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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y 님의 서재입니다.

네 로마 쩔더라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Cheezy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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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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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 청동 거상

DUMMY

로도스와 터키 해안의 거리는 14km. 이 좁은 해협을 거쳐가는 배 덕분에 로도스는 중개 무역항으로 거듭났다.


항구가 가까워지면서 그 유명한 로도스 청동 거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애 첫 고대 불가사의를 볼 마음에 설렌다. 뱃전 앞으로 달려가 까치발을 들었다.


와르르.


기대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종아리와 양발만 덩그러니 남은 신상이 날 맞이했다. 무너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도시 입구에 아무렇게나 방치할 줄은 몰랐다.


실망한 나는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왕발가락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 무너진 이유가 있었네.”


방파제 위로 쌓은 단상 높이가 10미터였고, 그 위에 높이 33미터 쩍벌 거인을 올렸다. 의자 다리 두 개로 의자를 세운 것처럼 위태로웠다. 저러니 지진에 취약하지···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배를 정박시켰다.


항구 관리가 마중나왔다. 관리 뒤로 시민 수백 명이 몰려들었는데 나를 보러온 듯했다. 모두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로도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폴로니스 왕자님.”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곳은 로도스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문이 거쳐가는 곳이지요.”


최전성기를 맞은 도시 관리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로도스 공화정이 공식 환영연을 열었습니다. 참석해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그전에 헬리오스 신전에 들러 신께 경배드리고 싶다. 환영연을 저녁으로 바꿀 수 있는가?”


외교 사절은 처음 만나는 상대가 중요하다. 보통 방문국 권력자를 가장 먼저 만나지만 나는 로도스 공화정 인사 대신 신전을 택했다. 이는 내 최우선 순위가 신전임을 암시한 것이다.


항구관리가 난처한 얼굴로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안내역을 붙여드리겠습니다.”


해적 소굴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앞으로 들르는 도시는 무조건 신전부터 찾을 것이다. 나와 아폴론 신의 관계를 그리스 전역에 각인시켜야 한다.


가장 먼저 찾을 신전은 헬리오스 신전. 같은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끼리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


안내역이 말을 끌고 왔다.


말에 오르니 시민들이 내려다 보인다. 보여져야 하는 입장에서 대중과 알맞은 눈높이였다. 자줏빛 히마티온을 걸친 왕족과 주변을 호위하는 붉은 방패의 로마군이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외모.


자세를 바로 한 뒤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황금빛 머리칼이 오전 햇빛에 반짝였다. 자연 금발을 알아본 시민들이 감탄했다.


“태양신의 금발이다.”


“정말 태양신을 빼닮았어.”


시민들의 호의적 반응을 확인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외모 지상주의 그리스 만세.


로도스 건국왕 이름을 딴 악티스 거리에 들어섰다. 아고라에서 신전으로 이어진 대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넓고 깨끗했다. 대로변 아름다운 조각상과 교차로 커다란 분수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였다. 비단길 교역이 끊겨 휘청이는 안티오키아와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언덕 위 헬리오스 신전에 도착하였다. 로도스 주신전답게 주변 신전보다 크고 화려했다. 태양을 맞이하는 동쪽에 신전 입구가 있었는데 태양 마차를 모는 거대한 헬리오스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헬리오스 신께 경배를 드리고 정문에 들어섰다. 수수한 복장에 대사제 지팡이. 안티오키아 파에스토스 닮은 할아버지 대신관이 나를 마중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님. 헬리오스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사제님 셀레우코스 제국 왕자 아폴로니스입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가 준비한 예물을 건네고, 헬리오스 신을 경배했다.


제사는 아폴론 신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대사제가 직접 제사를 주관한 것이 특이했다. 간단한 제사인만큼 제사 담당 사제 한 명이면 될 텐데···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까.


역시나 대사제가 독대를 청했다. 아도니아와 헬레네에게 다른 신전 사제들과의 교류를 지시하고 대사제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제단. 사무용 책상과 의자. 벽면의 파피루스 서고.


웅장한 신전의 겉모습과 달리 대사제 방은 소박했다.


대사제가 포도주 항아리를 가져와 잔에 따랐다. 가난한 평민집에서나 볼 법한 장식없는 도기 그릇이었다.


그리스 종교는 특이하다.


