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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디온 님의 서재입니다.

불법 영혼 계약을 멈춰주세요(마법 탐정 가문 1)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공포·미스테리

기디온
작품등록일 :
2019.12.14 13:01
최근연재일 :
2019.12.19 00:31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498
추천수 :
0
글자수 :
114,431

작성
19.12.1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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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장. 첫 피(3)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수업 시간이라 그런지, 교무실엔 몇 명 안 남아 있었다. 덕분에 선생님은 꽤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컴퓨터로 반 항렬표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선생님은 뒤를 되돌아보았다. “세민아! 왔네?” 해맑게 웃으면서 선생님이 일어섰다. 지금까지는 조례 때나 잠깐 본 정도라 딱히 쌤이 엄청 키가 큰 사람이라고 실감한 적은 없었지만, 선생님은 의외의 장신이었다. 세민의 정수리가 겨우 가슴에 올 정도였다. 어쩐지 여자애들이 환장한다 싶었더니···역시 키였군.


“우리, 매점이나 갈까?” 선생님이 물었다. 약간 뜬금없었지만, 세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15분 동안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척 연기를 해야 한다면, 초키초키 쿠키나 한 봉지 먹으면서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자, 가자!” 선생님은 신난 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몇 분 뒤, 세민과 선생님은 편의점에서 볼 법한 동그랗고 하얀 플라스틱 테이블과 맞는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세민의 앞에는 그토록 염원했던 초키초키 한 봉지, 선생님 앞에는 바나나 우유가 놓여 있었다.


“뭐야 그건?”


“초코맛 쿠키요. 뭐, 정확히는 코코아맛이겠죠. 여기에 진짜 초콜릿이 들어갔다면 가격이 800원일 리가 없으니.” 봉지의 성분표기를 참고하면서 세민이 대꾸했다.


그저 관찰이었지만, 선생님은 무척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깔깔 웃었다. 하얀 치아가 돋보였다. “세민이는 되게 현실적이구나.” 뭐라 할지 모르는 세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한 손으로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들고 온 종이 뭉치—자세히 보니 첫날 왔을 때 모두 써서 제출한 자기소개서였다—를 집었다. 세민은 그걸 쿠키를 먹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봉지를 뜯었다.


“음, 이세민, 나모초등학교 출신···영어를 좋아하구나? 선생님이랑 잘 맞겠네···취미가 책읽기, 오컬트···오컬트?” 선생님은 의아하다는 듯 세민을 보았다.


“괴담이나 게임이나···그런 거 좋아해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지만.” 세민이 쿠키를 먹으면서 대꾸했다.


“세민이는···큰아버님과 작은아버님과 함께 사는구나?” 종이를 훑어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세민은 한숨을 내쉬는 걸 겨우 참았다. 어쩐지 다들, 이런 걸 써내기만 하면 그 점밖에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네.”


그 뒤의 말을 덧붙일까 잠시 망설였지만, 세민은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중에 또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건 귀찮으니.


“참고로 우리 아빠들, 사귀는 거 아니에요. 큰아빠랑 작은아빠는 형제고요. 피가 안 섞이긴 했지만.”


“피가 안 섞였다니? 세민이랑?” 선생님이 물었다. 세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죠. 큰아빠도 작은아빠도 저랑 피가 안 섞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큰아빠랑 작은아빠도 마찬가지에요. 가인이도 그렇고요.”


“가인이? 이가인?” 선생님이 놀라서 되물었다.


“아실 거예요. 생긴 건 백인인데 한국말은 잘하는 애.”


“아, 맞아. 그런데 영어는 의외로···어···” 선생님은 못 할 말을 한 듯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세민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가인이도 자기 영어 못하는 건 인정하거든요. 아무래도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 자랐으니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혹시 법적 보호자가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 선생님도 굳이 캐묻고 싶진 않지만, 학교 측에서···"


세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렇게 따지면 친권자는 큰아빠겠죠. 이제···우리 엄마가 큰아빠의 먼사촌인가? 그랬대요. 그런데 엄마가 저 낳고 돌아가시고, 아빠는 뭐 어디 죽었거나 실종되었거나 그래서 마지막 남은 친족인 큰아빠하고 작은아빠가 맡으신 거예요. 엄연히 따지면 삼촌들이죠. 그런데 뭐···일단 아빠는 아빠니까, 그냥 큰아빠 작은아빠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선생님은 한동안 조용했다. 하긴, 세민의 꼬일 때로 꼬인 족보를 파악하는 데는 워낙 시간이 많이 드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너희 가족은 혈연 관계인 사람은 아무도 없네?” 마침내 입을 연 선생님이 말했다.


