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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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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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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24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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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DUMMY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청량했다. 려은은 세수를 하고는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이 신기한 듯 눈을 비볐다. 다른 건 어쨌든 시력이 좋아진 건 기분 좋았다. 피곤할 때면 안경에 눌리는 부분에 쥐가 내린 듯한 감각이 있었다. 그게 싫어 렌즈를 해보았더니, 소프트 렌즈는 눈물을 흡수하여 낀지 두 시간이면 보기 무서울 정도로 벌겋게 핏발이 섰다. 하드 렌즈는 끼자마자 눈물이 주루룩이었다. 안과에서도 민감한 각막이라며 렌즈는 무리라 말하였던 것이다. 라식수술은 각막의 두께는 되어도 부작용이 염려되어 하지 못했다. 고로 숙명이라며 포기한 지 오래였다.

설마 이렇게 얇은 눈꺼풀 위로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면서도 분명하게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 모르는 일 뿐이었어.’

려은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려은이 세수한 곳으로부터 아래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현이 토끼의 목을 자르고 뒷발의 가죽을 칼로 잘라 슥 벗겨내었다. 그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 내리고 물에 흔들어 씻고 있었다. 붉은 살덩이가 물 속에서 물컹거리며 흔들거리자, 작은 돌 아래 숨어 있던 가재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어머니가 이미 손질된 닭을 사와 분할할 때에도 집안에서 부엌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달려가 숨어버렸던 려은이 이제는 태연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현은 며칠 고열로 시달렸으나, 열이 내리자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려은은 자신의 속에 있는 ‘그’의 존재를 확실히 자각한 이후로 오히려 기운을 내었다. 불확실한 불안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보다 차라리 무언가 하나라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려은에게는 나았던 것이었다.

가현은 보찍과 려은이 합심하여 만든, 그러나 졸렬한 솜씨의 멧돼지 고깃국을 맛도 따지지 않고 묵묵히, 그러나 열심히 먹었다. 그런 가현을 보며 려은은 다소 안도했다. 가현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고, 회복하려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상처가 나아감에 따라 려은의 마음도 점점 가벼워졌다.

그리고 이젠 이렇게 평화로운 공기 속에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가현이었지만, 서로에게 어느 샌가 익숙해진 것이었다. 그건 소마와 보찍과도 마찬가지였다.

려은은 여인이 주는 음식을 더 이상은 먹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본 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그런 것은 먹을 수 없었다. 가현은 별 말 없이 려은에게 손질한 사냥물을 맡겼다. 요리는 려은이 맡는 대신에 몫을 나누어준다는 식이었다.

려은은 자신이 맡을 역할이 사소하더라도 일단은 생겼다는 게 든든하고 기뻤다. 그리고 조용한 산속 생활에 적응하여 마음이 점점 평안해지고 있었다. 쾌활하고 약삭빠른 듯 하면서도 어딘가 여문 곳이 있는 보찍, 강인한 몸에 귀티가 흐르는 소마, 무뚝뚝하지만 악의가 없고 결결한 가현에게 정이 생겼다.

“이대로도 좋을지도…….”

려은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소마가 그런 려은의 옆에 앉아 슬쩍 따뜻한 몸을 기대었다.

“보찍은?”

가현이 물었다. 서로 못마땅해 하던 둘이었지만, 어느새 눈앞에 없으면 신경을 쓰고 있다.

려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떡 만드는 거 도와준다고 했어.”

보찍은 여인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다. 부산하게 쫓아다니며 머슴노릇을 자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빛나고 있었으므로, 둘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에겐 언제까지나 신세를 질 순 없다고 하여 식사를 별도로 하는 것을 납득시켰다. 그 말에는 보찍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겠다고 여인 앞에서 과도하게 당당히 말했다. 허나 실은 그날 이후로 려은과 마찬가지로 가현과 소마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똥배짱으로 가장 많은 몫을 주장했다. 가현의 눈썹이 꿈틀하긴 했지만, 보찍은 묘하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이인지라 그냥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려은은 가끔 보찍의 침이 기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현과 려은, 보찍 중 누구도 서로의 앞으로의 일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상대한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일지, 무엇이 자신의 책임인지 별로 알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햇빛이 흐르는 물에 은빛 결을 만들어내었다. 몸속까지 시원하게 느껴지는, 파도 소리와 얼핏 비슷하게 들리는 숲의 노래. 소마의 하얀 털이 바람에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보찍은 그녀가 좋았다. 스스로도 잘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곁에 있으면 뭔가 편안해서,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때때로 보찍을 돌아보며 웃음 짓는 그녀의 눈꼬리의 요염함에 가슴이 뛰었다.

