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사정 (5)
“1654년 결산입니다. 상관장님.”
콧수염을 매끄럽게 기른 젊은 남자가 척 봐도 산전수전 다 겪었을 사람처럼 보이는 중년 사내에게 잘 정돈된 종이들을 공손히 건네었다.
“다른 품목은 괜찮았는데 후추 교역이 완전 적자 입니다. 저 잉글랜드 놈들만 개입하지 않았어도..”
“뭐 저 놈들이 저러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
“저 놈들때문에 후추 가격이 작년보다 30% 하락했는데도요?”
그러자 상관장이라는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으리라.
“서기관, 그럼 예상 손해액은 얼마나 되는가?”
“후추 한 품목만 삼만 플로린* 가량입니다.”
“삼만 플로린이라고?” (*20년 가까이 일한 비 숙련 노동자 6명의 임금 총합. 약 36억원.)
상관장의 표정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대로 본국에 돌아가면 저 콧대높은 투자자들한테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는데 일을 어찌해야 하나! 당장 삼만 플로린을 끌어 땡겨 올 수도 없고..”
“다행이 조선-콕싱야(정성공)와의 쌀 삼각무역으로 어느 정도 손실이 매꿔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저 잉글랜드 놈들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후추 무역은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쌀 무역한다고 푼돈이나 벌었나! 손해나 안 난게 다행이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조선과 콕싱야 둘을 뿌리칠 순 없습니다. 아, 상관장님 혹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잔뜩 심통나있던 상관장이 퉁명스레 답했다.
“뭐! 조선 왕하고 청나라 황제가 은자라도 준다던가?”
“비슷합니다.”
“응? 비슷하다니?”
“결국 청나라에서 조선을 칠 모양입니다.”
“그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서기관? 안 그래도 그것때문에 조선 왕이 머스킷을 대량으로 구해달라 한게 아닌가? 참. 그 총은 현재 수급은 어떻지?”
상관장이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자, 서기관은 묵묵히 들으며 기억해두었다가 하나씩 답했다.
“예. 총은 바타비아 일대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까지 오천 정을 확보 했는데 순조로이 기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조선과 교역량은 적지만, 훗날 조선 상관을 통해 청나라 내륙까지 진출해야지 않나.”
“그런데···”
서기관이 뜸을 들이자, 상관장이 보고서를 보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정보가 샜는진 모르겠는데, 우리가 총을 모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전 콕싱야(정성공) 가 자기들에게도 총을 팔아달라 하였습니다.”
“콕싱야? 그 악명높은 해적놈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니, 거기엔 총도 포도 많은데 왜 더 총을 사려는 거지?”
“그것까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볼때 콕싱야도 조만간 청나라와 큰 전투를 벌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조선으로부터 쌀을 더 들여오겠다고 하고, 조선으로 가는 초석중에 절반을 자기들에게 팔아줄 수 있냐고 조선 왕에게 부탁했다는걸 보면 말입니다.”
“전투라···”
“요즘 콕싱야의 함대가 뻔질나게 젤렌디야 요새 (대만섬) 근처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미확인 정보의 따르면 콕싱야는 이번에 난징을 공격하러 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난징 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면, 저 대륙이 난리가 나겠지요. 그 틈을 파고 들면 큰 돈이 될 만한 일도 많을겁니다.”
상관장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조선 왕이 머스킷 한 정에 얼마를 준다 했었지?”
“머스킷 한 정에 동아시아 은자 두 냥을 제시했었습니다.
“콕싱야는?”
“콕싱야는 한 정에 은자 여섯 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상관장은 더더욱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주문 받은 게 총 만 오천 정이니 벌어들일 수 있는 은자는 최대 구만 냥이군.”
“그리고 또 있습니다 상관장님. 콕싱야는 총이든 포든 무제한으로 공급을 받겠다 하였습니다.”
“무제한으로? 아니 그만한 은이나 금은 있다던가?”
“그것은 아닌듯 싶고.. 대신 그 담보로 자칭 대명 황제 영력제라 칭하는 자의 친필 및 옥새가 찍힌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무역 독점권을 준다고 약속한 문서를 제시했습니다.”
