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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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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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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쪽

파륵오륜담 2부 탈피 6

DUMMY

무엇 때문에 눈앞의 자들을 싫어하는지는 명연(冥淵)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척 귀찮고 거슬렸다. 자신을 끌어내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용이 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 뱀도 아닌, 용도 아닌 어중간한 이무기라는 것은 운신하기가 때론 매우 까다로워서 몸을 숨기고 잠을 잤다. 차가운 물은 자신의 생태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전혀 괴롭지 않았다.

용이 되어 올라간 친우가 예전 독과 같다한 고독도 자신의 천성에는 얼추 맞는 것이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이완될 수 있었다. 그 감각은 세월을 잊게 하기엔 충분했으며 아무런 고통도 동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휴식 혹은 본업에 가까운 잠을 방해한다고 해서 그들을 죽이거나 할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나름의 까닭이 있어 이(異)들도 인간들에게 협력 혹은 기생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스스로도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반골(反骨) 기질이 팍팍한 자신의 눈엔 그건 비정상적인 행태에 불과했다.

만물은 제자리가 있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것으로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수행을 한 자들이 가세한다는 것은 비록 수행의 경지가 높지 않다고 해도 뭔가 아닌 일이었다.

수행은 탐욕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가장 강력한 본능인 식욕, 성욕, 수면욕을 버리고 자신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그럴 때 자신 안의 더러운, 그러나 보듬어야할 불쌍하고도 가련한 본(本)을 직시하게 된다.

그런 과정 없이 힘을 얻는 자들은 대체로 전생의 수행을 통해서이다. 인간도와 축생도를 제외한 다른 사도(四道)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런데 저것들은 과연 수행을 한 놈들인가!’

공중에 뜬 채로 내려 보며 가슴이 부글거리는 것을 억제하려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건 마치 여러 가지 동물들의 특성을 인간에게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는 육체적이고 속된, 외부적 폭력을 행사하는 괴물.

그들에게서 청정한 풀잎내음을, 바다내음을, 물내음을, 흙내음을, 바람내음을 맡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금속성의 냄새 혹은 누린내에 가까운 육향이 역겹게 풍겨 그것들을 가리고 있었다.

“제 집을 방문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스켈이 과장스럽게 손을 저어대며 느끼하게 말했다. 명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지면에 내려섰다. 백색견은 황금빛 광채 도는 눈으로 주의 깊게 명연을 보기만 할 뿐 덤벼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움츠려진 듯 보이는 넓적한 발과 팽팽한 등의 곡선이 언제든지 누구한테라도 달려들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명연은 객관적으로 상대의 힘을 측정할 순 없었으나, 자신의 수준 안팎에선 조금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백색견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곤, 적이 아니라면 결코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

“왜 그렇게 끈덕지지? 너희에게는 충분한 동료들이 있지 않아?”

스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황망한 척 답했다.

“당신 같은 분은 또 없습니다.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당신께서도 우리들의 사상에 감화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명연은 입술 한쪽 끝을 삐딱하게 올렸다.

“함정일지도 모르지.”

스켈의 와인색 선글라스 아래의 눈이 꿈틀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힘은 저희들보다 강합니다. 저희가 무슨 수로 나가려 하는 당신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눈에 빤히 보이는 허튼 수작에 넘어가고 싶진 않았지만, 넘어가보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제하려고 했지만 저절로 회상되는 과거의 소소한 승리들에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무럭무럭 새삼스럽게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잠은 이제 완전히 깨버렸고, 험악한 물귀신들을 잡아 누르며 노는 것도 슬슬 질리는 참이다. 게다가 뚜껑달린 장난감 같은 곳을 벗어나 창공을 누비며 세상을 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놈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아야!’

자신의 보금자리를 들쑤셔 편치 못하게 했던 놈이다. 마땅히 갚아주어야 할 것이고, 그건 당연히 같은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었다.

“좋…….”

명연의 말 위에 소년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좋다. 네 집과 네 사상이란 걸 알아보고 싶군.”

려은은 가현의 얼굴을 보았다. 가현은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란 뭐지?’

려은은 혐오를 일으키는 괴상한 모습들의 이들을 바라보았다. 옷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유스러운 모습이다. 게다가 정신도 곧아 보이지 않는 불안정한 시선에 탁한 눈동자였다. 부속품처럼 은회색 구멍이 빠끔빠끔 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기계의 고리들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이미 말라죽은 고목에 머리카락을 풀어 매단 수급들이 덜렁거리는 모양을 연상케 했다.

