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협상 (5)
“그래.. 그랬단 말이지.”
순치제는 엎드려 있는 범문정을 향해 짧은 신음을 내었다.
“폐하 그저 소신을 죽여 나라 안팍의 모든 비난을 이 모자란 한족 간신에게 모으게 하소서!”
범문정이 더 낮게 엎드리며 호소하니 순치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타이시가 아니었으면 저들과 협상조차도 못했겠지. 그대를 죽이면 그 다음엔 누가 나에게 올바른 말을 하겠는가.”
“하오나 폐하..”
“그대는 그저 나의 의중을 저들과 나눈 것에 불과한게 아니지 않은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도 했고.”
순치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부복해있던 병부상서 홍승주(洪承疇)가 읍하며 말했다.
“과연 그러합니다 폐하. 이번 전란을 말미암아 우리 청군도 다시금 혁신할 기회가 왔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혁신이라고?
범문정은 혁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들고 홍승주를 바라보았다.
“병부상서께서는 방금 혁신이라 하셨소이까?”
“타이시께서는 조선에 다녀오시느라 아직 못 들으셨나보오. 혁신이라 함은···”
“내가 직접 설명하겠네.”
병부상서 홍승주의 말을 자르고 순치제가 직접 범문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범문정이 황제의 지시도 없이 고개를 든 것은 모른 체 했다.)
“타이시가 조선에 있는 동안, 그간 남경을 비롯한 천하에서 벌어진 전투와···그리고... 조선에서 있었던 전투 이후 이들을 교훈삼아 군을 일신하려는 계획이네.”
“그런 계획이 있었사옵니까 폐하!”
“아직은 그 얼개만 잡아놓은 상태이지만, 여기 있는 병부상서 그리고 조선에서 왔다던 그 예조판서라는 놈이 고생을 꽤나 하고 있네.”
그 말을 들은 범문정은 저으기 혼란스러웠다. 병부상서 홍승주야 당대 최고의 명장이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투항한 조선의 예조판서라면 김자점 그가 아닌가?
“폐하. 송구하오나, 방금 하교하신 것 중에 조선의 예조판서가..”
“타이시 그대가 들은게 맞다. 예조판서 이전, 조선의 도원수로 조선 전체의 군사를 움직이는 자였다니 과연 그 능력이 있긴 하더군.”
하며 씁쓸하게 웃는 순치제는 청나라 군사를 일신할 계획이 있다며 알현을 청한 김자점을 기억했다.
조선인 주제에 천병을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말에 그 패기가 궁금하여 불러온 자리에서 김자점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순치제에게 고했다.
조선군이 왜 갑자기 강해졌는지, 그 이유와 군사를 조련하는 법식 모두를 알고싶지 않냐는 그의 말에 순치제는 당장 그를 끌어내 목을 베라고 했지만 -
그날 밤 김자점이 마주한 건 서슬퍼런 칼날이 아닌 하급 관리로 변장한 순치제의 모습이었다.
“하도 네놈의 말이 가당치 않아 목을 베기 전에 이렇게 와보았다. 그래. 그 이유와 법식이 무엇이더냐?”
김자점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짧게 읍하고는 유창한 청나라 말로 떠들었다.
“몇 해전, 조선에서는 어느 장수의 아들이 영진신서라는 병법서를 새로 낸 적이 있습니다. 조선왕은 그 서책을 기초로 군사를 모두 바꾸었으니, 그 이름은 영격총수병과 영격기병인 것입니다.”
“영격이라?”
“예 그러합니다. 여러 방진을 짜서 쳐들어오는 기병과 보병들에 맞서는 병법서인데, 영격이라는 뜻은 적이 들이치기 전에 먼저 없애는 것 입니다.”
“들이치기 전에 없앤다. 결국 총을 뜻하는구나.”
“그러합니다 폐하.”
“그렇다면 그 시범을 보일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김자점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답했다.
“조총을 다뤄 본 경험이 있는 군사 오백을 맡겨주신다면 청의 어떠한 군사들이라도 모두 이겨보이겠습니다.”
