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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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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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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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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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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1화

DUMMY

아침이 찾아왔다. 살짝 열린 창문의 틈새로 새의 지저귐이 상쾌한 가을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와 펠릭스의 두 귀를 간질였다.

그는 푹신한 이불에 둘러싸여 잠깐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마침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을 비비며 창문을 활짝 여니 싱그럽고 상쾌한 초가을 내음이 물씬 풍겼다. 이슬을 머금은 촉촉한 바람을 타고, 새까만 제비 한 마리가 그의 바로 눈앞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날아갔다. 펠릭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벌써 십수년도 더 보아온 똑같은 풍경을, 마치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처음 보는 것처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한 발짝씩 밟아 내려오자 달콤한 향내가 펠릭스의 코 끝을 간질였다. 부엌으로 들어서니, 거구의 남자가 자그마한 테이블 앞에 앉아 그의 큰 손에 비해 작은 찻잔을 들고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올리버. 또 그 차에요?”


올리버는 펠릭스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어휴, 재료는 좀 아껴서 쓰라니까요.”


펠릭스는 쪼르르 찬장으로 다가가 찬장을 활짝 열며 말했다. 찬장 안은 유리병 안에 담긴 형형색색의 말린 잎사귀나 꽃, 열매 따위로 가득했다. 펠릭스는 손가락을 하나 뻗어 유리병들을 찬찬히 훑다가, 분홍 빛의 마른 꽃잎이 반쯤 담긴 유리병을 꺼내들어 올리버의 눈 앞에 들이밀며 질책하듯 말했다.


“봐요. 벌써 반 밖에 안 남았는걸.”


“사랑초는 쓰는 데도 별로 없잖아. 무슨, 낭만의 시대도 아니고. 그걸로 사랑의 묘약을 달이던 때는 지났어 벌써.”


올리버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나도. 그래도, 배앓이에 좋은 약초라고요. 내 참.”


“매실 있잖아. 배탈 환자한테는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그건, 폼이 안 살잖아요! 이래뵈도 명색이 연금술사인데!”


올리버는 다시 말없이 사랑초의 꽃잎을 달여 만든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의 몸집과 자그마한 찻잔을 비교해보면, 한 입에 다 털어넣어도 간에 기별조차 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는 꿋꿋이 차를 한 번에 한 모금씩만 홀짝였다.


“연금술사는 무슨.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그건 그래요.” 펠릭스는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른 찬장을 열어 그 안에 넣어둔 커다란 흑빵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요즘은, 약방이 워낙에 많아져서 우리 연금술사들은 벌어먹기 힘들어졌죠.”


“약방에서는 싼 값에 효과 좋은 약을 파니까.”


“하지만, 반 이상은 거짓말쟁이 약팔이들이에요!” 펠릭스가 딱딱한 빵을 칼로 서걱서걱 자르며 성을 냈다. “우리 연금술사들이랑은 다르다고요!”


“하지만, 네가 만드는 약들은 너무 비싸. 평범한 사람들은 효과가 덜해도 값싼 약을 선호한다고.”


“비싼 값을 해요. 그리고, 이것도 싼 편이라고요. 재료비만 해도 얼만데······”


“그러니 장사가 안 되는거지.”


올리버는 마침내 찻잔을 비우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네가 만드는 약을 살 돈도 없고, 돈이 있어도 네가 만드는 약을 살 이유가 없어.”


“그럴리가요. 제가 만드는 약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되면, 가게 앞에 장사진을 이룰 걸요?”


그러자 올리버는 갑자기 허탈하게 웃었다.


“죽이는 약, 살리는 약, 지우는 약 따위를, 평범한 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쓰겠어?”


“다 쓸데가 있는 법이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기는. 그러는 올리버, 당신은 며칠 전부터 채집 나가서 한다는 거라고는 토끼나 비둘기 잡아오는게 다잖아요? 그게 제대로 된 채집꾼의 일인가요?”


