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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y 님의 서재입니다.

네 로마 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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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y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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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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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신성 재판

DUMMY

거리는 소문을 듣고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내가 저택을 나서자 시선이 쏠렸다. 아침 항구에서 나를 환영했던 시민들의 눈에 의혹이 엿보였다.


좋지 않았다.


에페수스 시민 대부분이 아르테미스 신자다. 신성 재판은 에페수스시 전체에서 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기서 서두른다고 말을 달리면 부정적 여론만 생길 것이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야한다.


“보레누스, 시민들에게 다가갈거야. 호위를 뒤로 물려줘.”


“위험합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 정보없이 신전에 갈 순 없어. 부탁해.”


“... 알겠습니다. 풀로를 남기겠습니다.”


풀로가 말고삐를 잡고 보레누스와 호위대가 말 뒤로 이동하였다.


나는 심호흡으로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외모 버프를 믿고 미소를 띄웠다. 부드러운 톤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에페수스 시민들이여, 신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줄 수 있겠는가?”


······


눈을 마주친 시민 몇 명이 입을 열었다.


“예비 사제가 순결 서약을 짓밟는 짓을 했습니다. 에페수스 유곽 입구의 석판에 발을 대보았다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 매춘은 흔한 일이다.


직업 여성은 세 가지 타입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매춘 구역에서 종사하는 직업 여성(porne 포르네, 포르노의 어원)이었다.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는데 노예 출신이나 외국인 여성이 종사했다.


두 번째로 기예를 익힌 무희들이 있었다. 연회에서 노래와 춤을 공연하고 손님의 밤시중을 들었는데, 심포지온에서 만난 비키니 갑옷쇼 무희가 이에 해당한다. 연극단의 배우도 공연 후 귀족의 부름을 받았는데 비슷한 케이스다.


세 번째로 헤타이라(hetaira)가 있다. 이들은 지식과 교양을 쌓은 특별한 직업 여성이었다. 완고한 가부장제의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자, 정치가와 토론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는, 존경받는 여성이었다. 헤타이라는 지명 거부권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의 잠자리 지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매춘 구역에 종사하는 직업 여성은 포르네.


순결을 중시하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매춘 구역, 처녀 사제와 포르네는 극과 극이었다.


석판 발자국은 입구컷이다.


석판 발자국보다 발이 큰 사람(성인)만 입장이 가능하도록 했다. 즉 석판 발자국에 발을 갖다댄 것은 매춘 구역 입장 의도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


예비사제라 해봐야 13,14 살 어린 소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가 어른들이 발을 대고 들어가니 호기심이 생겼겠지. 뭣도 모르고 석판에 발을 댄 순간 지뢰가 터졌다.


누군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에게 죄가 있겠냐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고대 시대다. 중요한 것은 신을 모독한 행위 자체이지 행위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던 님프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로 변장한 제우스에게 당해 순결을 잃는다. 분노한 아르테미스는 칼리스토를 쫓아냈고, 헤라는 칼리스토를 저주해 곰으로 만들었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칼리스토는 엄연히 피해자지만 신들은 칼리스토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결을 잃은 행위, 불륜을 한 행위에 중점을 두고 처벌을 내렸다.


신성 재판은 신의 처벌과 비슷하다. 행위 그 자체만 놓고 처벌을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동요한 기색을 감추고 침착하게 물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신성 재판 도중 예비사제를 옹호하였습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는 재판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소녀를 도와주려다 휘말린 모양이다.


“사고를 친 예비 사제는 어떤 아이인가?”


“평범한 라틴계 아이입니다. 아! 부친이 로마 콘크리트 사업가라 하더군요.”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아까 만난 사업가였다. 사업가는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었고, 길에서 굴렀는지 하얀 토가가 먼지 투성이였다. 사업가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와, 왕자님 하나뿐인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흑흑 부탁드립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업가를 바라보는 시민들 눈길이 냉담했다. 딸을 잃게 된 아버지의 눈물어린 호소를 보고 저런 표정을 짓다니··· 뭔가 이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그리스계 주민이었다.


촉이 왔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재판이 아니었다. 라틴계 이주민과 그리스계 원주민의 갈등이 포함된 정치 사건이었다.


라틴계 이주민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에페수스 경제를 잠식했다. 당연히 그리스계는 불만이 쌓였을 것이다. 로마의 통치에 대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 없으니 신성 재판을 통해 분풀이한 것이 틀림없었다. 희생양은 사업가 딸, 예비사제 소녀였다.