“뜻은 가상하구나. 좋다. 내 너에게 한달여 시간을 줄테니 네놈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거라. 그러지 못한다면 즉시 참할 것이다.”
하며 꼭 한달 뒤, 김자점이 스스로 조련시킨 오백을 상대로 녹영과 철기들도 맥을 못 추자 순치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김자점을 참령(參領)에 임하고는
북경성에 화기영(火器营)을 설치하였고 김자점과 오백 군사를 특충병(特种兵)이라 하였던 것이었다.
대략 이야기를 전해들은 범문정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가 군재에 뛰어남은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그 자에게 군을 일신하려는 계획을···아니 경군을 우선 일신해도 되겠사옵니까? 주방의 군사들이···”
범문정은 순치제가 야심차게 시행했던 주방영성(驻防营城)과 주방팔기(駐防八旗)를 언급하며 말을 흐렸다.
청의 건국세력이었던 만주족은 한족보다 그 인구가 적으니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주요 거점에 철기를 주둔시켜 지역 안정을 꾀해야 했다.
그런데 순치제가 언급한 군의 일신은 당장 경군을 우선하여 한다니. 이렇게 된다면 주방의 군사들은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주방팔기를 폐하고, 녹영을 키울 생각이네.”
“예?”
범문정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폐..폐하 그것은..!”
“이번 전란을 겪으면서 말이지. 한족이라고 해서 모두 명의 편을 드는것도 아니고, 만주인이라 해서 모두 우리의 편을 드는것이 아니었네.”
“하오나..”
“결국 욕심인게지. 얼마나 욕심을 채워주느냐에 따라 충군할 대상이 바뀌니 말이야.”
“···.”
“그런 의미에서 주방팔기는 폐하기로 했고, 대신 이 청나라에 충군하여 벼슬길에 눈이 먼 자들로 하여 군을 정비할 생각이네.”
“그렇게 되면 명나라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옵니다..!”
“하! 그 거지꼴을 면치 못한 나라가 말이냐? 그 놈들이 이 전란을 수습하고 나라다운 나라 꼴을 갖추려면 적어도 삼 년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범문정은 순치제가 언급한 삼 년이라는 말을 주목했다.
“··· 삼 년이라 하심은···혹..”
“타이시가 생각하는게 맞다. 삼년 안에 군제를 개혁하고, 다시 명과 조선을 치겠다. 이번엔 완전히 천하를 청의 아래에 둘 것이다.”
“명과 조선을 동시에 말씀이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둘이 손잡고 우리 청나라를 침범하러 올 터인데 먼저 때려야 함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맺은 화맹은···”
“겨우 삼년 짜리지.”
범문정은 왠지 씁쓸해 하는 순치제를 바라보며, 문득 지난날 조선에서 만났던 조선왕과 정성공 생각이 났다. 그들도 폐하와 진정 같은 생각일까.
***
한편, 영력제 주유량은 협상 결과를 설명하는 정성공을 크게 치하했다.
“무왕(武王)이 큰 애를 써주었네. 참으로 애를 썼어!”
어느새 영력제에 의해 무왕에 봉해진 정성공이 계면쩍다는듯 입을 열었다.
“폐하의 용단이 아니셨다면 이번 화맹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아니야. 그대가 없었다면 어찌 조선의 충심을 재 확인하고, 청의 야욕을 꺾을 수 있었겠는가?”
“송구하옵니다.”
“빈말이 아닐세. 장강 이남을 어떻게 수복했다 하지만 다시 그 옛날 태조황제폐하의 치세로 돌리려면 시일이 많이 필요한 법. 참으로 귀중한 시간을 벌었네.”
주유량은 입에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다.
장강 이남에서 전투는 이제 끝났지만, 청나라와의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군사대 군사로 싸우는 전쟁이 아닌, 치세 대 치세로 싸우는 전쟁. 어느 나라가 더 성읍을 잘 관리하고 동원할 수 있는 군사를 더 많이 뽑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겨루는 전쟁.
