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마음을 두드리는 과정의 시작
“ 허... ”
거지 아이 하나쯤 내친다고 별 일이야
있을까 다만 헥터백작의 존망은 신이
아니고서야 언제고 끝이 날 것이니
그 뒤를 이가 루소라면 자신의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요,
이를 무시라도 한다면
“ 예견된 미래를 비참히 맞이하실지
가문의 주인이 되어 거슬리는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둘 것인지는
오로지 게일공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다시금 생각해 주십시오. “
건방지나 말이 틀리진 않는다.
마치 속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찝찝할 뿐
“ 내가 원치도 않는 연회를 들이미는
데는 분명 이득이 있음인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이냐? “
“ 물론입니다. 초대는 분명히 받게
될 것인데 그 전에 게일공께서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뭐지? ”
“ 핏셔가에 연통을 넣어 백작님을
만나 뵙기를 청하십시오. ”
“ 어쩌다 경매장에서나 몇 번 스친
것이 다다. 교류가 없던 내게 쉽게
손을 내밀까? “
“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예전의
헥터가라면 면전에다 대고 거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요. “
“ 그래도 장사치라는 꼬리표는
여전한 걸. ”
“ 대공가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공녀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돕지 못한 것을 두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죠. “
귀족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가득한 사교계라면
더더욱
‘ 아픈 걸 들키면 잡아먹힐 수 있기에
숨기는 동물이랑 별반 다를 게 없지.
대 놓고 이를 드러내는 길거리보다도
더 독한 것 같아. ‘
“ 수를 내다보기라도 한 거라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냐? ”
“ 게일공께서 발을 내딛을 디딤돌이
안전하도록 말을 만드는 게 제가
살 길이기도 하니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
“ 루이의 말투를 반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쯧. 그럼 핏셔백작을
만나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을까. “
“ 이번 재판으로 인해 득을 본 게
불쌍한 거리 아이들만은 아닙니다. ”
“ 미궁으로 빠질 뻔한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본 건 그들뿐일 텐데. ”
“ 표면적으로야 그렇지만 숨겨진
뒷면엔 페이가와 핏셔가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
이번 재판은 순수하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벌인 판이다.
거기서 생각지 못한 파이의 기억이
이래저래 쓸모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 대공의 시선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야
줄을 서고도 남지. ”
“ 그렇지요. 서로에게 집중하도록
한다는 게 그만 페이가 쪽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핏셔가가 본의
아닌 득을 얻게 되었으니 한층 들떠
있을 겁니다. “
“ 틈을 노리라는 거군. ”
“ 대공의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공가의 문턱을 넘는 모든 것에 관대한
지금이 적기니 간단히 즐길 수 있는
담소 거리와 약소한 선물 정도면 시작이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
나쁠 리가 두 손 들어 환영을 해도
모자를 것이다. 왜냐면
“ 쉘이 멍청하게 파이한테 속아 녀석을
돕는 바람에 페이가의 욕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게 되니 이를 만약 대공이
알기라도 한다면. “
“ 핏셔가 역시 버림받을 지도 모르니
그 날의 결과를 이끈 헥터가 아니
비네를 가까이 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겠네. “
“ 연회를 참석하는 많은 귀족들의
하나이기 보다 대공가와 각별한
핏셔가와 나란히 있다면 그림이
제법 좋을 거야. “
“ 그래서 나하고 있을 시간이 많이
없을 테니 그 동안 공부에 매진하고
있어라? “
“ 나랑 같이 돌아다니는 게 절대 백작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을 거야. 괜한
오해도 살 거고 그러니까. “
“ 뭘 그렇게 구구 절절 해. 그냥 미안
하단 말 한 마디면 될 걸. ”
“ 미안하단 말 하나로 어떻게 네 화를
풀 수 있겠어. ”
“ 내가 애초에 몰랐을까봐? 능력이
있어도 쓰질 못하면 부질없는 걸. ”
“ 루이... ”
“ 뭐~ 수업에 집중하면 헥터가
밉상들하고 부딪히는 일도 적을 테고
그 티쳐라고 했나? 그 사람이 인상은
그리 좋진 않아도 수업은 꽤 재미있어. “
나는 머리에 박히듯 기초가 들어가
있지만 루이는 텅 빈 상태라 헥터
백작에게 간청해 티쳐를 저택으로
불러 들였다.
“ 티쳐가 제법 방패막이가 되어주잖아.
그리고 입이 무겁기도 하고. ”
아나나스 부인과 달리 티쳐는 칼에게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기에 군더더기가
없어 딱 적격이기도 했다.
“ 뭐~ 귀엽고 사랑스러움만으론
내 무대를 지탱할 순 없지.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 될 테니까 머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교양은 절대 나이를
먹지 않고 우아하고 고상하게 남으니
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 “
“ 고마워 루이. ”
“ 고마우면 나가서 빈손으로 오지 말고
자린언니가 만든 쿠키라도 챙겨오면
더할 나위 없겠네. “
“ 알았어. ”
아이들 보고 싶은 거야 나만큼 할까
그들에겐 루이는 엄마와도 같은
존재였으니.