“고물이 모자라는 것 같은데요.”

보찍의 말에 여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가지고 오지요.”

시루떡의 떡을 시루 안에 안치려고 하는 때였다. 팥고물이 모자라 일을 잠시 멈추게 되어 여유가 생기자 보찍이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여인이 부엌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안반에 놓고 떡메로 쳐서 만들거나, 쌀을 찧어 시루에 안쳐 찌는 등 떡을 하는 일은 먹는 것과는 달리 만만치 않았다.

보찍은 여인이 턱이 높은 부엌문을 넘어 나간 후 새삼스레 부엌 출입구를 눈여겨보았다. 바깥 지면과 부엌 바닥의 차이가 많이 났다. 아궁이 탓이었다. 하지만 어른의 발에서 허벅지만큼이나 높이가 차이가 나면 부엌에 내려올 때도 위험하고 나갈 때도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갈 것이다.

보찍은 나갈 때의 여인의 끙하던 소리를 상기하곤 계단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스스로 감탄하여 즐거운 기분으로 부엌을 나섰다.

한참을 생각하다 결국 튼튼하게 흙과 돌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근처에 냇가가 있었지.’

자갈을 가져오려는 것이었다. 귀를 쫑긋 세워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희미하지만 그 소리를 확실히 포착한 보찍은 까만 눈으로 쌔액 웃고는 발걸음을 가볍게 옮겼다.

몇 걸음 가다 여인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면 당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집 뒷마당 쪽에 장독대랑 여러 가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여인이 거기에 갔을 거란 생각에 뒤돌아 걸었다.

생각한 대로 여인은 뒤뜰에 있었다. 여인은 마침 커다란 장독대 뚜껑을 여는 참이었다. 보찍은 환하게 웃음 지으며 여인을 향해 소리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여인은 소매를 접어 걷고는 옆에 있던 박 바가지로 장독 안의 무언가를 푹 펐다.

“흑.”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반사적으로 벽에 찰싹 붙었다. 심장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뭐지? 내가 잘못 본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틀림없어.’

보찍은 바가지에 담긴 썩어가는 안구(眼球)들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여인이 보찍을 알아채고 묘한 웃음을 짓더니 다가왔다. 그리고 눈알들이 가득 담긴 바가지를 보찍의 코앞에 갖다 대고 물었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시는지요?”

여인의 볼에 옅은 보조개가 생겼다. 태연한 여인의 모습에 보찍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개구리의 뱃가죽처럼 하얗게 번들거리는 표면 중에 동공이 풀어져 유독 까만 원이 있었다. 구역질나는 피비린내가 풀풀 풍겼다.

“파, 팥이 아닙니까?”

여인의 보조개가 더욱 깊어졌다. 순간 보찍의 뇌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여자의 뺨에 보조개가 있었던가?’

여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혹시나 전과 달라진 점이라도?”

여인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하얗고 투명한 볼 아래 푸르게 보였던 혈관이 두드러졌다.

여인이 튀어나온 혈관이 손끝에 걸리자 확 긁었다. 그러자 볼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보찍이 얼음처럼 굳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자, 여인이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다시 물었다.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요?”

보찍은 말하는 여인의 입안에 언뜻 보인 혀가 검보라색인 걸 알았다. 날카로운 하얀 송곳니가 혀 아래로 얼핏 보였다. 무심코 허리의 칠성검(七星劍)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니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보찍의 대답에 만족한 듯 여인이 활짝 웃었다. 눈가가 찌지직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여인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보찍은 미친 듯 달려가 장독대들의 뚜껑을 열었다.