“그거라도 잡아온 덕분에 배 곯지는 않았잖아. 너도 맛있게 먹어놓고서는. 그리고, 네가 뭐가 필요한지 말을 해 줘야 내가 캐 오든 말든 할 것 아냐. 찬장이든 진열장이든 어디든 간에, 전에 사놓고 아직도 다 못 쓴 재료들로 꽉꽉 들어차 있는데, 내가 뭘 더 캐 오겠어?”


“아휴, 알았어요. 원.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줘요. 한참 어린 애 상대로도.”

그리고 펠릭스는 그 말을 끝으로, 빵 조각을 뜯어내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아침 식사를 끝마치자 올리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아마 활을 손질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펠릭스는 엉성한 싸리빗자루를 들고 가게 문을 활짝 연 다음, 바닥을 쓸어 간밤에 쌓인 먼지들을 가게 밖의 마당을 향해 휙휙 털어냈다. 청소는 그리 재미난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부터 펠릭스는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빗자루질을 했다.


“왜 그리 들떠있어.”


방에서 나오며 올리버가 그의 발치를 지나가는 빗자루를 잽싸게 피하며 말했다.


“아침에 제비를 봤거든요. 좋은 징조에요.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징조.”


“연금술사 씩이나 돼서 미신이나 믿고.”


“미신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요? 예를 들면, 음. 어디보자······”


“됐어. 빗자루질이나 잘 하라고. 전에 기억하지?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한창 떠들고 있었는데 왠 벌레가 튀어나와서······”


“귀뚜라미에요.”


“귀뚜라미치곤 크던데.”


펠릭스는 조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실, 말리려고 사뒀던 대왕귀뚜라미 한 마리가 우리에서 탈출한 거였죠.”


“그래, 그거. 그래서 그 손님은 기겁을 하면서 도망쳐버렸잖아. 모처럼 약을 팔 기회였는데. 그 때, 솔직히 얼마나 아까웠다고. 그러니까 청소 잘 좀 해봐.”


“귀뚜라미가 탈출한건 청소랑은 상관없어요!”


그러나 올리버는 펠릭스의 말을 마저 듣지도 않고 부엌 뒷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가 버렸다.




한창 콧노래를 하며 빗자루질을 하던 펠릭스는 마침내 만족스러울 만큼 바닥을 쓸었다. 청소를 마친 그는 마당으로 나와 햇볕을 쬐어 기분좋은 신음을 흘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 앞을 보니, 왠 처음보는 아가씨인지 소녀인지 그 사이의 애매한 나이대의 사람이 가게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아, 어, 어서오세요?”


그 사람은 눈을 깜빡이며 펠릭스와 펠릭스의 머리 위에 붙어있는 간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아! 맞아요. 여긴 연금술 가게에요. 온갖 약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혹시, 찾으시는 약이 있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할듯 말듯 주저했다.


“남 듣기에 부끄러운 약인가요?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러니까, 조금 비밀스러운 약을 찾으시나요?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하실래요?”


그러자 그 사람은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가게의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펠릭스는 모처럼 손님을 받아 아주 마음이 들떠있었다. 그는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 올리버가 차를 마시고 남은 끓인 물을 이용해서 차를 내리려다가 멈칫했다. 무슨 차를 내려주는게 좋을지 손님의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손님의 겉모습만 보고도 손님이 좋아할 만 한 차를 내어오는 것은 펠릭스의 특기였지만, 저렇게 로브로 온 몸을 꽁꽁 싸맨 사람에게는 그런 재주도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부엌에서 머뭇거리던 펠릭스는 말린 사랑초의 꽃잎이 반쯤 담긴 유리병을 열어 꽃잎 몇 장을 잔 위에 얹었다.




찻잔을 가져오자 말린 사랑초의 분홍빛 잎사귀가 하트모양으로 피어나 달콤한 향기를 솔솔 피워올렸다.


“여기요.”


펠릭스는 카운터 앞에 의자를 끌어 놓고, 카운터 위에 잔을 놓고 반대편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떤 약을 찾으세요?”


