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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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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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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06.1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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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DUMMY

려은이 없어져서 찾는다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가빈사라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를 잃어버린 듯 속이 탔다. 그러나 이젠 지쳐서 거의 포기한 채 려은이 누워 있던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올 때도 몰랐으니 갈 때도 모르는 건 당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가만히 더듬어가다 이상한 기색을 발견하고 주의를 기울였다. 자신의 심장이 귀속에서 묘하게 쑥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동치고 있었다.

아바마마의 무용(武勇)은 믿고 있는 바였으나, 왠지 조금은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빈사라가 태어난 이후로 이 정도의 대규모 전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사냥터나 수련장에서의 모습뿐으로, 산 자를 베는 아버지를 상상할 순 없었다.

가빈사라를 대할 땐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없이 너그러운 정(情)을 진회색 눈 안에 가득 담아서, 약간은 지친 듯한 주름진 얼굴로 그녀의 머리칼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흐뭇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가빈사라는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초록색 싱그러운 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그녀의 양 볼을 스치며 어깨의 앞쪽으로 떨어졌다.

‘내가 왕이 된 것은 우리 아수라족의 본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싸우고 다투어야만 생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천벌과도 같은 탐욕의 거대함에 난 절망했었다. 다행히 긴 전쟁에 지친 많은 이들은 나를 지지해주었다.’

가빈사라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서 난 왕이 된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사나운 짐승의 갈기와도 같은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마구 나부끼는 것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칼날처럼 차가운 짙푸른 눈이 자신을 강렬하게 쏘아보고, 그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이 비웃는 것처럼 길어진다.

‘나의 검측한 마음이 무엇인지 공주는 아시는가?’

‘공주, 앙버티는 것도 보기 좋으나 당신에게 해를 입히고 싶진 않군.’

처음 보았을 때 느꼈다. 이 자는 무언가 위험하다. 절대로 가까이 해선 안 된다고.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몸이 먼저 안다. 그리고 열을 띠고 떨면서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귀엽구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달콤하게 언제까지나 맴돈다.

“공주전하!”

시녀가 사색이 되어 발을 젖히고 거칠게 뛰어 들어온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가빈사라는 벌떡 일어섰다. 귓가에서 은빛 방울이 옅은 소리를 내며 무심한 광택을 발했다.


푸른 피를 철철 쏟아내며 소한 아수라왕이 신음하고 있었다. 가슴의 깊이 베인 상처와 팔이 잘린 한쪽 어깨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압박하는데도 도시 흘러나오는 피는 멈추지 않는다.

가빈사라의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볼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라후는 옆에서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냘픈 어깨가 잘게 떨리고 앙다문 입술이 평소보다 푸르렀다. 눈물에 닦여 보랏빛 눈동자는 더욱 깨끗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칼 아래 부드럽게 뻗은 등과 엉덩이의 곡선, 투명한 액체에 젖은 초록색 속눈썹을 보고 라후는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가빈사라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이후로 누군가를 잃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가현 오빠는?”

라후가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가빈사라를 보았다. 마치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라후의 눈이 그녀의 하얗고 여린 손을 향했다. 그 손은 꽉 주먹 쥐어져 있었다.

“행방불명입니다.”

충격을 받은 듯 가빈사라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라후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덧붙였다.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공주가 쓰러질 것을 대비해 일어선 것이었으나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가빈사라의 눈물은 이제 밖으로 흐르지 않았으나, 그녀의 가슴에 한두 방울 계속해서 고여 들었다. 가빈사라는 소한 아수라왕의 침상 맞은편 시녀들이 갖다 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의(御醫)와 시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도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자수정 같은 눈 안에 담은 채 미동도 않았다. 슬픈 기색도 놀란 기색도 없이 고요히 왕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라후 또한 한참 바라보았다.

라후가 서너 시진(時辰)쯤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공주전하, 그러단 몸이 상하십니다.”

들어도 움직일 수 없는 듯 보였다.

라후가 일어서서 공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늘진 방에는 침상 위에 미약한 숨소리를 내는 소한 아수라왕과 가빈사라, 라후밖에 없었다.

