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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지저씨 님의 서재입니다.

부활의 성자, 이단의 괴수가 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지저씨
작품등록일 :
2024.03.01 11:46
최근연재일 :
2024.03.29 18:3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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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추천수 :
0
글자수 :
136,245

작성
24.03.0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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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1. 성전, 그리고 부활(1)

DUMMY

“하늘에 계신 창조신 제나스시여. 오늘도 만백성들이 이곳 성국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를······.”


신성국 제나스(Zenath of Holy Kingdom)의 수도, 성도(聖都) 제나스.


초대 교황의 이름을 딴 넓은 광장에 한 남자의 기도 소리만이 인파 사이에 고요하게 울렸다.


“나 교황 크리스토퍼가 제나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빛의 성자여, 이리 와 무릎을 꿇으라.”


한동안 이어진 기도의 말미, 그가 엄숙한 어조로 명하자 곧이어 젊은 남자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철컥, 철컥, 철컥


계단을 오를 때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두텁게 입은 그의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침내 남자가 교황의 발아래 조용히 무릎을 꿇자, 침묵 속에서도 좌중이 환호하는 것이 느껴졌다.


뭇 남자들은 동경의 눈빛으로

숫처녀들은 달아오른 볼을 감추며

노인들은 그를 향해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말썽깨나 부릴 것 같은 몇 아이들은 엄마 손을 뿌리치고 기어코 행렬 앞까지 다다르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말리는 부모 손을 빠져나가 그를 바라보며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종말이 사람을 핍박한 지 어언 7백 년. 빛의 신 제나스의 은혜를 받아 우리가 지금껏 살아 숨 쉴 수 있었으니···.”


젊은 남자가 무릎을 꿇자, 잠시 멈추었던 교황의 축언이 다시 시작됐다.


마물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지고 온 종말의 용.

절망한 사람들 앞에 강림한 마(魔)의 유일한 대항마 빛의 신 제나스.

그의 첫 번째 사자였던 초대 교황과 그 뒤를 이은 성인들.


세상의 절반을 용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나 남은 것을 지키기 위해, 또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나스의 용사들.


신성국 제나스의 성도라면 모두가 아는 역사의 흐름을 훑으며 교황의 축언은 이어졌다.


“이제 때가 되었노라. 그대 빛의 아들이여. 제나스의 이름을 입고 가 빛이 어둠이 이김을 알리라. 가서 종말의 목을 치고 빛의 역사가 도래했음을 온 만방에 알릴지어다.”


교황은 그리 말하며 양옆 사제의 도움을 받아 성검이라 불리는 교단의 제일 성유물을 성자에게 하사했다.


“와아아아!”


검을 받아든 성자가 일어나 성검을 치들자 여지껏 참았던 좌중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안! 그리안! 빛의 아들!”


“성자, 만세! 종말의 용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와아아!”


성력 693년, 믿음의 달이 시작되는 첫 번째 날.


오랜 핍박에 지친 사람들의 애통함은 단 한 사람에게 향한 기대에 업혀 희망으로 둔갑하려 하고 있었다.


**


“에이, 시발.”


사람들을 뒤로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 저려 죽을 뻔했네. 영감, 무슨 놈의 축복을 그리 중언부언하는 거야?”


아니,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는 얘기를 반 시간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하여간 그 지겨운 소리 들으며 무릎 꿇고 있어야 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풀 플레이트가 얼마나 무거운지 입어 본 적이 없으니 그러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의 축언은 신성력도 담지 않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식 축복일 뿐이었다.

출정을 앞두고 대중들 앞에 나의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행사.

이런 일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빌어먹을. 역지사지라고 언젠가 한 번은 이 갑옷을 강제로 입혀줄 테다. 영감탱이.”


“아악! 제발, 그리안님. 체통을 좀 지키시라구요!”


내가 시부렁거리며 저린 다리를 절뚝이고 있자 방정맞은 목소리가 뒤에서 달려왔다.


“욕설에다가 교황님께 대한 무례까지!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녀석은 뭐가 두려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체통은 얼어 죽을. 넌 내가 고아 출신인 거 모르냐? 난 원래 싹수가 노래.”


성검을 치켜들며 지었던 근엄한 내 표정이 사실 저린 다리 때문이었단 걸 사람들은 알까?


알 리가 없지. 어쩔 수 없다. 이게 성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얼굴 부을까 봐 어제부터 밥을 안 먹었더니 저혈압이 온 건가.

저린 게 왜 아직도 안 가셔?


그냥 깔끔하게 회복 기도를 올려서 해결하자.


