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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지저씨 님의 서재입니다.

부활의 성자, 이단의 괴수가 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지저씨
작품등록일 :
2024.03.01 11:46
최근연재일 :
2024.03.29 18:3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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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45

작성
24.03.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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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3)

DUMMY

소냐의 방에 들어온 나는 낯선 공간에 두리번거리지 않게 눈에 힘을 줬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소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엔도의 수많은 흉터의 지대한 지분을 가진 소냐라면 더더욱.


“자,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려무나.”


불러놓고선 한참을 팔짱을 끼고 노려보기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흐응···?”


소냐는 그런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울리며 팔짱을 풀었다.


“먼저 말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예요. 제나스의 빛의 성자, 그리안 씨. 아니, 요즘엔 이런 이름으로 불리던가요? 배신의 성자, 그리안?”


이런···.


나는 당돌하게 고개를 치드는 그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첫 만남에서의 소냐의 그 반응은 나를 알아본 당혹감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을 걸 각오했지만, 타국의 작은 마을까지 얼굴이 팔려있을 줄이야.


“부정은 안 하시네요. 침묵은 긍정으로 봐도 되는 거겠죠? 어차피 별로 숨길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보란 듯이 이름도 그대로 얘기하고.”


그렇다. 낮에 하워드 일행에게는 에둘러 표현해 자리를 넘겼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질문까지 거짓으로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교단의 진짜 배신자는 따로 있는데 내가 거짓말까지 해가며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

떠벌리고 다니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으니 피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보다 부끄러운 짓은 하고픈 맘은 없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바로 그 그리안이야.”


그렇다 해도 입장이 조금 난처해졌다. 가능하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가고 싶은데···.


“뭘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요? 다 알고 있다니까. 됐어요. 그만 가서 주무세요. ···어차피 내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거 같고.”


어?


“아니···. 내가 그 배신의 성자··· 물론 그건 다 간악한 자들의 계략으로···.”


“누가 그렇대요? 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얘기했지.”


소냐는 하품을 하며 나를 방 밖으로 억지로 떠밀었다.


“아, 아니 잠깐만···.”


“걱정 말아요. 어디 가서 얘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못 믿겠으면 내일 당장 떠나시던지.”


“그래도 아직 얘기할 게···.”


“아, 나가라구요! 숙녀 방에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에요? 소리 지른다?”


“어, 어엇···.”


-쾅!


막무가내로 나를 쫓아낸 소냐는 방문을 거세게 닫으며 모습을 감췄다.


어···. 당황스럽네.


요즘 들어 내가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지만 이건 한층 더 예상 밖인걸.


내가 요란하게 닫힌 문소리에 건너편에서 엔도가 뛰쳐나오진 않을까 신경 쓰고 있을 때.


“아, 이거.”


소냐의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덮는 이불이 휙 날아오곤 다시 닫혔다.


“결국 뭐였던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폭풍처럼 지나간 상황에 나는 한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


“일손을 거들겠다고는 했지만, 초보자인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다음날. 나는 엔도, 소냐와 함께 아침부터 열기가 뜨거운 작업장에 와 있었다.

성직자 삼인방도 잠깐 얼굴을 비췄으나 그들은 각자의 일로 바쁜 모양인지 금세 자리를 떴다.


“걱정하지 마. 내가 마을에는 더 대단한 게 많다고 그랬지? 그 중심이 바로 이 작업장이야.

우리 작업장은 아저씨처럼 사지만 멀쩡하면···. 우와, 뭐야. 팔뚝이 왜 이리 두꺼워. 허벅지야?”


사회성이 좋은 건지 뭔지···.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내 팔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는 소년.


“으악! 놔, 놓으라고! 아파! 안 할게. 이제 안 할게. 잘못했어요.”


하지만 나도 땀내 나는 사내들과의 생활엔 이골이 난 터라 당황스럽지만은 않았다.


짜식 엄살은.


나는 엔도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소리가 나온 후에야 손으로 내리눌렀던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너는 단련 좀 해라. 저기 목수들은 하나같이 단련이 되어 있는데 너는 왜 그러냐? 너 일할 시간에 농땡이 부리는 거 아니냐?”


자고로 땀을 흘린 육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

나는 남자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굴곡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엔도의 몸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아, 나는 설계직이라고. 몸 쓰는 건 얘 같은 애들이 잘하지! 악!”


그는 꼭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덧붙여서 매를 벌었다.


“시끄러.”


인제 보니 소냐의 어울리지 않는 때 묻은 옷은 작업복인 모양이었다.


