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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y 님의 서재입니다.

네 로마 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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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y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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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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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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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델포이 신탁

DUMMY

목욕 담당 시녀 둘이 아이 욕조를 대령했다. 청동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붓고 입욕제를 풀었다. 몸을 담그자 상큼한 민트향과 달콤한 꽃향기가 올라왔다. 일주일간 긴장하며 굳었던 몸이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녀에게 몸을 맡기고 생각에 잠겼다.


문명 게임의 대표적 사치재 향(incense).


기원전 3천년전 이집트에서 쓰이기 시작한 향은 점차 지중해 전역으로 퍼졌다. 지금은 입욕제, 방충제, 자외선 차단제, 화장품 등 일상 생활 용품에서 신전 제의 대향로 향불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고대에서 향만큼 발전된 산업도 없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다.


나무 수지, 꽃, 뿌리, 광물 등 수백 가지 향료가 재료로 쓰이는데, 까다로운 생산 방법 때문에 지역마다 특화된 향료가 생산된다.


이렇게 모인 향료는 그냥 쓰이지 않는다. 수백 가지 향료의 조합과 배합 비율을 연구하는 조향사가 전문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 향수 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통은 향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유리, 도기, 앨러배스터(설화 석고) 같은 고급 용기가 쓰인다.


판매망 역시 지중해 전역에 형성되어 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아테네 등 지중해 대도시 상점 20%가 향 관련 상점이며 매일 엄청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향유 담당 시녀가 다가와 목욕을 마친 내 몸에 향유를 발랐다.


“향도 좋은 사업 아이템이지. 알콜이 있으면 대단위 향료 추출이 가능해. 생각해보니 증류주도 괜찮겠네. 분별 증류 시설부터 만들어야 하나···”


향유를 바르던 시녀가 깜짝 놀랐다.



“술 말씀인가요?”


여덟살 꼬마가 주류 사업을 말하니 이상했나 보다.


재빨리 말을 돌렸다.


“말이 잘못 나왔어. 흐으음 냄새 좋다. 이거 무슨 꽃이야?”


“올리브유를 기초로 장미, 백합 향과 향나무 수지, 시트러스 껍질, 계피와 꿀, 샤프란을 조합한 향료입니다.”


“대단해. 재료를 전부 알아낸 거야?”


“기본 향료는 냄새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실 조합사께서 조합하는 과정을 몰래 지켜보았습니다.”


내 말실수를 덮어주기 위해서일까? 시녀도 자신의 약점 하나를 알려주었다.


시녀에게 윙크를 건네 고마움을 전했다. 성진이 녀석이 곧잘 하던 짓이었다. 시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다음은 의복을 입을 차례.


의복 담당 시녀가 다가와 직사각형 천 두 장을 맞대 내 몸을 감쌌다. 겨드랑이끈과 허리끈을 조여 신체에 맞추었다.


그리스 기본 의상인 튜닉인데 불안해 죽겠다.


노출된 허벅지 위로 허전했다. 바람 조금만 불어도 속옷이 보일 것 같다.


여자들이 짧은 치마 신경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튜닉 자락을 움켜쥐고 아래로 끌어내렸더니 시녀가 웃는다.


“바지는 안되겠지?”


시녀가 기겁했다.


“바지는 바르바로이(야만인)나 입는 옷이에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으세요?”


“... 아래가 추울까봐.”


“걱정마세요. 튜닉 위로 히마티온을 걸칠 거랍니다.”


하얀 튜닉 위에 짧은 히마티온을 걸쳤다. 두텁고 기다란 천을 몸에 둘둘 감은 망토다.


히마티온을 걸쳐도 허전한(?) 느낌은 여전했다. 앞으로 바지 없는 삶을 살아갈 생각을 하니 어지럽다. 하루빨리 익숙해지길 바라며 샌들 가죽끈을 조였다.


유모가 거울을 가져왔다. 무거워보이는게 청동거울이었다. 거울면이 고르지 못하다보니 얼굴이 무슨 피카소 그림처럼 보인다.


“못알아보겠어. 다른 거울은 없어?”


“이게 가장 좋은 거울입니다 왕자님.”


“유리 거울은 없겠지?”


“유리 그릇이나 장신구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거울은 처음 들어봐요.”


또 사업거리가 나온다.


유리의 주재료는 규소(모래), 석회석, 탄산나트륨.


규소의 녹는점이 철보다 높은 1,700도인데, 철도 녹이기 힘든 고대에서 규소를 녹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유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치트키는 석회석과 탄산나트륨이었다. 모래에 둘을 넣고 가열하면 녹는 점이 900도로 낮아지고, 유리 제조가 가능해진다.


판유리 공법을 알고 있으니 거울도 문제없다.


탄산나트륨 수급이 걸리는데, 직접 제조는 복잡하고 어려워 자연상태로 발견되는 암염을 찾아야 한다. 남부 시리아의 사해(死海) 또는 사막 오아시스를 뒤지면 나온다.