[전능하신 빛의 신 제나스시여. 당신의 아들이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사오니···.]


“아니, 그러니까 이런 짓 좀 하지 마시라구요.”


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려고 하니 방정맞은 목소리의 주인, 바스티앙이 내 손을 휘저으며 기도를 방해했다.


이런 불경하기 짝이 없는!

감히 성자의 기도를 방해하다니.

천벌을 받을지어다, 바스티앙이여.


“그리고 말이 고아지. 이런 세상에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교단의 엘리트 코스를 모조리 수석으로 졸업하신 분이, 교양 없다는 말을 입에 올려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식이 또 잔소리를. 이 녀석은 내가 지 상급자라는 걸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바스티앙의 열정적이고 침 튀기는 연설을 듣고 있자니 혈압이 올라서 다리 저린 것도 가셨다.


나는 파리 쫓듯 손을 휙휙 저으며 걸음을 뗐다.


저리 가라, 훠이. 잔소리 악마 물렀거라.


“그리안 경.”


아차, 그러고 보니 바스티앙이 여기 있다는 건······.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한 것에 유감을 표하며 나를 불러세운 목소리를 향해 인사했다.


“성녀님.”


“탐욕을 꿰뚫는 신안(神眼)의 지혜가 그대 발 앞의 수렁을 비추리니.”


“···만마(萬魔)의 간계 속에서도 언제나 너는 신의 품 안에 있음을 명심하라.”


가볍게 목례 할 생각이었는데 성녀 쪽에서 먼저 정식 인사를 하는 바람에 나도 예법에 맞춰 새로 인사했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얼굴 뵙기가 힘드네요, 그리안 경.”


성녀, 실비아 에이버리.

베누마트루크 종파 출신답게 그 총명함이 빛나는, 나와는 또 다른 의미의 교단의 간판.


“저야, 뭐. 워낙 공사다망한지라.”


나는 그녀의 눈을 살짝 피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뭐. 당연하시겠지만 고명하신 성자, 그리안 경께서 자신의 책무를 회피하기 위해 바스티앙 경에게 저를 내팽개치시는 건 아닌가 오해를 하게 될 것 같네요.”


그녀는 부러 내 말투를 따라 하며 능청을 떨었다.

팔짱을 끼고 턱까지 괸 모습이 영악하기 그지없다.


“그럴 리가요. 지금 시기에 저보다 바쁜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바빠서 그런 거죠.”


아, 별칭이 성자와 성녀라고 해서 우리 둘이 친남매 사이인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관계성으로만 따지면 아주 공적인 관계에 가까웠다.


“그리고 호위로는 저보다야 바스티앙이 낫죠. 그건 성녀님 생각에도 그렇죠?”


교단 최고위 성기사인 성자가 가장 순결한 사제인 성녀를 호위하는 것이 성자의 사명 중 하나.


하지만 그 임무를 나는 바스티앙에게 일임해두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그리안님보단 제가 낫··· 윽!”


나는 갑옷의 빈틈을 노리고 바스티앙의 오금을 신속하게 걷어찼다.


어딜 껴들어, 자식아.

이게 요즘 나랑 떨어져 있다고 감을 다 잃었나?


“후훗. 바스티앙 경은 그리안 경 대신 잘 해주고 계시죠. 그렇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나의 발차기를 눈으로 좇다니. 역시 성녀.

신안의 지혜가 아니라 그냥 신의 눈을 가지고 있는 듯한 동체시력이다.


“이런 핑계라도 대서 경의 무사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제 철야기도가 걱정으로 끊이지 않을 참이랍니다.”


수면 부족은 피부에 좋지 않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실비아.


아니, 당신 솔직히 말해. 피부 건강은 무슨. 잡티 하나 없으면서.

밤마다 하는 철야기도의 제목이 피부 좋게 해달라는 건··· 아무래도 아니겠지.

어, 그래. 너무 나갔다.


어쨌든.


“그래도 제 몸이 하나인 이상 어쩔 수 없는···.”


······.


“하···. 예, 그래도 오늘 이렇게 제가 자알 살아있는 걸 보셨으니 되셨지요?”


이번에도 나는 그녀에게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웃음으로만 말하는 저 표정이 사실 난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부러 바스티앙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외면하고 있는 것도 일부 사실이다.


저 미소는 항상 내 기억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도 이번에 한해서 내가 짬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제나스교의 성전(聖戰) 선언.