신전은 웅장하게 짓고 축제는 성대하게 개최한다. 그대신 사제 계급은 수수하고 검소하다. 신관 임용도 그렇다. 시민 누구나 신관이 될 수 있고,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다. 그리스 신관을 보면 구도자 같은 느낌이 든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만 봐도 사제 계급이 최상위 권력층으로 군림하는데··· 같은 다신교지만 민주주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나는 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포도주 향이 좋네요.”


“신전 포도밭에서 양조한 것입니다. 로도스 섬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좋은 포도주가 생산됩니다.”


나는 가벼운 화제로 로도스 현황을 살폈다.


“로도스는 학문의 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이 유명하더군요.”


“부유한 상인 자제들이 스토아 학파에 입문하면서 세가 커지고 있습니다.”


“로마 귀족들의 유학이 늘었다지요?”


“재밌게도 로마 귀족은 전부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웅변술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 요리사와 비서를 고용하여 데려가지요.”


“웅변술과 수사학은 원로원 의원의 필수 교양이니까요. 로마 유학생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로마 집권층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불편한데라도 있으신가요?”


대사제가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환영연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헬리오스 신전에 먼저 들르겠다고 말하니 항구관리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군요. 대사제님께서 짐작가는 바가 있으신지요?”


대사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씀해주시지요. 오늘 저와 독대하는 이유와 연관있어 보입니다만···”


“... 예리하시군요. 실은 왕자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대사제가 한숨을 내쉬며 배경을 설명했다.


로도스 수뇌부는 상업 귀족으로 구성된 공화정이다. 로도스는 풍요로운 부를 바탕으로 학문을 권장하여 그리스 3대 학문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하고 탐구하면서 철학자는 종교의 영역까지 거침없이 발을 뻗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얼마 전 스토아 학파 철학자 한 명이 태양신을 모독하였습니다. 태양이 불타오르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라고 주장하더군요.”


완벽한 학문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시대다.


스토아 철학은 자연론(자연과학), 윤리론, 논리론 셋을 다루는데 우주의 생성과 기원을 다루는 자연론이 신전과 맞붙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철학자 말이 맞는데, 아폴론 신 코스프레를 하는 나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 지동설이 맞다는 걸 알아도 천동설을 지지해야 했던 근대 성직자 마음이 이랬을까···


“하하 하아. 재밌는 말이네요. 누가 그런 허황된 말(?)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 같으면 신성모독으로 죽거나 도편 추방되었을 녀석입니다.”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지금은 다르다.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가 독약 먹고 자살할 때처럼 정치 파워가 약하지 않다. 부를 쌓아올린 상인층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웠다. 부와 권력을 쥔 상인은 학문을 후원하였고 스토아 학파가 태어났다.


권력 기반이 탄탄한 스토아 학파는 신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맞섰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가 전해지면서 그리스 다신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리스 다신교는 그리스 철학에 의해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에서 기독교 막타를 맞은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끝자락, 스토아 학파의 본고장 로도스 섬에서 철학과 종교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학과 종교의 대립.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히 대답해야 한다.


“대사제님의 아픈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철학자와 다퉈서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과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어쩔 수 없다.


기독교조차 신학을 집중적으로 키우고 나서야 철학과 맞짱이 가능했다. 빈약한 교리를 가진 그리스 다신교가 철학과 논쟁을 벌이겠다는 건 지금 죽겠다는 말이었다.


이럴 땐 한 발 물러나야 한다.


전면전을 피하고 영역을 보존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돕고, 축제를 베풀어 민심을 장악하는 일. 종교의 순기능을 살리는 일이 최선이었다.


“왕자님의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전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물러선다면 그건 그것대로 신도의 이탈을 불러올 겁니다.”


“종교적 권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왕자님께 드리고 싶은 청이 있습니다. 헬리오스 신전은 로도스 청동거상을 재건하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청동거상 재건과 신전의 권위 회복이 무슨 관계인가요?”


뜬금없이 청동거상 재건이라니···


“로도스 청동거상은 마케도니아의 침공을 막아낸 후 감사의 의미로 지어진 헬리오스 신상입니다.”


“아··· 청동거상이 헬리오스 신상이었군요.”


신상 재건으로 종교적 권위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 헬리오스 신전의 입장이었다.


“우리 신전에서 로도스 공화정에 여러 번 재건 의사를 밝혔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스토아 철학자가 뒤에서 반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저들의 반대 근거는 무엇인가요?”