“뭐···따지고 보면 그렇죠.” 세민은 그렇게 말하고 쿠키를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나나 우유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런 가족이랑 있으면 좋니?”


세민이는 순간 움찔거렸고, 선생님도 의도치 않게 비난하는 듯한 말투에 놀랐는지 서둘러 정정했다. “아, 아니, 절대 그런 뜻이 아니야! 가족은 다양한 형태가 있으니까. 그러니까···세민이는 가족이 좋니? 아니면 혹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딱히요.” 애초에 있어도 말해줄 일은 없지만. 선생님은 말이 더 이어지길 바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세민이 침묵을 지키자 포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래···그럼 친구···” 자기소개서를 훑어보던 선생님은 세민을 바라보았다. “아직 없니?”


“네.” 세민이 짧게 말했다.


“그래···처음 온 학교에서는 그럴 수도 있어. 혹시 같은 학교 애들은? 걔네들이랑 얘기는 해봤니?”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번개처럼 머리부터 발끝을 관통했다. 손에 쥐었던 쿠키가 바삭 하고 으스러지면서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뭐라고 말해야 되지? 저 개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새끼들하고 한 마디라도 섞을 바엔 죽겠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땅구덩이에 던져넣은 다음 직접 그 새끼들 머리 위로 흙을 손수 한 삽씩 퍼넣겠다?


결국 분노에 눈이 먼 세민의 입을 탈출한 건 본심이었다. “아뇨. 할 생각 없어요. 이 학교의 어떤 사람하고도 친구할 생각 없어요. 전 공부나 죽도록 해서 이딴 쓰레기 학교를 탈출할 거예요.” 선생님은 놀란 나머지 눈이 입이 반쯤 벌린 채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 충격받은 표정을 보자 분노가 차올랐던 것만큼 순식간에 후회가 밀려와 불길을 덮쳤다. 그냥 대충 웃으면서 넘길 걸. 하다못해 아무 이름이나 쓸 걸. 그렇지만 이미 수습하기에도 늦은 말이었다.


“아···혹시,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


세민은 으스러진 쿠키 부스러기를 봉지 안에 털어넣으면서 질문을 곱씹었다. 묵비권을 행사할까, 말까. 한편으로는 이 선생님에게 치부를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1년 지나면 존재조차 잊힐 사람한테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렇지만 멋대로 판단한 선생님이 어줍잖은 ‘친구 만들기’랍시고 또 이상한 애들이랑 같은 조에 집어넣거나, 착하고 이해 많은 친구에게 “친하게 지내달라고” 떠넘기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었다.


결국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털어내면서 세민이 겨우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 친구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요.”


“쓸모···없다고?”


“뭐, 선생님 눈에는 사회성 떨어지는 애의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만···아시지 않아요? 여자든 남자든, 친구라고 해봤자 남이나 다름 없는, 때로는 남보다도 못한 존재예요. 신경만 안 쓰면 다행이지, 없어지자마자 험담을 하고, 조금이라도 우두머리의 마음에 안 들면 어느새 겉돌고. 전 그런 헛된 인연에 시간을 쓸 바엔 공부나 더 열심히 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봐요.”


선생님은 부족한 말을 찾는 듯, 한 모금밖에 안 먹은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하더니 끝내 바닥에서 쿠루룩 소리가 날 때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사람은 모두 다른 존재니까, 세민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존중해줄 수 있어. 확실히 친구가 많다고 해서 진정한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럼···”


여태까지 자기소개서에서 눈을 안 떼었던 선생님은 갑자기 세민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세민이는 그렇게 하면 행복한 거, 맞지?”


세민이는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소리지르고 싶었다. 네, 네 네, 저 행복하니까 제발 좀 내버려둬요! 예! 그런데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단어, 아니, 그 음절이 세민의 혀를 무겁게 짓눌렀다. 삼켜보니, 응어리가 되어서 목구멍을 꽉 막아버리고 말았다. 오도가도 못한 채 열불에 달궈진 응어리는 서서히 부풀어오르더니 기도마저 짓뭉개버렸다.