려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가현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손을 펼쳐 손바닥 위에 치직치직 검은 색 번개로 뭉쳐진 구를 만들어냈다.

스켈과 이(異)들이 놀란 혹은 의혹의 표정으로 려은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려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스켈과 이들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기계를 향해 던졌다.

검은 구(球)는 기계에 정확히 명중했으며 순식간에 검은 번개가 기계를 둘러쌌다. 그리고 기계는 끼기기긱 이상한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더니 마침내 검은 구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구는 새하얀 빛과 함께 지이잉 없어졌다.

기계에 매달려 있다가 정신없이 흩어진 이들이 려은을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현 또한 놀라 려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놀람은 스켈과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려은은 즐거운 듯 화색을 띤 얼굴로 그 모습을 일련의 죄책감이나 걱정, 염려, 동정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젖어 볼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따라 그 끝에 이르러 봉(封)이라 자신의 피로 붉게 새긴 흰 비단 끈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려은의 안에 자리한 파륜(破輪)은 파천흑룡(破天黑龍)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별호로서 파륜의 본성을 짐작컨대, 파괴의 화신 혹은 강력한 천장(天將). 라후가 십년 동안이나 공을 들여 그의 세 가지 봉인 중 하나를 풀 정도로, 제석천의 아들이라는 자신을 도구로 여길 정도의 그런 존재인 것이다. 과거의 대전쟁의 원인이 된 자.

가현은 미간을 좁혔다. 파륜의 수염은 수염 그뿐인데도 여의주를 봉인한 결계 중 하나를 뚫었다. 그리고 그 여의주가 자신을 이용하여 파륜의 혼을 지닌 려은을 끌어들였다. 마지막으로 파륜의 영혼은 여의주를 흡수함에 따라 각성을 하고 려은은 흔들리고 있다.

가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기쁜 듯 눈을 반짝이는 려은의 뺨을 후려쳤다.

려은의 눈동자에서 소름끼치는 분노가 벌겋게 일어났다. 그 순간 가현은 려은이 왜 죽으려 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려은은 아직 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낌새를 이미 느끼고 있었음이었다.

“정신 차려, 멍청이.”

려은이 눈을 크게 뜨고 껌벅껌벅 했다. 가현의 입에서 ‘멍청이’와 같은 단어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가현의 흑운모와 같은 검고 깨끗한 눈이 슬픈 것처럼 아프게 울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려은은 가현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읽어내었다.

“미안.”

가현은 고개를 돌려 스켈을 향했다. 소마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현은 서둘러 몇 걸음 걸어가 소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 변해도 싫어하지 않는 거지?”

려은이 낮게 중얼거렸다. 가현은 움찔 했으나, 뒤돌아보거나 답하진 않았다.

“손님이 늘었군요! 저로선 정말 기쁩니다. 자, 함께 가시지요.”

그러면서 스켈이 가리킨 곳은 태양에 은빛으로 빛나는 건물 중 가장 높고 뾰족한 것이었다.


“여긴가.”

타호(嶞狐)는 입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입안이 마를 정도로 긴장하는 건 오랜만의 일로, 꽤나 즐거웠다. 인간들의 미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인간들 속에 섞여 살아왔지만, 온기를 품을 줄 아는 흙을 제쳐두고 이런 땅땅거리는 금속을 이용하여 건물을 짓는 건 무슨 심보일까.

그러나 편리할 것 같기는 했다. 정(精)이 서려있지 않는 금속 건물은 타호에겐 유리알같이 아름답게 빛나는 매끈한 얼음판과 같았다. 그 위를 미끄러지는 건 얼마나 쉽고 기분 좋은 일인가.

타호는 미간을 좁히곤 호박색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꿈틀꿈틀 붉은 핏줄이 눈동자를 둘러싸듯 일어나고 그의 갈색 머리칼이 언뜻 몇 갈래로 갈라지며 길어지는 듯 보였다.

마침내 타호는 형체의 경계를 없애고, 무색투명한 공기와 일체가 되어 스멀거리며 금속 벽의 미세한 틈을 통과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쪽인가, 아니, 저쪽!’