“델포이 신탁입니다. 아폴론 신께서 재건 금지를 명하셨습니다.”


“이런···”


델포이 신탁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발생한다. 신의 이름으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부여하면 반대파는 알면서 당할 수 밖에 없다.


신께서 금지하신 일을 신전이 행할 수는 없는 법. 헬리오스 신전에게 델포이 신탁은 외통수였다.


대사제가 나를 부른 이유가 확실해졌다.


신전 재건이 막힌 상황에서 신탁 수행에 나선 내가 나타난 것이다. 나의 등장은 헬리오스 신전의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묘수였다.


델포이 신탁은 델포이 신탁으로 응수한다.


상황이 재밌어졌다.


신탁 수행 메인 퀘스트 수행중에 괜찮은 사이드 퀘스트가 뜬 느낌이다.


“왕자님의 신탁 수행에 신상 재건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공화정의 재건 허가를 받아주십시오. 로도스와 이오니아 지방 헬리오스 신전은 왕자님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흔쾌히 대사제의 청을 승낙하였다.


“기왕이면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신상을 재건해보죠. 로마 콘크리트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반죽한 흙이 돌보다 더 단단해진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아시는군요. 청동 판금을 씌운다면 석상 재질이 꼭 대리석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튼튼한 놈이 제일이지요.”


······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가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은 튼튼한 뼈가 몸을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 건물 안에 단단한 뼈대를 집어넣으면 어떨까요?”


“... 강도가 올라가겠지요.”


2천년을 버티는 로마 콘크리트로 지반 공사를 하고, 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석상을 반죽한다.


나는 씨익 웃으며 선언했다.


“새로 세워질 로도스 청동거상은 불침의 신상이 될 것입니다.”


바깥을 나오니 저녁 노을이 보였다.


신전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하얀 대리석 도시와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모습이다.


이 멋진 풍경에 헬리오스 신상을 재건하여 화룡점정을 찍고 싶다.


먼 옛날로 거슬러왔는데 나 혼자 보면 아깝지. 후대 사람들에게 고대 불가사의를 감상할 기회를 주고 싶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올림피아 제우스 신상,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


지진으로 사라질 운명인 다른 불가사의도 마찬가지. 튼튼하게 다시 지어야지.


“보레누스, 환영연이 어디서 열리지?”


“공화정 민회 의사당입니다.”


“좋아. 한번 부딪쳐 보자고.”

800px-Rhodes0211.jpg

로도스 청동 거상 상상도입니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며 어떤 포즈를 취했는지 설이 분분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재건 제안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이뤄진 적은 없었습니다. 2015년에도 추진 움직임이 있었으나 무산되었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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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처녀신의 도시 +8 22.05.30 4,366 181 13쪽
19 이시스 여신전 +19 22.05.28 4,435 189 13쪽
18 로도스 청동 거상 2 +17 22.05.27 4,415 206 13쪽
» 로도스 청동 거상 +14 22.05.26 4,522 169 13쪽
16 절름발이 천재 필론 +14 22.05.25 4,738 180 13쪽
15 비밀 동맹 +17 22.05.24 4,831 190 13쪽
14 타르수스 노예 시장 +7 22.05.23 4,950 204 13쪽
13 출항 +7 22.05.21 5,168 200 13쪽
12 반칙왕 풀로 +16 22.05.20 5,175 214 14쪽
11 연극과 전차 경주 +8 22.05.19 5,541 224 12쪽
10 처녀 빗치 여신관 +13 22.05.18 6,056 231 14쪽
9 왕자님의 그건 큰가요? +22 22.05.17 6,119 252 13쪽
8 신전 제의 준비 +12 22.05.16 6,146 240 13쪽
7 보레누스와 풀로 +25 22.05.14 6,282 251 13쪽
6 아키우스 클로디우스 +11 22.05.13 6,596 254 14쪽
5 페르가몬 상단 2 +13 22.05.12 7,035 260 14쪽
4 페르가몬 상단 +15 22.05.11 7,373 279 13쪽
3 델포이 신탁 +9 22.05.11 7,897 276 13쪽
2 잘생겨서 엉덩이가 위험하다 +14 22.05.11 9,139 335 13쪽
1 프롤로그 +13 22.05.11 10,008 3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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