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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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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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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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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0화

DUMMY

실비아는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솥 옆에 놓인 조그만 발 받침대 위에 올라가 국자를 휘휘 저었다.


“그냥 맹물인데도 저어줘야하나요?”


“감각을 한번 느껴봐요. 커다란 물을 휘젓는 감각. 국자로 물을 젓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커다랗고 묽은 반죽을 젓는다고 생각해봐요.


“죄송한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실비아는 조금 울상이 되어 계속 국자로 맹물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솥 아래의 불이 뜨겁게 타올라, 열기가 그녀의 얼굴 위로 조금씩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설명하는데는 조금 재능이 없어서. 그러니까, 사람들은 저를 천재라고 불러주더라고요.”


“그래요. 좋겠어요. 그래서, 계속 젓고 있을까요?”


“네. 그래줘요. 그러고보니, 그런 점에서는 펠릭스도 저랑 비슷하겠네요.”


국자를 젓던 실비아의 팔이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어떤 부분이요?”


“남 가르치는데 소질이 없는 부분이요.”


그리고 메를린은 무슨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사람처럼 잠시 혼자서 키득거렸다.




“자, 좋아요. 이제 그만 저어도 괜찮아요. 어때요. 뭔가 감이 잡히나요?”


솥에서 국자를 끄집어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때문에 행여 바닥에 물 얼룩이라도 생길까 싶어, 플로라는 솥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아무데나 놔 둬요. 국자에 신경쓰지 말고, 솥을 봐요. 어때요. 좀 보이나요?”


실비아는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한 투명한 물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뭐, 처음에는 다들 그렇죠. 지금이 첫 번째 재료를 넣을 때에요.”


메를린은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유리병 하나를 집어들어 뚜껑을 열었다. 퐁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건 뭐죠?”


“설탕이요. 좀 비싸죠.” 메를린은 계량 스푼으로 조심스레 설탕을 두 스푼 떠서 솥 안으로 집어넣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겠어요.”


“음료라면 모를까, 약이니까요. 그리고 곧바로 이걸 넣으세요.”


그리고 이번에 메를린은 조금 낯익은 재료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들고왔다.


“아, 이건······”


“알아보겠어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메를린은 실비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자 실비아는 불편하다는 뜻으로 기침을 크흠, 하고 고개를 살짝 뒤로 내뺐다.


“사랑초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맞아요! 눈이 좋으시네요.”


“아, 그 꽃잎으로 차를 끓이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꽤 호화로운 차를 즐기는 사람이군요. 역시,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그건, 올리버에요.”


“네에?” 메를린은 정말 의외라는듯 다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것 참. 펠릭스도 정말 재미난 채집꾼과 같이 지내는군요. 알았어요 실비아. 아무튼, 잡담을 하느라 조금 시간이 늦어버렸지만, 꽃잎을 넣어봐요. 자, 여기요.”


실비아는 유리병을 집어들고 멀뚱히 메를린을 쳐다보았다.


“어서요.”


“얼마나 넣어야 하는데요?”


“아, 감이 오는 대로 넣어요 실비아. 스스로를 믿어봐요.”


실비아는 대체 그게 무슨소리냐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의 메를린에게 그녀는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말린 사랑초 꽃잎을 꼬집었다.


“이거면 될까요?”


“내키는대로 해 봐요.”


여전히 생글거리고 웃는 메를린을 보며 실비아는 저 웃는 얼굴이 성난, 차가운, 엄격한 얼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것 같았다.




실비아는 솥 안으로 말린 사랑잎을 한 꼬집, 두 꼬집, 세 꼬집 집어넣고도 한없이 모자라 보였다. 그녀는 네 번째 사랑잎을 넣고 국자를 저으면서도, 이 많은 물에 저정도 잎사귀를 섞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넣었나요?”