“청 황제가 아니라 명 황제라고? 저 땅에는 황제가 둘인가?”
“완전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누가 진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냐를 두고 둘이 싸우는 거라 이해하시는게 빠를겁니다.”
“그렇단 말이지···확률은 반반인가.”
“상관장님 제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닌 걸 알지만 누가봐도 기회는 조선이 아니라 저 대륙, 정확히는 명나라에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일단 비싸게 총을 사겠다 했으니 총이며 포며 화약까지 비싸게 팔아먹을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서기관 그렇다면 자네는···”
“네 그렇습니다. 조선으로 향할 머스킷을 모두 저 대륙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아니 서기관 그러면 조선에다가 뭐라도 변명 해야 하는게 아닌가?”
“상관장님. 알다시피 이 주변에 해적이 조금 많습니까? 저들이 진상을 파악하러 올 수도 없을 뿐더러 온다 하여도 이미 총은 명나라에 있는 상태 것이니 결국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기관 생각해 보게 이미 조선과 우리는 많은 신뢰가 생겼네. 혹시나 저들이 일을 알고 우리와 무역을 끝내겠다 하면 어떡하겠나?”
“상관장님. 그건 우리가 걱정할 게 아닙니다. 나가사키의 멍청한 부르흐 상관장이 속아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도 공평하고 서로의 권리가 보호 받는 자유 무역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초석 1 마운드*(37kg) 에 1 루피*라니 (*은 12g, 동아시아 은 1/3냥)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벌써 초석 가격이 여섯배 이상 올랐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조선과 3년 전에 맺은 50년짜리 고정가격 독점 공급 계약 때문에 발목이 붙잡혀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조선에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우리의 권리 아닙니까?”
서기관은 답답한 나머지 얼굴이 벌개지고 목청이 터질것 처럼 외쳤다. 상관장이라고 이를 모를까. 3년전 맺은 그 빌어먹을 계약만 아니었어도 초석을 수출하며 꽤나 쏠쏠히 재미를 보았을텐데.
“듣고 보니 서기관 자네 말이 맞는 듯 하네. 그렇다면 조선 상관장 벨테브레에게 보낼 편지를 써야겠군.”
“예. 상관장님 하지만 총을 하나도 보내지 않으면 의심을 살 거란 이야기엔 충분히 동의합니다. 적당히 총을 골라 일천 정만 조선으로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훌륭하군. 그러면 누굴 보내야 할까?”
“스페르버르호와 헨드릭 하멜을 보내면 될 것입니다.”
“아 그 친구가 있었군. 얼마 전에 나가사키 상관의 다녀왔지.”
“예 그렇습니다. 그 친구도 조선에 한번쯤은 가 보고 싶었다 했으니 잘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준비시키게.”
그때, 서기관이 좋은 생각이 난듯 말했다.
“아참, 상관장님 아까 그 후추 말입니다. 콕싱야에게 총을 넘기는 댓가로 후추도 같이 묶어서 넘기면 어떻겠습니까?”
“후추를 콕싱야한테?”
“말 그대로 입니다 상관장님. 총을 파는 댓가로 후추까지 묶어서 파는 것입니다. 저들이 제시한 은자는 은자대로 받고요.”
그러자 상관장이 별안간 폭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자네 정말 천재로군!”
“그렇게 하면 총으로도 은을 확보 할 수 있고 후추를 팔아치우면 작년에 발생한 손실을 모두 메꾸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순순히 후추를 사겠는가?”
“머스킷 한 정에 무려 은 6냥입니다! 콕싱야가 지금 얼마나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하군. 좋아 그렇게 추진 해 보세! 자네도 이번에 상관 하나는 맡아야지 언제까지 서기관만 할거야?”
“감사합니다 상관장님!”
그렇게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 바타비아 상관에서는 조선 상관에서 요청한 머스킷 15,000 정을 정성공에게 팔기로 결정하고 후추까지 사실상 강매하게 되어 쏠쏠한 이득을 챙겼다.