그 사람은 머뭇거리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펠릭스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그건 일종의 징조였다. 차를 마시고 얼굴 표정이 밝아진 사람들은 별다른 유난을 떨지도 않고 약을 사가곤 했다. 그래서 펠릭스는 손님에게 차를 내 놓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두눈 똑똑히 봐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를 마시지는 않고 잠시 두 손으로 잔을 들고 있다가 도로 조용히 내려놓았다.


“저기, 연금술 가게는 어떤 약이든 만들어 준다고 들었어요.”


“아, 물론이에요! 특히, 나처럼 재주가 좋은 연금술사는 그야말로 못 만드는 약이 없다고 보시면 돼요. 어떤 약을 찾으시나요?”


잔을 입에 가져다 대지도 않자, 살짝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펠릭스가 말했다.


“저, 그러니까. 조금 특이한 약도 만들 수 있나요? 약방에서는 그런 약은 못 만든다고 해서······”


약방에서 이미 거절당했다는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오히려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물론이죠. 저는 약방에서 만드는 모든 약은 물론, 그 이상의 것들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자, 말 해 봐요. 어떤 약을 찾으시죠? 살 빼는약, 살 찌는약,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드는 추억의 비약, 부끄러운 기억을 잊고 싶을 때 마시는 망각의 약이나, 먼지가 쌓여 더러운 집 안을 한 순간에 깨끗해 보이도록 만드는 집요정의 가루약, 심지어는 낭만적인 사랑의 묘약까지······”


“저, 죽음의 약으로, 부탁드립니다.”


신나서 떠들어대던 펠릭스의 얼굴이, 그 한 마디에 그만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죽음의 약이요?”

펠릭스는 자기가 방금 들은 말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약이요. 제가 잘못 들은게 아니죠?”


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영 신통찮다는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현관으로 나가 가게의 열림 표지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제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 거죠. 죽음의 약을 찾으시는게 맞나요?”


“네. 맞게 잘 들으셨어요.”


“좋아요. 그럼 우선, 몇 가지 여쭤볼게요. 혹시, 살충제가 필요하신가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쥐약을 찾으시나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초제를 찾으시나요?”


다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약을 찾고 있어요.”


펠릭스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래요. 그렇단 말이죠······”


“저기, 혹시 안 되나요?”


그녀의 얼굴 위에는 이제는 긴장감, 부끄러움, 주저함 따위 보다는 오히려 짜증과 실망, 오기 같은것이 서려 있었다.


“아뇨, 물론 가능해요. 그러니까, 사람을 죽일 만큼 강한 죽음의 약이 필요하다는 거죠? 어디에 쓰실건데요?”


“그것까지 말하고 싶진 않아요.”


“아니, 죄송하지만 알려주셔야 해요. 제가 만든 약이 살인사건에 쓰였다가는 우리 가게가 망하는건 물론이고 저까지 감옥에 갈 지도 모르거든요. 저는 호기심은 많지만 굳이 감옥 안까지 궁금하지는 않아서요.”


그녀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먹을 거에요.”


“네?”


“제가 먹을 거라고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래요, 내가 먹을 거라고요.”


“어째서요? 당신은 아직 젊고, 살아갈 날도 많고, 입은 옷도 좋은 옷감으로 마감도 잘 된 고급품 같은데, 목소리나 행동거지도 기품이 있고. 그런 당신이······”


“난 죽고싶어요!” 마침내, 그녀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난 죽고싶어요, 죽을 거에요!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요! 내 인생은 끔찍해요. 나는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살아간다는건, 죽음보다 끔찍해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당장 죽어버리는편이 훨씬 낫다고요. 알아요? 당신이, 내 삶에 대해 뭘 안다고 아는체에요? 난 죽을 거예요. 누가 뭐라든 상관없어요. 벌써 그러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결심을 굳혔어요. 그러니, 당신은 내게 약을 만들어 줄지 말지나 대답해요!”


그 많은 말을 순식간에 쏟아낸 그녀는 순식간에 늙어버린듯, 지친 표정으로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던, 이제는 조금 식어버린 사랑초 차를 조금 마셨다.