탄산나트륨 조달, 제조 시설 건설, 유통망 구비···


갑자기 웃음이 났다.


지금 내 처지에 사업이라니··· 김칫국 드링킹도 정도가 있지.


조급해지지 말자.


내게 걸린 제약을 푸는 것이 우선 순위다.


거울이 없어도 시녀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잘생겼다.


몸단장을 해준 시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수고했어. 다녀올게.”


* * * * * * *


기둥이 줄지어 서있는 외부 개방형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오론테스강 하류에 세워진 도시답게 항구와 상선이 보인다. 아고라(광장)로 이어진 도시 전경이 한강뷰 못지 않다.


강 건너편 로마군 주둔지도 보인다. 1개 대대와 보조병을 합해 천 명 가량이 안티오키아에 주둔중이다.


그 너머는 푸른빛 일색이다.


안티오키아 인구가 40만이라길래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푸른 숲과 목초지, 밀밭과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을 보니 수긍이 간다. 사막화가 진행된 현대 시리아와 180도 다른 모습이다.


경치를 구경하는 동안 시종관이 나를 불렀다.


시종관이 나의 방문을 알린다.


“왕자님께서 쾌차하셨습니다. 전하께 문안 인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초췌한 기색의 중년이 시종관을 바라봤다. 머리 위 금관이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보인다. 장시간 회의에 지친 왕이 입을 열었다.


“오후에 논의를 재개하겠다. 자문위원회는 이만 물러가라.”


자문위원회 노인들이 물러나고 동년배 친구들만 남았다.


헤타이로이(ἑταῖροι 왕의 친구들).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귀족 자제를 모아 아들 알렉산더와 함께 가르쳤다. 이들은 레슬링, 검술, 승마술로 신체를 단련했고, 위대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리스 철학을 배웠다.


헤타이로이는 알렉산더의 위대한 정복 여정에 함께 하였다. 전장에서는 정예 기병대로, 진영에서는 핵심 참모로, 후방에서는 지방 총독으로 활약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후예 셀레우코스 제국 역시 헤타이로이 전통이 존재한다. 전통이 아닌 악습이려나···


저들은 소수 그리스계의 상징이 되어 제국의 특권층으로 고착되었다. 소수 그리스계 특권층과 다수 피지배 민족으로 분리되면서 제국은 성장 동력을 잃었다. 헬레니즘으로 동서양 융합을 꿈꾼 알렉산더와 정반대 되는 행보였다.


제국은 병들었고, 헤타이로이는 적폐 세력으로 변했다.


열 살이 되면 내게도 헤타이로이가 붙을 것이다.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는다면 내 지지 기반이 되어줄 지 모른다. 김나지움(고대 그리스 종합 체육관)에서 알몸 레슬링을 겨루고, 목욕도 하고 ,비누도 줍고(?)


제기랄 또 이상한 상상을···


2년 기다려 철부지 귀족 헤타이로이를 얻느니 바깥 세상에 나아가 인재를 찾는 것이 낫다.


헤타이로이는 거절한다.


난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또박 또박.


나를 바라보는 헤타이로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유있는 걸음걸이와 당당한 표정으로 맞섰다.


옥좌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제우스신의 가호가 왕께 내리기를. 아들 아폴로니스가 셀레우코스 7세께 문안인사 드립니다.”


“어서 오너라 아폴로니스. 몸은 어떠하느냐?”


“다 나았습니다.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아폴로니스가 황금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고개를 들었다. 켈트족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금발과 미모는 언제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셀레우코스 제국을 쳐들어온 아르메니아왕 티그라네스 2세마저 아기 왕자의 외모를 칭찬하였다. 이 칭찬이 입소문을 타 안티오키아 시민 전체가 알게 되었다.


주신 아폴론을 닮은 왕자님은 안티오키아 시민의 자랑이었으며 별볼일 없는 왕실의 위안이었다.


아들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셀레우코스 7세는 즉시 왕실 주치의를 보냈다. 왕실 주치의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폴로니스는 단호히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어째서 주치의 처방을 거절했느냐?”


“병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폴론 신께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어전이 술렁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며 철학이 종교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종교를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교 축제와 신전 제의가 계절마다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고, 문학과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숨쉬고 있다.


신을 영접했다고 말한 왕자의 발언이 퍼진다면 신전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신성모독죄로 재판을 열 수 있을 만큼 위험한 발언이었다.


쿵.


셀레우코스 7세가 왕홀을 내리쳤다.


“다들 조용하라. 아폴로니스, 네가 무슨 말을 한 줄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저는 일주일 전 꿈에서 아폴론 신을 영접했고, 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가 환각 상태에서 신탁을 전달한다고 들었다. 아들의 증세는 신내림과 비슷했다.


