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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지저씨 님의 서재입니다.

부활의 성자, 이단의 괴수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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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씨
작품등록일 :
2024.03.01 11:46
최근연재일 :
2024.03.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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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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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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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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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썩은 땅콩의 수난(3)

DUMMY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이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드리옵고, 올려드리는 모든 제사 홀로 받으시오며···.”


이른 아침. 신전의 만창장에서 라이튼 셀포스 주교(bishop)가 식전 기도를 대표해서 드리고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실내.

반대편 음식을 먹기 위해선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법한 넓은 테이블의 음식은 이 시간부터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은 고작 두 사람과 사용인 몇 사람뿐.

차려진 만찬과 대조되는 인원수에 약간의 기괴스러움까지 느껴졌다.


“음. 오늘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맛이 섞여 있구나.”


기도를 마친 후, 조용히 식사를 시작한 라이튼 주교가 이내 수저를 내려놓고 점잖게 말했다.

작은 말소리였지만 소리가 반향 되어 온 탓에 괜히 더 엄숙하게 들렸다.


“앗···. 예, 그렇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그의 말에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가 화들짝 달려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니다. 아주 따뜻하구나. 아, 물론 아침의 빈속을 달래주는 온기 자체도 그렇지만 내 말은 이 스프가 주는 맛 자체가 따뜻하다는 얘기란다. 정성이 느껴지는 맛이야.”


“아···! 감사합니다. 주교님.”


걱정과는 달리 인자한 표정을 한 주교의 칭찬에 소녀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안도했다.


“이리 와 보거라.”


소녀는 이미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뒤쪽에 바짝 붙어 있었지만, 주교의 손짓에 그의 옆으로 가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못 보던 얼굴이구나. 새로 들어왔느냐?”


“예. 이제 신전에서 봉사한 지 스무날 정도 지났습니다. 항상 부엌에서 허드렛일만 하다가 요리장님께서 오늘은 한 번 거들어보라 하셔서···.”


“하하. 요리장은 그리 보여도 아무에게나 조리를 맡기지 않는 사람이지. 필시 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그래, 이름은 무엇이냐?”


“예, 주교님. 제 이름은 안나라고···, 힉?!”


곁에서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대화가 오가던 한참.

소녀, 안나가 별안간 옷 속에 들어간 벌레라도 발견한 것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이제 막 처녀가 되어가는 그녀의 둔부를 기특하다며 두들기는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음? 왜 그러느냐? 어린 나이에 기특하구나. 셀포스에 온 지도 얼마 안 됐겠지? 가족들은?”


“앗, 아···. 저기···. 네, 새언니랑 어린 조카가···.”


그러나 라이튼 셀포스는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능청을 떨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래. 잘 되었구나. 이제 저 짐승 소굴 같은 외지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니. 안심하거라. 셀포스는 안전하단다. 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너희 같은 어린 양들을 우선시 하게 되고 마는구나.”


소녀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대답을 이어갔지만, 남자의 손길은 어느새 끈적한 주물럭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에···. 감사···합니다. 주교님.”


안나는 몸을 뒤트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이제 상을 물리게. 나는 그만 기도실로 가봐야겠어. 오늘도 셀포스의 백성들이 무사하길 바라며 ‘거룩한 의지(holy will)’과 함께 기도를 드려야지. 앤드류 자네도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하지.”


“예, 라이튼님. 다녀오십시오. 제나스의 축복이 오늘도 함께하시기를.”


라이튼 주교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던 대사제이자 셀포스의 사제장인 앤드류는 조용히 입을 닦으며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교와 사제장이 자리를 떠나자 만찬장은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주위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사용인들도 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주고 갈 뿐, 곧 자기 할 일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치마 앞섬을 꾹 움켜쥐고만 있었다.


**


‘역시 어린 계집이 좋군. 오늘은 저 계집애로 해볼까···.’


라이튼 셀포스는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나풀거리는 발걸음으로 기도실로 향하고 있었다.

셀포스를 요새 도시로 있게끔 하는 성유물 ‘거룩한 의지(holy will)’를 운용하기 위해서였다.


마(魔)에 대해서는 절대 방어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성법, 신성불가침(sacrosanctity).

사용 제한이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거룩한 의지는 그 단점마저 지우는 것에 더해 광범위 발동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성유물이었다.


