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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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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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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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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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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5화

DUMMY

눈꺼풀 위에 가벼이 내려앉은 따스한 햇볕을 느끼고, 실비아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소파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지난 밤에 올리버가 말한 것과 달리, 실비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 천천히 일어나 두 팔을 머리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행복의 연금술가게의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실비아가 창문 앞으로 걸어와 살짝 커튼을 젖혀 창문 너머를 보자, 지난 밤 비를 흠뻑 머금어 짙은 녹색의 잎사귀를 통해 생명력을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는 나무와 숲, 풀들이 창문 밖으로 가득 보였다.



잠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실비아는, 이번에는 코 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향기를 맡고 창문에서 멀어져 부엌을 보았다.


“일어났나?”


부엌에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소식지를 펼쳐 보고있는 올리버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등이 배겼을 텐데. 잠은 잘 잤나?”


“아, 네. 덕분에요. 편히 잤어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올리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소파. 전에 열린 벼룩시장에서 중고로 내놓은걸 헐값에 사들인건데. 아가씨, 어쩌면 생각보다 평민의 삶에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아침부터 절 놀리는 거에요?”


“아니, 그냥, 보기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내가 봐온, 허풍쟁이 귀족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그러자 실비아는 표정을 풀며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부엌으로 왔다.


“오늘도 그 연금술사는 늦네요.”


“늦다니, 누굴 말하는거죠? 혹시 자기반성인가요?”


부엌 뒷문을 벌컥 열고 펠릭스가 들어오며 말했다. 벌써 외출복 차림으로 어디 다녀온 것인지, 그의 옷에는 흙과 이슬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농사라도 짓고 오는 길인가요?”


“뭐, 비슷하죠. 자, 받아요.”


펠릭스가 실비아에게 밀짚모자를 휙 집어던지자, 실비아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걸 왜요? 햇볕이라도 가리라고요?”


“그것보다 훨씬 위험한걸 막아야죠.” 펠릭스는 씩 웃으며 말하고는 부엌 창고로 들어갔다.


“뭘 하려는 건데요? 이제 재료를 구하는 여행을 출발하는것, 아닌가요?”


“맞아요. 재료를 캐러 가야죠.”


부엌에서 나온 펠릭스는 등에 커다란 자루를 매고, 손에는 기다란 나무지팡이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아니, 진짜 뭘 하려는 건데요?”


“밤을 주우려고요.”


“네?”


“밤이요. 밤 주우러 간다고요.”


“이 계절에요? 밤이 아직 영글지도 않았을텐데······”


“내가 찾는건 평범한 밤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계절에 열리는 밤나무도 있어요.”


펠릭스는 자루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조그만 배낭을 꺼내, 선반을 열어 흑빵 덩어리와 빵칼을 종이에 싸서 넣었다.


“진짜 밤 주우러 가는 거에요?”


“재료라고 했잖아요. 자, 여기.”


이번에 펠릭스는 실비아에게 나무 지팡이를 하나 휙 던졌다. 이번에도 실비아는 얼떨결에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올리버. 이게 지금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긴. 밤 주우러 가는 일이지.”


올리버는 잔을 내려놓고 읽던 소식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까지 이러기에요?”


“진정하고 어서 나갈 채비나 해.”


“아니, 진짜요?”


“그래. 진짜지 그럼 가짜로 이러겠어? 우리가 무슨 유랑광대 들도 아니고. 어서 준비해. 빨리 가서 빨리 줍고 돌아오자고.”


그리고 올리버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실비아는 여전히 분주하게 부엌을 이리저리 오가는 펠릭스를 보고, 허탈하게 한숨을 푹 쉰다음, 조용히 소파 옆에 내려두었던 커다란 배낭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펠릭스와 실비아, 올리버는 각각 머리에 챙모자, 가죽 모자, 밀짚 모자를 쓴 채로 행복의 연금술 가게를 둘러싼 밤나무 숲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이것도 꽤 정취가 있지 않아요?”


펠릭스가 허공에 대고 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다가, 마침 가까이 있는 밤나무를 탁 치며 말했다. 그러자 나무가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나무 위에 매달린 밤송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밤을 줍기는커녕 올라가서 따 와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실비아. 좋은 지적이에요. 갑자기 폭풍이라도 불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죠.”


