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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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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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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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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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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DUMMY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지?”

은빛 긴 머리칼이 붉은 하늘을 수놓았다. 아수라도(阿修羅道)의 하늘은 아수라 일족의 오만과 증오, 잔학성으로 인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가빈사라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장신의 인영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은빛 긴 머리칼을 제멋대로 풀어헤쳤다. 눈은 쪽빛에 먹을 섞은 듯 검푸르다. 흑색 갑옷을 입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사모(蛇矛)를 흘끗 보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아바마마의 곁에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군이 아귀도를 지나 이미 지옥도에 들었다고 들었다.”

라후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전하께서 저를 시켜 물건을 하나 가져오라 하시었습니다.”

그리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예를 표하곤 가빈사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라후의 몸에서 수라족의 최음제의 향과도 비슷한 아귀의 피냄새가 라후의 알싸한 체향과 섞여 훅 끼쳤다.

가빈사라는 주먹을 쥐고 충동적으로 외쳤다.

“난 당신이 싫어!”

라후는 의외라는 듯 은빛 검미(劍眉)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저의 무엇이 못마땅하십니까?”

가빈사라는 수치심이 몸에 뜨겁게 확 번지는 걸 느꼈지만,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아바마마는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야. 그분이 다스리신 몇 겁 동안 아수라 일족은 주어진 복락(福樂)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어. 그런데 당신이 온 이후로 아바마마가 달라지셨어. 하늘도 더욱 붉게 물들어 이젠 하늘에서 아귀들의 피가 쏟아질 듯 해!”

라후는 엷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것뿐입니까?”

흥분하여 숨결이 흐트러진 가빈사라가 라후의 말에 얼굴을 푸르게 물들이며 고함지르듯 말했다. 푸른 피가 미친 듯 뛰는 심장의 힘을 받아 얼굴로 꾸역거리며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너의 그런 선웃음이 싫어! 반지빠르게 구는 것도 싫고 때때로 어리눅게 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밝게 빛나는 눈 속에 감춰진 검측한 마음도!”

라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의 검측한 마음이 무엇인지 공주는 아시는가?”

가빈사라는 라후가 자신을 직시하자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라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짓눌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딸랑, 딸랑…….”

가빈사라의 귓가에 늘어뜨려진 은색 방울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람이 공주를 휘감았다. 색색의 꽃잎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방울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색 방울이 빨갛게 달아올라 미친 듯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주, 앙버티는 것도 보기 좋으나 당신에게 해를 입히고 싶진 않군.”

공주의 상기된 얼굴과 나부끼는 초록색 머리칼을 보며 라후는 사모를 한번 휘둘러 둘 사이의 기(氣)의 골을 깨어서 흩어놓았다. 가빈사라는 소매로 얼굴을 가려 일시의 사나운 바람을 막았다. 라후는 그런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귀엽구나.”

가빈사라는 라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들은 말이 정확한지도 바람소리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황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은하수의 별이 몇 개 떨어져 그 속에 박힌 것처럼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가현은 그무러지는 마음을 방치한 채 다붓한 분위기 속에서 저 멀리 꽃들과 붉은 하늘이 맞닿는 아련한 선을 보고 있었다. 가현은 이렇게 소마와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 가현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이마에 진땀이 흐르자 소마가 불안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가현은 소마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몸이 점점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소맷자락 안쪽에서 연기를 머금은 듯한 구(球)가 빠져나와 취석으로 만들어진 정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가현은 자신이 결계를 지나 처음 구를 잡을 때 느꼈던 무저갱(無低坑)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둔기가 되어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있다고, 고통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눈이 점점 감기는 것을 느꼈다. 반쯤 감긴 흐린 눈으로 구를 보았을 때 가현은 구 속의 까만 연기와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그 구를 보았을 때 보다 옅어졌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소마가 가현의 얼굴에 코를 갖다 대었다. 백합의 향기와 비슷한 가현의 체취도 그대로고, 귀에 들려오는 숨소리도 규칙적이다. 소마는 그제야 맘을 놓고 누워 있는 가현의 옆에 엎드려 고개를 가지런히 모은 두 발 위에 얹었다.


