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드는 자와 거스르는 자 (4)
영섭이 직접 이끄는 수어청 근위척탄여단이 도성 밖을 빠져나가 노량진으로 향해 가던 때였다.
마포 부근을 지날즈음, 저 멀리서 거뭇거뭇한 무리들이 모여있는것을 앞서가던 기병중대가 발견하여 영섭에게 보고했을 때,
그쪽도 여길 발견했는지 이내 이쪽으로 대열을 갖추고 다가왔다.
영섭은 벌써 청나라 군사가 여기까지 침입했나 크게 놀라 각 대대장들에게 신속히 전개할것을 지시했다.
“여단!”
“대대!”
“중대!”
“대 보병 대형으로! 신속히 기동하라!”
각 대대장들과 중대장들의 명령에 척탄병들이 중대 단위로 신속하게 일 자(ㅡ) 모양으로 헤쳐모였다.
150명이 1개 중대로 구성된 척탄병 중대는 50명씩 3열을 만들어 이내 방포 준비까지 마쳤다.
“화포중대! 신속히 척탄중대를 엄호하란 말이다! 조련한대로 움직이지 못할까!”
1 대대장 김체건(金體乾) 파총이 소리치자 군사들이 총통기 화차와 소완구 수레를 끌고 각 척탄병 중대 사이마다 흩어졌다.
척탄 중대마다 4분동안 납탄 200여발을 쏘아대는 총통기 화차가 둘, 아이 머리만한 진천뢰를 백 오십보 거리까지 쏘아대는 소완구가 하나가 배치되었다.
이렇개 척탄 중대가 셋, 화포 중대 하나로 구성된 척탄병 대대의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런 척탄병 대대가 여섯에, 영섭의 직접 지휘를 받는 영격기병 120기로 구성된 기병중대가 하나, 여단의 눈이 되어주는 영격총수병 100명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하나,
진천뢰를 쏘는 컬버린 열 문과 수레로 구성된 포군대가 하나, 화약과 치중, 취사를 담당하는 군사 350명으로 구성된 치중대대 하나, 그리고 기수와 북, 소금과 대금을 부는 군악중대가 하나가 근위척탄여단의 구성이었다.
영섭은 지난 시간 김자점과 친청파의 눈을 피해 남한산성에서 몰래 조련한 군사들을 실전에 투입한다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베트남에서의 현대 한국군의 구성과 전열보병대, 유온이 주창한 영진신서, 그리고 문종대왕시기 이미 있었던 개념을 서로 합하여 신식군의 방향을 제시할때만 하더라도
이 일을 같이 진행하던 병조판서 이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법이라 하며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정예군을 조련해야 한다 주장했었다.
“원앙진이 척탄중대한테 깨져나갈때 그 친구 표정이 아주 볼만했지.”
“예 전하?”
영섭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병조판서이자 절대 영섭 홀로 친정을 시킬수 없다며 부관 노릇을 자처한 이완이 되물었다.
“아니다.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형은 갖춰졌나?”
“예 전하! 포군대에 명하여 포격하오리까?”
“아직 적인지 아닌지 모르지 않느냐? 정찰대에서 보고는?”
“곧 도착할 것입니다.. 아! 저기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완이 가리킨 곳에서, 영격총 특유의 짧은 총신이 반짝거리며 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뭐라뭐라 소리지르는 듯 한데, 첫 전투를 치를 것에 긴장한 이들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서역승들이옵니다! 서역승들이 창을 들고 여기로 오고 있사옵니다!”
정찰대 군사 하나가 엎어지듯 영섭에게 달려와 고하니, 영섭과 이완은 크게 놀랐다.
“지금 뭐라했느냐!”
“전하! 서역승들이 마음을 달리먹은게 아니겠습니까! 어서 포군대에 포격을!”
이완이 재촉하자, 영섭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네. 저 서역승들이 뭐가 아쉬워 그러겠는가. 내가 직접 저들을 문정할 것이다.”