이제 겨우 장강 이남을 수복했기에 각 성읍의 관리들을 새로 뽑아야 하는 것 부터 각 마을을 지배했던 만주족의 토지며 물산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건지에 까지 잡다한 일들이 천하의 크기만큼 쌓여있었다.
다행히 영력제 주유량을 따르던 가신들이 수천 있어 우선 급한대로 남경의 6부를 재건하고, 근처 성읍에 파견하여 제도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급히 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수복한 다른 성읍이었는데, 결국 필요한 것은 시간과 인재 그리고 은자만이 이를 해결해 줄 수 있으니 이 중에 시간이 가장 급한 부분이었다.
영력제 입장에서는 이 천금같은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우선 급한대로 내치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물산이 픙부한 강남지역이 알단 한번 안정되기만 한다면 그 막강한 경제력을 뒷배 삼아 백만 군사 쯤이야 우습게 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전까지 장강 이남에서 몰려든 복명군이 어느 새 오십만을 훌쩍 넘겼었다 했다.
다만 그 대 군사가 모여든건 좋았지만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모두 제각각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제법 그럴싸한 갑옷과 병장기를 들고왔지만, 어떤 이들은 보습을 갈아 날을 세워 병장기라고 들고온 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각 군사들의 정예함도 다르고, 조련받은 것도 다르고 모든게 다르다는 뜻이니 다른 말로는 오합지졸의 모습이요 그 옛날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모인 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하늘은 아직 명나라를 버리지 않은게 틀림없네.”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옵나이다.”
“그래. 조선에서는 우리의 쌀과 차를 요구했다지. 은자도 아니고 칭제건원도 아니고.”
“폐하께서 염두해두신 바였지만.. 조선왕이 먼저 나서 충심으로 그 둘을 물리고서 쌀과 차를 얻어가겠노라 하였사옵니다.”
“조선왕은 참으로 예의를 아는 자로구나.”
“그렇사옵니다 폐하. 물론 지난날 불행이 있었지만..”
“벌써 수십년이 지난 일이야. 지금에서야 그 일을 따진다 한들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
“애써 다시 들어온 공작새를 날려보낼 필요는 없지. 잘 달래어 품 안에 둘 뿐.”
영력제는 주먹을 꼭 쥐고는 결연하게 말했다.
“어떻게 다시 불씨를 살린 천하인데, 이대로 놓칠수는 없지.”
“폐하의 옥음이 참으로 옳사옵니다. 사직을 이어가고, 종묘도 재건하여 온 천지에 명나라의 빛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야 하옵니다.”
“무왕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하지만 지금 당장 닥친 일부터 해결하지 못하면 종묘도 사직도 모두 모래성에 지나지 않음을..”
영력제가 지난날 청나라 군사를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자 정성공이 울컥하며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영력제는 환관을 시켜 정성공과 자신에게 차를 내올것을 명했다.
“지난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소신이 더 힘쓰겠사옵니다. 폐하!”
“무왕은 이미 이 나라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냈지. 융무제께서 그대에게 주씨 성을 하사함은 그 노고를 알기 때문임을 모두가 안다.”
영력제는 그를 치하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성공도 손수 영력제가 내어준 차를 마시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사받은 주씨 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성심을 다하여···. 커헉!”
순간 정성공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입에서 피를 뿜으며 온 몸을 비틀거렸다. 온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영력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문제야. 주씨 성을 가진 무왕이여. 그대가 너무 강하고 유능한게 문제란 말일세.”
“페···폐하?”
“그대의 유능함이 빛날수록, 황제인 나는 뭐가 되는가. 언제까지고 허수아비 노릇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장강 이남의 땅도 되찾았으니, 그대 말 대로 황실을 바로 세워야 함이지.”
“차..차에 독이··· 폐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법일세.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대도 편히 쉬게나.”
하며 영력제는 빙긋 웃어보였다. 온 천하에 평화가 도래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치세를 뽐낼 때가 된 것이고, 자신이 떳떳하고 준비된 통치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소한 걸림돌이라던가 위협이 될 만한 잡초들은 미리 제거해 두는게 나은 셈법이었음을, 오로지 명나라 황실에만 충성하려던 정성공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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