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36,059
추천수 :
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06.27 01:26
조회
193
추천
3
글자
18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DUMMY

“아, 정신이 드셨습니까?”

은회색 비단 유(襦)와 고(袴)를 입고, 같은 천에 진청색 가를 두른 포(袍)를 걸친 자가 물었다. 눈동자를 드니 진녹색의 성실한 느낌의 눈동자가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색 머리칼이 단정하게 위로 틀어져 올라가 있었다.

보찍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일깨웠다.

“지옥의 관리인 듯한데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시는지?”

그 말에 정신이 확 든 보찍이 상대방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찍!”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현이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했지?”

가현의 말에 눈썹을 추켜세우곤, 곧 상냥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저의 이름은 동화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생글생글 웃자, 가현이 마지못해 내뱉었다.

“..가현.”

그제야 동화는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가현과 보찍의 눈이 쏠렸다.

가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쑤시개?”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동화는 얌전해 보이는 얼굴로 빵긋 웃었다.

보찍은 속으로 죽었다고 중얼거렸다. 명계의 주인, 염라대왕조차 그 깐깐함에 고개를 젓는다는, 얼핏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동화(同華)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저승에 죄인이 아닌 자로서 태어났다는, 특별한 자였다. 게다가 그 영민함에 장래 염라대왕의 자리까지 그의 차지라는 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절박함에 슬금슬금 엉덩이를 끌어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팔꿈치에 무언가 쿵 닿아 뒤돌아보았다.

“은인!”

보찍의 말에 가현과 동화가 돌아보았다. 은인(恩人)이라 부르는 이유가 궁금한 듯한 눈빛들이었으나, 려은이 눈을 뜸에 따라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동화가 가현에게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까는 무덤 안이라 제압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티 없는 검은 눈동자가 끔벅 그들을 보았을 때, 가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네 이름은?”

가현이 묻자, 려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보찍이 려은을 와락 끌어안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려은은 가현과 보찍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고 려은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어머니와 아이는? 여기는 어디?”

풀 한포기 자라있지 않은, 누런 황토 먼지만 바람에 날리는 이곳은 둥글둥글 수많은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네게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그들은... 웃는 얼굴로 떠났다.”

가현의 말에 려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보찍은 침울함과 안도가 섞인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동화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다, 손을 들어 비석 하나를 가리켰다.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군요. 아마도 그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 테지요. 괴로운 전생의 기억은 분명 까맣게 잊어버렸을 터입니다.”

려은이 자신을 바라보자, 동화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당신이 정말 바로 그 파천흑룡 파륜입니까?”

려은의 표정이 굳었다.

“이 무덤들은 집중해서 보면 속이 보입니다. 작으나 커다란 그 세상에선 망자(亡者)들의 생각이나 마음에 따라 안의 모습도, 시간의 흐름도 달라집니다. 제가 당신들이 머물고 있는 무덤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것은 필연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동화가 진녹색의 눈을 들어 려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작정입니까? 과거에서처럼 아수라족의 편에 설 생각입니까?”

려은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는 파천흑룡 파륜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동화가 무언가를 외치려는 듯 입을 벌렸을 때, 려은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사 그게 나라고 말씀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아니라면…….”

가현의 동공이 커졌다.

“..아닌 겁니다.”

가현이 알던 려은이 아니었다. 유약하고 망설이기만 하던 그녀가 아니다.

보찍은 려은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그녀를 보면 무언가 깊은 곳에서부터 변한 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려은은 전신에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폭주할 듯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기운도.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후회할 일만 만들 뿐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뜯어먹는 광경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려은은 려은이야.”

려은이 돌아보자, 보찍은 까만 눈을 빛으로 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려은의 가슴이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동화와 가현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곧 가현은 힘없는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머리칼을 묶고 있던 하얀 끈을 풀어내었다. 그리곤 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그러모았다.

“머리가 많이 길었어.”

려은이 놀람과 쑥스러움에 어찌할 바 모르고 서 있을 때, 가현은 손끝을 깨물었다.

‘봉(封).’

아주 작게 끈 안쪽에 붉은 피로 적어 넣었다. 그리고 머리칼을 묶은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

려은이 고개를 들어 가현을 보자, 가현은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가현은 려은의 달라진 모습에 한순간이나, 려은의 존재를 부정 혹은 포기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그녀를 인정한 만큼, 그녀가 흔들리지 않게 돕고 싶은 마음으로 봉했다. 그러나 아까의 강대한 힘에 비추어 볼 때, 무용지물이 될 것은 거의 틀림없었다.

다만 자신의 기분이 전해지도록.

소마가 명랑한 진갈색 반짝이는 눈동자로 저 멀리서 뛰어와 그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려은의 품에 안겨 아주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려은은 소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동화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그 순간 보찍의 눈이 번쩍 했다.

‘안 걸리는 건가? 무사통과? 아싸!’