라후의 손길에도 공주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가려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놀라 공주를 바라보았다. 가빈사라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떨리는 손이 애처로이 그의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소한(消悍) 아수라왕이 부상으로 몸져눕자, 아수라 족 내에 불끈불끈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않는 자들이 생겨났다. 본디 아수라족의 왕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라, 그 힘을 나타냄이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무리들을 이끄는 통솔력에 있어서도 그 힘이 모자라지 않아야 온전한 왕이라 일컬어짐이었다. 그러나 몇 겁이나 되는 세월 동안을 장악하여온 소한아수라왕이 쓰러진 것이다.

배신이라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아수라 족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침상의 소한 아수라왕이 죽지 않은 것은 약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팔이 잘려나간 때문이었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재 아수라 족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인 라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한 아수라왕이 건재할 때부터 모두에게 인정받아온 그의 힘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무력(武力)외에도 그에게는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소한 아수라왕이 멀쩡할 때에도 때때로 어째서 왕위를 탐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몇몇 이들에게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는 마력(魔力)과도 같은 힘으로 아수라족의 장정(壯丁)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말의 내용인지, 그의 말에 담긴 주술과도 같은 힘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단정하고 분명한 어조의 말 속에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일파(一派)를 형성하여 군의 주축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한 아수라왕에 대한 충성심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이들은 나이 때문에, 혹은 이번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그건 음지(陰地)에서 라후가 조종한 결과라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빈사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유리병 속의 청정한 공기 속에서 자라난 난(蘭)의 한 떨기, 수줍게 벌린 꽃의 티끌 하나 없이 보드랍고 여린 꽃잎이었다. 그녀를 보호해주던 유리병에 금이 가고, 이제 차갑고 무자비한 바깥 공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수많은 장신구와 능라 옷들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찬의 수가 줄어들었으며, 시중을 드는 시녀의 얼굴에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모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시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은 당연한 것으로, 없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순결한 소녀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그녀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이게 무슨 짓…….”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릎이 꺾일 것 같은 것을 참으며 가빈사라가 경직된 목소리로 눈앞의 남자에게 외쳤다. 상대가 누군지 가빈사라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에게로 점점 다가오며 키들거리며 말했다.

“아마 너 뿐일 거다. 그 나이에 처녀인 여자는 말이야. 나도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거든. 그 처음이란 걸 말이야. 게다가 크큭, 공주마마가 아니신가 말이야.”

억센 손을 뻗어와 가빈사라의 상의 깃을 잡아당겼다.

“돈 많이 썼다구, 그 망할 년이 너를 경매에 붙이더군.”

가빈사라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앞의 남자가 말하는 년이란 자신의 시녀가 분명했다. 비록 핏줄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이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 줄은.

달이 밝은데 백목련 향기가 은은하여 풍취(風趣)를 즐겨볼만 하다며 가빈사라를 눈웃음까지 쳐가며 꼬드겨 낸 것이다. 부왕의 일로 마음이 울적하여 계속해서 침상 곁만 지키던 것을, 모처럼 나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가빈사라의 은방울도 울리지 않았다. 위험할 때 호신구(護身具)로 쓰라며 어릴 적에 부왕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느라 한쪽 고막을 터뜨린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용(無用)이었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일에 그녀의 어진혼이 나가버렸다.

벌어진 깃 사이로 그녀의 뽀얀 앙가슴이 드러나자, 남자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희열에 떨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고, 공주를! 내.. 내가 처음!”

가빈사라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대가 풀어지고 속적삼까지 헐거워져 달걀처럼 둥근, 윤기가 흐르는 양 어깨가 드러났으며, 치마는 걷어 올려져 허벅지가 보이는 상태였다.

그녀의 눈에 살기(殺氣)가 돌았다. 한 손을 들어 정신없이 혀로 가슴을 더듬고 있는 상대의 머리칼에 파묻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때까지 울리지 않던 방울이 딸랑딸랑 울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수가 점점 올라가 마침내는 징이나 종을 친 것처럼 기복 없는 하나의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은방울은 이미 제 색을 잃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고 안구는 휘돌아 백색만을 밖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빈사라는 손을 놓지 않았다.

“퍽!”

남자가 허물어졌다. 그의 연푸른색 뇌수와 조각난 새하얀 뼛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가빈사라는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헝클어진 옷차림엔 허연 뇌의 조각들과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그의 것들이었음에 분명한 살점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빈…….”