“알았어요. 뭐, 맞는 말이네요. 손님의 속사정을 제가 알 수는 없죠.”


“그래서, 약을 만들어 줄 건가요?”


“그게, 저. 사실······”


그러자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휙 돌려버렸다.


“당신도 결국 약방의 위선자들과 똑같군요.”


“아니, 아니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요. 재료가 없어서 못 만드는 거지, 나는 그런 약 얼마든지 만들수 있다고요!”


현관까지 반쯤 걸어간 그녀는, 펠릭스의 말을 듣고 다시 몸을 돌려 카운터로 돌아왔다.


“뭐라고요?”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가 몇 개 부족해요.”


“연금술 가게라면서요? 그리고, 가게 밖에다가 무슨 약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 써 붙여 뒀잖아요.”


“아, 맞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재료가 없는 약은 만들 수 없어요. 조금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가게도 장사가 그리 잘 되는건 아니라서요. 그렇다 보니 희귀한 재료는 아무래도 무턱대고 쌓아두기에는 돈이 아까워서, 의뢰가 들어오면 주문을 넣어 그때그때 조금씩 받아와야 해요.”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옷자락 속에서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펠릭스가 머뭇거리며 주머니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는 손수 주머니의 끈을 풀어 다시 카운터 위에 주머니를 힘껏 내리쳤다. 짤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은화와 금화들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이정도면 충분하죠?”


“이 정도면, 돈 걱정은 없겠네요. 하지만······”


“하지만?”


또 뭔가 남은것이 있냐고 그녀는 질책하는 듯한 눈으로 펠릭스를 쳐다봤다.


“돈으로 못 구하는 것도 있어요.”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와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아니에요! 계절이 안 맞아서 못 구하는 재료가 있다고요. 그건 억만금을 가져와도 지금은 못 구해요.”


“사람 죽이는 약따위를 만드는데 그렇게 비싼 재료가 필요하다고요? 당신, 지금 내가 만만해 보여서 이 기회에 한탕 잡으려고 작정한거지?”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펠릭스는 당황해서라기 보다는, 정말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슬픈 듯한 투로 말했다.


“나를 그런 사기꾼과 똑같이 보지 말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손님. 당신은 분명 어떤, 아주 특수한 효능의 약을 찾고 있는게 아닌가요? 그냥 목숨을 끊고 싶다면 길바닥에 널린 쥐약을 집어먹기만 해도 된다고요. 아니면 밧줄이나, 더 쉬운 방법도 있죠.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약방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이 행복의 연금술 가게까지 찾아왔어요. 그건, 당신이 적어도 아무렇게나 길바닥의 널린 시체처럼 되고싶지는 않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펠릭스의 말을 들은 손님은 조금 주춤거렸다.


“그래요. 한번 말 해 봐요. 어떤 죽음의 약을 원하죠? 내게 말해줘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약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약을 만드는게 내 직업적 사명이자, 나의 자존심이고, 또 나의 자부심이에요. 그러니까 어디 한번 말 해 봐요.”


손님은 다시 머뭇거리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고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약을 원해요.”


“그래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원하는 그 약이군요. 그렇다면, 아주 잘 찾아왔어요. 그런 약은 아무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만들어 주실 건가요?”


“아까 말 했잖아요. 재료가 없어요. 적어도 한 반 년 정도는 기다려야 되겠는걸요.”


그러자 카운터를 손으로 내리치며 그녀가 소리쳤다.


“나는 그렇게 오래는 기다릴 수 없어요! 나는, 당장 오늘 밤에라도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재료가 없으면 제대로 된 약을 만들 수 없어요. 손님이 찾는, 바로 그 약을,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 주는 것이 내 자부심이에요.”


손님이 고집을 부렸지만 펠릭스도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나는 당장, 바로 지금 그 약을 원해요. 재료가 부족하다고요? 그래도 그 비슷한 무언가라도 만들 수 있지 않아요? 당신은 연금술사라면서요. 연금술사들은 온갖 재료로 온갖 약을 만들잖아요. 설마, 그 죽음의 약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기 힘든 약은 아닐것 아녜요?”