동화는 파천흑룡(破天黑龍) 파륜(破輪)을 만나게 된 것에 놀랐지만, 그 이상으로 예상과 전혀 다른 파천흑룡 파륜의 모습과 상태에 당황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아수라 족의 편을 들어 지옥을 멸하고, 천상도로 쳐들어갈 것이냔 질문에 대한 답을 그에게서 들을 수 없는 것은 명백했다.

‘봉인은 아직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란 말인가.’

동화는 순간 갈등했다. 지금 여기서 불완전한 상태의 파륜을 죽이게 된다면 매우 커다란 위험요소 하나를 없애는 것이 된다. 하지만 불완전한 상태라 해도 파륜을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무덤 안으로 유인하여 어떻게든 해본다고 해도, 아까와 같이 잘 되리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옆의 보(報)의 관복을 입은 자는 믿기지 않았지만, 파륜을 매우 아끼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지옥견왕(地獄犬王)을 부리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인 듯 하면서도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것이 분명한 정체불명의 가현이 있었다.

‘혹시 저 자가 봉인을 해제했단 말인가?’

지옥견왕을 부리는 자다. 결코 범상히 여길 인물이 아니었다.

지옥견왕(地獄犬王).

지옥엔 야마의 개, 즉 염마의 개, 지옥의 개라 불리는 개들이 무수히 살고 있다. 그들은 망자들의 몸을 뜯어먹고 살면서 때때로 입을 벌려 한기(寒氣)를 내뿜어 지옥의 불을 잠시나마 수그러지게 해 자신이 살을 뜯은 자에게 보답을 한다. 망자들은 살을 뜯기고 온몸이 으스러져도 아방나찰들의 되살아나라는 명령에 원상복구가 되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공생하는 것이다.

그들의 몸은 축생도의 개들과 유사하게 생겼지만 많은 면에서 달랐다. 지옥의 불속을 유유히 걸어지나갈 수 있는 대단히 강한 몸과, 말을 이해하고 사리분별이 명확한 영리함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갈색, 회색, 홍색, 흑색, 백색 등이 섞인 얼룩무늬를 지녔다.

그러나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한 마리씩 드물게 잡티 하나 없는 백색, 나아가 은색에 가까운 털을 지닌 야마의 개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한 개들은 예외 없이 지옥의 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 힘의 끝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였으며, 또한 지극히 영물(靈物)에 가까웠다.

지옥견왕이라 일컬어지는 개가 태어났을 경우엔 반드시 수많은 지옥의 귀신들이 참살되었다. 지옥에 사는 이들이 공식적으로 먹을 수 있는 고기 종류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야마의 개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짐승들도 있었지만 땅속의 두더지나 불구덩이의 두꺼비와 같이 작고 잡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어느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공식적이라 함은 망자들을 제외한 모든 고기류를 뜻함이다. 몇몇 귀신들은 망자들의 살을 잘라 요리해먹기도 했다. 어차피 형벌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해서 죽고 살아나야하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는다는, 혹은 그쪽이 더 기호에 맞는다는 이유였다.

지옥견왕의 호칭은 동족에 대한 핍박이나 살해를 결코 용서하지 않고, 수많은 개들을 이끌고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마는 철두철미함과 그 수법의 잔인함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고 있었다. 비록 짐승이라 하여도 그 동족애와 통솔력은 뭇 귀신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지옥견왕이 태어나서 살아있는 천여 년 동안에는 염마의 개들은 번성일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지옥견왕이 죽고 난 뒤엔 다시 수난의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옥견왕이 간헐적으로 나타나, 지옥의 개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지옥견왕이 누군가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동족의 곁, 지옥이 아닌 장소에.

기이한 일이었다.

동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식은 내게 맞지 않아.’

자신에 맞지 않는 방식의 행동은 반드시 후회를 부른다.

파천흑룡 파륜이 과거에 잔악하고 무도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와서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특히나 저런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만약에 그가 잘못을 저질러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면, 그건 그 때의 일이다.

동화는 낙천적이나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웃음을 지었다.

보찍은 동화가 자신의 근무지 이탈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해서 한숨 놓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결코 편해지지는 않았다.

은인(恩人)인 려은은 결코 자신이 도와줘야 할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애당초의 그의 추측과는 달리 가현은 려은의 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인의 변화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여인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가 차려주는 음식도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시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누런 흙먼지 날리는 무덤가, 혹은 무덤 속이었다. 여인은 야차같이 변했고, 그녀가 반찬과 밥, 국이라고 내온 것들은 썩어가는 인육(人肉)이었다.

처음부터 몰랐던 것일까,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일까.

그는 자신이 남이 아닌, 깊은 곳에 있는 자신에게 눈 가리고 아웅한 걸지도 모른다고 어느 샌가 쭉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덜름하다는 느낌이 그를 석연찮게 했다.