첫 번째, 까맣고 하얀 머리칼들이 피 속에 잠겨 있었다.

두 번째, 뭉클한 분홍, 하양 내장들이 왕소금 속에 잠겨 있었다.

세 번째, 바작거리는 손발톱만이 가득했다.

네 번째, 귀와 코가 간장 속에 담겨져 있었다.

다섯 번째, 하얀 뼈다귀들이 살점을 드문드문 매단채로 흰색 고체로 변한 기름 속에 있었다.

여섯 번째, 살갗을 총총 썰어 초(酢)에 절여놓았다.

더 이상 열어볼 기운이 나지 않아, 보찍은 햇살에 따뜻해진 까만 장독대를 껴안은 채 혼몽한 의식을 다잡으려 애썼다.

멀리서 새가 찍찍찌직 찍찍찍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보찍의 심장을 기다란 손톱으로 할퀴어내는 것 같았다.

보찍이 장독대의 표면을 따라 주루룩 몸을 미끄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이대로도 좋았는데…….”

설움과 같은 눈물이 보찍의 까만 눈 속에서 넘실거렸다.


어느덧 밤이었다. 모기가 앵앵거리며 주위를 날았다. 모닥불이 주홍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위에서 기름을 지글거리며 꼬챙이에 꿰인 채 익어가는 고기에 소마가 입을 다셨다. 분홍색 혀가 날름거리며 입 주위를 핥았다.

려은은 고기의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화르륵 높이 요동치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보름이다.”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찌르르찌르르 들리는 가운데 가현이 말했다. 려은이 가현을 보자, 가현이 검은 수면에 황금빛 찬란하게 너울대는 달그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달그림자는 물의 흐름 위에서 이지러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

“만월이 뜨는 밤에는 만물 속에 잠들어 있는 검은 짐승들이 깨어난다.”

려은이 몸을 굳히자, 가현이 말했다.

“넌 이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돼.”

려은이 고개를 들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무, 무엇을?”

가현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모닥불 위에 걸쳐진 서너 개의 꼬챙이들 중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곤 려은에게 건네주었을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 후, 려은이 말했다.

“이대로도 좋을 거라 생각했어. 부모님, 친구, 학교, 내가 살아온 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있는 것도 괜찮으리라 여겼어. 이곳이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에. 내 속에 뭐가 있든 난 나라고.”

가현은 침착하게 말하는 듯한 려은의 떨리는 몸을 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내게 소중한 건 아무 것도 없었기에 어찌되든 좋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라. 아니, 내가 모른 척하면 문제는 없어질 거라고.”

려은은 숨을 들이쉬었다.

“..착각하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초라한 나를 숨기고 싶었던 거야. 소중한 것 따위 하나도 없는 사람의 삶이란.”

“도망치는 건가?”

가현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려은이 눈물 고인 눈을 크게 떠 가현을 바라보았다. 가현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모닥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다시 도망치는 건가?”

가현이 다그치자 려은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난 네가 나에게 구해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은 전쟁터였고 난 널 기절시키는 대신 죽일 수 있었어.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가 나에게 이런 상처를 입혔음에도.”

말과 함께 윗옷을 벗어젖혔다.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어깨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왜라고 생각하나!”

가현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괴물에게 의식을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싸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려은은 숨을 헐떡였다.

“어리석고 약한 자만이 자신의 추한 모습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말로 아무리 자신을 분석하여 정당화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어. 언제나 제자리에서 입만 놀릴 뿐이다.”

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그런 인간이었나?”

가현은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비상했다. 그 모습을 본 소마가 따라서 날려고 네 다리로 버티고 서서 자세를 잡을 무렵, 가현이 소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멀리 까만 밤 속으로 사라져가는 가현을 충실한 진갈색 눈으로 쳐다보던 소마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려은을 돌아보았다.

“컹!”