“네. 아마도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유리병에 남아있는 꽃잎을 모조리 털어넣고 싶었던 실비아였지만, 손님으로서 그건 지나치네 무례한 행동처럼 느껴졌기에 그녀는 그쯤해서 멈췄다.


“재밌죠?”


실비아는 조용히 국자를 휘휘 젓다가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재료를 더 넣으면 훨씬 더 재밌어 질거에요. 보자, 잎사귀가 물과 열로 조금 펴졌죠? 이제 다음 재료를 넣을 시간이 된 것 같네요.”


메를린은 이번에는 유리병 두 개를 동시에 열어보였다. 연금술에 대해 문외한인 실비아도 그중 하나가 무엇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말린 국화네요?”


“맞아요. 그럼, 이건 뭔지 알아보시겠어요?” 또다른 유리병을 내밀며 메를린이 말했다. 병 안에는 작게 잘라 말린 나뭇가지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글쎄요. 그냥, 나무 같은데.”


“감초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이 두개도 제 마음대로 넣으면 되나요?”


“배우는게 빨라요 실비아! 아주 마음에 드는걸요. 이 기회에 제 제자로 들어오는건 어떠세요?”


“네? 아니,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메를린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실비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에요. 저는 남의 것에는 손 안 대는 사람이거든요. 그럼, 실비아. 어서 넣어봐요.”


실비아는 방금 메를린이 한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메를린이 그녀의 눈 앞으로 유리병을 들이밀어 제대로 물어볼 새도 없이 다시 조심스럽게 재료를 꼬집어 솥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뒤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솥 안에서 좋은 향기를 내며 끓는 묽은 액체를 국자로 한 방향으로 계속 젓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안 저어도 별 문제는 없어요.”


“그래요?”


“대신, 그러면 솥 윗부분과 아랫부분에서 약의 농도가 조금 달라지겠죠. 봐요. 꽃잎은 다 물 위로 둥둥 뜨고, 감초는 아래로 가라앉잖아요.”


“아, 그렇네요.” 조금 신기하다는듯 솥 안을 들여다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사실, 대단한 약을 만들 게 아니라면 이 정도는 무시해도 그만이지만요. 자, 그럼 이제 슬슬 맛을 한 번 볼까요?”


메를린은 조그마한 나무 숟가락을 가져와 솥의 내용물을 살짝 떠서 호호 분 뒤 호록 마셨다.


“어때요?”


“한번 맛 봐요.”


다른 나무 수저를 건네며 메를린이 말했다. 실비아는 메를린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았지만, 알쏭달쏭한 웃음밖에는 더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녀는 조금은 긴장하여 숟가락을 솥에 담갔다.




마침내, 생애 처음으로 연금술사들의 약을 만들어낸 실비아가, 그 약을 맛보게 되었다. 사랑초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약재와 다른 몇몇 재료를 달여 끓여낸 그 수프에서 어떤 맛이 날지, 실비아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기대와 긴장으로 손이 조금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질 즈음,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숟가락에 담긴 액체를 마셨다. 달짝지근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맛에, 목구멍으로 넘어간 뒤로는 배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몸에 기분좋고 나른한 열기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까지 감고 맛을 음미했던 그녀는 도로 눈을 뜨면서, 그런데 어디선가 먹어 본 듯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요?”


“좋은 맛이네요. 그보다, 한번 먹어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실비아는 갑자기 깜짝 놀라 말했다.


“아! 그래, 그 차였구나. 펠릭스의 가게에 처음 찾아갔을 때, 그가 끓여준 차랑 맛이 비슷하네요.”


“그래요? 조금 의외네요.”


메를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래서, 이 약은 무슨 약이에요?”


자기가 이렇게 기분좋은 약을 끓여낸 것이 신기해서, 실비아는 다시 나무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약을 떠서 입 안에 머금었다.


“사랑의 묘약이요.”


깜짝 놀라 사레가 들린 실비아는 그만 품위없이 입안에 들어있던 약을 뿜어내며 연신 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아, 괜찮아요. 아니, 뭐라고요? 사랑의······”


“네. 사랑의 묘약이에요.”


