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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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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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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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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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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74화. 피 냄새 (1)

DUMMY

득구 일행에게 배정된, 아니 배정됐던 숙소는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공덕자가 약왕서를 손에 넣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다.


누군가가 그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 둘이었던 탓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은 우리 숭례당이 먼저 맡겠다고 하지 않았소? 실제로 걸협 어르신을 먼저 찾아뵌 것은 바로 우리 숭례당이지 않소?”

“어허, 먼저라니? 맹주께 보고를 올린 건 우리 돈의당이 먼저일세! 선보고 후조치,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겐가?”


숭례당주이자 충무악왕문이란 이명을 지닌 악문의 제삼당주 비화창(飛火槍) 악여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다니? 지금 그게 당주인 나에게 할 소리요?!”


돈의당주이자, 철혈패도 팽문의 집법당주인 탈백도(奪魄刀) 심용학은 불같이 화를 내는 악여를 보며 귀가 따갑다는 표정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거참, 누가 별호에 화(火)자 들어가는 사람 아니랄까 봐 불같은 성질머리 하고는···.”

“뭐요?!”

“아니, 이 사람아. 정천맹이 무슨 저잣거리 왈패 집단인가? 아님, 뭐? 체계도 절차도 없이 오직 서열과 상명하복만 존재하는 시대착오적인 꼴통 집단이라도 되는가? 딱, 이렇게 말이야, 응? 절차와 과정, 이런 게 있어야 강호를 선도하는 선진경영의 정천맹이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말 아닌가.”


아직도 악(岳) 씨로 성을 갈지 않으면 당주급의 직위에 오를 수 없는 악문을 대놓고 비꼬는 심용학의 말에 악여는 낯빛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격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방금 말을 내뱉은 돈의당주가 팽수찬이었다면, 지금쯤 사달이 나더라도 크게 났을 것이다.


그러나 탈백도 심용학은 팽수찬에게도, 악여에게도 한참 윗줄의 선배다. 악여가 아무리 배알이 꼴려도, 강호의 배분 상 꼴리는 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더군다나 심용학은 팽씨 성이 아닌 자로서, 일반 당주도 아닌 팽문의 집법당주(執法堂主)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단지 배분만 높은 것이 아니라 강호에서 쌓아온 명성 또한 악여와 비교해 한참 윗줄에 놓이는 사내란 뜻이다.


팽수찬이 팽문의 직계이긴 하나, 하북팽가를 대표해 천하지회에 참석하기엔 여러모로 그릇이 작은 인물이라면, 심용학은 그릇이 차고도 남는 자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심용학은 오랜 세월 낭인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쌓아온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팽수찬이 하북팽가를 대표해 천하지회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돈의당주 자리를 심용학에게 내주어야 했던 것도, 이런 측면이 컸을 것이다.


“저 악왕(岳王)의 빛나는 신위(神位)를 받으신 충무악왕의 이름을 내건 악문의 대표로 나온 자네라면, 응당 모든 일에 더 신중하고 입향수속(入鄕隨俗)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충무악왕문도 나름의 법도가 있겠지마는, 여기는 정천맹이 아닌가? 정천맹의 법도를 지키는 것은 곧 충무악왕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과도 같은 일일세. 아니 그러한가?”

“아니, 지금 우리라고 절차와 과정을 안 지킨 것은 아니지 않소! 단지 걸협 어르신을 먼저 뵙고 나서 그 소문이 사실일 경우에 맹주께 보고를 드리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에─”

“쯧쯧, 이 사람아. 한번 생각을 해보게. 천자께서 저 위대한 성웅(聖雄), 악비(岳飛) 대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충무악왕문의 이름과 그 현판을 내리실 때, 누가 와서 ‘내가 그런 소문을 들었으니, 황상께서 굳이 손을 어지럽히실 것 없이 내가 대신 현판을 달아주겠소!’ 하면, 응? 그랬으면 그거 아주 역모 아닌가? 왕(王)자를 어디 제 맘대로 갖다 쓰는 게?”

“아니, 그게 무슨···!”


악여는 황당하다 못해 아주 속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 무슨 해괴한 망발이란 말이오?! 우리 충무악왕문은! 저 위대하신 성웅, 충무공께서 저 간악한 금나라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남송을 수호한 혁혁한 공로를 기려 남송의 영종(寧宗) 공황제(恭皇帝)께서 왕으로 추존하신바, 대명천하에 이르기까지 그 정통성을 이어온 명실상부한 왕의 일족이오! 역모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를···!!”