“도구들 전부 네가 만든 것처럼 얘기하더니.”


“웃기고 있네. 이 인간이 그렇게 말해요?”


“내 머릿속에서 나온 물건이니 내가 만든 거나 다름없지.”


엔도는 꼬집힌 팔을 문지르며 소심하게 말했다.


“너는 만날 입만 바쁘고 그걸 실물로 만들어내는 건 항상 내 몫이잖아?”


다시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그 사이에서 소냐 눈치를 보는 나.


“왜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무래도 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녀는 자기 얼굴을 더듬으며 스스로 검댕을 묻히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뭐, 됐다.


“너희들 왔구나.”


“라트 아저씨!”


으르렁거리던 소냐의 표정이 일변해 목소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을까.

턱수염이 근사한 중년 남성이 핏줄 선 팔뚝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워드 경에게 들었네. 아주 근사한 새 일꾼이 들어왔다더군. 반갑소. 라트일세.”


“···그리안입니다.”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마음을 비우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억센 손은 거칠었고,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하하! 언제나 있는 하워드 경의 호들갑인 줄 알았더니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래! 생긴 거에 비해 아주 좋은 몸을 가지고 있구만.

듣기로는 방랑자라지? 정착할 곳을 찾고 있는 거면 우리 블로렌은 어떤가? 응?”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나를 붙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라트.

그 덕에 아이들과는 앗 하는 사이에 멀어지고 말았다.


“라트! 그 사람한테 본때를 보여줘요!”


“아, 알았어. 그만 불러! 그럼··· 좀 이따 봐요, 그리안.”


아무래도 케이트의 말마따나 작업소에서 그들의 입지는 확실한지 얼굴이 보이자마자 이곳저곳 불려 다니기 바빠 보였다.


“자네는 나랑 가면 되네. 자네는 오늘 내 일일 조수야. 아차, 내가 말 안 했지? 내가 이곳 소장일세.”


**


라트는 조수라고 표현했으나 실제로 내가 한 일은 견학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나를 만나기 전 언질을 줬다던 하워드의 덕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의 젊은 남성들은 죄다 이곳에서 일하는 게 아닐까 싶은 작업장 크기.


“응? 아무래도 그렇지? 따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다들 시간 내서 이곳에서 일을 하지. 저기 나무 톱질 하고 있는 피온도 원래 식당 주인일세.”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어제 보았던 식당 주인이 한 발을 나무에 고정하고 역동적으로 톱을 켜고 있었다.


“다 같이 해야지. 이거는 자기 잘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 살아남자고 하는 일이니까.”


라는 것이 라트의 설명이었다.


그의 말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제작되고 있는 품종은 폭이 굉장히 넓었다.

구하기 쉬운 목재, 라칸이기에 풍부한 철, 섬유나 직물, 용도를 알 수 없는 화학물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인상에 깊었던 것은 그 많은 제작품의 단일화와 생산의 체계성이었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주야장천 기다란 나무 장대만 깎고 있는 목수.

그것만 봐서는 어디다 쓰려는고 싶었는데 쇠스랑의 손잡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함정의 지렛대로 쓰이기도 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한 조립식 판자는 다른 것들과 아귀를 맞추더니 훌륭한 나무 방패가 되었고, 프라이팬에 들어갈 고정쇠가 석궁의 발사대를 완성 시키기도 했다.


처음부터 뛰어난 설계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만듦새와 호환성.

덕분에 작업자들의 생산성은 체계적이고, 누구 하나 인원이 새로 바뀌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저 두 남매가 평소에는 티격태격해도 일할 때는 죽이 잘 맞지. 엔도가 큰 그림을 그리면 소냐가 실물로 만들면서 문제를 개선하고.

내가 작업 총괄을 맡고 있긴 하지만 저 애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아주 복덩이들이야.”


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런 변두리에 보기 힘든 광경임은 분명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이들의 생명을 내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높은 곳만을 바라보고 달려왔구나.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과 자는 것. 무기의 손질과 말 안장 하나까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그 많은 전장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들의 작은 손길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일진대.


나는 그들의 진력이 담긴 물건들을 볼 때마다 천천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래서 당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아 보여도 모두 조금씩 긴장하고 있군요.”


영육(靈肉)으로 모두 신세 진 마을이다.

이제 곧 다시 떠나겠지만 가능하면 이곳 블로렌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음···. 숨길 필요도 없지. 다들 대놓고 마주하기 꺼려져서 그런 걸세. 그러니까 말이네. 우리 예상으론 이제 곧···.”