말을 채 잇지 못하였다.

가빈사라는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눈 안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널펀펀한 품속에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가빈사라를 품에 안은 라후는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비린내 속에서 괴로운 듯 얇고 여린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흐른다. 라후는 그 모습에 가슴 한 구석 오래된 흉터가 쑤셔오는 것을 느끼곤 가빈사라를 안은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갈(喝)!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신 게요?”

라후는 가빈사라의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쓸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직시하였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답하며 넓은 소매로 가빈사라의 얼굴을 가렸다.

“흥! 감추는 것이 무엇이어요?”

“쉬익…….”

“약속한 날짜라 왔으니 내칠 순 없을 터이지요, 나후아수라왕 전하?”

물이 제대로 배지 않은 듯한 검은 색 옷을 입은 노인이 방구석 어둠 속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내었다. 회백색 긴 수염이 뾰족한 턱 위에서 길게 자라 있었다. 작으나 형형한 연푸른 눈을 뜨고서 말라빠진 몸과는 달리 육중한 존재감으로 그 자리에 섰다.

그 옆에 농염한 푸른 입술의, 도톰한 허벅지를 드러내는 자줏빛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청동빛 곧은 머리칼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노란 감람석(橄欖石)과 같은 색의 눈이 조소하듯 치켜떠져 있었다.

하얀 수의(壽衣)를 입은 걸때가 큰 남자가, 좁쌀과녁과도 같은 넓적한 얼굴의,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입을 열어 다시 쉬익 하고 소리를 내었다. 갈색의 머리칼이 듬성듬성 나 있고 퍼런 핏줄이 드러난 손등 위로 두드러졌다.

마지막으로,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검은 머리칼의 한 올도 미동 없이 푸른 색 비단 장유(長襦)를 입은 아름다운 청년이 조용히 가빈사라가 누워 있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보일만큼 섬세한 선을 지닌 그의 얼굴엔 흥미가 가득했다. 황금빛 도는 갈색 눈을 반짝이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스릉.”

라후의 옆에 뉘어져 있던 사모(蛇矛)가 울었다. 움찔 놀라 뻗었던 손을 거두며 선웃음을 짓는 그 당혹한 순간에도 그에게선 건들멋이 우러났다.

“라후 아수라왕 전하, 이 무슨 일인지요?”

눈 끝으로 긴 초록색 머리칼을 확인하며 청년이 말했다.

“저희를 믿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갈(喝)!”

크게 외치곤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추궁하듯 덧붙였다.

“... 숨겨야 할 것인지…….”

그 말에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라후의 주변을 둘러싼 넷을 향해 라후가 내뱉었다.

“이제 너희들의 차례다. 너희들이라면 별 절차 거치지 않고도 이곳을 장악할 수 있을 터이다.”

노인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라후는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공기를 베어내듯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나 한시도 잊지 않았다. 제 사(四) 아수라도에서의 나날들을…….”

그의 그 말에 노인을 필두로 하여 모두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후는 팔을 치우고 가빈사라의 얼굴을 냉막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래, 잊지 않았다. 너를 보던 어느 한 순간에도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끝없는 절망과 분노!”

손을 가빈사라의 얇은 목에 가져다 대고 꾹 힘을 주어 누르며 덧붙였다.

“살의(殺意)”

가빈사라는 숨이 답답한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눈앞에 라후가 보이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후가 고개를 숙여 잠이 덜 깬 가빈사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미워한다고 말했었다.”

약간 쉬어 있었다. 가빈사라는 잠내 묻은, 약간은 어리광 부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내게 편했으니까요.”

라후의 눈빛이 변하여 양팔을 가빈사라의 얼굴 옆쪽 양편에 두고 물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가빈사라는 천진하게 웃었다.

“솔직한 게 좋다고 생각해요.”

라후가 의미모를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어째서?”

가빈사라는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라후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진심이라면 언제나 보답 받는다고 믿으니까요.”

가빈사라는 라후의 얼굴을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하얗고 맑은 웃음에 라후는 어찔해졌다.

아주 아래 심연(深淵)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격렬한 증오와 살의가 새롭게 생겨난 모호하고 불확실한 감정과 부딪었다. 그 충격에 온몸이 강하게 반응했다.

