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36,074
추천수 :
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07.16 00:00
조회
279
추천
3
글자
22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DUMMY

서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지옥에서 태어났습니다. 죄인의 자식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이렇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태어날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가빈사라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동화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 지옥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귀가 뾰족하고 콧구멍이 크게, 살갗은 시퍼런 귀신의 형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도 저를 낳고서 기뻐하지 않은 듯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패대기쳐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귀신은 나를 예뻐하여 미음을 쑤어 먹이며 키웠지만, 그 귀신이 죽고 난 뒤에는 다른 귀신들의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뽑아 먹기도 하고, 온 몸의 뼈를 으스러뜨려놓기도 했습니다. 그 때가 세 네 살 쯤 되었을 즈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비굴해져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귀신의 어떤 명령도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염마전의 구리 촛대를 훔쳐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염마왕의 서재에 있는 그것을 훔치려는 순간에 대왕께서 들어오셔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규정대로 지옥의 기름가마솥에 열 번쯤 튀겨져야 맞을 것을 염마왕은 용서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귀신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겪은 고통으로도 충분히 벌충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후 저는 염마왕의 보살핌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리삭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듣는 것은 괴롬의 기억이 남아있어 항상 점잖게 가만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따뜻하고 상냥한 주위의 배려가 당연하게 여겨졌을 때, 저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에 입을 갖다 대는 결기를 부렸습니다. 그 때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가 수용하고 고치게 하는 것보단, 제가 말하는 게 더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마구발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버르집고 성토하는 저를 이젠 모두가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알 수 없었지요. 어째서 타당하고 정당한 말에 그들이 수긍하는 듯 하면서도 화를 내고 저를 저어하는지요.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입어 만신창이, 짜발량이가 된 저를 염라대왕은 웃으며 안아주셨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을 말할 필요는 없느니라. 사람들의 뜻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논하는 지혜가 필요하니라. 너는 영특하고 냉정하며 사리분별에 밝으니 내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으니’

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제야 다른 이들이 스스로 알고 있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일을 공격하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러왔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말하는 데는 직설적인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닌, 사람을 감싸 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바뀌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대왕의 곁으로부터 떨어져 이런 곳에 있습니다. 지옥이 그 존망을 걸고 아수라족과 총력전을 벌이는 이런 때에 말입니다.“

가빈사라는 어느새 얼굴을 들어 동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가빈사라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 동안의 설움이 모두 녹아내린 듯 그녀의 표정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동화는 조금 후회했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인상이 차가워 부접하기 어려워하는 주위의 이들에게 써먹는 방법이었다. 바로 노출의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상대가 솔직해지는 만큼, 상대가 털어놓은 만큼 자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울을 수평으로 유지하려는, 저도 모르는 마음의 작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화도 그런 식으로 가빈사라의 말을 유도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까닭을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동화 스스로도 말을 하는 동안에 감상적으로 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이젠 담담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가빈사라의 이야기는 달랐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 정도의 일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듣고 난 이상 그의 양심상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또, 깊은 마음으로부터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가빈사라가 놀라 외쳤다.

“저기 저건!”

가빈사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바로 조금 전에 탈출했던 그 거대한 무덤이었다. 가빈사라의 눈은 마치 사로잡힌 듯 그 안을 향해 있었다.

“저토록 잔인하게…….”

끝도 없이 베고 베이고, 찌르고 찔리는 광경을 보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길입니다. 그들의 형(刑)은 기한도 없습니다.”

동화는 먼지가 엉겨 붙은 비석 표면을 쓸어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가빈사라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신음에 가까운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의 이야기대로라면 이미 그 라후라는 자는 왕이 되었겠군요. 그는 전대에서의 패배를 용납지 못하고 복수를 꿈꿀 것입니다. 아마 저런 전쟁이 온 우주에 휘몰아치겠지요.”

가빈사라가 질린 얼굴로 동화를 쳐다보았다.

‘지옥도…….’