말을 마친 펠릭스는 조용히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올리버는 한숨을 푹 쉬고는, 배낭을 내려놓고 손과 어깨, 발목을 풀더니 폴짝 나무위로 뛰어 올라 줄기를 타고 가지에 매달려 가지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빗자루질하는 듯한 소리가 났고, 곧 잎사귀와 부러진 가지에 섞여 아직 벌어지지 않은 초록색 성게같은 밤송이들이 떨어져내렸다.


“으악,피해요!”


벌써 모자에 밤송이 하나가 꽃힌 채, 뒤늦게 펠릭스는 후다닥 나무에서 떨어졌다.


“아니, 올리버! 말을 하고 털어야죠!”


“뭐라고?”


올리버는 기세좋게 계속 가지를 털어댔다. 덕분에 밤송이들이 한겨울의 눈처럼 계속 떨어져 내렸다.


“올리버! 들리면서 안 들리는척 하는거죠?”


“뭐라고? 뭐라그랬어?”


“올리버! 그만 놀려요!”




그렇게 올리버는 밤나무 하나의 밤송이를 할 수 있는데까지 다 턴 다음 나무에서 내려왔다.


“펠릭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다시 팔과 다리, 손목을 풀며 올리버가 말했다. 펠릭스는 장갑을 끼고 모자에 우스꽝스럽게 꽂힌 밤송이를 쑥 뽑아낸 다음, 주머니칼로 밤송이를 비집어 열어 알맹이를 꺼냈다.


“방법이 없어요. 그딴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줄이야.”


펠릭스가 버린 빈 밤송이를 조심스레 발로 건드리며 실비아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적율. 죽음의 약에 필요한 재료에요.”


“그런데요?”


“말 그대로 빨간 밤이라는 뜻이죠.”


“그래서요?”


“귀한 재료는 아니에요.” 펠릭스는 주머니칼로 밤알을 반 잘라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메고 온 커다란 자루에 휙 집어던졌다.” 왕국에선 잘 안나는 재료인데, 바다 건너에선 흔해빠진 재료라서 원래는 별로 비싸지도 않고 구하기도 쉬운 재료에요.”


“그리고요?”


“약의 맛을 달고 농후하게 만들죠. 농도랑 맛을 잡을 때 쓰는 재료고, 가끔 별미로 먹기도 해요. 그런데, 그 적율을 가득 싣고 오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그만······”


“세상에, 난파했나요?”


실비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화물을 모조리 바다에 버리고 무사히 돌아왔대요.”


“다행이에요.” 실비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행은무슨!” 그러나 펠릭스는 짜증스레 밤송이를 휙 집어 던지며 말했다. “덕분에, 갑자기 적율을 구할 방법이 없어져서, 나는 여기서 이렇게 하염없이 밤송이나 까게 생겼다고요!”


“나도 돕잖아.” 벌써 십수 개의 밤송이를 까발린 올리버가 옆에서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래요. 실비아. 당신도 도와요.”


“네? 저요?”


“네. 도와요. 여기, 마침 여벌 칼이 있네. 자, 칼 정돈 다룰 줄 알죠?”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펠릭스가 건넨 주머니칼을 받았다.


“아니, 장갑이 없네. 어서 장갑 껴요. 설마 장갑도 없는건 아니죠?”


“장갑은 있어요.” 그러면서 실비아는 폭신한 털실로 엮은 장갑을 꺼내들어,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그가 끼고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주었다.


“이거 써요.”


“네?”


“쓰라고요. 나는 숙련된 연금술사라 맨손으로도 괜찮아요.”


“아니, 하지만······”


“자, 마음바뀌기 전에 빨리.”


“아니, 그게아니라. 방금전까지 당신이 쓰던 장갑, 솔직히 별로 끼고 싶지 않은걸요.”


“뭐!”


펠릭스가 뭐라 화를 내기도 전에 올리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펠릭스. 오늘은 네가 졌어. 그냥 포기해. 대신 실비아, 칼 없이 밤을 까는 방법을 알려주지.”


올리버는 까던 밤송이를 잠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는 밤송이 하나를 골라 바닥에 놔둔 다음, 지팡이로 밤송이를 이리저리 누르며 발로 송이를 눌러가며 비집어 열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실비아는 올리버를 따라 지팡이를 들고 밤송이를 쿡 찔렀지만, 밤송이의 딱딱한 부분에 부딪혀 지팡이는 미끄러졌다.


“잘 안 돼요.”


몇 번 헛손질을 하다가 실비아는 겨우 밤송이 하나를 깠다.


