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성의 기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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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경기엔 심동연을 제외한 선수부 전원이 참석했다. 이언규가 국내 대회 첫 승을, 인계석도 중소 입식 경기에서 우승한 뒤였다.
“오사카!!!”
공항에 내린 이언규가 로비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왜 저래, 쟤?”
최진호 대표가 손가락을 머리 옆에 대고 돌렸다.
“언규 해외여행 처음이래”
정 관장이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도 오사카는 처음이에요”
인계석이 달걀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루에 8강부터 결승까지 치른 사람치고는 그나마 깔끔한 얼굴이었다.
공항을 나서자 최 대표의 누나가 밴을 끌고 나와 있었다. 최 대표의 누나는 오사카에 있는 한국 식당의 매니저를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누님”
정 관장과 칠수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이언규와 인계석도 둘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어서들 와요, 기운 내야 하는데 일단 맛있는 거부터 먹어요”
그러자 최 대표가 손을 ‘엑스’ 자로 들었다.
“누나, 얘네 오늘 계체 있어.”
“오케이, 그럼 바로 계체 장으로 바로 고고”
칠수는 이번에도 뒤에서 세 번째 경기였다. 킹스에서 흔치 않은 한국 선수라 나름대로 대우를 해주는 모양이었다.
“치루수 센슈, 70.0kg”
“기무라 센슈, 69.8kg”
<할복시켜주마, 조센징>
꽤 위험한 생각을 하는 상대였다.
생각을 읽는다는 건 재미있는 여러 일을 할 수 있다.
파이팅 포즈를 취하던 칠수가 갑자기 칼을 꺼내는 시늉을 하더니 그대로 배를 그었다.
기무라의 위험한 생각을 현실로 연출한 것이다.
그러자 순간 계체 현장이 험악해졌다.
“야, 오버하지 말자. 여기 일본이야.”
정 관장이 칠수를 감싼 채 방을 빠져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물을 들이켜는 칠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킹스의 구와바라 대표였다.
구와바라가 칠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최 대표와 대화를 나눴다.
일본말로 된 생각은 읽을 수 있으나 일본말 자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애매한 독심술이었다.
칠수들이 최 대표를 바라봤다.
“방금 좋았다고 하네. 그렇게 파이팅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고 하셔”
구와바라가 다시 최 대표에게 무언가 물었다.
“이번엔 뭐래요?”
최 대표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전략이 뭐냐고 하네, 이거 참”
그러자 칠수가 구와바라 쪽으로 다가갔다.
“허리케인 롤링 썬더데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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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표 누나의 한식당을 찾은 선수들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푸드 파이터야, 이 형”
벌써 밥을 세 공기씩 비운 인계석과 이언규였지만, 그 앞엔 더 굶주린 칠수가 있었다.
“누님, 된장찌개 정말 최고예요”
계체 폭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2주에 8kg 정도를 감량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살이 잘 빠지는 체형인데도 그랬다.
“그나저나, 진짜 전략 한번 말해봐”
최 대표가 물었다.
“음, 일단 테이크다운 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도망을 다닐 거야”
정 관장이 말했다.
“그리고?”
“그러다가 테이크다운을 ‘당해 줄’ 거야”
“깔린다고??”
“칠수가 그래플링도 또 어느 정도 하거든. 언규랑 동연이도 거의 이길 뻔했지”
“오호, 근데 기무라인지 걔도 그래플러잖아?”
이번엔 인계석이 나섰다.
“걔 6패 중의 3패가 서브미션 패배예요. 이상한 그래플러 같아요”
“공략할 빈틈이 많다는 뜻이니까, 충분히 비빌 수 있어. 칠수는 암바로 페이크를 걸다가 트라이앵글 초크로 넘어갈 거야”
다음 날 경기장에서 엑스파이트의 이덕교 기자를 또 만났다.
“아니, 기자님. 오사카 자주 오시네요?”
최 대표가 달려가 반겼다.