동화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수라 족은 싸우는 것이 본능인 종족이다. 그들에게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전쟁에 명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싸움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싸움 자체에 있는 것이었다.

아수라 족은 상대의 혈향을 즐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도 수긍할 수 있는 종족이다. 천상에서도 꽃잎이 휘날리는 아름답고 호화로운 궁에서는 쾌락을 즐겼지만, 그 외의 장소에선 땅이 그들의 피로 물들어 검푸를 정도로 살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들 특유의 억제하기 힘든 마음 속 불덩이의 배출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겨우 몇 겁 평화롭게 지냈다고 해서, 그 피의 뜨거움이 완전히 식을 리는 없었다. 그들의 피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오는 듯 가슴이 젖어드는 듯 알싸한 살해의 단맛을.

“지옥군이 등활지옥(等活地獄)과 흑승지옥(黑繩地獄)을 수복하고 아수라도까지 침범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마랑(魔郞)이 웃으며 말했다.

“잘 되었군요. 저 가식적인 꽃들이 지긋지긋하던 참입니다. 본래 아수라도라 하면 피에 젖은 푸른 땅에 광기로 물든 붉은 하늘이어야 하지요.”

라후가 말했다.

“추행진(錐行陳)으로 간다.”

추행진이라 함은, 적을 분단시킬 때 사용하는 진으로, 대체로 보아 삼각형의 모양이었다. 라후의 말에 문회(問悔)가 눈을 크게 떴다. 마랑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여기 있는 전력으로 진을 짜서 대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젠 제 4 아수라도에서 힘을 비축하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동포들을 해방시킬 때가 되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라후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겁자의 씨를 말리는 데 염마왕을 쓰려 한다.”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병사가 마랑의 눈에 띄었다. 마랑이 검지로 그를 천천히 가리키자, 병사의 목에 푸른 금이 생기더니 스산한 소리와 함께 잘려져 바닥에 툭 떨어져 몇 번 퉁퉁 뛰었다. 병사의 눈이 자신의 몸에 향하더니 녹슨 자물쇠가 열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너희들 중 누구도 출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난 나가겠다.”

문회가 걱정하여 항의하듯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라후가 투구를 쓰고 사모(蛇矛)를 쥐며 답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진정한 아수라 족이 어떠한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염마왕의 수급을 챙겨 천상도(天上道)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회, 마랑, 흉신(兇身), 취산(醉散) 모두 그 말의 뜻을 무섭도록 잘 알고 있었다. 라후는 아수라왕의 인(絪)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극성(極性)으로.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의 물처럼 염마왕과 그 권속들은 계속 위로 올라, 빼앗겼던 자신들의 영역을 되찾고, 마침내 바깥으로 흘러 넘쳤다. 그리하여 아수라도의 꽃잎을 짓밟고 섰다.

염마왕은 예상과는 다른 아수라도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가 기억하던 천상에서의 아수라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 때서야 소한 아수라왕이 어떤 인물이며, 왜 반역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어디로 가나…….’

쓰디씁게 혀를 찼다.

상대의 진형을 살펴보니 삼각형 모양의 진(陳)으로, 아마도 지옥군을 분단시키고 각개격파하려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라후아수라왕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나서지 않고 진의 중앙에서 지휘하려는 것 같았다.

유치찬란할 정도의 화려한 색깔에, 실용성보다는 멋을 앞세운 갑주를 입고 아방나찰들을 노려보며 욕을 퍼부어대는 아수라 군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처음 전쟁을 해보는 것이 분명한 자들을 이끌고 나와 지옥에서 샅샅이 긁어모은 엄청난 수의 지옥군을 상대하려 하다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저번에 지옥에 쳐들어 와서 자신의 눈앞에서 수정심장을 터뜨린 당시, 아수라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므로, 제대로 된 전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게 했다.

등활지옥(等活地獄)과 흑승지옥(黑繩地獄)을 수복하는 것엔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아마 그 동안 라후아수라왕은 아수라도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런 정도라면 아수라도의 전력을 바닥내고 건물을 불태워 재기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게 하고, 겁을 집어먹어 다시는 지옥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어 보였다.