“자자, 너무 흥분하지 마시게. 난 그저 비유를 든 게 아닌가? 그리고 아무리 송영종께서 악 충무공을 왕으로 추존하셨다 하나, 그건 남송의 일이지 않은가? 대명천하가 열린 지금에야─ 황실의 일원도 아니면서 왕의 이름을 쓰고자 한다면, 응당 대명의 황상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가 아닌가 말이야? 내가 어디 틀린 말을 한 것이 있는가?”

“아니, 대체···! 애초에 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요?! 지금 천자께서 윤허하신 충무악왕문의 이름에 먹칠이라도 한 번 해보겠다는 거요, 뭐요?!”


울화통이 터지는지, 악여의 화통 터지는 소리에 심용학은 다시 한번 귀를 틀어막았다.


“비유를 들자면 말이 그렇다는 얘길세, 비유.”

“뭔 비유를 그딴 식으로···!”

“남송의 법도는 남송의 것이고, 대명천하의 법도는 대명천하의 것이잖은가? 마찬가지로 충무악왕문의 법도야 어쨌든, 정천맹에 왔다면 정천맹의 법도를 지키란 말일세!”

“맹주께서는 지금 사망한 쌍비인의 일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시질 않소! 혹시라도 공덕자의 소문이 뜬소문이기라도 하면, 바쁘신 맹주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이오? 돈의당주께서 그 책임을 지실 거요?!”

“응?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당주로서 그런 심중한 사항에 대한 이야길 들으면 그 진위를 떠나서 당연히 맹주께도 보고를 드려야 맞는 사항이 아닐까 싶네만? 자넨 이 일이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로구먼?”


이대로 가다가는 악여의 관자놀이에 솟은 핏줄이 폭발하겠다 싶은 시점에 걸진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야, 이 썅느므 시끼들아! 다들 쥐딩이들 못 닫냐잉?!”


분명 온 숭산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인데 메아리가 없었다. 그것이 온전히 구정삼의 내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달은 일대의 무인들은 전원 전율하는 표정으로 합죽이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아따 요놈 시끼들, 가만히 있으니까 뭔 사람이 가마니로 보이나, 진짜 드럽게 나불댄다잉. 여가 뭐 도떼기시장인 줄 알엄마?!”


구정삼이 곧 모습을 드러내자 심용학은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포권례를 취해 보였다.


“천하삼절의 구보신개 대협을 뵙습니다.”

“구보신개 어르신을 뵙습니다.”


선수를 치는 심용학을 본 악여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뒤따라 포권례를 올렸지만, 구정삼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니미, 뵙기는 뭘 봬. 그지한테 뭘 얻어 처먹겠다고, 아침나절부터 옘병하고 자빠졌냐? 앙?”

“어르신의 심기를 불편케 해드린 것은 송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저희가 일부러 어르신께 폐를 끼치려 한 것은 아니었으니, 부디 너그러이 선처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선처는 얼어 죽을, 칵, 퉤! 지랄 났다, 지랄 났어. 내가 숭산에 올라왔을 땐 인사는 무슨, 코빼기도 안 비춘 놈들이 뭐 하나 좀 줏어먹을까 싶으니까 기냥 냅다 달려 들어가지고는 아귀마냥 드글드글 대는데, 니들 같으면 열 받어, 안 받어? 콱, 깨지면 안 되는 게 깨지기 전에 쥐딩이 조용히 혀라잉.”

“···송구합니다, 대협.”


한 문파의 집법당주이자 정천맹의 당주가 받아넘길 수 있는 수준의 모욕은 아니었지만, 심용학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정삼의 말이 거친 것이야 낭인 시절부터 유명한 이야기였고, 힘이 곧 법인 무림에서 구정삼은 단 세 명뿐인 절대자의 입지를 다진 철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순간, 이곳은 소림임에도 불구하고 구정삼의 말이 곧 법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이었다. 구정삼이 처음 등장할 때 보여준 신기에 압도된 이들이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생각조차 품지 못했으니까.


평소라면 이쯤에서 염천호를 찾아가라며 빽,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지금 구정삼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크흠, 뭐··· 그래. 솔직히 아직 열 뻗치긴 하지만···. 뭐 때문에 요 지랄이 났는가는 나도 모르는 건 아니지.”

“어르신! 그 말씀은···?”

“우리 공 향주가 뭔가 손에 넣었다는, 그거 때문 아니냐?”

“설마···!”

“진짠가? 진짜야?”

“약왕서! 그걸···!”

“대협! 어르신! 우리도 한 번만 보게 해주십쇼! 한 번만!”

“아이 썅, 닥쳐! 우리가 먼저야!”