려은이 그를 바라보자, 소마는 눈을 마주친 채로 입을 벌려 다시 한 번 컹 하고 짖었다. 마치 그녀를 질책하는 듯 했다. 려은은 그런 소마를 와락 힘주어 끌어안고는 중얼거렸다.

“좋겠다, 너도, 가현도. 난 마음 줄 곳 하나 없어.”

벗어나려 버둥거리던 소마가 순간 멈칫했다. 그런 소마의 목덜미 풍성한 털에 려은이 볼을 비비자, 소마는 려은의 머리칼에 닿은 귀가 가려운지 귀를 파닥파닥파닥 계속해서 움직이면서도 그대로 있었다.


가현은 허리까지 닿는 풀숲을 헤치며 걸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불시의 침입에 풀벌레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뛰쳐나갔다.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섰을 땐 어딘지 모르는 곳이었다. 사방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말 그대로 천옥(天獄).

마치 그것이 가현의 지금 처지나 마음인양 느껴져, 가현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곧 옆의 풀을 채어 움켜쥐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내가 화풀이를…….’

그녀와 자신의 망설이고 헤매는 모습이 닮아서였다.

가현은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그 스스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적이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주술 혹은 봉인의 힘이든 어쨌든 그는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그의 선택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그가 잃어버렸던 기억이 차츰차츰 아주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떠오름에 따라 그는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야할 좌표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의지하듯 함께 있는 려은에게 화풀이를 해버린 것이었다.

려은의 무기력하고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방관자인 듯 지나치게 태연, 유약한 태도는 그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초조, 불안, 두려움이란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점점 타들어가다, 마침내 꽈꽝!

“그녀와 함께 있기로 결심했었잖아.”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려은의 어미를 잃은 강아지같이 매달리는 애처로운 눈빛, 그리고 그 속의 근거 없는 신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실한 그는 생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한편으론,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보다도 강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그리고 다시 제대로 겨뤄보고 싶어 하는 무장(武將)의 뜨거운 피가 그의 몸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완벽히 망각 혹은 지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 그의 품속에 연수정과 유사한 색의 구(球)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그’와 려은 둘 다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 특히 중요한 점은 그 구도 ‘그’와 려은에게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수정바위 속에서 깨어난 지 불과 십여 년. 그는 운명의 존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려은의 곁에 있기로 한 자신의 선택은 순전히 자신의 결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상황이 분명해지고, 좀 더 안정될 때까지 려은과 함께 있기로 마음을 정했었다. 그는 스스로가 려은의 기둥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의 강건해 보이던 심성은 기실, 단 한 번도 제대로 관찰하고 실험해본 적 없기에 금강석인지 유리인지 그 재질을 알 수 없는 무색투명한 잔과 같을지도 몰랐다.

민무늬의 단아한 무색투명한 잔이 딱딱하고 평평한 회색 바위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깨어질 것인가.


“저, 저를.. 죽여주세요.”

느닷없는 목소리에 려은이 소마의 털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멍하게 중얼거렸다.

“뭐……?”

돌아보자 여인의 아이가 서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저를 죽여주세요.”

그러나 아이의 턱에 고집이 보였다.

려은은 혼란에 휩싸여 물었다.

“어째서……?”

아이가 문득 손을 들어 려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셋 중 누나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심장을 가졌으니까.”

려은의 몸이 발작적으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지?”

아이가 짚신 신은 발로 려은에게 한걸음 다가서며 답했다.

“누나의 눈 속엔 붉은 세로줄이 가끔 보여요. 옛날에 어른들한테 들었어. 그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용이 숨어 있는 거라고.”

아이의 눈이 짓눌려 안구가 빠져나오려 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아이가 비틀비틀 손을 뻗었다. 려은은 앉은 채로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누나는 그런 거 좋아하잖아…….”

려은은 고개를 흔들며 악을 썼다.

“아니야! 아니야아!”

‘그’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 아니야. 아주 좋아해.’

소마가 번개처럼 훌쩍 뛰어 려은의 곁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그’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려은의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검은 머리칼이 땅에 닿을 듯 길게 자라나고 손등은 이미 검은 비늘로 덮였다.