타호는 벽을 따라 재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곳입니다.”

꽤나 신경 쓰는 듯한 정중한 태도와 신중한 어조로 스켈은 말했다. 려은은 머리를 뒤로 힘껏 젖혀도 그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는 건물이 스켈의 집일뿐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단순히 생활만을 위한 집이라면 굳이 자신들을 끌어들이려 할 이유가 없었다.

스켈과 이(異)들, 그리고 려은, 가현, 소마, 명연을 데리고 온 비행정은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각으로 비어버린 자리는 곧 사각형의 한 변에서 튀어나온 덮개로 덮였다. 착륙 전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려은은 무릎을 굽혀 지면의 잔디를 만졌다.

“가짜?”

스켈은 와인색 선글라스의 다리 하나를 잡아 치켜 올리며 답했다.

“가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흙이 있어야 자라고 날씨에 따라 생장상태가 변하는, 벌레가 끼는 잔디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요. 언제나 푸름을 간직한다는 것에 잔디의 존재의의가 있는 겁니다.”

명연이 킥 웃었다.

“차라리 초록색 물감을 칠하지 그랬어?”

스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마에 핏줄이 무섭게 섰으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예의상의 미소임이 분명한 표정을 짓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시위하는 듯한 지나치게 쾌활한 말투로 외쳤다.

“안에는 여러분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 놀라운 것들이 있습니다! 제 가슴이 다 뛰는군요!”

소마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가현이 손을 뻗어 목을 꽉 누르듯 했다.

“왜 그러는 거야?”

려은이 걱정스레 물었다. 명연도 소마의 드러난 하얀 송곳니와 붉은 잇몸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스켈이 말하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백색견이 저만큼 반응하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았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세상으로 오시는 겁니다. 눈을 뜨게 해드리겠습니다!”

스켈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이들이 뒤따랐다.

‘꺼림칙해…….’

려은은 발이 땅에 붙은 듯 느껴졌다. 그러나 가현은 소마를 걱정스레 보았으면서도 주저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못해 따라가는 려은 속에서 파륜이 웃었다.

‘크크큿, 재밌겠어!’

려은은 멈칫 했지만 달리듯 해서 명연의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안에 들어갔다.

건물 주위엔 무향(無香)의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몸체의 끝 첨단(尖端)이 가리키는 푸른 하늘엔 점점이 부정형의 하얀 구름들이 흩어져 있었다. 구름들은 천천히 동쪽을 향해 바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타호! 제가 왔어요!”

코끝이 붉고 선량한 까만 눈동자가 사랑스러운 남자아이였다. 그리고 그 옆엔 건장한 청년이 호피(虎皮)를 두르고 피로 물들인 듯한 검붉은 머리칼을 마구 휘날리며 서 있었다.


“저건 뭐죠?”

물풍선같이 물컹물컹한 연한 연두빛 젤 속으로 이(異)들이 뛰어드는 것을 보고 려은이 물었다.

“잘 물으셨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들은 그 속에서 눈을 감고 잠을 자듯 숨을 고르고 이완하고 있었다.

“저건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의 기분을 재생, 반복시켜주는 장치입니다. 피로나 스트레스 따윈 저 속에선 전혀 없습니다.”

스켈의 말에 려은은 약간은 혹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그건 과거잖아? 허망할 뿐이야.”

명연(冥淵)의 말에 스켈은 고개를 획 돌리며 '다음!‘ 하고 외치곤 뚜벅뚜벅 걸어갔다. 려은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산처럼 거대한 모습의 유동체 안에서 자신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파륜의 기억일까, 아니면 나의 기억일까.’

려은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좁은 통로에 가현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켈과 명연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마가 가현과 려은의 중간 지점까지 와서 눈을 반짝이며 려은을 보았다.

“아, 그래. 갈께.”

마치 알아들은 듯 고개를 위로 살짝 들었다가 놓고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가현의 곁으로 돌아갔다. 가현은 평소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려은이 걷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가현과의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려은은 가현이 아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 보폭을 좁혀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변해도 싫어하지 않는 거지?’

그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려은은 이로써 만족했다.

스켈이 별안간 큰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께는 웬만한 것으론 안 될 거란 생각입니다. 특히 물속에 있었던 누구씨 때문에 말이죠!”

