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5)
“···대체 전하께서 지난날 얼마나 고초를 겪으셨는지 감히 가늠조차 되질 않네.”
영의정 김육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공조판서 신속도 복잡한 얼굴로 술잔만 매만졌다.
“아무래도 병자년.. 그때의 참상이 아직 잊혀지지 않으신 듯 합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김육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진정 무인지대라는 것을 군령으로 내리신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강화에서야 청적이 워낙 저지른 죄가 많아 모두 참살하라 하였지만..”
“그렇다면 그 무인지대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의중을 여쭈어 보아야겠군.”
“면목 없습니다 대감.”
“아닐세. 아니야. 그저 나랏일이라는게 그런거 아니겠는가.
하며 김육은 이완과 신속에게 위로주 아닌 위로주를 한 잔 씩 따라주었다.
이튿날 새벽, 영섭은 여전히 꿈을 꾸며 괴로워 하고 있었다. 이번엔 쏘련 총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청나라 군사의 모습이었다.
다행히 그를 칼로 베어 넘기니 사방이 청 나라 적군이요, 장수들은 고함치며 자신을 잡으려는 명을 내리고 있었다.
그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 날 강화도에서 그가 쏘아 넘긴 어린 졸병 그리고 지난 날 월남에서 사로잡았던 아이의 모습이 섞여있었다.
“허억! 헉..!”
“전하··· 서역승을 불러다 드립니까..?”
중전 장씨가 어의 대신 까바렐로 신부를 궁으로 부를까 영섭에게 물었다. 이제는 영섭의 외상 후 스트레스에도 침착히 잘 대응하게 될 정도니 영섭은 그저 중전 장씨가 고맙기만 했다.
아닌게 아니라 지난날 영섭이 이런 외상 후 스트레스에 고통받았을 때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성당과 천주님이었다.
그저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 마음 속에 남아있던 복잡하고도 풀기 어려운 여러 충동적인 감정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성당 안에는 그 누구도 총알 한 발도 쏠 수 없었다. 정글 어디서나, 들판 어디서나 총탄을 맞거나 폭탄을 뒤집어써야했던 그 시절과는 영원히 분리되는 것 같았다.
영섭은 까바렐로 신부에 이어 아담 샬 신부마저 조선에 왔던 날 이후로 때떄로 그들을 불러다 고해성사를 했으니 조금씩이나마 스스로를 견뎌내는 중이었지만,
강화도 원정을 다녀온 이후 악몽을 꾸는 횟수는 많아지고, 꿈 내용도 점점 지난 생에서 이뤄낸 것과 지금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데 뒤죽박죽 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주일에는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영섭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불안한 기억으로 다시금 잠을 청했다.
***
이튿날 상참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에 앉아있던 까치가 세 번 울었다.
“오늘은 왠지 반가운 손님들이 올 모양이지.”
“반가운 손님이라 하심은..?”
“아닐세 상선. 마저 가세나.”
하며 영섭은 까치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관두고는 편전으로 향했다.
회의가 얼마가 진행되었을까. 별안간 밖에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중신들은 혹 무언가 괴변이 터진것은 아닌지 웅성거렸다.
“전하! 의주성에서 온 급보이옵니다! 청나라 황제의 사신이라 주장하는 자가 백기를 들고 전하를 알현하기를 청한다 하옵니다!”
“청나라에서!”
이완이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듯 격렬하게 반응했다. 다른 중신들도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형형한 눈빛을 쏘아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더운 콧김을 내뿜는 자가 있었다.
누가 뭐래든 전시에, 아국이 적국을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적국이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기 보다는 분노와 짜증 그리고 구타를 유발하는 일이다.
보통은 항복이나 패배를 선언하는 대신, 배짱을 부려 겁박하려 들거나 말도 안되는 요구조건을 들어 강화를 종용하기 때문이었는데,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오늘 하루 종일 싸울 수 있다며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모한 자의 모습 그 자체와 다를 바 없었다.