라후는 고개를 숙여 달콤한 과실과도 같은 작은 입술을 맛보았다. 언제나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싱그러운 신록의 색과도 같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가빈사라의 몸이 경직되었으나, 곧 가쁜 숨과 함께 풀어졌다. 청조(靑潮) 띤 뺨에 볼을 비비고 맑은 빛의 쇄골을 깨물어 푸른 흔적을 남겼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라후는 가빈사라의 손이 자신의 팔을 꽉 힘주어 잡아 그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곤 더욱 박차를 가했다.

투명한 땀이 턱선을 타고 흘러 가빈사라의 흐트러진 몸에 떨어졌다. 가빈사라의 초롱초롱하던 보랏빛 눈이 혼탁해져 있었으나, 기분 좋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침상 바깥으로 나가 있는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곤 라후가 물었다.

“나를 사랑하고 있나?”

가빈사라는 새삼 얼굴을 푸르게 물들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라후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말로 해줘. 그 때까진 이 손을 놓지 않을 테니 말이야.”

가빈사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다, 달콤한 재촉에 못 이겨 겨우 말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라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내의(內衣) 차림으로 벌떡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없이 옷을 가리켰다. 라후가 벗긴 옷들은 침상 아래에 마구 흩어져 있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가빈사라는 이불로 몸을 가린 채 그것들을 갖추어 입었다.

라후의 억센 손에 손목을 잡혔다.

“아파, 아프다구요!”

그러나 라후는 소한 아수라왕의 침실에 닿을 때까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야윈 소한 아수라왕 앞에 서서 내뱉었다.

“잘 봐.”

라후가 뭔가 중얼거리자, 의식도 없는 소한 아수라왕의 입이 크게 벌려지더니 안에서부터 길고 검붉은 등껍질을 가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리를 가진 생물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빈사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식혼오공(喰魂蜈蚣)이다. 우리 집안 대대로 물려져 내려오는 귀물(鬼物)이다.”

거대한 지네는 라후에게로 날아들었다. 가빈사라가 얕은 비명을 질렀지만, 눈을 떴을 때엔 라후의 손목에 황금으로 된 지네 모양의 팔찌가 하나 생겨난 것뿐이었다.

“이제 너의 아버지의 숨은 잦아질 것이다. 그의 혼은 이미 십년 전부터 없었다.”

가빈사라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는, 라후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다른 한쪽 손목도 잡아 자신을 정면에서 쳐다보게 했다.

“네 아비가 어찌해서 왕이 되었는지 아느냐? 나의 아비, 어미, 형까지 죽이고 더러운 수를 써서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자들의 우두머리이다. 왕가의 핏줄들을 모두 죽여 정통 아수라왕가의 혈통을 끊으려 했다. 어리석은!”

라후는 소한 아수라왕을 돌아보았다. 소한 아수라왕은 살이 스러지고 뼈가 바스러져 마치 십년 전에 죽은 이의 시체를 보는 듯 했다. 가빈사라의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고이는 듯 하더니 라후의 손을 뿌리치고 소한 아수라왕의 시체에 손을 묻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아바마마!”

회색 먼지만 풀풀 날릴 뿐이었다. 백발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오열을 터뜨리는 그녀 뒤에 서서 라후가 가라앉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였다.

“내 이름은 라후(羅睺), 라후아수라왕가(羅睺阿修羅王家)의 핏줄을 잇는 자이다.”

가빈사라의 눈에서 퍼런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뒤돌아서서 외쳤다.

“악마(惡魔)!”

찢어지는 비통한 절규에 라후는 오히려 여유 만만한 웃음을 띠었다.

“조금 전 넌 그 입으로 나에게 사랑을 말했었다.”

손을 뻗어 가빈사라의 턱을 고정시키고 덧붙였다.

“정말 귀엽구나…….”

그리곤 별안간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 턱을 밀어버리고는 이를 갈았다.

“무지(無知)가 가증스럽다!”

가빈사라는 시야가 빙글 도는 것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누군가 나에게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말해줘…….’

‘오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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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금원
    작성일
    09.09.27 21:15
    No. 1

    필력이 평균이상이신것 같긴하지만, 아수라족의 특징이라든지.. 좀 종족설정이 불분명하네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니 종족 특성이라는 것으로 모든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수라라고 뭐가 다른건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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