의외로 이 거래 내용을 알게 된 정성공은 크게 웃으면서 좋아했는데 3년전 만났던 조선 국왕의 호위대장 유혁연이 어떻게하면 죄인으로부터 정보를 잘 얻어낼 수 있는지 직접 후추가 들어간 설렁탕을 끓여주며 직접 알려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성공이 청나라 병사 스물을 붙잡아 후추를 잔뜩 넣어 만든 설렁탕을 코에 들이부으니 청나라 병사들 모두가 겁에 질려 자기들이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방법으로 번번히 당하자 순치제는 고작 후추 한 알 때문에 기강이 흐트러졌다며 병부상서를 크게 질책할 뿐이었다.
***
한편, 영국 동인도회사의 마드라스 상관장이자 포트 세인트 조지의 총독 아론 베이커는 토머스 그린힐이 내미는 보고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보게 토머스. 작년은 정말 힘든 한해었네. 저 콧대높은 무굴제국 놈들도 그렇고 네덜란드 놈들도 그렇고 정말이지 인도가 정말 황금의 땅이긴 한 건가 싶네.”
“각하. 그래도 이 땅에서 나는 물산을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세인트 조지 요새도 만든 것이구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벌써 본국에서는 초조해 한단 말이지. 이대로 오년을 질질 끌게 된다면 우리 회사는 파산 할 지도 몰라.”
하며 베이컨은 보고서를 천천히 들어올리려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대체 저 네덜란드 놈들하고 경쟁해서 얻는 게 뭔가. 후추가 돈이 될까 싶어 뛰어들었는데 오히려 돈만 잡아 먹는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네. 이러다 정말 첫 번째 항해 사건*이 반복되는게 아닐까 두렵네.” (* 영국 동인도회사의 첫 번째 상업 무역 항해 결과 당시 투자자들은 모두 돈 대신 후추 현물을 받고 청산 되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은 시간과 재고에 따라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니 일단 확보하는 대로 본국으로 모두 보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네만 참 어려운 부분이야. 아니면 이걸 다른 곳에 판다던가.”
“청나라는 어떻습니까?”
“청나라? 네덜란드 놈들이 청나라에 후추를 팔자고 이미 시도했다가 퇴짜를 맞은 곳이 아닌가?”
“이번에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 네덜란드 놈들이 선수친 것이 참으로 분하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어찌됐든 돈 벌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토머스, 자세히 말해보게.”
“네덜란드 놈들이 공공연히 청나라가 조선을 칠 거라고 합니다. 빅토리 호 선원들이 들은 이야기인데 바타비아 일대에선 이미 이 소문이 사실로 받아 들여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선 왕도 청나라 황제도 모두 다 에우로파의 총과 포를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가? 총은 몰라도 포 하면 역시 잉글랜드 것이 최고지. 그런데 그 말이 믿을만 한건가?”
“네덜란드 놈들은 벌써 머스킷을 긁어모으고 있더군요. 저 놈들은 절대 돈 안될 일을 하진 않습니다.”
“그렇지.. 분명 그렇지..”
“미확인 보고서이긴 하지만, 최근 청나라가 화약이나 초석, 총과 대포라면 가리지 않고 대량으로 사들인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자 베이커의 머릿속을 무언가 빠르게 치고가는게 있었다.
“그 화약, 그 초석. 우리도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맞습니다 각하. 네덜란드 놈들보다는 다소 비싸지만..”
“어쩌면, 후추 무역으로 입은 손해를 메꿀지도 모르겠군.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 한다면 초석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할거야. 거기에 컬버린과 구형 매치락 머스킷도, 갑옷들도 팔 수 있겠지.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팔아 치워야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아론 베이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순치제는 저기 저 먼 잉글랜드에서 왔다는, 생글생글 웃으며 넙죽 절하는 상인들이 가져온 총과 대포, 갑옷들을 바라보며 크게 흡족해 하며 이들에게 많은 은자와 비단을 내렸으니, 영국 동인도 회사는 새로 얻은 물주에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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