“재료가 부족하면 약효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요.”


“상관없어요.”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그녀는 이제서야 조금 진정을 찾았다.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어차피 죽기로 각오한 몸이에요. 무슨 부작용이 일어나든 간에, 나랑은 상관없어요.”


“그런가요?”


펠릭스가 묻자, 그녀는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죽는 마당에 죽기보다 더하겠어요?”


“그래요. 그렇다는 거죠. 좋아요. 저는 약에 대해 충분히 설명 해 드렸어요. 죽음의 약이고,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요.”


“그래요. 좋아요. 그럼 이제 약을 만들어 주실 건가요?”


펠릭스는 카운터 아래에서 재고 목록을 꺼내 펼쳐들어, 이리저리 페이지를 넘겨본 뒤에 대답했다.


“따라오세요. 만들어 드리지요.”


그리고 펠릭스는 부엌 옆에 붙어있는 연금술사의 작업장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손님은, 이제는 조금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연금술사의 작업실은 부엌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몇 군데는 부엌과 아주 달랐다. 부엌에는 솥이 벽 가까이에 있어 바로 굴뚝과 붙어 있었지만, 이곳 연금술사의 작업실에는 굴뚝도 없었고, 솥이 방 한 가운데에 신성하게 모셔져 있다는 부분이 달랐다.

그외에는 부엌과 비슷했다. 조리대 대신에 작업대가, 재료를 손질하는 구석도 있었고, 찬장과 진열장 안에는 수많은 정체불명의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솥 위에 연결된 길고 복잡하게 꼬여있는 유리관을 보면, 역시 이곳은 절대 부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펠릭스는 곧장 물 양동이를 떠 온 다음 솥에 계속해서 부어넣기 시작했다. 한 양동이. 두 양동이. 세 양동이. 네 양동이째 부어넣었을 때, 손님이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뭘 하는거죠?”


“약을 만들어야죠.”


양동이의 물을 다 부어, 다시 물을 뜨러가는길에 펠릭스가 대답했다.


“너무 많이 물을 넣는 것 같은데요.”


“이정도는 필요해요.”


다시 길어온 물을 펠릭스가 솥 안에 쏟아부었다. 비가 올 때처럼,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양동이 안에서 솥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손님은 마음 한 켠이 조금 불안해 진 듯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약을 얼마나 만들려고 물을 그렇게 부어넣어요?”


“단 한 병이요.”


“한 병이요? 그럼, 아무리 그래도······”


“이따 보면 알게 될 거에요.” 펠릭스는 다시 양동이에 물을 길어와 솥 안에 들이부었다. 이윽고, 솥이 거의 가득 차서 찰랑거릴 정도가 되고 나서야 그는 마른 장작을 솥 아래에 쌓고 불을 지펴 그 커다랗고 검은 솥을 천천히 끓이기 시작했다.




드르륵 탕. 펠릭스는 찬장을 열어 시커먼 무언가가 가득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내, 계량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솥 안에 쏟아부었다.


“계량하지 않나요?”


“필요 없어요. 나는 굉장히 숙련된 연금술사니까.”


덜커덩 탕. 펠릭스는 또다른 선반을 열어 이번에는 바싹 말린 거무죽죽한 판 같은 것을 두 장 집어들어 솥 안에 던져넣었다.


“뭐에요 그건?”


“쉿, 연금술사의 비밀이랍니다.”


끼익 탕. 이번에 펠릭스는 진열장의 유리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불투명한 유리 병을 꺼내들어 뚜껑을 열었다. 밀봉된 뒤로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것인지, 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상야릇한 지린내 같은 것이 살짝 났다. 이번에도 펠릭스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내용물을 솥 안에 쏟아부으며, 기다란 국자를 찾아 나머지 한 손으로 집어들고 그것으로 솥을 두어번 휘휘 저었다.