가현은 자신이 소마와 함께 걷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키를 가진 소마의 북실한 털을 손으로 헤쳤다. 부드러운 감촉에 만족하여 주위를 보니, 뜻밖에도 염라궁의 한 곁이다.

어느새 삼도천(三途川)의 지류중 하나에 걸려 있는 주(朱)칠을 한 나무다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염마전의 식솔들, 염마왕의 손님과 부하들이 지나는 길이다. 망자들은 이쪽으로 올 수 없었다. 그들은 탈혼귀(奪魂鬼), 탈정귀(奪精鬼), 박백귀(縛魄鬼)이라 불리는 염마대왕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사출산(死出山)을 넘고, 엄격한 감시 아래 삼도천중 하나를 건너야 했다.

삼도천은 죄의 경중에 따라 건너는 강이 세 개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망라하여 삼도천이라 부르는 것이다. 죄가 무거운 자는 강심연(江沈淵)을 지나야 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얕은 산수뢰(山水瀨)를 건넌다. 강심연의 경우, 마치 발목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리기 때문에 이미 죽어버린 망자들은 죽지도 못한 채 물속을 기어 나와야 한다. 바위가 칼날 같은 험하디 험한 돌산인 사출산을 지나면서 이미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긴 그들은 저승의 독기가 스민 얼음 같은 물에 매우 큰 고통을 받는다. 산수뢰는 마치 산의 계곡과 같은 것으로 기껏해야 허벅지까지 잠길 뿐이다. 마지막으로, 죄가 아주 가벼운 자는 유교도(有橋渡)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사를 한다. 삼도천 맞은 편 기슭, 망자가 오는 곳엔 현의옹(懸衣翁)과 탈의파(奪衣婆)와 그 둘이 거느리고 있는 우두(牛頭)란 옥졸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두들이 도착한 망자들을 몰아 의령수(衣領樹)란 나무 아래 모이게 한다. 탈의파가 망자들의 옷을 벗기면 현의옹이 그 옷을 기다란 장대를 이용해 나뭇가지에 척 건다. 마치 고무처럼 휘어지는 의령수는 옷의 무게에 따라 항상 일정한 정도로 휘어진다. 그럼 어느 강을 건넜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특정 존재들만이 다닐 수 있는 다리 저편에 망자가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망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자신을 보더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리에 발을 내딛었다. 어째서 이런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곁에 염마왕의 부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잘못 흘러들어온 생령(生靈)인 듯 했다.

금속테에 감싸인 유리알을 얼굴에 걸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치마에 하얀 윗옷, 금색 단추가 달린 검은 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까만 머리칼은 귀 아래 두 치 정도의 길이였고 얼굴은 하얗고 가름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걸어서 이젠 다리의 중간쯤에 이르렀다.

가현은 가끔 생령들이 저승을 기웃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대체로 꿈속에서 이루어지며, 깨어난 뒤 기억하지는 못해도 무의식중에는 알고 있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깊숙이 들어오다니.’

가현은 몇 걸음 나아가 손짓으로 되돌아가라고 했다. 겉모습으로 보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듯한 여자 아이는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손짓에 무언가 느꼈는지 뒤돌아서는데, 바로 그 순간 가현의 품속에 있던 구가 엄청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하얗게 뿜어 나오는 빛에 가현이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여자 아이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가현은 여자 아이의 눈동자가 순간 묘안석(猫眼石)처럼 빛을 하나의 세로줄로 반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점점 풍경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던 염라궁의 건물들도, 다리도,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존재까지 하얗게 사라지고 있었다.

가현은 눈을 번뜩 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무방비하게 바닥에 놓여져 있는 구를 확인했다. 구 속의 검은 안개가 더 엷어져 있었으나,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마가 그런 가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뭔가를 알아채고 낮게 크르르 거리며 경계음을 내었다.

가현은 소마가 노려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꿈에서 보았던 생령이 눈앞에 있었다. 아직 잠을 깨지 않은 듯 눈을 감고 있는데 까만 속눈썹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면서도 우는 듯, 주룩 흘러내렸다.

가현은 무심코 손끝을 눈물자국에 갖다 대었다.