남의 집 정치 싸움. 한 발 물러서고 싶어도 아도니아와 헬레네가 엮인 이상 나도 휘말려들 수 밖에 없다. 일단 사업가를 호위대 뒤로 돌려보냈다.


“내일 환영연에서 총독 각하를 만날 예정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에 갈 때까지 시민의 고충을 듣고자 하니 각자 힘들었던 점을 말하라.”


나는 수행 비서를 불러 이름과 사연을 파피루스에 적도록 하였다. 눈치를 보던 시민이 하나둘 사연을 하소연하였다.


라틴계 우대 정책에 쌓인게 많았나 보다. 아르테미스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적은 파피루스 문서가 열 장이 넘었다. 나는 추가로 서신을 써 수행 비서에게 건넸다.


“이걸 총독 각하께 보여드려라. 그리고 오늘 일과 후 잠시 뵙기를 희망한다고 전하라.”


로도스 청동 거상은 파괴되어 구경할 수 없었고, 아르테미스 신전은 사안이 급박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한가롭게 구경할 때가 아니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를 구해야 한다.


“재판은 어디서 열리는가?”


“신전 공회당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공회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공회당 주변에 입장하지 못한 방청객으로 넘쳐났다. 보레누스가 앞으로 나서려 할 때,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섰다. 방금 전 사연을 하소연한 시민들이었다.


“아폴로니스 왕자님께서 오셨다. 길을 열어라.”


시민들의 도움으로 길이 열렸고 공회당 안에 들어왔다.


재판정은 원형 강의실과 똑같은 구조였다.


재판정 중앙에 고위 신관 여러 명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예비 사제가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가 예비 사제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달달 떠는 건 마찬가지였다.


똑똑한 둘이지만 반원형 방청석에 앉은 배심원 수백 명이 입을 열 때마다 눈빛을 쏘아보내면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누가 봐도 적대적 분위기였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내 명성은 동지중해 전역으로 퍼졌고 태양신을 닮은 외모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방청석의 소음이 가라앉았다.


뚜벅 뚜벅.


내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재판정이 조용해졌다. 나는 재판정 중앙의 대사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대사제는 성스러운 머리띠를 두른 50대 여사제였다.


“셀레우코스 제국 왕자 아폴로니스입니다. 아폴론 신전 사제들과 신탁 수행에 나서는 길에 아르테미스 신전을 방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의 방문을 환영하고 싶지만 그럴 때가 아니군요. 재판정을 나가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허락없이 재판정에 참석한 것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아폴론 신전 사제들과 신탁 수행에 나선 길입니다. 허락하신다면 내 신관을 거느리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건 안됩니다. 죄인에 동조한 저들 역시 죄인입니다.”


“죄인을 동조한 자 역시 죄인이라··· 여기서 내가 아도니아와 헬레네를 감싸면 어떻게 되나요? 나도 죄인인가요?”


날 재판에 참석시키거나 아니면 아도니아와 헬레네를 내놓거나. 나는 대사제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대사제가 매섭게 나를 내려봤다. 나는 대사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허공에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침묵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좋습니다. 두 신관이 왕자님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재판 참여를 승낙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최악의 경우는 재판에 참석하기 전 날치기 판결을 내려 아무 손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얼굴을 들이밀었으니 최소한 변론 한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도니아에게 속삭였다.


(야 빨랑 쓰러져)


(네?)


(기절하는 척 쓰러지라고)


풀썩.


아도니아가 몸을 크게 떨더니 픽 쓰러졌다. 완벽한 연기였다. 헬레네가 나를 바라봤다.


(저도 쓰러질까요?)


(넌 됐어. 한 명은 재판 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줘야지)


갑작스런 기절쇼에 재판정이 웅성거렸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대사제를 바라봤다.


“대사제님, 이 재판은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주시하고 계신 중요한 재판입니다. 기절한 죄인을 두고 판결을 내리는 것은 여신께서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상태를 조금 회복시키고 재판을 재개하는 것이 어떨까요?”


“죄인에게 물과 포도주를 주고 의식을 회복시키도록 하라.”


다행히 시간을 벌었다. 헬레네가 아도니아를 간호하는 척 속삭였다.


(죄송해요 왕자님. 아이가 불쌍해서 한 마디 거든다는게···)


(사과는 나중에 해. 재판 어디까지 진행됐어?)