“전하! 명을 내려주시면, 즉시 수어청 척탄대대를 끌고 진군하여 청나라 사신을 폭사시키겠나이다!”
이완이 씩씩하게 외쳤다. 저 청나라 놈들 때문에 전하의 근심이 더 깊어져서는 안된다.
지난날 전하께서 그토록 괴로워 하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방책은 그저 청나라를 완전히 짓밟아 이기는 길임을.
하지만 영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는 그를 제지했다.
“병판은 자중토록 하고 너는 마저 고하거라. 진정 청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이 맞느냐?”
“예! 스스로를 태사 범문정이라고 하는데, 우선 서로간에 싸움을 멈추자 합니다. 이에 의주부윤 홍처후가 일단 군사를 보내어 대치하고 있다 하옵니다.”
“싸움을 멈추자라. 의주 부윤이 잘 하고 있구나. 성급히 그들을 들일 필요는 없지.”
“전하. 이는 청나라의 책략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화평을 이야기 하고 뒤로는 싸움을 준비하는···”
“화전양면전술 말이냐.”
“예?···”
영섭은 그런 거라면 시도 때도 없이 겪어보았던 터라 별 감흥조차 생기지 않았다. 지난날 북한 놈들이 한두번 그래왔던가? 겉으로는 평화를 속으로는 전쟁을.
청나라가 강화도 공격에 실패하고, 사실상 전 병력이 전멸했음에도 재차 의주성 쪽으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이유야 뻔했다. 병력이 없기 때문이다.
“놈들이 급한 모양이로구나. 의주성을 들이치지 않고 사신을 보낸 것을 보면···”
영섭이 용상을 손가락으로 딱딱 거리며 고민에 빠지자 김육이 영섭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신은 군사에 어두워 전하께서 하교하신 바를 이해하지 못했사옵니다.”
“단순한 이치다. 강화도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의주성을 통해 육로로 진군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아니함은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가 없거나 다른 곳의 전황이 좋지 못해 군사를 빼올 수 없거나.”
“과연 그렇사옵니다! 허면 사신이 온 것도..”
“아마 다른 곳의 전황을 뒤집기 위해 거짓 화평으로 우리 눈을 속이려는 셈이겠지. 흔하디 흔한 일이다.”
타이시 범문정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장 자금성으로 말을 돌려 도망갔다가 어떻게든 군사를 모아와 의주성을 공격했겠지만,
그는 조선왕 이호가 그저 어릴 적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와 청나라를 무서워 하던 이였다는 것만 간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그가 상대하는 조선왕 이호는 북한의 화전양면 전술과 베트콩의 작전이라면 이미 당할대로 당해본 박영섭이라는 인간이 똬리를 틀고 있었으니,
이를 꿈에도 모르고 있던 범문정은 이미 순치제의 의중이 낱낱이 해부당해 강의 재료로 쓰이고 있단걸 모른 채 의주성 밖에서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파발꾼이 장계를 승지에게 건네자, 승지가 영섭에게 장계를 건네려는 그 때, 다른 파발꾼 하나가 편전 밖에서 급히 영섭을 찾았다.
“전하! 전하! 제주목에서 급히 장계를 가져왔나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이라 칭하는 정성공이라는 자가 명 황제 영력제의 국서를 갖고 전하를 알현하기를 청한다 하옵니다!”
“명나라 라고 하였느냐?”
“예! 이번에 남경을 수복하여 진실로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 기초가 되었으니 어찌 으뜸가는 신하에게 이를 알리지 않겠느냐며···”
그러자 우의정 원두표가 흥분하여 외쳤다.
“전하! 드디어 가짜 상국을 버리고 진짜 상국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지난날 임진년에 하사받은 재조지은을 갚지 않겠사옵니까?”
“진짜 상국, 재조지은이라 하였느냐?”
“예 전하. 실로 천하의 기운이 다시금 명나라에 향하고 있으니, 지난 숭정 이후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라··· 허허.”