하지만 이 전례 없는 성유물도 결국 자아 없는 물건.

실질적으로 기도를 올리는 제나스 성도가 없다면 성법을 자동으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본래 성유물이란, 성인이라 칭송받은 위인들이 기도를 위해 사용했던 성물(聖物)이 남아 유산(遺産)이 된 것이다.

이것을 타인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을 통해 사도 전승(apostolic succession)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 이는 1인 전승 체제지만, 셀포스를 위해 24시간 유지되어야 하는 ‘거룩한 의지’는 현재 라이튼 외에도 2명의 사용자가 더 있는 것이었다.


“좋은 아침일세 데클렌. 아니, 자네에겐 밤새 고생했네라는 인사가 나은가?”


라이튼이 기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시간이 벌써 아침이 되었군요.”


셀포스의 경비대장이자 자정부터 동이 튼 후까지의 기도를 맡은 거룩한 의지의 사용자, 상급 성기사 데클렌이었다.


“그래, 앞으로의 여덟 시간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이만 가서 쉬시게. 아니면 또 곧바로 경비대에 가볼 생각인가?”


“예, 그래야지요. 다른 사람들에겐 이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지 않겠습니까. 밤새 별고는 없었는지 돌아봐야 마음이 놓입니다.”


“셀포스 만큼 평온한 도시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마음대로 하게.”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주교가 기도를 이어받는 것을 본 데클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신전 내부의 밤샘 기도였음에도 갑옷으로 무장한 차림새가 그의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데클렌 경 아니십니까. 덕분에 오늘 밤도 평온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기도실을 나와 신전의 예배당에 도착하자, 모페드 대사제가 아직 졸린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밤새 잘 주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제가 제 사명을 다했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시는군요.”


이것은 데클렌 나름의 농담이었으나 모페드는 잠이 덜 깬 탓인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부지런도 하십니다. 바로 경비대로 가시는가 보죠? 기사라 그런가, 체력이 남다르시네.”


그에게는 늘 있는 일이지만 모페드는 ‘주교님이랑 사제장님은 끝나고 나면 기본 세 시간 티타임이던데···.’라며 그를 신기해했다.


“그럼 이만···.”


이 남자의 말 상대를 하고 있으면 언제 귀찮아질지 모를 일이라 데클렌은 적당히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아, 데클렌 경.”


“예. 아직 하실 말씀이라도?”


“음···. 그게 말입니다.”


데클렌이 알기로 모페드는 시동이 걸리지만 않으면 오히려 말이 없는 편에 가까웠다.

사람 대하기를 어려워하는 건 아니나 보통은 사색에 빠져 있곤 했으니.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의 쪽에서 용건이 있는 듯했다.


“아닙니다. 힘내시라구요. 파이팅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러나 잠깐의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희한한 일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속을 파악하기 힘든 자이니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탐욕을 꿰뚫는 신안(神眼)의 지혜가 그대 발 앞의 수렁을 비춰주기를···.”


그렇게 떠나가는 데클렌의 등 뒤로 모페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


“주교님. 시간 다 되었습니다.”


어느새 겨울의 짧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가 되었다.

교대 시간에 맞춰 다음 순번인 앤드류 사제장이 기도실을 방문했다.


“그래, 자네 왔는가. 겨울이라 그런지 오래 앉아 있으려니 몸이 굳는군. 기도실이 더 따뜻했으면 좋겠어.”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라이튼은 의자에서 육중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실 줄 알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 놨으니 식전에 몸을 좀 녹이시지요.”


라이튼의 뒤를 이어 기도 준비를 하면서 앤드류가 대답했다.


“음, 따뜻한 차 좋지. 그런데 앤드류. 물만 마시기에는 속이 허한데 혹 곁들일 다과는 없나?”


“물론이지요. 고된 일과 후에는 달달한 것을 좀 섭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주교님 개인실에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역시 자네로군. 그런데 오늘의 메뉴는 무엇인가?”


뒷짐을 쥐고 앤드류의 말을 흡족해하던 라이튼이 은근슬쩍 그에게 되물었다.


