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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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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3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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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DUMMY

축축한 어둠 속에서 가빈사라는 비척거리며 기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내 다다른 듯 가빈사라의 머리에 차가운 느낌이 툭 퍼졌다. 가빈사라는 벌벌 떨리는 몸으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달아…….”

가빈사라는 쩍쩍 다시며 정신없이 입을 벌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바짝 말라 있던 목구멍이 생기를 되찾아감에 따라 한참 운동하지 않고 있던 장(腸)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생으로 도려내는 듯한 느낌에 가빈사라는 겨우 몇 방울 먹었던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러고도 푸른 피가 섞인 연두색 위액을 한참 동안 내뱉어야 했다.

갈증보다 더한, 살을 태우는 고통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독하군... 하지만 훙!”

문의 작은 창문으로 횃불이 드리워졌다.

“봐라!”

괴노파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가빈사라는 오랜만에 보는 빛에 눈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내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가빈사라는 아무것도 없을 듯했던 뱃속으로부터 핏빛이 더욱 진해진 위액을 토했다.

“너 같이 약하고 천지도 모르는 계집애를 라후님은 왜 살려두려 하셨는지 모르겠군, 훙! 혹시 그 속에 전하의 씨앗이라도 품었느냐?”

해쓱한 얼굴로 충격에 떨고 있던 가빈사라의 눈에 시퍼런 독기가 돌았다. 그 모습에 괴노파는 묘한 웃음을 짓고는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훙후후후후.... 그래, 그렇구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가빈사라는 이를 악물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괴노파가 물었다.

“네 아비는 혹시... 소한인가?”

가빈사라의 눈동자가 커진 것을 확인한 괴노파의 얼굴이 확연히 굳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개구리 같이 불룩 튀어나온 눈 속, 흰자위와의 경계가 불분명한 연푸른색 눈동자를 휙 뒤로 돌려 흰자위만 드러내어놓다가, 곧 눈을 새빨간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훙! 재미있게 되었군.”

그러더니 문을 쾅 하고 발로 거칠게 밀어 열었다. 회백색 머리칼이 횃불에 주황색으로 번들거렸다.

“가거라!”

가빈사라는 괴노파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망설였다. 그러자 괴노파가 외쳤다.

“여기에 더 있고 싶은가보지? 그럼 말리진 않겠다, 훙!”

가빈사라는 천장에 걸쳐져 있는 그물 위, 각종 동물들의 털가죽과 내장이 마구 엉켜있어 바닥이 붉은 피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고는 비틀비틀 걸었다.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녀를 보며 괴노파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선대 나후 전하처럼 되지는 않아야 하겠지, 암!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그건 너의 운이다, 반역자의 딸아. 하지만 넌 라후님을 결코 쓰러뜨릴 수 없어.”

벽에 기대어 두었던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들어 가빈사라를 가리키자 가빈사라의 몸이 둥둥 떴다. 지팡이의 주위로 꽈배기 모양으로 바람이 일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가빈사라의 몸은 긴 통로 끝 어둠 속으로 날려서 사라졌다.

노파는 합죽한 입으로 우물거렸다.

“살아남는다면 잠깐의 심심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

돌연 고름과 같은 누런 색 물이 주룩 주름진 볼 위로 흘러내렸다.

“저주받은 나후 아수라왕가의 피…….”


문회(問悔)는 대릉(大陵)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파천흑룡 파륜의 봉인들이 풀리기 시작하자, 불안이 더욱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몇 대의 나후아수라왕의 유모로서 살아온 대릉은 이제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늙어 그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걸로 문회는 오랜 친우이자, 동료를 죽여야 하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누런 마(麻)로 된 누더기를 입은 비대한 몸집의 괴노파가 뒤돌아섰다.

“왔나, 훙!”

주름으로 가득 찬 얼굴에 옅게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릉님.”

회백색 털이 듬성듬성 나 있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대릉이 외쳤다.

“나도 할 이야기가 있네!”

문회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에 입을 다물고 기다리자, 대릉이 아무 것도 없는 좁은 방안을 빙빙 돌다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소한은 죽었겠지?”

문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딸은 어찌되었는지 아나?”

문회가 초조감에 말없이 고개를 젓자, 대릉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휴…….”

대릉은 납작한 코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큰 숨을 뿜어내었다.