명연이 즐거운 듯 능글능글 웃으며 덧붙였다.

“누구씨가 아니라, 명연씨라고. 나 말이야.”

못 들은 척 하고는 스켈이 명연을 화나게 하려는 듯 명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가시 돋친 어투로 말했다.

“대단한 줄 알았더니 미학(美學)도 모르는 이무기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지요!”

명연은 콧방귀를 뀌곤 태연한 얼굴로 스켈을 바라볼 뿐이었다. 려은은 명연을 새삼 보았다.

‘이무기…….’

말로만 들어와 환상의 생물이라 여겼던 이무기가 눈앞에 있었다.

‘역시 이상해…….’

려은은 새삼 자신이 살던 시대와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 보시지요! ...으악!”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방안에 가득한 수백 개의 유리관들은 모두 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듯한 여러 가지 고깃덩어리들이 바닥에 끈적끈적한 액체와 함께 흩어져 있었다.

“경비가 생각보다 형편없던데?”

스켈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넌 뭐냐?”

그러자 샤프한 외모의 미남자가 천장 가까운 곳에 걸터앉아 있다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너희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異)지.”

호박색 눈동자가 수축했다 커졌다. 단정한 갈색 머리칼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리고 있었다.

“이라니, 대단한 작명센스야.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재산이 되고 등록이 되어야 하고 실험대상이 되어야 하나보지?”

려은은 파륜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으므로, 려은은 저도 모르게 파륜을 향해 말을 걸었다.

‘뭐야?’

‘..적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려은의 몸에 불이 치달리는 듯한 감각이 왔다.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으로 팽배했다. 소마가 크게 울부짖었다. 가현이 재빨리 운선(雲扇)을 펼쳐 천장을 향해 휘둘렀다.

콰쾅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선이 끊어져 불꽃이 튀었다.

타호는 급히 몸을 허공에 띄웠다.

굉음이 멎고 우뚝 선 것이 보였다. 타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날 밤 봤던!’

려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흉신(兇身)이 파천흑룡 파륜을 죽인다.”

낮고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회색피부에 거대한 체구, 등에 맨 작고 검은 상자. 가현은 안색을 굳혔다. 라후의 부하가 인간도에까지 오다니.

스켈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었다.

“저건 괴물이야! 왜 있는 거야!”

타호가 냉소를 지으며 비웃듯 말했다.

“인간들의 이중성(二重性)이란! 모든 것을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그 미추(美醜)를 결정한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정당화, 미화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사악한 존재! 건강에 좋기 때문에 길에 흙을 깔고, 귀찮은 벌레가 생기기 때문에 가짜 풀과 나무로 도시를 치장하지.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하려고 머릿속에 칩을 넣고, 유전자를 조작하지. 실패작이라 판단되면 살아있음에도 잘게 절단해 불태워버린다!”

타호의 격정어린 말은 절규로 이어졌다.

“너희들이 갖고 놀라고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저기 내 동포들이 있다. 기형의 몸으로도 살아있던 그들의 숨통을 끊어야만 했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스켈은 손가락을 뻗어 타호의 뒤를 가리키며 낄낄 웃었다.

“저, 저기 살아있는데, 뭐, 뭔 헛소리야!”

타호의 열변에 정신을 빼앗겼던 명연은 스켈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채 식지도 못한 고깃덩어리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허연 연기와 같은 것이 바닥에 깔리는 것을 알았다. 그 연기에 닿자마자 죽은 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것은 려은 일행과 팽팽하게 대치한 흉신이란 자의 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타호는 분노에 차 눈을 은빛으로 번쩍였다. 저런 식으로 욕보이게 할 순 없었다. 명연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몸이나 풀어볼까.”

려은에게 집중적으로 되살아난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 흉측한 모습에 려은은 움찔움찔 뒤로 물러났다. 가현과 소마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각기 흉신과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너는 겁쟁이야. 나한테 몸을 넘기는 것은 어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잠만 자면 되는데. 그럼 괴로운 일 하나 없을 거야. 모두 내가 대신할 테니까.’

려은은 불현듯 그에 동조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흉신은 듬성듬성 난 갈색 머리칼 아래 우직한 검은 눈으로 그런 려은을 뚫어져라 보았다.