“신께서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신지 이백 년이 되었다. 네 말을 신뢰할 근거가 있더냐?”


“제 말투가 변한 것을 느끼셨는지요?”


······


셀레우코스 7세가 아폴로니스를 바라봤다. 매일밤 엄마를 찾아 울던 아이가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의젓한 말솜씨··· 아들은 아프기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좋기는 하구나. 허나 신탁 수행은 단지 델포이로 가기만 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아폴론 신께서 어린 저를 도우시고자 신들의 축복을 빌려오셨습니다. 자신의 권능인 예언의 축복, 아테나 여신의 지혜의 축복, 헤르메스 신의 여행자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모두 깜짝 놀랐다.


아들처럼 완벽한 외모를 받았다던지, 헤라클레스처럼 무시무시한 힘을 받았다던지. 가끔씩 신의 사랑을 받은 아이가 태어나곤 한다.


하지만··· 여러 신의 축복을 동시에 받았다는 말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여러 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사람은 오직 신화속 영웅밖에 없다. 왕자의 발언은 자신을 신화속 영웅과 동급임을 주장한 말이었다.


소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비웃었다. 왕자의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쿵.


셀레우코스 7세가 다시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네 말투가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진 것도 지혜의 축복 덕분이냐?”


“그렇습니다.”


소란한 분위기에서도 왕자는 침착했다.


셀레우코스 7세가 생각에 잠겼다.


델포이 신탁이 유명한 이유는 예언의 신 아폴론이 내리는 신탁이기 때문이다. 예언만 있다면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전쟁이든 가뭄이든 폭풍우든 전염병이든··· 실로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언의 축복을 받은 것이 사실이더냐?”


“어젯밤 계시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붉은 사각 방패가 강가의 거대한 성벽을 넘을 것입니다.”


붉은 사각 방패는 로마군의 상징 스쿠툼을 일컫는다.


어느 도시일까?


로마군과 전쟁중인 나라가 강가의 거대한 성벽을 세운 도시를 찾으면 된다.


아르메니아의 신수도 티그라노세르타.


티그라네스 2세는 점령지 시민 30만을 강제 동원하여 유프라테스 강가에 티그라노세르타를 지었다. 티그라노세르타 성벽 높이는 무려 22미터에 달했다.


든든한 성벽이었지만 셀레우코스 7세는 불안한 마음을 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로마가 승리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


자신은 아르메니아 왕에 의해 세워진 공동왕이었다. 로마가 자신을 방치할 리 없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즉시 친로마 성향을 지닌 다른 왕족에게 양위를 강요할 것이다. 로마에서 유학중인 배다른 동생이 유력했다.


헤타이로이가 조언했다.


“티그라노세르타 공성전이 벌어지면 수비 10만 대 공격 2만 5천의 싸움입니다. 아무리 로마가 공성전에 강하다 해도 1년은 족히 넘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이 남았다는 말이군.”


“예언은 향후 추이를 지켜보며 대응해도 됩니다. 당장의 과제는 왕자님의 신탁 수행을 도울 것인지 말 것인지 정하는 것입니다.”


왕자의 신탁 수행을 막을 것인가 도울 것인가.


막는다면 신의 분노를 살 것이고, 돕는다면 빈약한 나라 재정을 털어야 한다.


셀레우코스 7세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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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처녀신의 도시 +8 22.05.30 4,372 181 13쪽
19 이시스 여신전 +19 22.05.28 4,439 189 13쪽
18 로도스 청동 거상 2 +17 22.05.27 4,418 206 13쪽
17 로도스 청동 거상 +14 22.05.26 4,526 169 13쪽
16 절름발이 천재 필론 +14 22.05.25 4,742 180 13쪽
15 비밀 동맹 +17 22.05.24 4,836 190 13쪽
14 타르수스 노예 시장 +7 22.05.23 4,953 204 13쪽
13 출항 +7 22.05.21 5,172 200 13쪽
12 반칙왕 풀로 +16 22.05.20 5,181 214 14쪽
11 연극과 전차 경주 +8 22.05.19 5,547 224 12쪽
10 처녀 빗치 여신관 +13 22.05.18 6,064 231 14쪽
9 왕자님의 그건 큰가요? +22 22.05.17 6,124 252 13쪽
8 신전 제의 준비 +12 22.05.16 6,153 240 13쪽
7 보레누스와 풀로 +25 22.05.14 6,288 251 13쪽
6 아키우스 클로디우스 +11 22.05.13 6,603 254 14쪽
5 페르가몬 상단 2 +13 22.05.12 7,042 260 14쪽
4 페르가몬 상단 +15 22.05.11 7,380 279 13쪽
» 델포이 신탁 +9 22.05.11 7,906 276 13쪽
2 잘생겨서 엉덩이가 위험하다 +14 22.05.11 9,156 335 13쪽
1 프롤로그 +13 22.05.11 10,024 3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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