“나후아수라왕가의 분들은 너무나 상냥하셔서 탈이지. 오랫동안 그 분들을 보아왔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흠집을 내는 배려를 하시는 것은 다 똑같군. 하지만 끝도 없는 고독을 잊게 하는 데는 좋은 약이 될지도 모른다...훙!”

눈을 붉게 물들이더니, 대릉이 문회를 노려보았다.

“자네 또한 어릴 때부터 내가 보아 와서 잘 알지. 자네가 이 제 4 아수라도를 벗어나, 위로 올라간 것은 파륜의 봉인이 깨어져서이겠지? 그리고 이 나를 찾아왔지, 훙!”

문회는 소매 안의 갈고리를 움켜쥐었다.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대릉은 흐뭇한 듯 크게 웃었다.

“훙후후후! 비밀이 언제까지 숨겨지리라 생각하나? 이 내가 죽어도 언젠가 드러날 것일세. 비록 자네가 공(功)으로서 죄를 상쇄하려 한다 하더라도, 죄는 죄!”

문회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수염이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대릉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그러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조금만 있으면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도 말이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에 대릉과 엉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회는 갈고리로 대릉의 목구멍을 땄고, 그 사이로는 하얀 피가 벌컥거리며 넘쳐흐르고 있었다.

대릉이 끊어질 듯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훙! 네 몸 속에 내 피가 들어갔으니, 길어야 일 년... 라후 전하께.. 다시 배신감을 맛보겐…….”

그 말과 동시에 문회의 손이 움직였고, 대릉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릉의 피가 닿자마자, 바닥의 새까만 돌이 새하얀 연기를 올리며 녹았다.

“독두꺼비, 대릉.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는다.”

숨이 끊어진 대릉을 바닥에 던져버리며 문회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누구보다도 나후 아수라왕가의 피를 경애(敬愛)하고 있다.”

그는 갈고리를 휘둘러 대릉의 하얀 피를 떨어낸 뒤, 왼쪽 가슴 부위를 움켜잡고 비틀비틀 걸어 사라졌다.

대릉의 흘러나온 피로 주위의 바닥이 녹아 움푹 꺼진 곳에 대릉의 시체가 자리했다. 그러고도 남은 하얀 피는 바위의 골을 타고 흘러, 커다란 바위틈에 자리하고 있던 대릉의 보금자리가 기우뚱 하며 쓰러지는 바위들에 깔렸다. 굉음과 함께 대릉(大陵)은 이름 그대로가 되었다.


“살아있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 가빈사라는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 바로 위에서 아이들의 맑은 눈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빈사라는 입을 벌렸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한 아이가 어디론가 발소리를 타닥타닥 내며 뛰어가더니 곧 단풍잎 같이 작고 붉은 손바닥 가득 흐린 물을 떠왔다. 가빈사라는 좀 전에 이름도 모르는 짐승들의 썩은 피를 먹었음을 상기하였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더러움에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앉아 바라보는 아이들을 실망시킬 순 없어 입술을 열어 그 물을 마셨다.

“여기는 어디니?”

아이들이 무척 기뻐하며 외쳤다.

“살았다!”

가빈사라의 얼굴에 오랜만에 맑진 미소가 돌았다. 순수하게 타인의 회생을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빈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든 죽을 먹었다. 궁에서 호화롭고 맛있는 음식만 먹던 가빈사라에게는 소태처럼 써서 넘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돌산의 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을 보면 그녀 자신이 먹는 것들이 아이들이 여툰 것이라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 차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오랫동안 아무 것도 섭취하지 않아 목숨이 위험한 상태였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쇠심줄처럼 질겼다.

국부만 겨우 가린 상태로 남녀 구분도 없이 젖먹이부터 일곱 살 남짓까지 모여 살고 있었다. 가빈사라가 며칠 검불로 만들어진 침상에 누워 있다,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무렵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너희들의 이름을 가르쳐 줄래?”

아이들이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의 침묵 후, 제일 큰 아이가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는 여기 사는 사람이 아냐.”

묘한 긴장감이, 적대감이라고 이름 붙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투기(鬪氣)가 느껴지자 그녀는 놀라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아이는 가빈사라를 바라보며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에겐 이름 없어.”

가빈사라가 의아하여 아이를 쳐다보자, 무감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죽으면 이름 지은 게 아깝잖아.”