실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펠릭스!” 그녀가 소리쳤다. “어떻게, 처음 보는 처녀한테 사랑의 묘약 따위를······”


“네?”


“그러니까요!” 실비아가 메를린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어떻게, 가게에 처음 찾아오는 처녀한테 사랑의 묘약 따위를 만들어 줄 수 있죠?”


그러나 메를린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자기 말을 이해해 주지 않아 답답해진 실비아가 다시 말했다.


“사랑의 묘약을 먹으면 첫눈에 반하게 되잖아요!”


그제서야 메를린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듯, 갑자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처럼 시원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웃겨요?”


“아, 죄송해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메를린이 말했다. “낭만 소설을 읽으신다더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어요.”


“난 진지해요! 그 약 때문에, 내가 지금······”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곤 했다. 바로 지금의 실비아처럼.


“아, 실비아. 걱정 말아요. 사랑의 묘약은, 낭만 소설에 나오는 것같은 효과가 없으니까.”


“네? 정말요?”


“그럼요. 정말이에요. 그냥,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약일 뿐이에요. 사실, 차에 더 가깝죠. 그러니 당신이 그 사랑의 묘약을 마셨다고 해서 펠릭스한테 한 눈에 반하는 일은 없어요.”


“진짜에요?”


“진짜에요, 물론. 저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 않아요.” 메를린이 생긋 웃으며 말하여, 실비아도 더이상 화든 짜증이든 내기가 뭣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금 실망했죠?”


“아, 아뇨. 딱히 그런 것은 아니고······”


메를린은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가 휘젓던 국자를 대신 잡고 솥 안을 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연금술사들도 그게 사랑의 묘약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막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몸이 가볍게 붕 뜨고, 기분이 좋아지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리고 속이 편안해지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는 다들 약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낭만적인 약효는 없었어요. 그래서 약의 이름도 바꿔버렸지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긴장이완제라고.”


“그렇군요.”


실비아는 실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만적이지 않죠?”


“네? 아, 네. 조금 그렇네요.”


“그래서 저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옛날 이름이 더 좋아요.” 천천히 솥을 저으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솥 안에 담긴 약을 바라보며 메를린이 말했다. “연금술에는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연금술사들도 약사들도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요. 그게 가끔 아쉬울 때가 있어요.”


“아, 그렇군요.”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기에 실비아는 이번에도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마지막 재료만 넣으면 약이 다 되겠어요. 실비아. 한번 넣어볼래요?”


“아, 네. 고마워요 메를린.”


“고맙긴요.” 메를린은 그렇게 말하며 실비아를 향해 살짝 웃어주고는 이번에는 반짝거리는 새하얀 가루가 가득 담긴 유리병을 들고왔다.


“이게 뭐에요?”


“요정 가루요.”


“요정이 있나요?”


메를린은 다시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아니오. 나방의 한 종을 일컫는 말이에요. 등에 벌레 날개가 달린 조그마한 사람 모양의 요정은 없답니다.”


“그것도 별로 낭만적이지는 않네요.”


“그렇죠?” 가루가 담긴 병의 뚜껑을 열고 실비아에게 내밀며 메를린이 말했다. “그래서 저는 펠릭스가 좋아요. 펠릭스가 만드는 약에는 낭만이 있거든요.”


병을 집어든 실비아의 손이 잠시 어색하게 멈췄다.


“아, 네. 그, 뭐랄까······”


“실비아. 말 하기 힘들면 말 안해도 돼요. 특이하다고 생각했죠?”


“조금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실비아가 우물거렸다.