‘전력의 손실도 미미하다! 따끔한 맛을 보여 주마.’

청동빛 갑주에 오피화(烏皮靴)를 신고 붉게 이글거리는 용암주를 박아 넣은 거대한 장검을 들었다. 뻣뻣하게 뻗은 검은 수염과 눈썹 아래 단호하면서도 열기 띤 새까만 눈을 크게 부릅떴다.

“더 이상 참을 필요 없느니! 달려가 저 경박한 혀를 뽑아버려도 좋다!”

지옥의 귀신 특유의 신체적 특징을 비하하는, 동굴 같은 콧구멍에서 바위 같은 코딱지가 떨어진다, 혹은 음메음메 히이이잉 울어보라는 둥의 아수라군의 야유에 어지간히 열 받았었던지 아방나찰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염마왕이 장검을 들자 일순 숙연해졌던 것과는 반대로, 희열과 분노의 기성을 지르고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염마대왕은 자신만만했다. 그깟 무경험의 조무래기들이 진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충 줄 서서 밀고 들어오는 것 정도는 우두(牛頭)와 마두(馬頭)들의 거대한 체격과 괴력에 금방 찌그러져 와해되고 말거라고 확신했다. 그 외 가지각색의 지옥의 귀신들은 망자들을 괴롭히던 솜씨를 그대로 발휘할 것이었다. 우두와 마두를 기둥으로 삼아 그 주위에 작은 귀신들이 몰려다니는 방식으로, 이는 전투의 효율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덩치가 큰 우두와 마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역시 싸움이 본능이자, 살생을 즐기는 종족이라는 평답게 쉽사리 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작전대로 분단되고 있었다. 그러나 염마왕은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다.

각개격파를 당하기엔 아방나찰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오히려 아수라군이 지옥군에게 포위당해 섬멸당할 위험이 높은 것이다.

“이 정도도 모르다니…….”

염마왕은 못마땅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일찍이 외경했던 전대 아수라왕의 핏줄이라 보기엔 너무나도 조악한 솜씨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인 이상, 손속에 자비가 있을 리 없었다.

“무서우신 분…….”

공중에 선 마랑(魔郞)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흉신(兇身)이 긍정의 뜻이 담긴 숨소리를 길게 쉬익 내었다.

‘추행진(錐行陳)으로 분단을 내어 오히려 지옥군의 양면공격을 유도한다. 그리고 인(絪)을 사용하여 동귀어진의 형세를 이룬다. 마치 수적인 열세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분투하는 듯 보이게 하여, 전멸하기 위한 작전의 기이함을 가리려는 것, 허를 찌르려는 속셈이다.’

신경질적으로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진갈색 눈을 굴렸다. 그의 깍지 낀 손안에 미지근한 땀이 축축하게 고이고 있었다.

“..과연 재미있는 장난감.”

흉신이 마랑을 휙 돌아보았다.

마랑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아수라족의 푸른 피와 지옥군의 붉은 피가 섞여 기묘한 보랏빛으로 짓밟힌 꽃잎들이 물들고 있었다. 푸른 피의 시큼한 냄새, 붉은 피의 쇠비린내, 꽃의 달콤한 향기가 섞여 가슴 뒤틀리도록 역겨웠다.

우두(牛頭)는 괴력으로 아수라 병사 하나를 잡아 개구리를 잡듯, 다리를 잡고 쫙 찢었다. 푸르딩딩한 내장이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후두둑 떨어졌다. 귀신들이 끼릭낄낄 거리면서 아수라족의 머리를 잡고 뿌득 뒤로 돌렸다. 입에서 불을 내뿜어 쇠꼬챙이를 달구어 눈만 찌르며 돌아다니는 귀신도 있었다.