“뭐, 그래도 그 정도면 깨나 잘 하는 편이네. 펠릭스보단 훨 낫군.”


“내가 왜요?”


“넌 발로 밤송이 못 까잖아.”


줄곧 밤을 까던 펠릭스는 고개를 휙 돌려 실비아를 보더니, 조금 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긴 하네요.”


“당신도 못하는 일이 있군요?”


실비아는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지팡이가 삐끗하여 그만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당신도 그리 능숙해 보이지는 않네요.”


“방금은 실수에요.”


“그래요. 실수 많이 해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실수하는 중에라도 밤송이도 좀 까 주고요.”


“펠릭스!”


“실비아, 펠릭스. 둘 다 장난은 그쯤 해둬. 나 혼자 벌써 반이나 깠잖아.”


근처에 빈 껍데기를 수북히 쌓아둔 올리버가 손가락을 풀며 말하자, 두 사람은 말없이 각각의 방법으로 밤을 까서 알맹이를 자루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의미가 있나요?”


어느 순간, 밤송이를 발로 짓이기며 실비아가 말했다.


“뭐가요.”


“적율은 붉은 밤이라면서요. 이것들은 다 초록색 밤송이에, 알맹이는 갈색인데요.”


“속껍질도 까봐야죠.”


“아직 하나도 깐 적 없잖아요."


“나중에 한번에 모아서 까야지, 하나 까보고 다음것 또 까보고 그러면 어느세월에 일을 끝내요? 당신, 이런 일 안 해봤죠?”


“그야, 저는 귀족이니까요.”


실비아는 당연한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어휴, 그놈의 귀족들이란. 아무튼 밤이나 계속 까요. 재수없으면, 이 숲을 통째로 털어도 적율 한 알이 안 나올지도 모르니까.”


“네? 진짜요? 세상에······”


그 말에 실비아는 그만 지팡이를 손에서 놓치고 그대로 큼직한 숲 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보다 펠릭스. 숲에서 밤 따도 되는거야?”


“샀어요.”


“사다니, 뭘?"


“이 숲, 샀다고요.” 밤송이에서 알맹이를 꺼내며 펠릭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뭐야! 무슨 돈으로?”


“죽음의약 판 돈으로요.”


“재료비 떼면 얼마 남지도 않는다면서?”


“이게 그 재료비죠.” 펠릭스는 또 다른 밤송이를 만지작 거리다가 그만 손에 바늘이 박혔다. “이런! 성난 고슴도치같으니. 이것봐요. 장갑에 바늘 박혔어요.”


“으악! 징그럽게, 뭐하는 짓이에요! 어린 애도 아니고······”


펠릭스는 기어이 실비아를 놀린 다음에야 장갑에서 바늘을 쑥 뽑아냈다.


“얼마에 샀는데.”


다시 올리버가 묻자 펠릭스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금화 아홉 닢이요.”


“아홉 닢!” 올리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제 금화 여섯 닢으로 남은 여행을 끝마쳐야된다, 이거야?”


“못할것도 없죠. 나는 무일푼으로도 잘만 여행다녔는걸.”


“그건 너 홀몸일때고. 그리고 그 때는, 아직 세상에 약사들이 별로 없어서 연금술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우대받던 시기잖아.”


“지금도 괜찮지 않겠어요?”


“어휴, 말을 말아야지 원.” 올리버는 도로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칼로 밤을 깠다. “너, 작업실에 너무 오래 혼자 있었던 것 아니야?”


“글쎄요. 혼자 오래 있는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요?”


“됐다. 말을 말아야지. 이봐 펠릭스. 이게 마지막 밤이야.”


올리버가 밤송이를 휙 던지자 펠릭스는 능숙하게 받아 들었다.


“다음 나무를 털 테니까, 뒷정리하고 따라와. 이렇게 떠들고 놀면서 했다가는 하루종일해도 모자라겠어.”


그리고 올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탈탈 턴 다음, 다시 몸을 풀며 다음 밤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대강 사방팔방 뿌려둔 밤송이를 가지런히 한데모아 쌓아둔 다음 펠릭스와 실비아는 올리버가 밤송이를 터는 것을 기다렸다.


“저기요. 아까, 그 적율이라는게, 이 숲을 다 털어도 한 알도 안 나올수 있댔잖아요.”


“네, 그래요. 왜요?”


“적율이라는게 정확히 어떤 건데요?”


“아직 거기까진 안 읽어봤나요?”