하며 영섭이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가니, 이완이 어쩔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를 따라 박차를 가했다.
***
“마르탱 경! 저길 보시오!”
신부 이냐시우스 데 몽테, 아니 이제는 동방 몰타 기사단원이 된 피에르 드 기 대위가 외쳤다.
알렉산더 신부, 아니 동방 몰타 기사단장 마르탱 드 레당은 황급히 천리경을 꺼내 저 멀리 다가오는 군대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피에르 대위! 사제왕 요한의 군대에 저런 자들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기사단장 Magnus Magister 각하! 처음 보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타타르 군사일수도!”
기사단장 마르탱이 끄덕이자 피에르 대위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파이크를 내려라!!!”
“창을 내리시오!”
그들을 따라온 마포 성당의 기사들이자, 대부분이 조선인 신자였던 동방 십자군 오백여명이 어깨에 올렸던 창을 앞에 내려 꽂았다.
-척!
“피에르 대위! 타타르 군사들도 우리를 발견한듯 하오! 적 정찰병이 도망가고 있소!”
“곧 타타르 기병들이 들이닥치겠군요!”
“대위는 기사들을 점검하시오! 총병들은 총에 화약과 탄환을 넣으시오!”
마르탱은 노련한 몰타 기사단원답게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침착히 지시를 내렸다. 그 때 피에르 대위가 비명 비슷한걸 질렀다.
“세상에! 기사단장 각하! 들리십니까?”
“플루트와 드럼 소리 말이오? 그건 알겠는데 대체 저 소리는..”
저 멀리서 날카로운 철판이 성난 황소마냥 서로 부딪치며 깨져나가는, 온몸에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탱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몸을 움츠리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 당황했다.
“모두에게 일러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각하!”
피에르 대위가 다급히 기수를 돌려 동방 십자군들을 어르려 할 때, 마르탱이 외쳤다.
“타타르 기병들이 몰아친다! 파이크를 올려라! 대 기병 방진으로!”
“창을 들으시오! 철기를 상대할 진법으로 움직이겠소!”
십자군 모두가 배운대로, 다소 떨리기는 했지만 누군가 시작한 기도문을 읊으며 창을 단단히 쥐고는 창날을 앞으로 내밀고는 뒤를 땅에 박았다.
그간 훈련 받을 시간도 모자랐을테지만, 신속히 방진이 짜이는 것을 보며 마르탱은 그저 하나님의 은총 아래 모두가 피땀흘려 훈련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려오는 타타르 기병들을 보며, 마르탱은 십자군들이 제 역할을 잘 해주기를 기도했다.
“부디..”
그 때, 천리경을 건네받은 피에르 대위가 외쳤다.
“백기입니다!”
“백기라고요?”
“타타르 기병들이 백기를.. 아닙니다! 타타르 기병이 아니라 조선군입니다! 사제왕 요한의 군대입니다!”
***
영섭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중대가 적으로 추정되는 무리에게 돌격하라 명했지만, 저 멀리 고슴도치 처럼 방진이 짜여지는 것을 보고 영섭이 다급히 외쳤다.
“저들은 청나라 군사가 아니다! 백기를 올려라!”
영섭이 알기로, 청나라 군사들 중에 저런 방진을 구사하는 이는 없었다. 딱 한번 사천병들이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지만 저런 식으로 빽빽하게 진을 짜진 않았다.
그렇다면 저런 진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에스파냐의 테르시오나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선형진 정도일 터. 영섭은 자신의 판단이 맞기를 바랬다.
“전하! 저들도 백기를 올렸습니다!”
기병중대장이 외치자, 영섭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후, 저 검은 무리중에 은빛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자가 백기를 들고 나오더니 외쳤다.
“사제왕 요한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를 찾는 이가 누구인가!”
영섭이 말을 타고 나가자, 이내 반대편에 서 있던 사내가 경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제왕이시여! 저는 동방 몰타기사단장 마르탱 드 레당이라 합니다! 그 전엔 제물포 성당의 알렉산더 신부였습니다!”