려은이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마치 무저갱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허한 눈이었다. 려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붉은 선이 서서히 떠올라 양쪽으로 확장했다. 붉게 변한 눈으로 려은은 흉신의 속을 혀로 핥듯 살피기 시작했다.

시체의 구릉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음이 겁에 겁박되어 떨고 있는 흉신이 있었다. 왜소한 체구, 앙상한 팔 다리, 움푹 팬 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동료들의 시체들 속에 있었다. 시체들 속에 몸을 숨기고 전투가 끝났는지도 모른 채 헉헉 뜨거운 숨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전쟁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가 호혈향(好血香)의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아수라족이라 할지라도, 그의 성정 자체는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를 두고 친우들은 아수라족의 돌연변이라 부르며 깔보듯 감싸주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은 지금 그의 곁에 없었다. 오로지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들뿐.

흉신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우겼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고기일 뿐이다.

손을 뻗어 자신을 구하고 죽은 친구의 머리통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귀를 우둑 물어뜯었다. 푸른 피가 질척하게 묻어났다.

“맛있다!”

흉신은 정신없이 코를 씹어대었고, 마침내 몇 구의 시체를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다.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것을 먹은 탓으로 썩은 내가 물씬 풍기는 물컹한 설사가 나왔으나, 탐욕스러운 내장은 가득 채워짐에 만족스런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온 지 얼마가 되는지도 모를 무렵, 그는 마침내 빛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장창으로 쑤셔댈 거라 생각한 제석천의 군도 없었으며, 아군 또한 없었다. 오로지 고기, 고기들 뿐.

그리고 친우들의 몸으로 살을 찌운 자신이 있었다. 흉신은 중얼거렸다.

“흉한 몸…….”

생존에의 본능이 그를 죽였다.


흉신은 문득 저 멀리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알아채었다. 밝아오는 붉은 하늘 탓에 오히려 푸른 기를 띤 것처럼 보였다.

그건 마치 자신을 부르는 친우들의 얼굴들과도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흉신은 손을 뻗어 소리되어 나오지 않는 절망의 외침을 부르짖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흉신의 꿈속에 하얀 뼈만 남기고서 흉신에게 먹힌 이들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흉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외쳤다.

‘영원히 저주를 받으리라!’

흉신은 울면서 몸부림쳤지만, 그 누구도 냉혹함을 거두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고 있군.’

파륜의 조소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려은에게 속삭였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니, 살기가 괴로운 거야. 그래서 과거 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알려진 나에게 투사를 한 거지. 자, 어떡할 거야? 착한 려은양!’

끼득끼득 웃으며 파륜이 어두운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정신을 채 돌이키기도 전에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파왔다. 소마가 달려들어 려은의 팔에 매달린 이를 물어뜯었다. 물고 좌우로 흔들자 뜯겨진 부위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그러나 잠시도 사정을 두지 않고 소마는 즉각 달려가 튕겨져 나온 이를 앞발로 쾅 내리찍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었다. 사방으로 피가 후드득 튀고, 그 이는 결국 거동불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작은 살점 하나하나가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그제야 려은은 왜 소마가 평소와 다른 잔인한 모습으로 상대를 대했는지 알았다.

려은이 흉신을 살피고 있을 때 이미 싸움은 시작된 모양으로 방안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가현과 소마가 려은을 보살펴 주고 있었음을 알고는 려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앞으로 나섰다.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손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극도의 상실감에 려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 시야를 가리며 전면으로 뛰어드는 이를 길고 검게 자라난 손톱으로 네 조각 내버렸다.

등줄기가 오싹하는 쾌감이 있었다.

‘착한 인간인 려은은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파륜이 이죽거렸다.

“입 닥쳐!”

려은은 크게 외치며 흉신에게 짓쳐 들어갔다.

‘난 착하지 않아!’

흉신이 뒤로 급히 물러났지만, 려은은 이미 손톱의 끝을 흉신의 목젖에 대고 있었다.

“나를 원망하나?”


‘도망치는 건가?’

‘그런 식으로 해서 다시 도망치는 건가?’

‘어리석고 약한 자만이 자신의 추한 모습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말로 아무리 자신을 분석하여 정당화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어. 언제나 제자리에서 입만 놀릴 뿐이다.’


려은은 흉신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가현.’