“저 청나라는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못 되옵니다. 어찌 칼로서 윽박질러 여러 나라를 굽힌다 한들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겠사옵니까?
덕과 이상 그리고 교화 없이는 그저 오랑캐요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일 뿐이옵니다.”
원두표의 말에 영섭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만 대꾸할 뿐.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조판서 신속도 우의정을 거들었다.
“전하. 비록 지난 병자년 이후 명과의 사대가 끊어졌다 하오나, 이는 청의 강압에 의해 그런 것이지 우리 스스로 진심에 우러나와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우리 조선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법이며 법률이 명나라의 것을 본따 하였으니 관습을 따진다면 이번 일은 헤어진 부모를 만난 것이나 다름 없기에 사대는 유효함을..”
“지랄들을 하는군.”
영섭이 내뱉은 말에 편전은 순간 얼어붙는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삼정승 이하 중신들과 열심히 붓을 놀리던 사관도 그저 뜨억한 채 영섭을 바라보았다.
“저..전하?”
“우의정, 공조판서. 내 질문 하나 던지겠다. 그대들이 지금 전쟁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언가?”
영섭의 불호령같은 말에, 원두표가 주뼛거리며 답했다.
“처..청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옵니다.”
“공조판서는?”
“청나라에 의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백성.. 아니 국민들을 지켜내기 위함이옵니다.”
“다시 묻겠다. 청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명나라와 사대를 다시 하자는 것인지. 청나라에 의해 잘못된 것을 명나라의 법식으로 하여 바로잡겠다는 것인지.”
“그.. 그것이”
원두표와 신속이 우물쭈물해하자 영섭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지금 이야기 해 봐야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중신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 없자, 김육이 이런 상황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노련하게 받아내어 영섭에게 고했다.
“전하. 우선은 ‘두 나라’ 에서 사절이 오는 것이니 만큼 옛 법도를 따라 칙사를 대접하는 예법으로 이를 맞이하는 것이 옳겠사옵니다.”
영섭은 김육이 ‘두 나라’ 를 말할 때 힘을 준 것에 담긴 의미가 무얼까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정의 말이 옳다. ‘두 나라’ 를 맞이해야 함에 소홀함이 있어선 안된다.
청나라가 상국이라고는 하나 이미 우리 조선과 청나라는 전쟁중이기에 상국으로 대우는 차마 하지 못하며,
명나라와는 지난 병자년 이후에 명에서 선대왕께 하사한 옥새를 청나라에 바쳤으니 그들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폭언이었다.
청나라와 명나라 둘 다 조선의 상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영섭의 말에 중신들은 화들짝 놀랐다.
청나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명나라까지? 아닌게 아니라 지난날 정성공이 영력제 주유량의 달력을 들고 왔을 때는 외교 관계를 맺은거라 하지 않았었던가?
“비록 정성공이 영력제의 책력을 아국의 상인에게 들려 보냈다곤 하나 그로 말미암아 정성공에게 물목을 지원한 것은 그저 측은지심에 의해 한 것이니 중신들은 개의치 말라.”
궤변이었다. 어느 누가 불쌍하다고 군량과 그 귀하다는 염초를 수백톤씩이나 지원을 해주던가?
호조판서 이시방이 당장에라도 전하! 그간 후명으로 흘러들어간 쌀이며 염초가 얼마인지를 정녕 모르시옵니까! 하려는 눈빛을 쏘아대자, 김육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허면 전하. 이 두 나라의 칙사를 어디에서 영접하시겠사옵니까? 영은문에 두 나라를 몰아넣으면 다음 날 유혈이 낭자할 터인데···”
김육이 농담을 하는건지 진지하게 말을 하는건지 알 수 없을 말을 하자, 영섭은 껄껄 웃으며 답했다.
“고양군 훈련소에서 이들을 맞이 할 것이다.”
“예? 훈련소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그대는 혹시 무력시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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