“칠수 선수 보러 또 왔습니다. 오늘 왔다 오늘 넘어가는 일정이에요”
“야, 이렇게 응원단도 있고. 칠수 너 무조건 승리해야겠다.”
정 관장이 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 없으니 소감이나 한 말씀 말씀해주세요”
이덕교가 휴대폰을 들이댔다.
“아···. 이번에도 반드시 KO로 이기겠습니다. 판정승은 절대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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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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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는 그야말로 ‘집요’했다.
<테이크다운, 테이크다운, 테이크다운>
머릿속엔 온통 테이크다운 생각밖에 없었다.
생각도 테이크다운, 그리고 출신 자체도 자유형 레슬러다 보니 대부분의 공격이 하단으로 들어왔다.
타이밍 맞게 스프롤, 타이밍 맞게 스프롤만 하면 그만이었다.
“우~~~”
1분이나 같은 양상이 계속되자 오히려 관중석에서 야유가 들렸다.
정 관장과 세운 전략은 ‘쓰러져 주기’였다.
2분 정도까지 ‘밀땅’을 하다가 2분이 지날 즈음 마지못해 넘어가는 전략이다.
<개새끼, 테이크다운, 테이크다운>
초조해진 칠수가 시계를 올려다봤다.
1분 58초, 1분 59초, 2분
칠수가 2분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테이크다운!>
거의 스무 번째 시도 만에 기무라의 태클이 성공했다.
물론 그 성공은 칠수의 성공이었다.
서브미션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기 때문이다.
칠수는 등을 대자마자 두 발로 기무라의 허리를 감쌌다.
일명 ‘풀 가드’ 상태였다.
그래플링에선 상위 포지션이 가장 좋지만, 누워 있을 때의 최고는 ‘풀 가드’다.
암바, 트라이앵글초크, 길로틴 초크 등 다양한 기술과 연계할 수 있다.
원해서 들어온 기무라였으나 칠수가 가드를 잠그고 팔로 뒤통수를 누르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세다.>
생각보다 센 칠수의 완력에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칠수야, 잘 보고 들어가!”
정 관장이 소리쳤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간신히 뒷목 잡은 손을 푼 기무라가 파운딩을 시도했다.
<머리, 머리, 배>
모든 파이터들이 즐겨 쓰는 파운딩 패턴이었다.
패턴을 알고 있으니 방어가 편했다.
하지만 가드 위로 들어오는 충격이 꽤 만만치 않았다.
파운딩을 막으며 칠수는 알게 됐다. 기무라가 왜 서브미션 패배가 많은지를.
바로 움직임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작은 폭에서 사용하는 ‘해머링’ 펀치가 아니라, 어깨의 회전력을 많이 요구하는 펀치를 하고 있었다.
체력도 쉽게 빠질 뿐 아니라 빈틈도 많은 동작이었다. 물론 파괴력은 더 좋다.
“허점 많다! 잘 보고 들어 가!”
<배, 배, 머리>
이번엔 기무라가 패턴을 두 번째 것으로 바꿨다. 역시 단순한 패턴이었다.
칠수는 머리 공격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두 팔을 온몸으로 움켜쥐었다.
<암바구나!>
기무라가 칠수의 생각을 간파했다는 듯 다른 손으로 칠수를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암바는 미끼였다.
기무라가 몸을 일으킨 틈을 타 칠수의 두 다리가 올라왔다.
<트라이앵글!!>
머릿속으로 소리쳤으나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칠수는 두 다리로 기무라를 묶은 채 반대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거의 그립이 완성됐으나 기무라가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칠수도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조였다. 결국, 칠수의 뒤꿈치가 바닥 쪽으로 단단히 고정됐다.
“기브업? 기브업?”
기술이 들어간 걸 확인한 주심이 소리쳤다.
기무라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찮긴···.’
기무라의 얼굴은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안 해···. 포기 안...>
근성 하나는 인정해야 할 선수였다.
그러나 포기는 선수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무라의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상대 코너에서 하얀 수건이 날아왔다.
“이겼다!!!”
1라운드 3분 7초.
칠수가 프로에서 거둔 두 번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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