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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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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08.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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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파륵오륜담 2부 탈피 5

DUMMY

철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현과 소마는 포박되었다. 가현은 한편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면 아래 려은의 동태를 살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계와 여러 사람 혹은 이들를 대동하고 나타난 스켈이란 자를 보고 있었다.

갈색 송곳니를 날카롭게 반짝이며 입에서 투명하고 찐득찐득한 거미줄과 유사한, 그러나 굳으면 금속성의 물질이 되어버리는 것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이는 키가 작고 대머리인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모습이었다. 등의 살가죽을 종이처럼 무수히 구멍을 뚫어 날카로운 화살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 이는 대여섯 살 정도의 연령으로 보이는 여아였다.

가현은 조용히 스켈의 입을 바라보았다. 전날 본 것과 똑같이 붉은 색 가운에 와인색 선글라스를 끼고 창백한 금발을 길게 뒤로 땋아 들어뜨린 스켈은 재미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했다.

“용주(龍舟)의 힘은 틀림없군. 설마 했는데 정말 몽환경(夢幻鏡)의 암시에 따르다니. 드디어 골칫거리인 이무기를 수하에 둘 수 있게 됐어. 게다가…….”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강을 바라보았다.

“경이로운 수치야. 내가 본 이 중엔 최고로군!”

희열에 떠는 스켈을 보며 가현은 냉소를 지었다.


‘너는 뭐지?’

려은의 뚱딴지같은 물음에 이무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청록색 눈동자를 환히 빛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명연(溟淵)이라 한다. 그리고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려은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명연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지금 네 일행이 쓰레기들에게 잡혀 있는 것이 보인다. 또 한 번 쓸어버려줄까!’

그러더니 새파란 빛과 함께 검은 거대한 몸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남색 머리칼에 청록색 눈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비늘로 만들어진 듯한 검은 바탕에 오색광채가 나는 드레스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명랑하게 헤엄쳐서 려은의 앞으로 오더니 손으로 려은의 배를 더듬었다.

‘벌써 다 나았네.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리둥절해 하는 려은을 보며 툭 쏘듯 말한다.

‘그러니 미안하지 않아!’

려은은 그제야 자신이 녹인 듯한 명연의 촉수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채 묻기도 전에 명연이 수면을 향해 솟구쳤다.

그런 그녀를 보고서 서둘러 위로 가려는 순간,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차갑고 억센 수많은 손들이 려은을 잡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두운 물속에 있어왔는지 알 수 없을 그들이 려은을 붙잡고 있었다. 옷뿐만 아니라 살까지 찢겨나갈 것 같은 강한 힘이었다.

려은은 그들의 고통과 비명, 나아가 소원을 들었다.

‘죽어줘.’

본능적으로 그들을 뿌리치기 전에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건 자신의 힘이 강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만큼 가슴이 넓어진 것일까.

그들 중 하나라도 구제할 수 있다면 자신이 죽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려은은 맥을 놓고는 바닥으로 주르르륵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명연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 젖은 고혹적인 모습에 스켈은 속으로 과연이라 외치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용이 되지 못하고 지상에 주저앉고 말았지만, 기나긴 세월의 수행이 어디 가겠는가.

이무기의 내단(內丹)을 얻고 싶어 비드페드미르의 이들을 모두 동원한 적도 있었으나, 꾀가 많고 강의 많은 물을 이용해 싸우는 바람에 싸움 거는 족족 패하고 말았다. 물론 강의 물을 마르게 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건 그의 미학(美學)에 도무지 맞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특별히 제 0 구역 용주에까지 청을 어렵게 넣어 몽환경을 이용해 무소속 이와 싸움을 붙였고, 성공했다. 그 이도 상당한 수치였음을 이전의 만남으로 알고 있었다.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죽었다고 쳐도 이무기의 힘을 어느 정도는 빼놓았으리라 생각했다.

“구해주지, 꼬마야!”

명연의 말에 가현이 무표정하게 비스듬히 어깨를 기울이고는 두 발을 굴렀다. 그러자 가현과 소마를 포박하고 있던 이가 울렁거리는 땅에 뒤로 넘어졌다. 이어 소마가 숨을 크게 내쉬자, 거미줄과 같은 것이 버서석 얼더니 먼지처럼 조금씩 부스스 떨어졌다. 소마가 몸을 후드드득 흔들고, 가현이 힘을 약간 주자 초봄에 강의 얼음 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놀란 얼굴의 명연을 보며 가현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서늘한 바람이 명연의 젖은 뒷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어리석긴!”