다른 아이가 가시눈을 하고서 그녀를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소한 같은 비겁자 때문에 우리 같이 용감한 아수라 족 전사들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 네 부모도 왕을 버리고 땅속으로 땅강아지처럼 숨어드는 걸 택했겠지? 그러니 넌 그런 비단옷을 입고 은방울을 매달고 있는 거 아냐?”

작은 여자 아이가 방금 외친 아이의 손을 잡곤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가자!”

처음 말했던 가장 큰 체구의,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아이가 외치자 그 여자아이만을 남기고 모두 굴로부터 빠져나갔다.

가빈사라는 라후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충격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여자 아이가 가빈사라의 얼굴에 때가 거멓게 묻은 손을 갖다 대었다. 가빈사라가 뒤로 확 물러나자, 아이가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그제야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 가빈사라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곤 아이의 얼굴에 스스로 얼굴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아이는 가빈사라가 가만히 있는 것을 알고는 천천히 볼과 이마, 입술을 만지곤, 긴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리곤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작고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부드럽고 따뜻해.”

가빈사라는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깜짝 놀라 발버둥 쳤지만, 곧 잠잠해져선 잠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향기…….”

가빈사라의 품속으로 파고들더니 코를 가빈사라의 앙가슴에 들이대었다.

“엄마…….”

잠시의 정적 후, 투명한 물방울이 툭 아이의 잠들은 얼굴로 떨어졌다.

가빈사라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자신을 보는 듯 하여 가슴이 미어졌다. 아수라족의 그 어느 여인도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내가 되고 싶어 할 뿐이었다. 외롭고 외로워 억지 미소를 만들었었다. 자신을 보아주는 이가 있었으면 해서.

가빈사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쇠약한 몸을 움직여 천천히 주위상황을 알아나갔다. 그러고 난 뒤에야, 아이들의 태도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4 아수라도는 자신의 아버지인 소한 아수라왕이 유폐한 나후아수라왕의 충복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자연환경은 극히 피폐하여 아이가 태어나도 얼마 안 되어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정을 주지 않으려 아이가 어릴 때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게다가 제 4 아수라도 내에는 군대가 조직되고 있었고, 모든 것은 군대를 위해 존재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 군대의 목적은 제 1, 2, 3 아수라도를 되찾고, 나아가 천상도에 과거의 복수를 하고 천상의 자리를 되찾는 데 있었다.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환경에서 살아야만 했던 그 원한이 응집된 듯한 정서가 제 4 아수라도에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퍼져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에 살고 있는 제 1, 2, 3 아수라도의 동족들을 매우 증오하고 있었다.

또한 여자는 일종의 공동 재산으로 취급되어, 끊임없이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아가 자신의 어머니도 누군지 몰랐다. 그건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기 때문이었다.

버려진 아기들은 더 큰 아이들에 의해 길러졌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고, 그 중 하나에 의해 가빈사라는 구조된 것이었다. 가빈사라는 운이 아주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가빈사라는 손가락으로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땋아 가랑머리로 만들어, 가지고 있던 끈으로 매듭을 지었다. 여자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면 풀어헤치고 다시 해달라고 할 터였다. 그러나 가빈사라는 그 작은 머릿속 약삭빠른 듯 가여운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항상 기껍게 다시 해주었다.

아이는 머리카락을 땋아 예쁘게 되었다는 느낌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만져주는 감각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정에 대한 그리움이 아이들 모두에게 짙었다.

“조금만 있으면 데리러 올 거야!”

큰 남자아이들이 기대감에 가득 차서 외치는 것을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말했다.

“나 군대에 들어가서 성인이 될 수 있어!”

순간 가빈사라의 손끝에 힘이 빠져, 여자아이의 푸석푸석한 금빛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그녀를 걱정하여 주위에 곰비임비 몰려들었다.

그녀가 위험하지 않고,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 뒤에는 아이들답게 솔직하게 다가온 그들이었다. 가빈사라는 가슴이 파열되는 듯 뜨겁고 시리게 아팠다.

마침내 비교적 큰 남자아이들이 기대하던 날이 왔다. 그러나 그 설렘에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수선하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분위기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가빈사라와 여자아이를 내버려둔 채,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다가와 가장 큰 남자아이가 말했다.

“누나는 숨어있어.”

가빈사라가 알아듣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이자 옆의 아이가 말했다.

“여자는 다 잡아가니까.”

가빈사라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곧 곁의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물었다.

“이 애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난 눈이 멀어서 아무도…….”