“동방 몰타기사단? 알렉산더 신부? 아! 그 알렉산더 신부님이란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제왕이시여! 지난날 타타르 군사들이 신자들을 학살한 것에 분노하여, 침묵수행을 깨고 몰타 기사단으로 복귀했나이다!”
“아니 그런데 몰타 기사단이 조선땅까지 왔단 말입니까?”
“그 뿐이겠습니까! 그 날 이후 뜻 있는 기사들이 모여 동방 십자군을 결성하였으니, 여기 있는 검은 옷 입은 자들입니다!”
영섭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몰타 기사단이 여기 있는것도 황당했는데, 십자군이라고? 그.. 십자군?
“교황청은 이 사실을 알고있습니까?”
영섭은 너무나 당황해 말을 더듬었지만, 마르탱은 사제왕 요한이 감격한 것으로 오해하고는 더 큰 환희에 찬 얼굴로 외쳤다.
“세 달전에 이미 특사가 떠났습니다! 왕이시여! 이제 교황성하께서 전 에우로파에 십자군을 이끌고 조선, 그리고 여기 사울을 수호하러 올 것입니다!”
“지금 뭐라고..”
“왕이시여! 에우로파에서 십자군이 올 때까지! 저를 비롯한 동방 몰타 기사단은 사제왕 요한의 수호기사단이 될 것을 맹세하겠나이다!”
하며 마르탱이 무릎을 꿇는데, 뒤이어 십자군들이 모두 영섭을 향해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리며 그에게 충성의 서약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영섭이 뭐라 하며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서약이 끝나버렸고,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멍한 표정을 짓는 영섭과 마침내 사제왕 요한을 지키는 성전을 시작했다는 환희에 찬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교차했다.
“단장, 아무리 그래도 그대와 같은 사제들이 나설 전쟁이 아니오!”
영섭이 애써 정신을 차리고서 마르탱에게 말하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희가 ‘사제’ 였다면 말이지요.”
“그게 무슨..”
“왕이시여, 여기 있는 이냐시우스 신부는 원래 피에르 드 기 육군 대위로, 저 십자군들에게 테르시오를 가르쳐 훈련시켰습니다.”
하며 마르탱이 왠지 부끄러워 하는 피에르 대위를 끌고와 소개시켜주니 영섭은 지난날 구빈원에서 해맑은 미소로 감자를 캐던 이냐시우스 신부를 떠올렸다.
“피에르.. 대위라고?”
그러자 피에르 대위가 주춤거리며 영섭 앞에 섰다.
“피에르 드 기 에스파냐 육군 대위입니다! 사제왕 요한께 최우선 신봉 선서를 바치겠나이다!”
“아니 안그래도..”
영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에르가 손을 들고 뭐라 중얼중얼 거리는 통에 영섭은 그저 아니.. 아니.. 하며 결국 입을 닫았다.
“왕이시여! 이로서 동방 몰타 기사단이 사제왕 요한을 수호하겠노라 맹세하였으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며 마르탱이 결연한 표정으로 영섭을 바라보는데, 영섭은 성당으로 돌아가서 감자나 캐고 구빈원이나 돌봐라 하려는 말이 목구멍을 빠져나오려는걸 가까스로 막고는 흠흠 하며 말했다.
“때 마침 잘 되었습니다. 우리 척탄 여단에 병원이 없으니 동방 몰타 기사단에서 병원을 맡아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십시오. 또한 치중대대의 호위를 맡아 식량과 화약들이 무사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게 끝입니까?”
영섭은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마르탱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순간 이들이 뭘 원하는지 깨달은 영섭이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했다.
“제일 중요한게 남았습니다.”
그러자 마르탱과 피에르의 귀가 쫑긋했다.
“부디 이 사제왕 요한과 함께 선두에서 저 타타르 이교도들을 처부수어 냅시다!”
그제서야 마르탱은 웃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