엄하게 나무라는 듯한 소년의 어조에 명연은 움찔했다. 그러나 가현은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뒤에 남은 커다란 백색견이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려 날카로운 바위산들의 연속과 같은 하얀 이와 붉은 혓바닥을 드러낸 채 주위의 풍경이 흔들리는 기이한 울림으로 포효했다.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몸속을 진탕시키는 종류의 진동이다. 스켈이 데려온 인간들과 이들 대부분이 피를 토했다. 상당히 화가 난 듯한 기색의 개를 보고 명연은 강가에 내려앉길 주저했다.

‘도대체 뭐야?’

개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저건 단순한 개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아이의 무력해 보이는 모습에 걸맞지 않는 기이하고 강력한 힘. 그리고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년의 그 노한 표정.


죽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려은은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사실은 생각하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그저 감정의 흐름을 느낄 뿐으로, 문자화하는 것은 조악했다. 그러니 문자화해야만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인지해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주객전도와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파륜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끝도 없고, 이젠 보람도 없을 일에 지쳐버린 건지도 몰랐다. 살고 싶다는 본능만으로 견뎌내기엔 그녀는 냉정하기만 할 뿐, 천성적으로 강하질 못했다. 그래서 자신안의 파륜의 존재를 깨닫기 전에도 회피하고 냉소하며 자기위안을 일삼았을 터였다.

변하고 싶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일이었나?’

목적을 잃었다. 어떻게 변해야 할지도, 왜 변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혹은 누구를 위해 변해야 하는지도 만족할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위 환경은 변해만 갔고, 적응하는 것도 신물이 나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 또한 그녀의 의지를 벗어나 변해가고 있었다. 주위 환경 탓뿐만 아니라, 파륜의 존재에 의해서였다. 그녀가 통제하기 힘든 충동이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거리며 제멋대로 튀어나오려 했다.

그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해지는 것으로 자존심 강한 려은에겐 참기 힘든 것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떤 생명체에게나 있는 죽음에의 본능에 조금 충실해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려은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누군가 멱살을 잡고 암흑 속에 있는 려은을 마구 흔들었다. 너무나 거칠어서 거슬렸다.

눈을 가늘게 뜬 려은의 망막에 가현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너를 잡아두기 위해 죽은 그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가현은 무섭도록 차분하게 그녀를 향해 묻고 있었다. 행동의 격렬함과 말의 날카로운 차가움이 대비되었다.

려은은 고개를 저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젠…….’

가현의 표정이 굳었다. 가현이 쥐었던 려은의 옷자락을 놓으며 짧게 뱉었다.

‘죽어버려.’

물귀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려은을 내버려두고 가현을 뒤돌아 수면을 향해 헤엄쳐갔다. 그 뒷모습을 보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슴 저린 상실감에 몸이 떨려 왔다.


‘도피.’

문득 떠오른 단어에 려은은 무기력하게 놓여 있던 팔을 들어 가현을 향해, 물 밖을 향해 힘껏 뻗었다.

그녀의 주위로 검은 번개와 같은 것이 치직거리며 일어났다. 그러자 물귀신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려은은 려은이…….’

보찍이 끝까지 하지 못했던 말의 뜻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변하든 난 나다.’

고정된 자신을 추구하며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변해지는 또는 변해가는 자신의 본질, 더불어 자신의 뜻과 의지를 놓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얻은 것을 잃고, 당연히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주위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마음의 상처를 저어하여 웅크리고 있는 것은 어리석다.

자신을 소중히 하는 방법에는 온전히 자신을 보존하는 것 외에도 얻으며 기쁘고, 잃으며 슬퍼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감각을 사랑스레 여기는 용감함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녀 자신 말고도 귀히 여길 이들이 있음을 잊고 있었다. 분노라 생각했던 가현의 무표정을 뇌리에 떠올렸다. 깊이 상처받았음이다. 려은이 그를 일순간이라 할지라도 버렸음에.

려은은 힘껏 땅을 박차고 위로 향했다. 절망과 겁을 물 깊은 곳 울부짖는 귀신들에게 맡겨둔 채.

앞서가는 가현의 팔목을 잡았다. 가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뿌리치지도 않았다.

려은은 시원하게 웃음 지으며 손을 내려 가현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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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1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1 4 16쪽
1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79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2 3 18쪽
1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6 3 23쪽
1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3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1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2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6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6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2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69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6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0 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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