가빈사라는 생략된 말을 그 이상으로 이해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여자라도 잡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시 눈이 먼 아이가 태어날까봐 그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빈사라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아이는 영구히 버려졌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자 가슴을 누가 꾹 누르는 듯 속이 답답하고 심정이 암담해졌다. 앞을 볼 수 없는 이 아이가 무사히 크더라도 병사들에게 나쁜 짓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병사들의 움막 속을 지키고 있는 여자들도 그러한 일을 당한다고 치더라도,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적어도 그녀들은 보호를 받으며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구멍이 뻥뻥 뚫린 돌산에서 맨발로 헐벗은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누구의 탓일까.’

가빈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은 생각할 때가 바이 아니었다. 대릉에 의해 갇혀 있는 사이에 짐승의 피로 젖어 검붉은 색으로 물든 치맛자락을 붙잡고는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고맙다.”

가빈사라의 말에 아이들의 안색이 진지해졌다. 가빈사라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출세나 기타 이점을 위해 자신을 넘길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가빈사라는 제 4 아수라도 출신이 아닌 것이다.

가빈사라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러한 돌산은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이들이 동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면 자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데리러 오는 병사들의 볼일은 자신들에게 있으니 더 이상 동굴에 흥미가질 일도 없을 것이라 하였다.

가빈사라는 질척하고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스레 디뎠다. 그녀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어느 샌가 없어진지 오래였기에 맨발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선 보기 힘든 별별 벌레들이 그녀의 드러난 살을 건드렸다. 그 때마다 가빈사라는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이 안이에요!”

우두머리격인 아이가 동굴 안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의 두 눈에 증오가 가득했다.

“반역자가 저 안에 있어요!”

그런 그를 가빈사라에게 면박을 주었던 아이가 어두운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친절하게 대해주라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던 거였다. 아이들은 대장이었던 아이를 흐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이 배고파 울 때 웃으며 노래 부르고, 우리들이 헐벗었을 때 능라 옷으로 몸을 휘감은 일족의 배신자가 저 안에!”


가빈사라와 여자아이는 동굴안의 얼음같이 차가운 공기에 서로 껴안고 숨을 죽였다. 가빈사라가 불안해하는 여자아이를 꼭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조금만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잊고 있었다.

‘진심이라면 언제나 보답 받는다고 믿으니까요.’

얼마나 지독한 배신이었던가.



가빈사라는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 그 자체.

한 점 망설임조차 없었다.

몸을 아래로 날렸다.

귀를 에는 듯한 바람에 눈을 꼭 감았다.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날 배신한 거야?”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로 가빈사라는 울분에 차서 외쳤다. 그러자 우두머리격인 아이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배신이 아니야.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순간 라후의 얼굴이 아이의 얼굴에 겹쳐보였다. 가빈사라가 야수 같은 오열을 터뜨리자, 여자아이가 마구 손을 내저으며 가빈사라를 찾았다. 마침내 가빈사라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아이는 그것을 꼭 붙잡았다.

병사들이 고래고래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르다 지쳐 망연자실 늘어진 가빈사라를 붙들고 갈 때, 눈 먼 여자아이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넘어졌다. 그러나 그 작은 두 손은 가빈사라의 피 묻은 치마 끝자락을 결코 놓지 않고 있었다. 거친 돌바닥에 여린 볼이 쓸려 피가 배어 나와도 아이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질질 끌려가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 여자아이의 존재를 깨닫고는 아이들을 시켜 떼어내게 했다. 그러나 어린 여자아이의 힘이 어떻게 그렇게도 강한지, 그 손가락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가지마, 가지마, 언니야…….”

어눌한 아이의 말에 가빈사라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를 떨며 우는 아이를 불현듯 생각난 듯이 보았다.

한참을 끙끙대도 소용이 없자, 검은 갑주를 입은 병사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한 병사가 검을 수직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가빈사라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뿌걱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그 속, 심장까지 차가운 금속이 박혀 들어갔다.

시야가 델 것 같은 뜨거운 눈물로 일그러졌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부들부들 떠는 자신을 배신했던 대장격인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병사들이 돌가루 묻은 신발바닥으로 아직까지 숨을 쉬며 부르르 떨고 있는 아이의 등을 짓밟아 고정시키고 검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았다. 푸른 피가 위로 솟구치더니 아이가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희미한 눈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아아 몇 번 내더니 아이는 온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숨을 놓았다.

그제야 그 작은 손 안, 가빈사라의 옷자락이 풀려났다.