염마왕과 마랑(魔郞)이 예견했던 대로 되었다. 분단을 시킨 후, 한쪽을 빨리 처리하고 다시 다른 쪽으로 향하는 강력함과 신속함을 필요로 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각개격파를 하기엔 아수라군의 숫자가 적고 약했다. 그래서 한쪽을 채 전멸시키기도 전에 다른 쪽 지옥군이 당도해, 양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고, 나아가 완전 포위당해 사면초가의 상태가 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라후는 침착하게 자신을 공격해오는 지옥군을 베어내고 있었다. 붉은 피가 그의 얼굴에 분수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차분히 죽어가는 아수라군의 숫자를 세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되었는가?”

반수 정도 남았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인(絪)은 천성적인 것으로, 별다른 주문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의 은빛 머리칼이 고슴도치의 곤두세운 털처럼 바짝 섰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물컹물컹 검은 연기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스물스물 기어가 아수라족의 몸에 닿자, 닿은 자의 몸에서 푸른 수증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믿을 수 없는 괴력으로 적을 쪼개기 시작했다.

일당백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 아수라족이 돌변하자, 염라왕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나후아수라왕의 핏줄이 저주받았다고 일컬어지는 가장 큰 이유인 바로 저 힘!

동족을 마음대로 지배 가능한 저 선천적인 힘 때문에 떠받들어지면서도 고립되었다. 아수라족의 보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나, 동족이 아닌 자와 동족 모두에게 괴물 취급되었다. 게다가 그 능력을 제하고도 우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함.

“당황하지 마라!”

염라왕이 외쳤으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칼에 맞아도, 목이 돌아가도, 눈이 멀어도 어찌된 일인지 쓰러지지 않고 전투 기계인형처럼 달려들기만 하니. 생물이 아닌 이상한 것과 싸우고 있는 듯한 이질감과 거부감이 두려움과 공포로 변화되기는 쉬운 일이었다.

기세가 역전되었다. 퍼렇게 물든 눈으로 덤벼드는 아수라 족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런 식이라면 그들의 몸이 오래 못 견딜 것, 버티는 수밖에 없다.’

염마왕이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버티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아수라족의 수명은 아방나찰보다 훨씬 길다. 아무리 전락했다곤 해도, 신족(神族)의 명부에 있던 자들이었다. 만약 그 천수(天壽)를 모두 희생하여 지금 이런 식으로 싸우고 있는 거라면 자칫 잘못하면 전멸 당할지도 모른다.

기술이나 경험을 넘어선 저 압도적인 기도(氣度)는 그들이 아수라족이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아수라족이란 것은 이러한 것이다.’

라후는 자신의 인(絪)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왕가를 배신하고 평화를 선택해 안락함에만 젖어 산, 비겁하고 허약한 것들은 동족이라 인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나마 알게 된 것이 복이라 할 수 있겠지.’

피와 살, 나아가 뼈를 태워야 끝이 나는 것이었다. 이제 피가 다 증발하고, 회색 살이 지글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제 지옥군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졌다. 피가 끓어 증발하고, 살갗이 타고, 근육이 드러난 채, 혹은 근육도 타서 뼈만 남았는데도 덤벼드는 아수라 족은 죽음을 관장하고 망자를 벌하는 그들에게도 진저리나도록 끔찍한 모습이었다. 싸우기는커녕 피하기에 바빴다.

“전열을 정돈하라!”

염마왕의 외침도 공허하게 되었다. 후퇴란 말이 떠올랐으나, 염라왕은 이를 악물었다.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화근을 일찍 뿌리 뽑지 않으면 앞으로 지옥은…….’

이대로 물러나게 된다면 앞으로 다시 군대를 일으켜 아수라족을 치는 것은 힘들게 되리라. 게다가 아수라족의 전력은 저런 수까지 써서 공격하는 걸 보아선 저게 마지막인 듯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두 죽여 버리면 비교적 긴 기간의 평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을 빼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수라군은 지옥군을 놓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마치 나 죽고 너 죽자는 듯이.

“끝까지 물러서지 마라! 베어버리는 거다!”