펠릭스가 의아하다는듯 묻자 실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약초랑 관련된 책을 우선 읽었거든요.”


“아, 하긴. 밤이 풀은 아니긴 하죠. 적율은, 그러니까, 빨간 밤이에요. 알맹이가 빨간 밤. 사실 밤벌레 때문에 알맹이가 빨갛게 착색된 밤을 적율이라고 불러요.”


“그냥 벌레먹은 밤이잖아요?”


“네. 바로 그거에요.”


실비아는 잠시 당황했다가, 그녀가 먹었던 죽음의 약의 재료에 벌레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는듯 혼자 헛구역질을 잠깐 했다.


“벌레먹은 밤을 약으로 써요?”


“못 쓸것도 없죠. 오히려 연금술사들 한테는 흔한 일인데. 그리고 적율 정도면 양반이죠. 말린 전갈을 그대로 집어넣고 펄펄 끓이는 약도 있어요. 거미나, 뭐 그런 것들.”


“으, 상상만해도 끔찍해요.”


“아무튼, 그 적율이라는건 특이한 밤벌레가 애벌레를 까서 만들어지는건데, 왕국에는 그 벌레가 없어요.”


“그게 뭔데요?”


“불눈나방. 그러고보니, 당신은 벌써 한 번 봤군요.”


실비아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늬가 있는 날개를 가진 나방을 떠올렸다.


“그렇긴 하네요. 근데, 그러면 당신이 지금 갖고있는 나방으로 아무 밤에나 알을 까게 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걘 수컷이에요. 약용은 수컷을 써서.”


“아.”


실비아는 아쉽다는듯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왕국에도 불눈나방이 심심찮게 보였는데, 워낙 생긴게 그래서. 당신도 그랬죠? 그리고 해충이다 뭐다 말이 많아서 약을 쳐서 싸그리 구제해버렸어요. 그리고 그 때는 적율에 들어앉은 애벌레가 불눈나방 애벌레인줄도 몰랐고.”


“어째서요?”


“밤송이 말고도 다른 데도 알을 낳거든요. 오히려 밤송이는 죄다 적율로 써버려서, 그게 무슨 벌레였는지 알 기회도 없었겠죠. 어쨌든, 그래서 적율은 바다 건너에서 죄다 수입해와야 하는 거에요. 이제 적율이 뭔지 잘 알겠죠?”


“아까보다는요. 그러니까, 우리는 저 수많은 밤송이 사이에서 벌레먹은 밤알을 찾고 있는 거네요?”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마침 나무도 다 턴것 같군요.”


막 다람쥐처럼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내려오던 올리버를 가리키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 나는 미리 다음 나무도 털 테니까, 열심히들 까라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요 올리버.”


“무리 하라고 해도 안 할거야.” 땅으로 폴짝 뛰어 착지한 올리버는 배낭에서 가죽부대를 꺼내 목을 축이고는, 다시 몸을 풀며 다음 밤나무로 걸어갔다.


“듬직하죠?”


“네?”


갑작스런 펠릭스의 물음에 실비아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저래뵈도 굉장히 성실해요 올리버는. 아주 듬직한 일꾼이죠.”


“뭐, 그렇긴 하네요.”


벌써 나무 중턱까지 오른 올리버를 보며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와 실비아는 조용히 밤 까기에 열중했지만, 올리버가 나무를 터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느덧 올리버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다만 저 멀리 숲 속에서 나무 하나가 열심히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 올리버가 지금 저기쯤에 있구나 할 뿐이었다.


“저기, 펠릭스.”


“왜요.”


계속 밤을 까던 실비아는 조금 주저하며 펠릭스에게 물었다.


“여기, 안전한가요?”


“아마도요.”


“아마도요?”


실비아는 두 손으로 지팡이를 꽉 쥐었다.


“아마도라니요.”


“모르죠 나도. 마을 근처 숲이긴 한데, 곰은 아마 없을테고. 뭐, 들개 정도나 있으려나?”


“위험하잖아요! 들개라니.”


“개를 좋아하는것 아니었나요?”


“나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만 좋아한다고요!”


“거 참. 들개가 들으면 슬퍼하겠군요. 내가 보기엔 혈통좋은 사냥개나 들개나 거기서 거기인데.”


“아무튼, 그래서 들개가 나올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위험한 숲 속에서 사냥꾼이나 호위도 없이 우리들끼리 덜렁 온거에요?”


“올리버 있잖아요.”


“어디요?”