또다시 한순간에 펼쳐진 아수라장에 구정삼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조용.”

“···!”


구정삼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한 번만 더 정신머리 놓고 그 아가리, 아주 좆대루 함 씨불여봐라잉. 내가 처음 딱 한 놈은 깨지면 안 되는 걸 아주 걸판지게 깨 놓을랑게.”


아까부터 자꾸 뭘 깨겠다는 건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협박에 다시 한번 모두가 합죽이가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구정삼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몸이 직접 공증을 서겠다. 가서 확인하는 것까지만. 단!”


꿀꺽,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구정삼이 말을 이었다.


“만약 공 향주가 그것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진실이라면, 하오문은 오직 정천맹의 맹주─ 혹은 맹주의 대리인에게만 그것을 공유할 거다. 다른 놈들은 안 돼.”

“···으음.”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솔직한 반응에 구정삼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절차니 어쩌니 하는 소릴 해댄 건 네놈들 아니냐?”

“맞습니다. 지극히 지당한 지적이십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심용학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포권례를 취했다. 그런 심용학을 보며 구정삼은 내심 혀를 찼지만, 어리숙하게 반응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복잡한 건 모르겠지만··· 이거면 된 건가?’


구정삼은 거칠게 난 수염 사이로 턱을 긁적이며 제갈민이 주문했던 내용을 되짚었다. 고 계집애가 뭐랬더라? 첫 번째는 공증을 서겠다고 선언할 것, 두 번째는 맹주 혹은 그 대리인에게만 공유하겠다고 할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아차! 하나 깜빡한 게 있다.”

“예? 깜빡한 것이라뇨?”


두 눈을 껌뻑이는 심용학의 표정에 구정삼은 제 주둥이를 후려칠 뻔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뜩하냐, 등신아.


“어흠! 아니 그냥 생각하던 게 하나 있어서 말이지. 별거 아니다. 신경 꺼.”

“아, 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심용학을 보며 구정삼의 미간은 뒷간 지푸라기마냥 구겨졌다. 이 자식 이거, 눈치 겁나 빠른 놈인데. 이 분위기에선 도저히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어르신, 잠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그걸 더 엉키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악여였다. 악여는 이마의 핏대 하나가 끊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분명 그것을 공유하는 것은 맹주 혹은 맹주의 대리인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확인할 동행으로 돈의당주를 꼽은 것은 아니지요?”

“···어, 그건 그런데?”

“하면 저희 숭례당도 그 길에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오, 이게 웬 떡이야? 구정삼은 반색하며 혀를 내둘렀다. 심용학이 뭔가 훼방을 놓을 기세였지만 호기를 놓칠세라, 구정삼이 선수를 쳤다.


“뭐, 까짓거 좋다.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온 니들 성의를 봐서 그 정도는 허락해주지. 따라오고 싶다는 놈들은 다 따라와도 좋다. 단!”

“···단?”

“소림은 안 돼.”

“···예?”

“그게 조건이다. 딴 놈들은 다 돼도, 소림의 땡추 놈들은 절대로 안 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아, 이유는 원종 땡추한테 직접 물어봐라. 그렇게 대놓고 나를 엿 먹였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도 슬슬 해두라고 말 좀 전해주고. 알긋냐?!”



* * *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거냐?”


구정삼이 살짝 질린 표정으로 묻자 제갈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어때서요? 어차피 척을 진 건 저쪽이 먼저잖아요?”

“그래도 말일세. 정천맹에 있는 분들께는 좀 부담이 되지 않겠는가?”


도종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구정삼의 질문을 보충하자, 구정삼이 그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는 천하지회에 하남제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통했을지 몰라도··· 이젠 아녜요. 도리어 여기선 할배, 아니 어르신이 어르신답게 팍팍, 더 우악스럽게 나가주는 게 좋다고요. 실제로도 어르신께서 천검의 행방을 오랜 시간 동안 쫓은 것과, 마지막엔 하남제현과 접촉하려 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여기선 그 하남제현을 도중에 가로챈 원종대사에게 개인적인 분노 정도는 표출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야 그렇지만?”

“그래야 할 이유는 더 있어요.”

“주규를 떼어내는 것 말고도 더 있다고?”

“이게 더 중요해요.”

“뭔데?”

“현재로서 정천맹의 패권을 쥔 원종대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 같은 천하삼절의 일각이자 무당의 장문인 현현진인뿐이에요. 하지만 현현진인은 현문진인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고, 현문진인은 천하지회가 끝남과 동시에 원종대사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죠.”