“울고 있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물결이 약간 인 적은 있지만, 고양되어 가득 채워지고도 남아 넘쳐흘러 눈물이 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우는 행위란 미지의 것, 이해가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가현이 손으로 려은을 만지자, 소마 또한 경계심을 늦추고 앉았다. 그리고 처음 보는 것을 동그란 눈으로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가현은 려은이 깨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손을 떼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의 명을 받잡고 왔습니다. 가지고 오신 것을 주십시오.”

라후의 말에 가현은 순간 가빈사라의 말을 떠올렸다.

‘아바마마가 오셨었어. 하지만 소마가 오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서... 전엔 안 그랬었는데…….’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다.”

라후의 얼굴이 확연히 굳었다. 그리고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까지 가셔야 합니다. 따라오실 수 있으면…….”

가현의 얼굴에 실낱같은, 웃음과 유사한 것이 스쳤다.

“내가 못 갈 것 같은가?”

라후의 얼굴에 약간은 다른 의미의 생기가 돌았다.

“지름길로 가는 게 좋겠지요.”

라후의 도발적인 말투에 가현은 아무 말 없이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런 그의 뒤로 뜻밖의 것이 보이자 라후가 의아하여 물었다.

“저 인간 여자는……?”

가현은 돌아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모른다.”

라후는 누워있는 려은을 바라보고는,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갸우뚱했다.

‘기색이 익다.’

그러나 그가 인간, 그것도 저렇게 무력해 보이는 어린 여자애를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는 그가 오랫동안 목표로 해온 물건이 있는 것이다.

“가시죠.”

말없이 가현은 운선(雲扇)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감았다. 그의 옷자락이 흔들리며 소매가 부풀어 올랐다. 그런 그를 보고 라후 또한 사모(蛇矛)를 땅에 꽂고 주위의 공기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꽃잎들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계(界)가 아닌 다른 계로 빠르게 이동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천성적인 기의 강대함과 노력,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요괴 또는 마물이라 불리는 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재미있겠군.’

아수라 일족의 최대 강자는 왕이고 두 번째는 라후라고 일족들 사이에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라후는 목구멍을 간질이는 득의의 웃음을 삼켰다. 라후는 왕을 통해서 가현의 능력을 희미하게 눈치 채고 있었다. 강한 자는 무조건적으로 숭배되는 아수라 일족의 풍습을 알면서도 가현은 그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모습이 달라 배척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드디어 보게 되는 건가.’

가현은 옆에서 팽배해오는 라후의 기를 느끼곤 더욱 더 힘을 주었다. 라후는 그런 가현을 거니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먼저 갈 테니, 있는 힘껏 따라와라!”

예사말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지금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강함을 상대에게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무수한 꽃잎들 때문에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마는 눈을 반짝거리다, 한쪽 귀를 앞뒤로 움찔 움직였다. 회백색 전류 같은 것이 파직거리며 미세하고도 미묘한 공기의 떨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마가 벌떡 일어나 전광석화처럼 가현에게로 뛰어들었다. 충돌할 듯 보였지만, 내려앉는 수많은 꽃잎들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려은은 차가운 느낌에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취옥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노랑, 하양, 빨강, 보라, 분홍 꽃잎들은 그대로였다. 한숨을 내쉬자 바닥에 하얗게 김이 어렸다. 고개를 약간 돌리자 붉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꽃밭이 보였다.

“나, 또 이상한 거 보는 건가.”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잿빛 피부의, 그러나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런 가봐…….”

하지만 그 소녀의 손에 들려 있던 소반이 바닥에 내려지자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아무래도 진짜 같았다.

배가 고팠다.

몸을 일으키고 바라보자, 소녀의 자수정 같은 눈이 자신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녀의 귓가에서 은색 방울이 딸랑딸랑 고음의 선명한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귀는 사람과 확연히 다르게 그 끝이 뾰족했다. 의외였지만, 거부감이나 혐오감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실 감정이 움직이는 데도 기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지금 려은에게는 그럴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당신, 인간?”

그러나 소녀의 말에는 정신이 좀 들었다. 려은이 입술을 달막이자, 소녀는 무색투명한 유리그릇을 들어 려은에게 내밀었다. 안에는 붉은 갈색의 액체에 진달래꽃과 잣들이 동동 떠있었다.

