門)을 강제로 개방하여, 탐랑의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명운(命運)을 뒤틀기 위한 원기(元氣)가 되어 소모되는 것이다.


천검은 탐랑이 되어, 계약대로 열쇠인 성화를 통하여 ‘문 너머’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진기(眞氣)를 다룰 수 있었다. 그래, 백련교의 대호법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힘은, 그가 이룬 모든 성과는 전부 성화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힘을 어찌 사용하는가를 선택한 것은 오롯이 천검이었다.


그는, 천검은 백련교의 도구가 될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적이 되어,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는 것을 선택했다.


이번 ‘탐랑’은 득구라고 했다. 득구는 천검만큼 준비가 되진 않았지만, 이번 성화인 성채에게 직접 선택을 받았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 성채가 성화라면 탐랑은 득구여야 한다. 서동천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돼야겠지. 탐랑은 열어야 할 문이기도 하지만, 열리기 전까지는 성화를 수호하는 수호자이기도 하니까.


그럼, 설총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되는가?


이미 앉을 자리가 꽉 찼음에도, 설총은 어찌하여 여기에 다다를 수 있었는가? 도대체 어떤 운명이 설총을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그 답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저는 선작을 찍어주신 160분 덕분에 아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보내드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작게 나마 보답이 됐으면 합니닷!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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