드르륵 탕. 펠릭스는 또 다른 재료를 꺼내들었다. 덜커덩 탕. 이번에는 그는 두 손에 각각 유리병을 하나씩 들고 동시에 솥 안으로 들이부었다. 동그란 눈알같이 생긴 공들과, 아직 꿈틀거리는 커다란 지렁이와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풍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솥에 빠졌다. 끼익 탕. 마른 잎과 꽃이었다. 덜커덩 탕. 뿌리를 꺼내들어 강판에 간 즙을 펠릭스는 솥 안에 부어넣었다. 덜커덩. 드르륵. 끼익.


“재료가 많이 필요하네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점점 더 알 수 없는 재료들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솥 안으로 집어넣는 펠릭스를 보며, 아까보다 명백하게 불안한 기세로 손님이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펠릭스는 수없이 많은 재료들이 담긴 유리병들을 아예 길게 한 줄로 늘어놓고 이것을 넣었다가, 저것을 넣었다가, 한 통 가득 솥 안에 쏟아 붓고 국자로 휘휘 저으며 기괴하게 웃었다.


“많이 필요하죠, 많이 필요하고 말고요! 생각해 봐요. 적어도 십 몇 년을 살아온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그의 세상을 한 순간에 부술 만 한 약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요. 하나의 세상을 박살내기 위해서 이 정도 재료밖에 필요없다면, 오히려 굉장히 값이 싸게 먹히는 편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선반과 찬장, 진열장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병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재료를 솥 안으로 집어 던지고 쏟아 부었다.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포르말린에 말린 두꺼비 같은 것들이 솥 안으로 빠져 들어가자 손님은 기겁을 했고, 마찬가지로 날개를 붕붕거리며 좁은 케이지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벌레를 손으로 덥썩 잡아들어 솥 속으로 던져넣을 때는, 그녀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았다.

끼리릭. 덜커덩. 드르륵. 끼이익. 덜커덩. 끼리릭. 드르륵. 국자는 계속해서 솥을 같은 방향으로 점점 더 빠르게 휘저어, 솥 안에는 거대하고 끔찍한 검은 소용돌이가 무거운 기포를 터트리며 끓어올랐다.


“이게 대체 뭐에요?”


“약이죠!”


펠릭스는 이번에는 반짝거리는 가루가 가득 담긴 유리병을 어디선가 가져와, 뚜껑을 열고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솥 안으로 전부 쏟아 부어버렸다. 그러자 솥 안에서 오색찬란한 구름이 넘쳐 흐르며 솥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로 끓어올랐다.


“싫어요! 그만 둬요!”


“왜요? 약이 필요하다면서요?”


또다시 알 수 없는 재료를 솥 안으로 집어 던지자, 이번에는 불길한 검은 연기가 솜사탕처럼 덩어리져 피어오르다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거품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것인 줄은 몰랐어요. 멈춰요. 그만해요. 싫어요, 이런 건.”


“이제와서?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뭣보다도 이젠 나 혼자선 멈출 수도 없다고요!”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맹렬한 기세로 국자를 저으며 펠릭스가 외쳤다. 검은 연기가 걷히고 나자 솥 안의 내용물은 붉게 끓기 시작했다. 솥 아래의 시뻘겋게 날름거리는 불꽃과, 기포를 터트리며 금방이라도 폭발할듯 끓는 기름처럼 요동치는 솥의 내용물이, 펠릭스의 얼굴을 마치 시뻘건 지옥불속에 살며 죄인을 비웃는 악마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비추었다.


“그만 둬요!”


더이상 그녀의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솥 안의 내용물이, 반죽처럼 엉겨붙으며 점점 솥 위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멈춰요!”


“틀렸어요. 너무 멀리 왔다고요.”


“멈추라니까!”


“늦었어요! 이제 나도 못 막아요. 이건, 내 손을 떠났으니까요!”


“제발, 그만 둬!”