7백 년 전, 종말의 용과 마물의 급습으로 갑자기 시작되었던 성마전쟁(聖魔戰爭)과는 반대로, 이번엔 인간이 마를 향해 선포하는 거룩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서게 될 것이 나, 빛의 성자(聖子) 그리안.

이 전쟁을 발안하고 여기까지 준비한 것도 바로 나, 제나스의 제일검 그리안되시겠다.


그러니 어찌 다망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무래도 바로 이틀 뒤면 출정이다.

지금도 이러고 있을 때가···.


“경께선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열중하느라 헛소리를 들었나?


“네? 성녀님 미치셨···? 아니, 아니, 아니. 죄송합니··· 으억!”


아닌가 보다.


바스티앙은 같은 곳을 두 번이나 맞고 기어이 깽깽이걸음을 걸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 어쩔 건데, 네가.


“그리고 여전히 자신은 돌보지 않으시고 낮은 자들을 위해 더욱 낮아지고 계시죠.”


내가 바스티앙의 무너진 위계질서를 참교육 해주고 있는 사이, 실비아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저도 할 일이 없어 이곳까지 와서 푸념을 늘어놓는 건 아니랍니다. 가시죠, 그리안 경. 경께서 무사히 사명을 다하실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돕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실비아. 그래야지요. 이번에는 반드시···.”


나는 앞서가기 시작하는 성녀를 따라 무거운 발을 떼었다.


그것은 비단 갑옷의 무게 때문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이틀 뒤, 성도에는 자애의 달답지 않게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으나 사람들의 열기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전(聖戰)을 향해 가는 용사들의 행렬이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수도를 지켜야 할 중앙기사단의 3할 편성, 그들을 지휘하기 위한 상급 기사들.


전 세계를 돌며 순례하던 자유 기사와 사제들까지 모였으며, 제나스를 벗어나면 각국을 수호하는 넘버 기사단과 국경수비대까지 합류할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제나스교의 최고 권세자인 일곱 추기경 중 넷이나 직접 참전한 유례 없는 군대였다.


그런 그들의 질서정연한 행렬은 가히 장관.

이날을 위해 광을 낸 기사들의 갑옷은 눈부시게 빛이 나고

신앙으로 갈고 닦은 그들의 눈빛은 그보다 광채를 발했다.


이 광경을 직접 본 자는 누구든지 신의 군대가 바로 여기 있다며 소리칠 것이다.


시인은 이를 노래하고 예술가는 본 것을 화폭으로 남겨 영원토록 후대에 전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모두의 기대와 시선을 받으며 열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곳 성도로 다시 돌아오는 그날에 이보다 더 큰 환대가 나를 맞이하리라.


아니, 그런 것보다 마침내 이 땅에서 마를 뿌리 뽑고 모두가 최소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런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검을 뽑아라.


목청을 울려라.


하늘에 계신 제나스께 모든 영광을!


종말에서 태어난 악종들에게 신의 철퇴를!


자, 이제 시작이다.


“전군! 출정!”


나는 고양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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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10) 24.03.29 2 0 13쪽
22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9) 24.03.28 4 0 12쪽
21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8) 24.03.27 4 0 12쪽
20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7) 24.03.26 6 0 12쪽
19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6) 24.03.25 6 0 14쪽
18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5) 24.03.23 5 0 13쪽
17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4) 24.03.22 6 0 12쪽
16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3) 24.03.21 6 0 12쪽
15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2) 24.03.20 6 0 15쪽
14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1) 24.03.19 7 0 14쪽
13 ep4.썩은 땅콩의 수난(6) 24.03.18 7 0 13쪽
12 ep4.썩은 땅콩의 수난(5) 24.03.16 5 0 14쪽
11 ep4.썩은 땅콩의 수난(4) 24.03.15 6 0 15쪽
10 ep4.썩은 땅콩의 수난(3) 24.03.14 6 0 12쪽
9 ep4.썩은 땅콩의 수난(2) 24.03.13 6 0 15쪽
8 ep4.썩은 땅콩의 수난(1) 24.03.12 5 0 13쪽
7 ep3.벌거벗은 기사(2) 24.03.11 7 0 13쪽
6 ep3.벌거벗은 기사(1) 24.03.09 7 0 13쪽
5 ep2.노래하는 자들 24.03.08 11 0 13쪽
4 ep1. 성전, 그리고 부활(4) 24.03.07 8 0 14쪽
3 ep1. 성전, 그리고 부활(3) 24.03.06 9 0 12쪽
2 ep1. 성전, 그리고 부활(2) 24.03.05 10 0 12쪽
» ep1. 성전, 그리고 부활(1) 24.03.05 1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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