“저기, 그러니까······”


펠릭스는 손가락으로 올리버를 가리키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지만, 그의 손가락끝은 한 군데 멈추지 못하고 잠시 허공을 방황했다.


“없잖아요.”


“그렇네요.” 펠릭스는 도로 손을 내렸다.


“들개가 나타나면 어떡해요?”


“걱정 마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무슨 방법인데요?”


“그건, 비밀이랍니다.”


“아니, 장난 칠 때가 따로 있지. 들개라고요! 잘못 물리면 위험하잖아요. 당신은 겁도 안나요?”


“별로요.”


“아니, 당신, 역시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나는 당장 올리버를-”


“쉿!”


갑자기 펠릭스는 실비아를 잡아 끌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요?”


전혀 상황 파악을 못했지만 덩달아 목소리를 죽이고 실비아가 물었다.


“뭐가 있는것 같아요.”


“네? 설마, 장난은 아니죠?”


“아닐걸요.”


그러자 실비아는 펠릭스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좀 놔요.”


“네? 아, 이런.”


“내 참. 겁도 많지.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 어떻게 죽을 생각을 다 했데?”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다르긴 뭐가 달라요. 똑같구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거기서 거기 아녜요?”


“아니, 자꾸 내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기에요?”


“알았어요. 원 참, 까칠하기는.”


“펠릭스! 당신 진짜······”


갑자기 펠릭스가 그녀의 팔을 뒤로 휙 잡아당겨, 실비아는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곧바로 무례한 펠릭스의 행동에 대해 벌컥 화를 내려 했지만, 수풀 속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들개의 아가리에 오른 발을 쑤셔넣은 펠릭스를 보고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떡해요!”


“진정하고 내 가방 열어봐요.”


눈이 붉게 충혈됐고, 입 가에서 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며 들개는 펠릭스의 오른발을 지근지근 씹기 시작했다.


“꺄악! 당신, 오른 발이...”


“아니, 가방 가져오라고요. 이봐, 실비아! 아 좀!”


뒤늦게 실비아는 펠릭스의 가방을 가져왔다. 늑대의 이빨이 더욱 깊이 살을 파고들자 펠릭스의 발 근처에서 붉은 피가 바짓단을 적시며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떡해요!”


그런데도 펠릭스는 마치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가방을 뒤적였다.


“아, 어딨지. 분명 넣어 뒀는데. 옳거니, 여기 숨어있었구나. 실비아. 두 눈 감고, 코와 입을 막고 멀리 떨어져요.”


“네?"


“시간없어요. 시키는대로 해요. 내 말 무시했다가 큰일나도 난 모릅니다.”


펠릭스는 새빨간 액체가 담긴 조그만 유리 플라스크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사이에도 들개가 다시 펠릭스에게 달려들려하자, 펠릭스는 걸레짝이 된 그의 오른발을 또다시 들개의 아가리를 향해 밀어 넣었다.


“대체, 이게 다 뭐람!”


실비아가 시킨대로 얼굴을 가리며 멀찍이 달아나자 펠릭스는 눈을 감고, 숨을 참은채 플라스크를 들개에게 던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지고, 허공에 붉은 안개가 확 퍼졌다. 안개에 닿은 들개는 곧바로 깨갱 소리를 내고 비틀거리며 수풀 속으로 달아났고, 펠릭스는 재빨리 바닥에 납작 엎드린채 바람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어기적거리며 기어갔다.


“아, 맞다. 안개라고 말을 해줬어야 하는데. 설마 바람 반대방향으로 간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다행히 펠릭스가 기어가던 방향의 나무 뒤에서 실비아가 뛰쳐나왔다. 그녀는 펠릭스의 손을 붙잡고 질질 끌어 나무 뒤까지 끌고온 뒤에야 손을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가장 먼저 펠릭스의 오른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아주 정중히,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네? 다쳤잖아요.”


“본다고 알아요? 괜히 얼쩡 거리지말고 멀리 떨어져요.”


“아니, 아주 끔찍하게 물어 뜯겼잖아요. 그리고 개가 무슨 병이라도 옮겼으면······”


“당신이 본다고 아나요?”


실비아는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져서 뒤로 슬쩍 물러섰다. 펠릭스는 살점과 거의 달라 붙어버린 바짓단을 주머니칼로 찢어 상처를 드러내보였다. 그곳에는, 정말 끔찍한 꼴이 되어버린 고깃덩이가 놓여 있었다.




“꺅!”