제갈민은 콧잔등을 스치는 앞머리를 후, 불어 넘겼다. 다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그녀는 슬슬 머리를 정돈하자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현문진인은 떨어진 입지는 둘째 치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현현진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역시 천하삼절인 구보신개가 대놓고 원종대사에게 불만을 표출한다면?”

“날 포섭하려 들거다, 이거냐?”

“그거예요. 굳이 포섭되진 않더라도··· 현문진인에게 아직까진 이 정천맹을 둘러싼 패권 다툼에서 재기, 혹은 역전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인식만 심어주면 충분해요.”

“그게···.”

“오월동주. 천하지회에서 그리려던 그 그림을 완성할 마지막 기회가 되어줄 거예요.”



* * *



“그렇게 나오셨다, 이건가.”


원종대사는 씩 웃으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무영각주께 문의를 드릴까요?”


정천맹의 정보를 담당하는 무영각주는 아미의 덕화사태다. 그리고 아미는 소림과 같은 불문의 일파로서 정천맹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별다른 설명 없이도 힘을 빌려줄 것이다. 그러나 원종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더불어 그가 원하는 대로 우리 쪽 사람은 아예 이번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해주고.”


법홍의 눈썹이 꿈틀, 어긋맞았다.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부.”

“약왕서 아닙니까? 더군다나 후반부는···.”

“사독, 그 여자가 소유하고 있었겠지.”

“그러니 말입니다.”

“주규가 꽁꽁 감춰두고 있던 백련교의 비밀을 한번 엿볼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게로구나?”

“그 말씀대로입니다.”


법홍은 속에 있는 불만을 감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만··· 그때 징조를 생각해보면, 후일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지극히 옳은 말이로구나.”

“하면, 어째서 이런 호기(好期)를···.”

“호기?”


원종대사의 되묻는 질문에 법홍은 입을 다물었다. 방장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흐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아니··· 라고 보십니까?”

“생각해보거라, 법홍아. 천검을 제외하면 중원에서 가장 먼저 그 책을 보았다는 하남제현이 내 손에 있고, 정천맹의 맹주인 현문진인 또한 내 손에 있다. 무엇보다···.”


원종대사는 꽉 틀어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천하무림··· 강호를 일통한 정천맹이 곧 내 손에 있는데, 그깟 서책 하나쯤 보는 것이 무에 큰 기회라고 할 것이냐? 마음만 먹으면 이후에는 언제라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뭐, 현문 그 친구와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속내도 있을 것이고, 그 밖에도 더 많은 계획을 위한 포석이기도 하겠지. 구정삼, 그 단순한 친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신산이라는 친구들이 세운 계획일 테니··· 뭐, 나름대로 위협적이기도 하겠지. 아무리 새끼라 해도, 맹수의 핏줄을 이었다면 발톱 정도는 있을 테니.”


흘흘, 웃음을 흘리던 원종대사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허나, 법홍아. 대마불사라는 말을 아느냐?”

“바둑에 쓰이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 지금 상황이 딱 그런 상황인 게다. 사소한 수 하나둘쯤으로는 큰 흐름 자체를 뒤집을 수 없는 법인 게다. 열심히들 발버둥 치게 내버려 두거라. 승자가 베푸는 관용을 방심이라 여기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풀려간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도리어 승자만이 아닌, 패자도 얼마든 방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원종대사의 두 눈에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작가의말

회차별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독자이기도 한 친구 녀석이 요즘엔 한 회차에 분량이 너무 많으면 길어서 읽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음, 이건 또 어떨까 싶네요. 이후 회차부터라도 분량을 조금 조정해서, 읽기 편하신 만큼을 연재하는 게 나을까요? 이번에도 고견이 있으신 분 계시다면, 기탄없이 견해를 들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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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4 n1832_ps..
    작성일
    24.04.24 18:41
    No. 1

    개인적으로 그리 길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네이버 웹소설과 비교해도 눈에 띌 만큼 길지는 않은 것 같구요. 내용이 잘 읽히는지 여부는 길이보다는 그 회차의 내용에 더 영향을 받지 않나 싶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면 술술 읽히고, 내용상 전개를 위해 상대적으로 덜 집중되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에 안 들어 올 수도 있겠죠. 다만 10대, 20대들은 길면 읽기 힘들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2 KaHaL
    작성일
    24.04.24 20:31
    No. 2

    그렇군요... 처음 컨셉을 너무 씨게 잡았나... 싶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본작은 끝까지 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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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67화. 잿더미 속에도 새싹은 튼다. (2) 24.03.28 219 6 15쪽
222 67화. 잿더미 속에도 새싹은 튼다. (1) 24.03.27 201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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