혼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장소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아방나찰 하나를 구하며 소리쳤다. 염마왕의 검에 아수라 해골 병사의 갈비 쪽 뼈다귀가 부서졌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염마왕은 순수한 분노의 힘으로 꽝 박치기를 했다. 비틀거리는 해골병사를 발로 차 넘어뜨린 뒤, 발로 머리뼈를 지그시 밟아 주었다. 그 덩치로 밟았으니 당연히 머리뼈가 성할 리 없다.

“음후후!”

염마왕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에 아방나찰들은 점점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투양상이 지옥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하여, 어느 정도 궤도를 찾는가 싶었을 때였다.

“흑!”

염마왕은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누군지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실루엣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멀쩡할 수 있는 아수라족 병사는 단 한 사람뿐.

“나후…….”

라후는 서늘한 미소와 함께 염마왕의 등에 박혀 있는 사모(蛇矛)을 힘껏 비틀어 뽑아내었다. 입으로 붉은 피를 토하며 휘청이는 염라왕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같은 분노의 외침이 쏟아져 나왔다.

“등 뒤에서 공격하... 비겁…….”

라후가 차갑게 대꾸했다.

“죽어라.”

사모를 휘둘러 목을 베어내었다. 아직까지 눈을 뜨고 꿈틀거리는 얼굴을 보고는 말했다.

“안심하지 마라. 제 4 아수라도엔 이보다 더 많은 군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 경악으로 일그러지더니 염마왕의 얼굴은 그 상태로 굳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염마왕의 머리카락을 풀어 고리모양으로 묶어 손잡이를 만들었다. 라후는 그것을 잡고는 허공에 떠서 외쳤다.

“염마왕은 죽었다!”

아방나찰들의 시선이 염마왕의 잘려진 목으로 향했다. 슬픔과 절망감으로 뒤범벅이 된 아방나찰들은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리멸렬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남은 자는 라후 뿐이었다.


“똑, 똑, 똑…….”

황금빛 찬란한 궁의 회랑 바닥에 검붉은 액체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표정 멋진데요?”

마랑(魔郞)이 팔짱을 낀 채, 불룩한 회랑 기둥에 기대서서 말했다. 라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염마왕의 수급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속을까요?”

고요함에 마랑이 자조적인 웃음을 짓곤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속고 싶어 하는 자들은 있지.”

마랑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방나찰들의 붉은 피로 칠갑을 한 라후는 그 자체가 눈이 시리도록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검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빛은 살기(殺氣)조차 숨죽을 정도로 불투명, 무감정했다. 두드려도 둔탁한 소리조차 나지 않을 듯 보이는 육중함이 그 새까만 눈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마랑은 라후의 말보단 그 모습에서 풍기는 무서울 정도로 허한 기운에 눌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라후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랑은 손톱을 깨물었다.

염마왕의 마지막 죽은 모습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할 정도의 것이었다. 동공이 풀렸으나, 굳어버린 살가죽과 더불어 죽기 전의 경악과 공포를 충분히 효과적으로 전달 가능했다. 라후가 일부러 그런 표정이 되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싸우다 힘이 안 되어 왕가에 전해 내려오는 힘인 인(絪)을 최후의 수단으로 쓴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래서 지금 아수라도에 전력(戰力)은 없다고 얼핏 보아 오해하도록. 만약 라후아수라왕의 냉혹함을 알고 있다면 속지 않겠지만.

전쟁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파와 전쟁에 대비 혹은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경파가 있는 법이다. 라후는 천상도(天上道)의 두 파로 나뉠 이들에게 양쪽 모두의 근거 혹은 빌미를 준 것이다.

천상도로 보내질 염마왕의 수급은 강경파의 수단이 될 것이고, 지옥군과의 싸움에서 전멸한 듯 보였던 상황은 온건파에게 명분을 줄 것이다.

라후는 혼란을 야기하려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파륵오륜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파륵오륜담 2부 탈피 5 09.08.09 238 3 10쪽
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2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2 4 16쪽
»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79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4 3 18쪽
1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6 3 23쪽
1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4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1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4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7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8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3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71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8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2 8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