문득 뇌리에 김예원의 얼굴이, 최소연의 비아냥거리는 위로가 귓가에 울렸다. 왜 그 새끼들이 울어야 하는데 자신의 눈에 습기가 차는 것일까? 그 간단한 부조리가 너무나도 거슬려 세민이는 콱, 볼 안쪽을 물어버렸다. 전기처럼 찌르르 오는 고통과 비릿한 피맛에 놀란 몸은 순간적으로 우는 것도 잊어먹었다. “뭐···괜찮아요. 견딜 만 해요.” 세민은 그제서야 피맛 나는 대답을 툭 던질 수 있었다.


“그래···하지만 세민아,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다가 인연이 찾아와도 거절하면 안돼? 분명 찾아올 거야. 세민이도 매력적인 아이니까.”


세민은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꽤나 마음에 드는 편이었었다. 친구 친구 거리는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선생님도 아니었고, 꽤나 현실적이고 노터치인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데 잘나가다가 갑작스레 가식으로 빠져버린 대화에 세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이 사람도 똑같았구나.


매력적? 도대체 언제 봤다고 매력적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거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력적이었으면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매력적이었으면서 항상 우두머리 친구나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신세였다고?


가인은 매력적이었다. 큰아빠는 매력적이었다. 하다못해 작은아빠도 충분히 매력이라 부를 만한 개성이 넘쳐났다. 세민은···아무것도 없었다. 성적표에 찍혀나오는 숫자들 말고는.


썰물이 빠지고 밀물이 밀려오듯, 똑같은 웃음과 똑같은 손짓, 똑같은 중저음의 목소리였지만 갑자기 그 뒤에 있는 것들이 보였다. 힐끔힐끔 시계를 들여다보는 눈. 빨리 달아나고 싶은 듯, 의자 끝에 걸터앉은 자세. 과거의 자신이라면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었겠지만, 최근 들어 눈치가 좀 늘은 것 같았다. 이 대화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선생님은 위한 것이겠구나.


그 뒤로 성적에 대해 몇 번 이야기가 오갔지만,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뭐라 하긴 어려웠다. 아니, 정확히는 세민이 한 음절 이상의 대답을 주지 않은 탓이었지만···서로가 그걸 원하고 있는 시점에선 그게 최선의 결과였다. 선생님이 준비해둔 질문을 전부 소진하자, 세민과 선생님은 일어서서 교실로 돌아갔다. 목례를 가볍게 하고 서로 헤어졌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세민은 샤프를 쥐고 문제집을 폈다. 그래도 뭐···특별히 나쁜 선생님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민을 귀찮게 하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계약의 조건은 충분히 지켜준 셈이었다. 이젠 세민이 유일하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답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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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4장. 준의 실종 19.12.19 10 0 14쪽
18 13장. 뱀 눈의 남자(2) 19.12.18 9 0 11쪽
17 13장. 뱀 눈의 남자(1) 19.12.18 10 0 12쪽
16 12장. 폴록의 복수 19.12.17 9 0 14쪽
15 11장. 토끼굴에 빠지다 19.12.15 12 0 16쪽
14 10장. 예술가의 고뇌 19.12.14 12 0 14쪽
13 9장. 병문안 19.12.14 23 0 15쪽
12 8장. 복수의 클럽 19.12.14 14 0 15쪽
11 7장. 폭풍의 언덕 19.12.14 18 0 13쪽
10 6장. 케이크와 커피와 가십 19.12.14 16 0 17쪽
9 5장.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19.12.14 11 0 17쪽
» 4장. 첫 피(3) 19.12.14 11 0 11쪽
7 4장. 첫 피(2) 19.12.14 53 0 13쪽
6 4장. 첫 피(1) 19.12.14 13 0 14쪽
5 3장. 사랑의 학교 19.12.14 14 0 12쪽
4 2장. 그림자 도서관 19.12.14 29 0 15쪽
3 1장. 쌍둥이의 자리(2) 19.12.14 29 0 12쪽
2 1장. 쌍둥이의 자리(1) 19.12.14 119 0 11쪽
1 프롤로그. 바다에서 걸어나온 남자 19.12.14 87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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