“괜찮아요. 난 그런거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그보다, 슬슬 재료를 넣어볼래요, 실비아? 너무 오래 끓였다가는 약이 아니라 국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실비아는 뒤늦게 요정가루를 조심스럽게, 귀한 음식에 향신료를 뿌리듯 몇 꼬집 정도를 집어들어 솥 안에다가 살짝살짝 흩뿌렸다. 가루가 떨어질 때마다 형형색색의 연기를 한줄기씩 피워올리는 솥을 보며, 실비아는 짧은 순간 연금술이라는 것이 어쩌면 생각보다 조금 더 낭만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를린은 완성된 약을 그럴싸한 유리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까지 닫은 다음 라벨을 붙여 실비아에게 건넸다. 방금 바른 풀 냄새가 여전히 나는 약병을 두 손으로 받아든 실비아는 라벨에 적힌 ‘사랑의 묘약’이라는 단어와 병 속의 투명한 액체를 신기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축하해요. 첫 번째 약을 만들었네요. 이제 당신도 어엿한 연금술사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네? 아니, 아니오!”


장난스럽게 말을 건 메를린은 다시 혼자 키득거렸다.


“자부심을 가져요 실비아. 적어도, 내가 보기에 펠릭스보다는 훨씬 나아요.”


“펠릭스보다요?”


“그럼요!” 메를린은 갑자기 재밌는 이야기를 떠올린 어린아이처럼 실비아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아세요? 세상에. 펠릭스가 처음 만든 약도 바로 이 사랑의 묘약이었는데, 펠릭스는 사랑초 꽃잎이 든 병을 한 손에 들고서는, 그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어서 솥 안의 물이 거의 반절 정도 증발할 때 까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어째서요?”


“어째서일것 같아요?”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혹시 몸이 갑자기 굳는 병이라도 앓고 있나요? 발작증이라든가······”


“아니, 아니에요, 실비아! 꽤 재밌는 접근이었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요.” 메를린은 다시 웃었다. 실비아는 그렇게 쉽게, 자주, 시원하게 웃는 메를린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사랑이라는게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안 잡혀서 그랬대요. 이상하죠?”


“그렇네요.” 실비아는 잠시 가만히 메를린의 말을 곱씹다가 풋, 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사람 답네요. 그사람에게는, 정말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없는걸까요?”


그러자 메를린도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펠릭스에게는 분명 사람의 마음이 있어요. 다만 조금 서툴 뿐이죠. 아무튼, 그런 펠릭스와 비교하면, 실비아. 방금 당신이 만든 약은 그야말로 걸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어요. 가장 쉬운 약이긴 하지만, 그 쉬운 약도 제대로 못 만들던 펠릭스 보다 당신이 지금 만든 약이 훨씬 좋아보여요.”


“아, 옆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갑자기 메를린은 실비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자신감을 가져요 실비아. 그 약은, 당신이 만든 약이에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메를린을 향해, 실비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병을 손에 쥐고 실비아는 메를린의 작업실에서 나왔다. 메를린이 막 솥을 씻기 시작했을 떄는 그녀도 옆에서 돕겠다고 나섰지만, 메를린은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실비아는 연금술사들의 솥에 대한 삼십분 가량의 짧은 강의를 듣고 나서 아무런 미련도, 미안한 마음도 갖지 않고 메를린의 작업실에서 나왔다.


그녀가 작업실에서 나오자 오두막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덕대기 자루에 무언가를 잔뜩 담아온 올리버와 실비아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 다녀왔어요?”


“그래. 얘랑 같이 산책갔다 왔지.” 올리버의 다리 사이로 늑대가 슬금슬금 들어와, 실비아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를 지나쳐갔다.


“대단하시네요.”


“사실, 처음에는 사냥을 하려고 했어.” 실비아의 말이 반어법인지 아닌지는 신경쓰지 않고 올리버는 자기 하고싶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녀의 숲에 있는 것들은 다 마녀의 소유니까. 함부로 짐승을 잡을 수는 없겠더라고.”


“그럼 그건 뭐에요? 돌멩이라도 주워왔나요?”