단말마와 같은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솥의 내용물이 소리없이 폭발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회색 구름을 뿜어내 연금술사의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폭풍이 걷히고 구름이 걷히자, 손님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솥에 연결된 길다란 유리 관에 벌레처럼 달라붙다시피한 펠릭스를 발견했다.

유리관을 따라서, 투명하고 맑은 액체가 느릿하게,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액체는 미로처럼 얽힌 유리관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마침내 유리관 끝에 어느새 준비해둔 향수병보다도 작고 투명한 유리병의 안으로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져 내려갔다.


“이건······.”


“쉿!”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는 엄숙하게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똑, 똑 하고 유리병 속으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연금술사의 작업실 안은 고요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이 유리병 속으로 똑 하고 떨어져 들어가자, 펠릭스는 뚜껑을 닫고 그것을 손님에게 내밀었다.


“이게······.”


“당신이 찾던, 그 약이에요.”


펠릭스는 그제서야 탈진한 사람처럼 가까운 아무 의자에 풀썩 주저앉으며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휴! 정말 엄청났어요.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요.”


손님은 펠릭스를 무시한 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약병 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살짝 병을 흔들어보자 안의 내용물이 맑게 찰랑거렸다.


“맑고 투명하네요.”


“물론이죠. 검고 혼탁한 죽음을 생각했나요?”


손님은 병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에요. 시체 썩는 냄새나, 아니면 예배당의 향기로운 향초라도 기대했나요?”


이번에는 손님은, 위험하게도, 손등 위에 그 액체를 한 방울 똑 떨어뜨린 다음 발간 혓바닥을 살짝 내밀어 맛을 보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아요.”


“당연해요. 혹시 무슨 달콤한, 씁쓸한, 어떤 맛이든 기대했나요?”


“이게 죽음의 약인가요?”


손님이 약병의 뚜껑을 닫고 묻자,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색무취무미의 맑고 투명한 액체.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손님은 여전히 신비로운 감각에 싸여 성스러운 성물을 다루듯 약병을 보다가, 이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저기,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저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의 속사정은 궁금하지 않아요. 연금술사는, 손님이 원하는 약을 원하는 때에 만들어 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 물론.” 그녀의 말을 자르며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재료가 없을 때는 조금 예외지만요. 필요한 재료가 좀 부족했어요. 대체제를 넣었지만, 그 약이 잘 들을지 어떨지는 솔직히 저도 몰라요.”


그녀는 다시 약병을 살짝 흔들었다. 유리에 묻지도 않고 스르륵 흘러내리는 신비로운 액체를 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걸 먹으면 죽겠죠?”


“뭐,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죽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마침내 그녀는 약병을 어딘가에 집어 넣고, 펠릭스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아까 비용은 지불했잖아요.”


“이건,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거에요. 고마워서, 더이상 캐묻지도 않고 내 부탁을 들어줘서.”


“아, 이런. 솔직히 탐이 나지만, 안 돼요. 난 못 받아요. 대스승님이 알았다가는 당장에 불호령이에요. 나는 약값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받지 않기로 맹세했어요. 그러니, 이 돈은 도로 가져가요.”


펠릭스는 한사코 거절하며 그녀의 손을 도로 뒤로 밀어넣었다.


“더이상 내겐 필요없는 것인데도요.”


“뭐, 저승길에 노잣돈으로라도 쓰시든지요. 아무튼, 난 조금 지쳤어요. 그러니 이제 볼일을 다 보셨다면 돌아가시는게 어떨까요? 아니면, 다른 약도 필요하신가요? 아, 이런 계절에는 살충제랑 구충제가 꽤 필요할지도 몰라요. 어때요, 하나 만들어 드려요?”


갑자기 손님은 그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다는듯 펠릭스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뇨, 필요 없을것 같네요. 그럼, 수고해요 연금술사 선생님.”


“살펴가세요. 그리고, 저는 분명히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손님은 연금술사의 작업실에서 나갔다. 펠릭스는 손님의 배웅을 하지도 못 할 정도로 지쳐, 의자에 앉은 그대로 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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