려은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뒷걸음질 치며 회피해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자신에겐 거짓을 말해 위로하며 살아온 결과가 남이 말하는 착하다는 것뿐? 그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거? 그렇다면 이젠 필요 없어!’

흉신이 한참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없어져야 나 같은 자가 다시 생기지 않는다.”

려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독한 탐욕에 더러운 시기심도, 절망도 분노도, 두려움도 내 것이야.’


‘존재라는 것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지, 암. 누군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겠나. 그래서 사귐이 있는 것이고, 정이 있는 것이며, 가슴이 있는 것이며, 혼백이 있는 것이 사람일세. 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음이야.’

‘설사 자신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인간들의 소원, 바람을 들어주려 생겨났지. 잊히고 퇴락해가는 집에서 오랫동안 망설여왔어도 결말은 나지 않았어.’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지. 순리라면 우리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 분명한 만큼, 집과 함께 하리라고. 만약에 집착을 가지고 끝까지 자신의 의식을 세상에 붙들어 매려 한다면 그것은 악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말이야.’

‘그렇게 천한 잡귀가 될 바에는 신(神)으로서 흙과 바람으로 흩어지는 편이 훨씬 나아!’

‘깨끗하게…….’


‘깨끗하지 않아도 좋아. 난 살고 싶어. 다른 모든 이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나만은 예외이고 싶어.’


“그럼 나를 죽여 봐. 말리지 않을 테니.”

강철같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흑색 손톱 끝이 흉신의 목을 파고들어, 푸른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경악하여 좌중의 모두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명연은 바닥의 액체로 벽을 만들어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거나, 이들의 체액을 폭주케 하여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타호는 분신술을 써서 이들을 밀쳐 내거나 넘어뜨리고 있었다. 차마 이들의 몸 자체를 파괴할 순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에 반해 소마는 사정없이 물어뜯고 밟아 터뜨렸고, 가현 또한 운선을 휘둘러 살마다 나오는 청백색 빛으로 이들의 살을 갈라놓고 있었다.

하지만 연약한 듯한 외모의 려은이 벌벌 매는 듯 보이다가 갑자기 저런 식으로 돌변하고 마니,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흉신에게 조종당하는 이들이 모두 꾸물꾸물 려은으로 향해가고 있음이었다.

마치 파도가 해변으로 몰려오는 듯 방해에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려은은 이들, 혹은 이들의 살점들에 흉신과 함께 파묻혀 버렸다.

명연이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착잡한 듯 말했다.

“네가 없어져야 나 같은 자가 다시 생기지 않는다라.. 언젠가 들어보았던 말이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을 덮어두기 위해 혹은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약한 자가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약하기에 미워할 순 없겠지.”

타호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든 가현과 소마, 명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들이 마주치고,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고치 같은 형태의 살덩어리를 뚫으려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정도 그 방에서 멀어진 것을 깨닫고, 벽에 기대 스켈은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이(異)들의 능력을 모두 파악했다 생각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는 거지?”

등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호피를 두른 건장한 청년이 피로 물들인 듯한 검붉은 머리칼 사이로 황금빛 테를 두른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앙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형(虎兄)! 기다려요! 같이 좀 가자니까요오…….”

엄청난 기백에 스켈은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네가 첫 번째다, 감히 그 비천한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고 조작하려 들었더냐?”

스켈의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경련을 일으키며 몸이 비명을 질러대었으나, 화등잔만한 두 눈 앞에선 소용없었다.

“죽어라.”

단호하면서도 태연한 어조로 말하곤 호형이라 불린 자는 손을 들어 태산 같은 기세로 스켈을 쳤다. 스켈의 가슴팍이 파여져 심장이 반쯤 날아간 것이 보였다. 피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 자신에게 달려온 작은 남자아이를 붙잡고 말했다.

“이 쪽이 아니었다. 다른 길로 가자.”

꼬마는 붉은 코끝을 벌름거리긴 했으나, 별말 않고 사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종알거렸다.

“호형! 타호는 무사하겠죠?”

그런 그들의 한참 뒤쪽에 몸의 일부가 참혹하게 뜯겨나간 자줏빛 거대한 뱀 한 마리가 길게 누워 있었다.


