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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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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58
추천수 :
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06.1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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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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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DUMMY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본편




“안 돼!”

려은(濾恩)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방의 풍경이 두루 뭉실 흐려 보였다. 미지근한 땀방울이 턱을 타고 근질근질 흐르고 있었다.

갈퀴손으로 앞으로 쏠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안경을 더듬더듬 찾았다.

안경을 쓰자 모든 게 명확해 보인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곤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나 막상 서려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있었는데 백지처럼 깨끗했다.

꺼림칙했다.

꿈은 려은에겐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 인형 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뽑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날 진짜로 뽑았다. 얼마 전 꿈에서도 장롱을 열었더니 까만 옷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 팬티 바람으로 안절부절못하다 깨었더니 그 다음날 아침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었다.

려은은 책상 쪽을 바라보곤 억지로 일어섰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에 자기 전에 챙겨둔 가방이 있었다.

‘너희들이 인간인 줄 알아? 너희는 고3이야, 고3!’

어제 들은 학년 주임인 지구과학 선생님의 외침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 말에 반의 모두는 와아 하고 웃었었다.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괴로운 것은 아니다. 힘들긴 하지만 익숙해져서 괜찮다. 펜을 잡고 글씨를 쓰느라 굳은살이 박인 중지 손톱 옆의 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외로 재미있는 일도 가득이다. 특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옥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정말로 멋지다. 도시의 네온사인의 불빛이 별보다 더 환하다. 붉게 변색되어버린 하늘은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병적인 환희는 마치 마약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 안전장치도 없는 옥상에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에서는 기술자를 시켜 창틀에 못을 박아 놓았다. 한동안 포기하고 있었지만, 한번 시도해보았더니, 못은 부자연스럽게도 너무나 쉽게 빠졌다. 누군가가 이미 뽑아놓은 것이었다. 동지애를 느끼곤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섰을 때 마치 자유인인 것처럼.

아직도 비평준화인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을 부모님들은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들어가서 한 달 동안 반 아이들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었다. 이유도 알 바 없이 두려워한 까닭에 모두 공부만 했다. 옆을 돌아볼 시간 따윈 없었다.

그 공간 안에 있지 않으면 모르는 것투성이다. 특히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곳이 얼마나 삭막하고 쓸쓸한 곳인지를. 학생 중 누군가는 하얀 학교 건물을 정신병원으로 부른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는 것도.

교외지역 중학교에서 항상 전교 일등을 하던 아이가 처음 친 모의고사에서 전교 53등이 나왔다고 부모님께 혼나고 약을 먹었던 것도 그거 바보 아니냐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었다. 특히 걔보다 성적이 덜 나온 일부 아이들의 말투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몇몇 아이들은 진지한 어조로 학교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면 그 학교는 삼년 동안 시험을 안친다며 죽으려면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게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두려움을 떨치려 과장되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살에의 유혹의 존재를 깨닫고 부정하려 무진 애를 쓴 것일지도 몰랐다. 그 아이의 장례식 날이 중간시험 하루 전이어서 반 아이들이 한명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집에 가야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멈칫 했다.

려은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말하는 미친 듯이 공부하라는 것은 실행할 자신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버틸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것이 이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려은의 집은,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분명 이곳이었다. 려은은 이상하다고, 무언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찬물을 얼굴에 마구 끼얹었다.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식탁에 앉았다.

“에, 또 연근......”

“너 코피 났었잖아. 그냥 먹어.”

별 수 없이 하나 집어 먹는다.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피곤해서 코피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일본만화에 흔히 나오는, 멍청한 남자주인공이 예쁘고 섹시한 여인의 허벅지를 보고 코피를 쏟는 거랑 똑같은 원리인 것이다. 즉, 머리에 열이 오르면 코피가 난다는 뜻이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몇 번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연달아 생기면 뻘건 피가 나오는 것이다. 코피가 나고 나서야 그 때 스트레스를 받았었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멕시코, 일본, 칠레, 미국, 중국 등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지진이 어제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젯밤 10시 30분경, 리히터 규모 1.4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멕시코는 리히터 규모 8.4, 일본은…….”

려은은 구멍이 빠끔빠끔 나 있는, 간장으로 졸여 갈색인 연근을 바작 깨물었다. 투명한 진이 주욱 늘어난다.

“지진과 함께 화산폭발의 위험이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경고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마욘 화산, 피나투보 화산, 중국과 북한에서는 백두산의 폭발 징후를 발견... 그 외에도…….”

노릇 바삭하게 구워진 고등어의 살을 젓가락으로 헤집었다.

“인도네시아의 종교분쟁이 악화일로에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은 각각 성명을 내고…….”