올리버가 자루를 슬쩍 열어보이자 실비아는 갈색, 흰색, 연갈색의 버섯들이 안에 잔뜩 담겨있는 것을 보았다.


“버섯정도는 괜찮겠지.”


“아마도요.”


“그래서, 약은 잘 만들었고?”


“아, 네.”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방금 받아든 약병을 살짝 내밀어 보였다. “잘 됐어요. 옆에서 계속 도와준 덕분에요.”


“친절한 연금술사군. 어디의 누구와는 달리.”


“그래요.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솥을 씻는 걸 도와주려고 했는데,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강의를 들었어요.”


“그래? 무슨 강의인데?”


그래서 실비아는 방금 자기가 들었던 삼십분 분량의 강의를, 반으로 요약하여 올리버에게 말했다.


“거 참.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연금술사의 솥은 복잡한 금속 코팅이 되어 있으니 아무렇게나 막 닦으면 안된다, 이 말이잖아.”


십오 분짜리 강의를 다 들은 올리버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렇네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그렇게 따지면 내가 쓰는 사냥용 칼도 함부로 닦으면 안 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시간짜리 강의도 너끈하게 해 내겠군.”


“그런가요?”


“그래! 활, 칼, 내가 신는 신발, 입는 옷, 모자···...어휴. 똑똑한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피곤하게 산다니까. 아무튼 여긴 부엌이 어디지 대체? 그냥 여기 놔둬도 되려나?”


자루 근처를 알짱거리는 다람쥐와 쥐, 새를 발로 슬슬 밀어 쫓아내며 올리버가 말했다.


“글쎄요.”


“뭐, 달리 방법도 없고. 일단 놔두지뭐. 그나저나 펠릭스는?”


“저도 몰라요. 숲으로 산책 간댔잖아요. 못 봤나요?”


“못 만났어. 어디로 간거야 그놈은? 대체 숲 속 어디까지 간 건지.”


“설마.” 실비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길을 잃은건 아니겠죠?”


“하하! 설마. 그 펠릭스인데. 그리고, 여긴 마녀의 숲이잖아. 펠릭스를 좋아하는 마녀가 다스리는 숲 속에서 길을 잃어봤자 그놈이 맞닥뜰릴거라고는 과자로 지은 집 정도가 끝이겠지.”


“네?”


“과자로 지은 집. 동화를 읽어본 적 없나?”


“전혀요.” 실비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답했다. “전혀 없어요. 동화를 읽은 적은.”


“그래? 그러면 이 기회에 알려주지, 귀족 가문의, 음. 실비아 아가씨. 그래, 옛날옛날에······”


불편한 나무토막 위에 앉은 실비아는, 그렇게 조금은 갑작스레 맞은편에 앉은 올리버가 뜬금없이 두런두런 해 주는 동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새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며 올리버가 해주는 동화에 귀를 기울였다.




검게 물들어가는 숲 속에서, 펠릭스는 바구니에 이런저런 재료들을 담고 있었다. 풀, 잎사귀, 뿌리와 버섯. 두꺼비 몇 마리. 그리고 그는 지금 어떤 풀 줄기 앞에서 가만히 앉아 풀 줄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더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원하는 농도만큼 짙어진 뒤에 그는 풀 줄기를 잡아 뽑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뽑힌 뿌리가 있던 자리의 흙을 발로 슬슬 메운 다음 자리를 옮겼다. 만약 멀찌감치 떨어져서 펠릭스가 하고 있는 일을 지켜본다면, 무언가 무시무시한 범죄를 일으키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펠릭스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밤이 숲 속에 완전히 내려앉자 그제서야 펠릭스는 왔던 길을 되짚으며 오두막을 찾아 숲을 헤메기 시작했다. 그는 이 어둠 속에서도 팔을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길을 헤매지도 않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달빛조차 빽빽한 나무에 가려 비치지 않는 숲 속을 얼마동안 걷던 펠릭스는, 숲 저쪽에 한 무리의 반딧불이 조그만 연녹색 구름처럼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반딧불의 구름은 느릿하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꼭, 어린아이의 괴담에 등장하는 등불을 손에 든 납치범처럼, 누군가를 어디론가 이끄는 등불처럼. 펠릭스는 웃자란 수풀을 헤치며 그 반딧불의 구름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구름 몇 발짝 뒤에서, 그는 아주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해리어.”