려은은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릇을 받아 몇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소녀가 약간 긴장을 풀고서 말했다.

“잔입이라 말라서 그래.”

려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너는 인간이 아닌 거야?”

려은이 입을 열자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아수라족이야. 이곳은 아수라도고.”

아연실색한 려은을 향해 소녀가 물었다.

“너는 인간이면서 어떻게 수라도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려은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몰라, 모르겠어...난 분명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 날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려은이 자신의 머리를 양 손으로 쥐어짜듯 누르자, 소녀가 려은의 손을 잡았다. 려은의 눈동자가 바늘구멍처럼 줄어들면서 발작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움직이는 것을, 완강하게 잡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먹자. 먹으면서 얘기해.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져 버렸거든.”

그러면서 소반의 그릇들 중에 가장 큰 그릇의 뚜껑 손잡이를 잡고 려은을 향해 말했다.

“이건 용봉탕(龍鳳湯)이야, 뭐가 들었는지 맞춰봐.”

표정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돌자, 려은은 흥미가 생겨 그릇을 보았다. 려은의 손도 아래로 차츰차츰 내려왔다.

“설마 정말 용과 봉황이 들어 있는 건가?”

소녀의 표정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려은은 실수했음을 깨닫고 입을 열려 했지만, 소녀는 손을 저으며 재빨리 말했다.

“틀렸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인 용을 여기에 넣고 삶는다면 삼계(三界)가 뒤집어질걸!”

그리고는 까르르 웃었다. 머쓱해하는 려은을 향해 뚜껑을 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닭과 잉어야. 몸에 좋대.”

그러고는 비색(翡色)의 거북이 등에 얹혀 있는 긴 상아 젓가락을 잡아 쥐어주며 먹어보라고 재촉했다. 상아 젓가락의 윗부분에 정교하게 용이 투각(透刻)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소녀를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고풍스러운 옷이지만, 옷감의 광택이 고급스럽고 바느질이 꼼꼼하였다. 무엇보다 소녀의 거리낌 없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남을 의심하거나 어려워한 적 없었을 거라는 느낌을 받고서 그녀가 매우 귀히 여김 받으며 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자신의 젓가락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서 잉어의 살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입안에서 흩어지는 살에 식욕이 조금 돋는 듯 했다.

문득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소녀가 방긋 웃었다.

“가빈사라야. 종달새라는 뜻이래.”

려은은 무언으로 요구하는 가빈사라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려은(濾恩)...이라고 해.”

가빈사라가 고개를 힘껏 끄덕이고는 자신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재잘재잘 지저귀기 시작했다.

“원래는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와보니 없어졌지 뭐야. 항상 그래.”

그러면서도 언짢은 기색이 아니어서 려은은 오빠를 꽤 미더워하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 연꽃무늬와 수레바퀴무늬, 빗살무늬 등이 찍혀 있는 작고 동그란 것들이 예뻐서 젓가락으로 하나 집었다.

“이건 뭐야?”

“그건 다식이야. 노란 건 소나무 꽃가루에 꿀을 넣어 반죽한 거고, 까만 건 흑임자로 한 거구, 분홍색인 건 오미자 물을 넣어 꿀과 녹말로 반죽한 거야. 그리고 옆에 있는 건 규아상이라고 만두인데 축생도의 해삼이란 것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 사실 난 해삼을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잘 모르겠어. 이건 조란과 율란인데 조란은 찐 대추의 살을 다져서 다시 꿀을 섞어 대추 모양으로 빚은 거야. 가운데 꽂힌 건 잣이고 그 위에 뿌려진 건 잣가루. 율란은 삶은 밤을 찧어서 꿀과 계피가루를 섞어 밤 모양으로 만든 거야. 위의 하얀 것, 이것도 잣가루구. 아, 아까 네가 마신 건 진달래화채야.”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고 려은이 입을 딱 벌렸다. 대신 숨을 쉬어줘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 벙한 모양새를 보곤 가빈사라가 하얗고 작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영롱하게 웃었다. 종달새라는 이름처럼 맑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려은은 저도 모르게 눈 안에 웃음을 머금고 가빈사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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