하얀 속살이 이쁜 배추김치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중동의 화약고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스라엘측은 핵무기 사용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려은은 아침 뉴스치곤 살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별 감흥 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결론은 어쨌거나 자신은 학교를 가야한다는 것이고,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다는 얘기다.

“다녀오겠습니다.”

낮은 굽의 까만 구두를 신고 신발 코를 바닥에 탁탁 두드렸다.


“백두산이 폭발하면 우리 모두 죽는 거 아닐까?”

려은은 짝인 현정의 말에 맥없이 책상위에 엎드렸다.

“폭발하기 전엔 모르지.”

현정의 표정이 가라앉더니 망설이는 듯하다, 화내는 것도 아닌 차분한 투로 말한다.

“려은이 너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떨어져서 그냥 우리를 보는 것 같아.”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어딘가로 갔다.

‘화나게 한 걸까.’

하지만 그 정도로 저럴 현정이가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려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현정이도 그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그게 편하니까.’


려은은 평소 그대로 수업을 반쯤은 듣고, 반쯤은 흘리며 눈앞에 무언가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잘못 본 것일 거라고 애써 속으로 말했다. 그건 있을 리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앞과 뒤로,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통과해서도.

그러나 모두들 모르고 있었다. 모두 평소의 태도 그대로였다. 두두두 달려가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고 당황해하는 건 자신 혼자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두 손이 올려져 있는 책상 바로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뿌옇게 빛을 내는 것을 한 손으로 붙잡고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듯한 낫을 높이 치켜들었을 땐 숨이 막혀왔다.

게다가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았을 때는 더욱 더.

‘감히 지옥의 형벌에서 도망치려 하다니! 더 이상의 생(生)은 없다!’

살가죽이 벗겨져 근육과 안구가 그대로 보이는 사람이 침을 흘리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침이 려은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점점 자세히,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휙.’

자신의 목, 정확히는 망자(亡者)에게로 내려쳐지는 커다란 낫의 파공성도 점점 확실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싫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어느새 망자의 목은 잘려져 데구루루 굴러, 발치에서 허한 눈알 두개가 려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끔찍하고 참혹한 비명들이 온 교실에 울려 퍼지는데도, 망자를 잔인하게 사냥하고 죽이는 광경이 눈앞에서, 혹은 자신들의 몸을 투과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선생님과 아이들은 려은만 볼 뿐이다. 책망과 놀람 어린 시선들을 무시하고 미친 듯이 가방을 챙겨서 학교를 나왔다. 거리에서도 참극은 무수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학생이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거리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넓은 길을 일직선으로 걷지 않는 까닭이다. 혼자서 움찔거리며 놀라는 게 아무래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참았던 말을 집에 오자마자 터뜨려내었다.

“엄마, 바깥에 저거, 저거 안 보여?”

현관문을 열고 려은을 보자마자 집에 왜 왔느냐고 하는 어머니를 밖으로 끌어내어 물어봐도 고개를 저으며 려은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얼굴에 걱정이 드리우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듯 한 밧줄을 던졌다. 밧줄은 어머니의 배를 통과하고 려은의 배를 통과했다.

‘싫어, 싫어……!’

려은은 뒤돌아섰다. 검은 밧줄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려은 또래의 여자애를 포박하는 것을 보았다. 벌거벗은 여자아이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성한 살에도 나은지 얼마 안 된 듯 화상자국이 붉게 남아있었다. 몸이 점점 죄어들고 있는 것을 려은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너는 자살한 죄가 있으므로 생(生)을 멸하지 않는다.’

‘차라리, 차라리 없애줘! 다시 안 태어나도 좋으니!’

울부짖던 여자애가 문득 려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어.’

려은은 뒷걸음질 쳤다.

‘살려줘, 구해줘, 도와줘.’

려은은 상황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를 보는 거냐.’

“어디를 보고 있니?”

검은 그림자와 어머니가 동시에 말했다. 여자애의 까만 눈동자가 절규를 담고 려은의 가슴속에 박혀들었다. 어머니의 무지하고 선량한 눈이 려은을 수상쩍다는 듯 살피고 있었다. 려은은 떨리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나는, 나는…….”


려은이 무척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려은의 어머니는 려은을 려은 자신의 방에서 자게 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것을 보고 그러면 답답하다며 이불을 들추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려은은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학교에 연락을 해 하루 쉬게 하겠다고 하고 나서 려은의 어머니는 고 3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것일 거라고, 요즘 코피도 몇 번 흘리고 했으니 체력도 약해져서 그렇다고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려은의 방에서 기척이 없자,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불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며 안도했다.

“려은아, 자니?”

대답이 없었다.

“..려은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불 끝자락을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거머쥐었다.

“펄럭.”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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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2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1 4 16쪽
1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79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3 3 18쪽
1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6 3 23쪽
1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3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1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3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6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6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3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69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7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1 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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