금속성의 광택을 내는 새까만 손톱이 은빛 물결처럼 밀려오는 달빛을 퉁퉁 튕겼다.

아이는 자신의 두 눈알이 바닥에 투둑 떨어져 구르고 목에 칼자국이 생기면서도 기분 좋은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멈칫했다. 아이의 몸엔 그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상처가 군데군데 생겨나고 있었다.

“막둥아! 막둥아! 밥 먹을 시간이란다! 네가 좋아하는 쇠고기국도 끓여놨단다!”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니?”

간들간들 생긋생긋 여인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여인의 모습을 본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여인의 이마엔 두 뿔이 날카롭게 솟아있었고 얼굴에는 피 철갑을 하였다. 검푸른 색 뾰족한 혀를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 사이로 내밀고 있었다. 손톱 끝은 피에 젖어 검붉은 색이었고 눈가는 길게 찢어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내 사랑스러운 아들, 내 구멍에서 나온 아들, 내 구멍으로 들어가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와 려은이 동시에 말했다.

“..싫어.”

여의주의 일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의지가 일치한 순간이었다.


“버서서서서석…….”

가현은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를 깨닫고 귀를 세웠다. 심란하게 만드는 고민 따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의 진원지를 감지하여 운선(雲扇)을 휘둘렀다. 그러자 풍압에 풀들의 끝부분이 잘리면서, 달빛에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그 속에서 함께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이코, 이게 무슨 짓이야!”

매우 놀란 듯 눈에 눈물을 가랑가랑 채우고선 보찍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보찍의 회색 머리칼이 달빛에 은색으로 보였다.

“쥐처럼 꼼실꼼실 숨어 다닌 네가 잘못이지.”

가현의 퉁명스런 목소리엔 반가움이 보일 듯 말 듯 묻어 있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인 보찍의 모습에 곧 놀라 물었다.

“뭐냐, 그 꼴은?”

보찍이 소매로 옷에 붙은 검불을 탈탈 털며 답했다.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해서 너랑 려은이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가도 가도 벗어날 구멍 같은 게 보이지 않더란 말씀이야. 게다가 너희들도 보이지 않고. 지리산가리산 헤매다가 결국 이 모양 이 꼴에, 여기지.”

가현이 미간을 찌푸리고선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왜 진작.”

“아, 그건 네가 너무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서, 나섰다가 괜히 불똥 맞을까…….”

보찍이 뒤통수를 긁으며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우엑, 우엑, 잘못했어, 잘못했어!”

잠시 후, 보찍은 가현에게 들리지 않게 앙잘대었다.

“점잖은 얼굴해가지곤 뾰롱뾰롱 까다롭게 굴긴…….”

가현이 휙 돌아보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런데 왜 떠나려고 한거지?”

문득 떠오른 실연의 아픔에 눈시울이 붉어져서 보찍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 여자가 괴물로 변해버렸어…….”

가현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갸우뚱했다.

“장독대 안에는 그녀와 동족인 인간의 고기가 부위별로 그득그득…….”

속이 편치 않은지 보찍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가현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그러다 주위를 살펴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알아챈 거야?”

보찍이 짐짓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나 가현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하고는 곧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려은!”

절벽이 빈틈없이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들어올 길이 있었던 아까와는 달랐다. 즉, 둘을 려은에게서 떼어놓으려는 모종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가현이 서둘러 날아올랐다. 보찍 또한 뒤따랐다. 그러나 절벽은 마치 살아있는 양, 가현과 보찍이 넘으려고 할 때마다 죽죽 늘어나 못 나가게 했다. 그럴수록 둘의 마음은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아니, 저건?”

보찍이 놀라 외쳤다.

달과 별이 지고, 해가 뜨는 것이 순식간에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박힌 붉은 눈알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하도록 커다란 만월(滿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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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륵오륜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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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파륵오륜담 2부 탈피 5 09.08.09 237 3 10쪽
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1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1 4 16쪽
1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79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3 3 18쪽
1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6 3 23쪽
1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3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3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6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6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3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69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6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0 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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