“ 내일 정오에 차를 함께 하기로 했다. ”
드디어 게일공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 잘되었습니다. 지금 쉘의 증언으로
핏셔가 입장에선 꽤 껄끄러울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 쪽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이제 헥터백작님께 이를 알리셔야
하는데 아? 그보다 오늘 오찬 때
백작님께서 일찍 자리를 뜬 것이 무릎
통증이 도진 것이라고 “
“ 고질병이 된지 오래다. 치료를 하자고
하여도 노인네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보니 내가 일전에도 말했듯이 당신께선
아직 건재함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신지 원. “
“약해진 지금이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 여지껏 내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분이시다. 이런 일로 나를 달리 보실 리
없어. “
‘ 어린애처럼 보채보기는 했고? ’
하여간에 제일 닮은 그들이라 서로를
더 미워하는 건지도
“ 미래의 헥터가 주인으로서 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운 어른처럼 그러지 마시고
통증에 좋은 약을 직접 들고 가셔서
이야기를 꺼내보세요. “
“ 그런 건 아랫것들에게 시키면 될 일을
아니 정 그러면 네가 가져다 드리면서
슬쩍 떠보면 되겠군. “
“ 곁을 내어 줄 분이 계시지 않는 지금
자제분들 중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종 전 제일
기억에 남는 이는 백작 부인을 대신해
살뜰 했던 그 누구일 것입니다. “
돌려 말하면 알아들어 먹질 않아
꼭 이렇게 날 나쁜 사람 만든다.
돌아가신 백작부인까지 들먹이니
곧장 매서워지는 게일공을 난
애써 무시한 채 나중을 생각하자고
달래어 손에 홍화를 들려 주었다.
“ 황궁에서의 초대장이라 실로
오랜만이군. ”
“ 아무래도 대공가의 일이 황제폐하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
“ 오랜만에 황실에서 아이 웃음 소리를
듣나 했을 테니. ”
“ 그래서 말입니다 아버님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핏셔백작님과 함께 동행을
했으면 합니다. “
“ 그 자는 왜? ”
“ 아슬란의 시찰단을 원래라면
대공각하께서 접대를 해야 하나
대공비의 상태 때문에 오래 있질 못해
그 자리를 핏셔백작이 대신 한다고
합니다. “
“ 아슬란에서 채굴되는 광물이 좋은 게
많긴 하지. ”
처음엔 떨떠름하던 헥터백작이 아슬란
시찰단과 거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란 걸 눈치 채고 태도가 부드러워
졌다.
“ 그래서 연회 참석 전 방문을 요청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
“ 핏셔백작이 쉽게 곁을 내 줄 사람이
아닐 텐데. ”
“ 대공께 진심을 내보인 덕분인 듯
합니다. ”
“ 아부만 잘하는 게 아니었나보구나. ”
비네가 대공가를 찾은 것을 두고 여지껏
부린 게 재롱만이 아니었음을 느끼고
조금은 마음이 든 듯 했다.
“ 아이 어미는 어찌 되었다고? ”
“ 지병으로 세상을 버린 지 오랩니다.
지인을 통해 비네를 부탁한단 말만
남긴 터라 부모나 친인척이 어디
있는 지 어느 가문의 사람인 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
“ 너도 참 무심하구나. ”
“ 별 의미를 두지 못한 탓이지요.
그 보다 이것을... ”
더 캐물을 것 같은 헥터백작 앞으로
아펠이 주었던 홍화를 달인 차를
내밀었다.
“ 뭐냐? ”
“ 이맘때쯤이면 심해지지 않습니까.
마침 좋은 홍화가 들었다기에. ”
“ 아랫것들을 시키면 될 일을
번거롭게. ”
“ 비네 덕에 안 보이던 게 너무 잘
보여서 그냥 지나치기가 좀. ”
“ 내가 죽기 전에 네 철든 모습을
보는 건 꿈도 못 꿀 거라 생각했는데. ”
별일이라며 중얼거리긴 했지만
홍화차를 적시는 입꼬리는 찻잔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드디어 핏셔가에 도착했다.
“ 절대로 먼저 나서시면 안 됩니다. ”
“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비네가 직접
와서 아양을 떠는 게 더 낫겠군. “
“ 아무리 그래도 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칫 백작가를 우롱하는
처사로 비쳐줘 관계를 돈독히
하기는커녕 적이 될 수도 있으니... “
“ 그만~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한낱
어린 너에게 이 따위 설교나 듣고
있으려니 한심해서 그런 것을. “
‘ 네네~ 어련하시려고 누구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진짜~! ’
“ 표면적으로는 페이가의 실수로 인해
핏셔가에 기울었다고 보여지나 핏셔가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
“ 대공가에 심어둔 페이가의 세작을
도왔다는 그것 때문에? ”
“ 네. 그 불편한 진실이 어리석은
실수임을 대공각하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건 자칫 변명으로만 보일 수
있어 고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
“ 지나친 욕심이 부른 화를 나보고
끄라니 원. ”
“ 당연히 그냥 끄셔는 안되지요.
조아리긴 하나 애원은 핏셔가에서
해야 마땅하니 적당히 맞추며 안달
나게 하시면 될 것입니다. “
그렇게 아펠에게서 주의를 들은
게일공은 핏셔가의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 그대가 나를 보고자 했다고? ”
얼마 지나지 않아 반백의 중년 남성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게일공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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