(최종 변론만 남았어요)


(시부레 늦었네)


나는 예비사제 소녀를 힐끔 바라봤다. 소녀는 넋이 나가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변론을 하고 싶어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판결을 뒤집긴 어려워. 이건 정치 싸움도 포함된 사건이거든)


(네?)


(나중에 얘기할게.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뭘 하실 건가요?)


(물타기)


······


의논을 끝낸 후 아도니아가 정신(?)을 차렸다. 바로 재판이 속개되었다.


나는 대사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먼저 신탁 수행 도중 불미스러운 일로 아르테미스 여신께 누를 끼친 점을 사과드립니다. 여기 모이신 대사제님과 배심원 시민 여러분께도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대사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속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열두 가지 시련을 감당하였습니다. 군대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을 물리치고 보물을 되찾으며 신과 인간 모두를 기쁘게 했죠. 신은 분노를 거둬들였고, 인간 사회는 괴물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뜬금없는 헤라클레스 이야기에 배심원들이 어리둥절했다. 대사제가 손을 들어 조용히시켰다.


“지금 왕자님은 세 죄인에게 헤라클레스처럼 속죄 의식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는 겁니까?”


똑똑하네. 역시 대사제 짬밥 어디 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처벌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정성을 보여드리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의 정성과 속죄 의식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아르테미스 여신은 순결의 여신이며 사냥의 여신입니다. 여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사냥 제전을 제안합니다.”


사냥 제전.


쉽게 말해 사냥 대회다. 사냥 대회를 열어 가장 좋은 사냥감을 아르테미스 여신께 제물로 바친다. 좋은 사냥감을 바친 사냥꾼은 신전의 축복과 포상을 받는다.


등수 안에 들면 좋겠지만 사냥을 해본 적이 없어 구체적 방안은 모르겠다. 보레누스랑 풀로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제의를 열었으면 축제로 이어지는 것이 그리스 국룰. 축제로 사람들 시선을 흐리고 에페수스를 빠져나가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아르테미스 신전 입장에서 사냥 제전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두 손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리스 다신교는 교회처럼 일요일마다 예배드리는 종교가 아니다. 신전 제의는 종교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고 많을수록 좋았다.


대사제와 고위 사제가 의논을 길게 나눈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폴로니스 왕자의 말을 수용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속죄 의식을 거행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회개할 것이다. 보름 후 사냥제전을 열 것이니 에페수스 시민의 많은 참여를 부탁한다. 죄인의 처벌은 사냥 제전 이후로 미룰 것이다.”


한 시름 덜었다.


나는 투옥된 아도니아와 헬레네를 위로한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수행 비서가 총독의 방문을 알렸다.


그리스 신전, 로마 총독, 그리고 나.


이제 판은 만들어졌고, 한바탕 춤출 일이 남았다.

에페수스 발바닥.jpg

터키 에페수스 유적지 발바닥입니다. 포르네 조각과 함께 있었다는데 발바닥만 남았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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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처녀신의 도시 +8 22.05.30 4,371 181 13쪽
19 이시스 여신전 +19 22.05.28 4,439 189 13쪽
18 로도스 청동 거상 2 +17 22.05.27 4,418 206 13쪽
17 로도스 청동 거상 +14 22.05.26 4,526 169 13쪽
16 절름발이 천재 필론 +14 22.05.25 4,742 180 13쪽
15 비밀 동맹 +17 22.05.24 4,836 190 13쪽
14 타르수스 노예 시장 +7 22.05.23 4,953 204 13쪽
13 출항 +7 22.05.21 5,172 200 13쪽
12 반칙왕 풀로 +16 22.05.20 5,181 214 14쪽
11 연극과 전차 경주 +8 22.05.19 5,547 224 12쪽
10 처녀 빗치 여신관 +13 22.05.18 6,063 231 14쪽
9 왕자님의 그건 큰가요? +22 22.05.17 6,124 252 13쪽
8 신전 제의 준비 +12 22.05.16 6,152 240 13쪽
7 보레누스와 풀로 +25 22.05.14 6,287 251 13쪽
6 아키우스 클로디우스 +11 22.05.13 6,602 254 14쪽
5 페르가몬 상단 2 +13 22.05.12 7,042 260 14쪽
4 페르가몬 상단 +15 22.05.11 7,380 279 13쪽
3 델포이 신탁 +9 22.05.11 7,905 276 13쪽
2 잘생겨서 엉덩이가 위험하다 +14 22.05.11 9,155 335 13쪽
1 프롤로그 +13 22.05.11 10,024 3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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