남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자 반딧불의 구름도 제자리에 멈췄다. 수풀을 헤치고 펠릭스가 걸어나오자, 갑자기 기름 등불의 갓을 휫 열어젖히며 펠릭스의 얼굴을 향해 해리어가 불빛을 비추었다.


“눈부셔, 해리어.”


“펠릭스.” 도로 등불의 갓을 씌우며 해리어가 말했다. “네가 왜 여기있지?”


“우연히. 그러는 너는?”


“나도 그럼 우연이라고 해 두지.”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뻑뻑한 어둠의 장벽을 뚫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갈 곳이 있지 않아?”


“그래. 그러는 너는? 숲에서 길이라도 잃었나?”


“아니, 나는 길을 잃은 적이 없거든. 너랑 달리.”


“그래, 나랑 달리. 왜냐면, 네놈에게는, 도무지 인간의 마음이라는게 전혀 없으니까. 생각하고, 고뇌하고, 상념에 잠기고, 때론 사랑에 빠지고 또 때로는 고통에 몸서리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네놈에게는 전혀 없으니까.”


해리어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펠릭스는 앗차 싶어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해 해리어. 그런 뜻으로 하려던 말은 아니야.”


“펠릭스. 옛 친구로서 네게 말하건데.” 해리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조용한 숲 속에서 펠릭스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더이상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또 네가 내 눈에 띄면 그땐 무슨 짓을 벌일지 나도 모르니까.”


“미안한데, 해리어. 지금 당장은 그렇게는 못 하겠어.”


“왜지?”


다시 해리어가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대는데도 펠릭스는 개의치 않았다. 펠릭스에게, 해리어는 위험하다기 보다는 위태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나나 너나 지금 목적지가 똑같거든.”


“뭐야!” 해리어가 갓을 씌운 등불을 휘둘러 펠릭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메를린이?”


“뭐, 그런 셈이지. 그러니, 일단은 같이 가자고. 너도 혼자 적적하지 않았어?”


“싫어! 내 참. 메를린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다시 해리어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반딧불의 구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그러지마 해리어. 우리 옛날에는 친했잖아.”


“그래, 그래서 나는 더욱 네가 용서가 안 돼. 어떻게, 어떻게······”


해리어는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더이상 해리어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해리어의 뒤를 따랐다. 숲 속에는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며 흙을 밟는 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으로 사박 사박, 하고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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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화 21.10.19 29 1 23쪽
22 22화 21.10.18 27 1 30쪽
21 21화 21.10.18 32 1 20쪽
20 20화 21.10.17 30 1 26쪽
19 19화 21.10.17 29 1 24쪽
18 18화 21.10.16 30 1 24쪽
17 17화 21.10.16 29 1 24쪽
16 16화 21.10.15 31 1 25쪽
15 15화 21.10.15 32 1 19쪽
14 14화 21.10.14 31 1 22쪽
13 13화 21.10.14 29 1 31쪽
12 12화 21.10.13 35 1 27쪽
11 11화 21.10.13 36 1 31쪽
» 10화 21.10.12 37 1 22쪽
9 9화 21.10.12 33 2 13쪽
8 8화 21.10.11 38 2 28쪽
7 7화 21.10.11 43 2 19쪽
6 6화 21.10.10 47 2 22쪽
5 5화 21.10.10 55 2 24쪽
4 4화 21.10.09 74 2 34쪽
3 3화 21.10.09 101 4 18쪽
2 2화 21.10.08 234 4 29쪽
1 1화 21.10.08 775 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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