겨울. 테만 산맥의 열기 때문에 비교적 따뜻한 라칸이지만 그 계절의 혹독함은 다르지 않았다.


“쿠알 떼가 올 걸세. 무리의 선봉은 하워드, 케이트 경이 이미 확인했네.”


쿠알. 기괴할 정도로 큰 입과 광분(狂奔) 성향이 위협적인 소형과 중형 사이의 마수(魔獸).

무리를 지어 다니는 탓에 놈들이 휩쓸고 간 마을은 티끌도 남김없이 괴멸되기 일쑤였다.


참으로 같잖게도 마물들에게도 생태와 습성이 존재했다.

가뜩이나 겨울은 민중의 생활이 버거운 시기.

영악한 놈들도 이것을 아는지 겨울의 피폐함을 무기 삼아 사람을 습격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 지방의 겨울은 춥지 않지만 그래서 좋은 사냥터를 상위 마물들에게 밀린 쿠알이 라칸으로 크게 남하한 것이었다.


“막을 수 있습니까?”


“그전에도 쿠알의 습격은 몇 번 있었지. 위기는 항상 넘겼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았어.”


결과만 놓고 보면 블로렌은 쿠알의 공격 정도는 막을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그 말은 달리 말해 마을 구성원의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할 걸세. 그러기 위해 우리는 준비해왔고 더 발전해왔어.”


그의 말엔 굳은 결의가 보였다.

주위에 있는 작업자 몇이 작업에 집중하는 척하며 라트의 말에 귀를 세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같은 마음이로군.


“비록 저는 블로렌 사람도 아닌 스쳐 가는 자지만 함께 돕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상 자네도 우리 마을의 일원일세. 언제 왔고 언제 떠날까는 중요하지 않아.”


라트는 내 말에 기쁜 듯이 어깨를 두드리며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


“온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사람들과 함께 마을 경계 목책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어, 진짜다. 밤이라 깜깜한데 눈도 좋네요, 아저씨.”


야행성인 쿠알을 대비해 곳곳에 횃불을 꽂아 놓았지만, 그 시야가 태양이 비치는 낮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하워드 경과 케이트 경도 무사한 것 같다.”


그러나 요즘 내 눈은 밤이든 낮이든 언제나 빛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저 멀리서부터 오는 두 명의 기사를 알아보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많은 것 같소···.”


내 옆에 있던 마을 남성 하나가 침음성을 삼키며 말했다.


확실히 적지는 않군.


어림잡아 그 숫자는 대략 사백에서 오백.

저 정도면 이전의 나라도 마을의 피해 없이 단신으로 일소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숫자였다.


그런 짐승의 무리 앞에 서서 하워드와 케이트, 두 명의 기사가 쫓기듯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리한 전장에서 싸우기 위한 우리 모두의 계획.

하워드는 예정했던 위치에 도달하자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크게 외쳤다.


“모두 준비!”


그 소리에 블로렌의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준비는 만전. 작은 마을의 사활을 건 전쟁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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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9) 24.03.28 4 0 12쪽
21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8) 24.03.27 4 0 12쪽
20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7) 24.03.26 6 0 12쪽
19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6) 24.03.25 5 0 14쪽
18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5) 24.03.23 5 0 13쪽
17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4) 24.03.22 5 0 12쪽
»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3) 24.03.21 6 0 12쪽
15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2) 24.03.20 5 0 15쪽
14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1) 24.03.19 6 0 14쪽
13 ep4.썩은 땅콩의 수난(6) 24.03.18 6 0 13쪽
12 ep4.썩은 땅콩의 수난(5) 24.03.16 5 0 14쪽
11 ep4.썩은 땅콩의 수난(4) 24.03.15 5 0 15쪽
10 ep4.썩은 땅콩의 수난(3) 24.03.14 5 0 12쪽
9 ep4.썩은 땅콩의 수난(2) 24.03.13 6 0 15쪽
8 ep4.썩은 땅콩의 수난(1) 24.03.12 5 0 13쪽
7 ep3.벌거벗은 기사(2) 24.03.11 7 0 13쪽
6 ep3.벌거벗은 기사(1) 24.03.09 7 0 13쪽
5 ep2.노래하는 자들 24.03.08 11 0 13쪽
4 ep1. 성전, 그리고 부활(4) 24.03.07 8 0 14쪽
3 ep1. 성전, 그리고 부활(3) 24.03.06 8 0 12쪽
2 ep1. 성전, 그리고 부활(2) 24.03.05 10 0 12쪽
1 ep1. 성전, 그리고 부활(1) 24.03.05 1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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