실비아가 바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금새 다른 이유로 휘둥그레졌다. 암만봐도 펠릭스의 오른발은 사람의 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 오른발이 이상한데요.”


“아니, 방금전까지는 꺅꺅거리면서 호들갑이더니. 그렇게 빨리 침착해져요?”


“아, 그건, 조금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 발이 이상하다고요.”


“그렇겠죠.” 펠릭스가 종아리 부근을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펠릭스의 오른쪽 무릎 아래가 다리에서 쑥 뽑혀나와, 실비아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입을 가렸다.


“아니, 뭐에요 대체?”


“의족이요.” 뽑혀나온 기다랗고 조금 어설픈 인형의 다리처럼 엉성하고 앙상한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아깝게. 이건 더이상은 못 쓰겠다. 실비아. 내 가방좀 갖다줘요. 저기, 아까 팽개쳐놓은 그대로에요.”


“네?”


“내 가방!”


“아, 알았어요.” 후다닥 달려, 바닥에 널부러진 펠릭스의 배낭을 들고 실비아가 돌아왔다. 펠릭스는 곧바로 배낭 바닥에 고이 접어두었던 또 다른 인형의 다리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쑥 집어넣고 나무 토막을 짜맞출 때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당신, 오른 다리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비용으로 썼어요.”


“비용? 무슨 비용이요?”


“약 만들때 썼어요. 그러고보니, 그 때도 꼭 오늘 같은 날이었네요.” 갑자기 펠릭스는 실없이 웃었다. “꽤 위험했죠 그 때는.”


“아니, 뭘 했길래 다리 하나를 통째로······”


“늑대의 눈물. 알아요?”


“처음 들어요.”


“그걸 뽑으려고, 늑대한테 다리를 좀 물려줬거든요.”


“네? 당신 미쳤어요?”


“미치다니, 그렇게라도 안하면 도저히 뽑아낼 방법이 없었거든요. 적어도 팔짱끼고 고상한척 앉아있던 늙은이들보단 훨씬 멀쩡하죠.”


“아니, 당신 다리잖아요! 아프잖아요. 불편하잖아요.”


“그 정도를 감수할 만한 일이었어요.” 마침내 다리를 끼운 펠릭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두 발로 서자마자 균형을 잃고 휘청여, 당장 실비아가 달려와 옆에서 그를 부축해주었다.


“아이쿠, 고마워요. 처음 일어날 때는 항상 어색해서리.”


“아니, 당신 다리 이야기나 마저 해요. 대체 무슨 일을 벌였길레 다리 하나를 뜯긴 건데요?”


“늑대의 눈물을 뽑아내려고 아가리에 쑥 밀어넣었어요. 놈도 입에 뭘 물려놓으니 아주 얌전하더군요.”


“그게 할 말이에요?”


“별 수 없었어요. 스승님이 제안한 붉은 가루 병의 재료에 늑대의 눈물이 끼어있는걸 어떡해요.”


“뭐요?”


“아, 물론, 내가 자원해서 한 일이니까 스승님을 욕하지 말아요. 내가 안했으면, 아마 지금쯤 스승님이 절름발이가 됐겠죠.”


“하지만, 붉은 가루 병은······”


“네. 약은 실패했어요. 그 덕분이랄지,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죠.”


“그러면, 당신 다리는요?”


“내 다리도 날아간거죠 뭐. 대신, 하나 알았잖아요. 붉은 가루병의 약을 만드는데 늑대의 눈물은 효과가 없다. 끝.”


“당신은 화도 안 나요? 짜증이라든가, 후회라든가, 그런 평범한 사람의 감정을 도저히 느끼지 못하나요?”


“왜 느껴야 되는데요?”


펠릭스의 물음에 실비아는 당장에라도 수도없이 많은 말을 노도처럼 쏟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수많은 단어들이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밀고 당기다 그대로 넘어지며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목구멍에 엉킨 것처럼,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만나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이상해요.”


그 상황에서 애써 기껏 쥐어짜낸 말은, 그녀가 이미 몇 번이고 되풀이한 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해요. 난 후회도 안 하고, 화도 안 나고, 짜증도 안 나요.”


실비아는 어이가 없어 이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이 뭐야. 무슨 일이야?”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그들에게 다가온 올리버를 향해, 펠릭스는 아까 뽑아든 의족을 무슨 깃발처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올리버는 경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심하다는듯 한숨을 푹 쉬며 손으로 자기 이마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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