피비린내에 후각이 마비되었다. 더욱이 완벽한 어둠에 잠겨버려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귀를 쫑긋 세웠으나, 자신의 숨소리가 점점 격해지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손톱을 지그시 앞으로 누르듯 뻗어보았으나, 분명 좁을 공간 안에서 흉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흥분으로 떨려왔다. 과거 평범한 인간일시에는 이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무엇에도 열중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감각에 상쾌함이 몰려왔다.

재미있겠다고 한 파륜의 말 그대로였다. 그에게 재미있는 것이 자신에게도 재미있을 줄은 몰랐지만.

려은은 자신이 파륜의 영향을 받아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상황 또한 그녀에게 그렇게 되어갈 단서를 주었음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전과는 달리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는 그녀의 것이며, 파륜과의 경계가 설사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라도 결코 자신을 잃는 것은 아니라고.

길어진 검은 손톱도, 손등과 등에 무겁게 느껴지는 검은 비늘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종종 자신에게 말했었잖아? 집에 가야한다고.’

어둠 속에서 더욱 확실히 보이는 새하얀 얼굴로 말했다.

‘네 집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솔직해지라구.’

분노도 경멸도, 조소도 슬픔도 없이 망연하게 깨끗한 얼굴로 자신에게 말하는 파륜을 향해 려은이 말했다.

‘우리의 집은 어디라고 생각해?’

파륜은 당황하여 한참을 아무 말도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별안간 뜨거운 어조로 말했다.

‘역린(逆鱗)을 찾아. 그것의 이름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우리는 끝까지 가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파륜이 ‘우리’ 라고 말했다. 밝아진 안색으로 려은이 얼른 물었다.

‘끝이라면?’

파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려은은 파륜과의 간헐적인 대화와 자신의 변화를 통해 파륜이 변덕이 심하고 때론 매우 격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단편적이고, 서서히 찾아가는 중이라는 것도. 본성은 생존본능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으나, 한 줄기 서정적인 약함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진홍색 눈동자에 검붉은 머리칼의 그 때문이 아닐까. 이제 다시는 파륜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이미 유명을 달리 했을 것이기에. 육도의 모든 살아있는 것에겐 반드시 숨을 거둘 때가 온다. 그건 제석천이라 해도 예외가 아닐 것이었다.

려은은 문득 깨달았다. 파륜과 자신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나무와 같았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근본은 같은 탓에, 깊은 곳의 성질은 같았다. 처음엔 마치 괴물처럼 여겼던, 무조건 악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폭력성, 잔혹함 또한 려은에게도 있는 것이었다. 또한 려은의 연약함과 망설임이 희미하나마 파륜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궁금증이 생겼다.

‘파륜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그는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 걸까?’

가끔씩 자신의 감정 이상의 슬픔이 몰려왔던 때가 있었다. 무간지옥에서 모자를 보았을 때도 자신의 탓이라, 운명을 원망했었다. 그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깊은 고뇌와 비슷한 감정의 끝자락을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이제 와서야 들었다. 천중도시에서 소외감과 비인간적인 취급에 분노하고, 가현의 익숙하다는 말에 마음이 착잡하게 젖어들었을 때도 묘한 동조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파륜은 려은의 테두리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음이었다.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야.’

려은은 파륜에게 있어서 자신이 족쇄라는, 라후가 말한 ‘가짜, 허수아비’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다. 하지만 파륜은 이죽거리고 화를 내고 하였으나, 정작 자신을 강하게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럴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온하고 따뜻한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불에 데는 듯한 감각이 팔을 스쳤다. 손으로 잡자,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려은은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춘 채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과거의 대전쟁은 파륜의 탓이라 했다. 그의 탓이라면 자신의 탓도 되는 것이라고 려은은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속죄를 하려면 그의 분이 풀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상처를 입고, 결국엔 숨 쉬는 것을 멈춰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속죄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이 일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파륜의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려은은 그것이 마땅하다고 굳이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왜 죽어야 하지?’

이기적인 본성.

그것의 외면화를 인정함으로 인해서 려은은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이제 다시 한 번, 이타적인 마음을 갈무리할 때였다. 냉정하고 차가워 다가가기 어렵다고 여겨지던 려은의 분위기는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려은에게 가족을 좋아하고,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륜도 류허에겐 마찬가지였다.

분리된 듯, 동떨어진 듯 보이던 것, 기실은 동본(同本)이며 가까이에 있었다.

파륜과 려은은 하나의 동전의 테를 따라 서로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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