지옥의 관리가 되겠다고 한 것은 쥐의 작은 몸, 미약한 존재감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지옥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주어진 일이 많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려은을 발견하고 따라간 것은 개죽음 당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은인(恩人)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야 명분이 서고 당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진실한 자신을 속이고 기만해서 바람이 가득 든 풍선 같은, 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양으로.

려은은 망설이던 유약한 모습을 탈피해, 이제 그 괴물에게 맞서기로 선언했다. 자신이 자신이고, 설사 남이 달리 말하더라도 자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가현은 자신의 잘못을 려은에게 사과하며,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러나 난 뭐지?’

보찍은 저도 모르게 동화의 낯빛을 살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도 도망치고 있어.’

보찍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난 아직도 시궁창의 쥐야.’

뜨겁고 무거운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어디로 갈 거냐’ 란 질문에 려은은 속으로 곧바로 답했다. 자신이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모두 떨쳐버리는 대신에 마무리 짓고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내하여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 모자(母子)의 일을 통해서 무언가 려은의 가슴에 꽉 맺혀 있던 응어리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자신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던 것의 정체가 명확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흘린 뜨거운 눈물이 일순의 감정의 넘쳐흐름 따위론 설명될 순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속이 시원해진 듯한 느낌에 좀 더 활동적이고 결단력 있는 자신이 되었다, 혹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수라도(阿修羅道)에 갈 거예요.”

그 말에 모두가 려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려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뚱멀뚱 거리자, 동화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수라도와 지옥은 전쟁 중입니다. 게다가 아수라족 내에서 반역... 이 일어난 듯 합니다.”

‘반역’이라는 말끝을 묘하게 흐렸다. 그러나 가현의 낯빛을 허옇게 질리게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가현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소한 아수라왕은 죽었는가? 그럼 그의 딸은?”

항상 거의 무표정한 혹은 냉막한 얼굴을 유지하던 그가 평정을 잃자,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저는 지옥에 속한 자이기에 구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다만 전(前) 나후아수라왕의 둘째 아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가현의 입술이 떨렸다.

“라후!”

그리곤 뒤의 무덤에 등을 기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빈사라…….”

가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려은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가빈사라를 알아?”

가현이 멍한 눈동자로 답했다.

“내 여동생이다.”

그제야 려은은 자신이 아수라도에서 눈을 떠서 처음 만난 이가 가빈사라라는 게 이해가 갔다. 꿈에서 가현을 만나고 여의주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려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의주라고?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러나 곧 별다른 고민 없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본래 가빈사라는 오빠한테 주려고 음식을 가지고 왔었다.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져 버렸거든... 원래는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와보니 없어졌지 뭐야.’

려은이 아수라도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데에 대한 사과와 작별인사를 가빈사라에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단순한 기분상의 문제로서 부담 없는 방문을 의도하였던 것이었으나, 가현의 말과 태도로 짐작컨대 가빈사라는 왕의 딸인 공주이며, 지금은 반역이 일어난 상태인 아수라도.

곤란했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자신을 도와준 이인 가현이 가빈사라의 오빠이며, 아수라도의 왕자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침묵이 한참 흐르자,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보찍이 외쳤다.

“난 려은이 가는 데로 갈 테니까.”

의외의 발언에 려은은 깜짝 놀랐다.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보찍이 불안정한 상태임이 분명한 아수라도에 가겠다고 한 것은 자신의 안전 때문일 터.

“아…….”

입을 벌리곤 말을 하지 못하는 려은을 두고, 가현이 대못을 쾅 박듯이 말했다.

“그럼 셋 다 아수라도에 가는 거로군. 너는?”

동화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저에겐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당분간 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머물 생각입니다.”

우연히 만난 것뿐인데, 자연스럽게 동료로 취급하는 관대한 태도가 훌륭했다. 동화는 마음으로부터 가현에게 호감을 가졌다.

“당신은 인간도의 선인(仙人) 출신입니까?”

가현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자, 동화는 별 다른 말을 않고 은은한 웃음을 머금었다.

보찍은 속으로 어느새 의기양양하여 외쳤다.

‘역시 이곳은 무간지옥이었구나!’

반면, 려은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가지 않겠다고 해야 하나 하고 번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만큼 솔직하거나 뻔뻔스럽지 못한 려은으로서는 자기위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잠시라도 자신을 따뜻하고 허물없이 대해준 가빈사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는 건 결코 꿈자리가 좋을 일이 아니었다.

개운해진 려은이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동화가 그런 려은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곤 입안으로 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양을 향해 풍경화를 들어 그 중간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무간지옥이란 공간이 찢어져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화의 소매로부터 황금색 빛이 복잡한 문양의 형태로 쏘아져 나와 그 틈을 잡고 견디고 있었다.

가현과 소마, 려은과 보찍은 망설이지 않고 빛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파륵오륜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파륵오륜담 2부 탈피 5 09.08.09 237 3 10쪽
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2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1 4 16쪽
1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79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3 3 18쪽
1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6 3 23쪽
»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4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1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3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6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6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3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69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7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1 8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