가빈사라는 온 몸에 지금까지 느껴본 적도 없는 분노가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뜨겁고 뜨거워 온 세상을 태워버릴 듯 잔인한 화염이 막 가슴 속 어두운 곳에서 화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양 손바닥을 펼쳐 양쪽에서 자신을 붙들고 있는 병사 둘의 팔을 잡았다. 가빈사라가 눈을 감자, 그녀 주위에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우아악!”

병사들의 비명과 함께 가빈사라는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칼에 매달려 있는 은색방울이 뜨르 하고 작은 음을 내었다.

양 허리가 잘린 병사 둘이 털썩 바닥으로 무너졌다. 퍼런 내장이 펄떡이고 있었다.

다른 병사 셋이 가빈사라에게 달려들려는 참에 그 중 한 병사가 외쳤다.

“임신한 여자다!”

그가 가빈사라의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 안쪽을 가리켰다. 검은 색의 꽃잎 몇 장이 그녀의 살 표면 위로 나타나 있었다. 그것을 본 나머지 둘이 칫 하며 물러섰다.

가빈사라는 얼음처럼 차가운 송곳이 머리를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수라 족 특유의, 여인의 임신 표지가 자신의 팔 안쪽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원망스럽게도, 통한스럽게도 눈에 박혀 들어오듯 분명했다.

“사로잡는 수밖에 없나, 제길!”

병사들이 외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빈사라는 자신의 양 손을 들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실..이... 아....냐…….”

보랏빛 눈이 붉은 빛을 발하더니 함빡 웃음을 지었다.

“사실일 리가 없잖아아아아아악!”

그녀의 초록빛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허공에서 흩어져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은색 방울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라 청력의 범위를 넘어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귀를 막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빈사라의 방울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나중엔 눈, 코, 입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가빈사라가 정신을 차렸을 땐, 푸르데데한 살덩어리들이 마구 얽혀있는 형상이었다. 간혹 보이는 터지지 않은 안구와 손가락, 머리카락이 그들이 본래 아수라 족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키키키키…….”

가빈사라는 마구 웃어젖혔다. 그리곤 맨발로 피곤죽을 밟으며 정처 없이 헤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안식할만한 곳을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조용한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눈 먼 여자아이가 양태머리를 하고는 즐거워했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서늘한 눈물이 떨어지는 기세에 위로 날아오르듯 별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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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륵오륜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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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파륵오륜담 2부 탈피 5 09.08.09 238 3 10쪽
25 파륵오륜담 2부 탈피 4 09.08.09 239 3 10쪽
24 파륵오륜담 2부 탈피 3 09.08.03 204 3 12쪽
23 파륵오륜담 2부 탈피 2 +2 09.07.30 492 3 30쪽
22 파륵오륜담 2부 탈피 1 +2 09.07.29 342 3 15쪽
2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2부 탈피(脫皮) - 프롤로그 09.07.29 295 3 2쪽
2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9 +1 09.07.22 342 4 16쪽
1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8 09.07.16 280 3 22쪽
1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7 09.07.07 332 3 8쪽
1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6 09.07.05 274 3 18쪽
»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5 09.06.30 237 3 23쪽
1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4 09.06.27 194 3 18쪽
1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3 09.06.25 363 5 12쪽
1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2 09.06.24 364 3 22쪽
1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1 09.06.23 301 3 11쪽
11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0 09.06.20 344 3 15쪽
10 파륵오륜담 1부 각면 9 09.06.17 791 4 34쪽
9 파륵오륜담 1부 각면 8 +1 09.06.17 407 3 19쪽
8 파륵오륜담 1부 각면 7 +1 09.06.15 470 4 13쪽
7 파륵오륜담 1부 각면 6 +2 09.06.15 548 2 15쪽
6 파륵오륜담 1부 각면 5 +2 09.06.15 633 4 11쪽
5 파륵오륜담 1부 각면 4 +1 09.06.14 871 2 18쪽
4 파륵오륜담 1부 각면 3 +2 09.06.14 1,137 3 13쪽
3 파륵오륜담 1부 각면 2 +1 09.06.14 1,818 3 8쪽
2 파륵오륜담 1부 각면 1 +2 09.06.13 3,518 5 12쪽
1 파륵오륜담(破勒悟輪譚) 1부 각면(覺眠) - 프롤로그 +3 09.06.13 4,812 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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