“직접 보실 때의 기쁨을 위해 비밀로 남겨두고 싶지만, 입이 또 근질거리는군요. 아침 식사 때 주교님이 드시고 싶어 하셨던 메뉴라고만 해두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래. 자네는 눈치가 참 빨라서 좋아. 그럼 나머지는 내 직접 가 확인하는 것으로 하겠네.”


“예, 주교님.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


-똑똑


“주교님, 차를 좀 내왔습니다.”


라이튼이 안락의자에 잠겨 기대감을 만끽하고 있자, 곧 노크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래. 안나구나. 어서 들어오거라.”


“예, 주교님.”


양손에 쟁반을 든 채로 재주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침 만찬장에서도 시중했던 안나라는 소녀였다.


조심스럽게 주교의 개인실에 들어온 그녀는 처음 같지 않은 솜씨로 책상에 다과를 놓으며 차를 따랐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 기다리거라.”


어쩐지 긴장한 모습으로 빨리 자리를 뜨려는 안나를 라이튼이 불러세웠다.


“기도를 오래 드렸더니 손발이 아직 차서 움직이기가 힘들구나. 이리 와서 좀 먹여주지 않겠니?”


세 살짜리 아이도 아니고···.


소녀는 문득 자신의 어린 조카가 음식을 받아먹는 귀여운 장면이 떠올랐으나, 그 얼굴이 눈앞의 남자로 바뀌자 소름이 돋았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임시 거처에서 새언니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조카 생각에 안나는 주교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라이튼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채 팔을 뻗어 다과를 그의 입에 가져갔다.


-톡, 호도독.


“어이구,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니. 그러지 말고, 그래. 여기 내 앞에 앉으면 가까우니 떨어지지 않겠구나.”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안나의 가냘픈 허리에 우악스런 팔이 휙 감겨왔다.


“자, 잠깐···!”


소녀는 단말마를 질렀으나 별다른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끌려가 라이튼의 품에 안긴 형상이 되고 말았다.


손발이 차기는 무슨, 소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은 불쾌한 열기가 가득했다.


“어허! 셀포스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게 누구 덕인 줄 알고? 너를 위해 고행한 나를 위해 이 정도 봉사도 못 하겠다는 것이냐? 오호라, 그렇구나. 너는 셀포스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는 게야.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하였거늘. 그렇다면 네가 정녕 마물이 득실거리는 저 바깥으로 쫓겨나고 싶다는 뜻이렸다?”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으나 자기보다 세 배는 무거울 것 같은 성인 남성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오히려 그 발버둥마저 즐겁다는 듯 라이튼은 즐겁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으, 으윽···! 잠깐, 잠깐만요. 주교님. 잠깐 이것 좀 보세요.”


도저히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급하여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품 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 필사적으로 주교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음? 이게 뭐지?”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종이와 문자에 라이튼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 이건 설마···?”


여유 있게 소녀의 손에서 쪽지를 받아든 라이튼의 표정이 일순 간에 얼어붙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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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5) 24.03.23 5 0 13쪽
17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4) 24.03.22 6 0 12쪽
16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3) 24.03.21 6 0 12쪽
15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2) 24.03.20 6 0 15쪽
14 ep5.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1) 24.03.19 7 0 14쪽
13 ep4.썩은 땅콩의 수난(6) 24.03.18 7 0 13쪽
12 ep4.썩은 땅콩의 수난(5) 24.03.16 5 0 14쪽
11 ep4.썩은 땅콩의 수난(4) 24.03.15 5 0 15쪽
» ep4.썩은 땅콩의 수난(3) 24.03.14 6 0 12쪽
9 ep4.썩은 땅콩의 수난(2) 24.03.13 6 0 15쪽
8 ep4.썩은 땅콩의 수난(1) 24.03.12 5 0 13쪽
7 ep3.벌거벗은 기사(2) 24.03.11 7 0 13쪽
6 ep3.벌거벗은 기사(1) 24.03.09 7 0 13쪽
5 ep2.노래하는 자들 24.03.08 11 0 13쪽
4 ep1. 성전, 그리고 부활(4) 24.03.07 8 0 14쪽
3 ep1. 성전, 그리고 부활(3) 24.03.06 9 0 12쪽
2 ep1. 성전, 그리고 부활(2) 24.03.05 10 0 12쪽
1 ep1. 성전, 그리고 부활(1) 24.03.05 1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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