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용제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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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또다시 영지에 발생한 일을 처리하러 성을 떠난 것은 루그가 회귀한지 2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루그는 검술훈련을 피하는 대신 백작에게 직접 궁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백작이 초빙한 선생에게 예법을 배웠다.
사실 루그는 9년간 백작가에서 살았고, 따라서 예법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배울 것이 없었다. 예법 선생은 루그가 알려주는 예법을 전부 그 자리에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궁술 역시 비슷했다. 루그의 솜씨가 아주 뛰어나진 않지만 초심자 수준의 교육에서는 딱히 얻을 것이 없었다. 그냥 뭐든지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백작에게 어울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크.'
백작이 성을 떠난 다음날, 루그는 마침내 우려하던 사태를 만나고 말았다.
주방으로 가서 음식이나 집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을 나섰는데 복도에서 마빈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빈은 루그와 별로 닮은 기색이 없었다. 머리도 좀 칙칙한 금발이었고, 눈매는 험악해서 위압감이 있었다. 청록색 눈동자만이 그나마 닮은 구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빈은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루그를 바라보았고, 루그는 그가 어떻게 나올까 반응을 살폈다.
루그가 과거와 다르게 행동한 탓에 이제 과거와는 다른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서 마빈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실제로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대충 예상이 되긴 하지만.'
예전에 겪어본 마빈은 성미가 급하고, 욱하는 기질이 있었다. 아직 열세 살의 어린 나이지만 치열한 강체술과 검술 훈련을 받아왔고, 마물들을 상대로 실전을 겪기까지 해서 손속이 잔인했다. 마빈에게 맞아서 앓아 누웠던 적이 몇 번인지 기억도 안날 정도였다.
'뭐, 여기서는 없던 일이니 그걸로 원한을 불태우는 것도 우스운 짓이지. 게다가 애잖아?'
루그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은 몸은 열다섯 살의 소년이지만 알맹이는 어른이다. 열세 살 짜리한테 발끈해서 드잡이질을 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었다.
물론 그것도 상대가 가만히 넘어가 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천한 것 주제에 멍청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다니 뭐하는 짓이지? 당장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조아릴 것이지. 지난번 가르침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군."
"……."
"잘못을 했으면 맞아야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네 주제를 가르쳐주마."
루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마빈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성큼 다가들면서 손을 뻗어서 루그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한 것이다.
'역시 빠르군.'
체격은 비슷하지만 마빈 쪽이 훨씬 단련된 몸을 가졌다. 게다가 체내에 담고 있는 강체력의 차이는 압도적으로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이 뻗어온다.
팍!
하지만 루그는 반응했다. 슬쩍 옆으로 비키면서 마빈의 손을 쳐내버렸다.
"잘못은 얼어죽을."
루그가 투덜거렸다. 아무리 애랑 드잡이질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맞아줄 수는 없지 않은가? 루그도 성깔 더럽다는 이야기를 밥먹듯이 듣고 산 몸이었다.
마빈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쳐냈어? 어떻게?"
20일 동안 강체술을 연마하고, 체력을 단련했다고 해도 마빈에 비하면 루그는 여전히 비리비리한 몸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전광석화처럼 뻗어오는 마빈의 손을 쳐냈으니 놀랄 수밖에.
그것은 루그가 맨손으로 무기를 든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맨손격투술을 극한까지 연마했던 과거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몸의 중심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고 움직임을 예측하면 반응할 수 있다.
'여러 번 통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 녀석은 검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체술은 별로다. 몸을 빼는 것 정도는 가능해.'
검을 쓰는 기사들에게 있어서 체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것을 익혀둘 뿐, 전문성이 부족했다. 아직 미숙한 마빈의 경우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루그가 말했다.
"내가 보기 싫은 마음은 이해하겠다만, 난 너랑 쓸데없이 얼굴 붉히기 싫다. 그냥 갈 길이나 가."
"건방진 놈!"
마빈이 발끈해서 달려들었다. 미리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던 루그는 훌쩍 뛰어서 뒤로 물러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마빈의 주먹을 피하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지금!'
루그는 손을 들어 마빈의 주먹을 비껴냈다.
팍!
"큭!"
하지만 밀어내는 힘이 부족해서 주먹이 볼을 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루그는 흔들리지 않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계단 난간을 잡고 거기에 몸을 올리자 둥글게 이어진 난간을 따라서 몸이 죽 미끄러져갔다.
"이 자식! 도망가는 거냐!"
"그럼 내가 거기 버티고 서서 너한테 맞아주랴?"
순식간에 아래층에 도달한 루그는 그렇게 비아냥거려주고는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마빈의 주먹에 맞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윽, 내가 쥐방울만한 놈한테 맞다니."
완벽하게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힘과 속도에서 눌려서 맞아버리다니, 이가 갈릴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해야하는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행한 21일간의 단련은 지름길을 달리듯이 빠른 성장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래도 아직 마빈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내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네놈 버릇은 고쳐주고 떠나야겠다."
어른스럽게 분쟁을 피하고 떠나려고 했지만 열세살 짜리 꼬맹이한테 한대 맞아보니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원래 루그는 남에게 맞았을 때 참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한 만큼은 갚아주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볼카르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소리를 했다.
<슬프군. 나를 죽여야 할 인간이 덜 떨어진 꼬맹이한테 맞고 질질 짜다니. 그러게 내게 마법을 배웠으면 이런 일 따위 없었을 것 아닌가.>
"닥쳐! 그리고 너한테 마법을 배우고 있었으면 아예 붙잡혀서 두들겨맞고 있었을 거다."
루그는 이를 갈며 주방으로 가서 몰래 빵과 고기 몇 점을 집어먹은 뒤 숲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훈련강도를 두 배로 높여야겠다고 결심하면서.
******
1장 끝.
요즘 바이오리듬이 헝클어진 탓인지 픽 쓰러져서 12시간 이상 잤군요. 정말로 온갖 해괴한 꿈을 꾸었습니다. 으음.
진실성 0.0013457%에 도전하는 2장 예고편.
강체술의 의미,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고한 요리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 세 개의 육질이 조화되어 하나하나의 고기를 합쳐서 조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을 낼 수 있다는 키마이라 고기를 조리해내기 위해서는 인간을 초월한 힘이 필요했다. 아직 인간의 문명이 부족한 힘을 커버하기 위한 도구를 만들어낼 정도로 발달하기 이전, 요리에 혼을 바친 장인이 있어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는 '인간의 힘이 부족하다면 인간의 힘을 초월하면 되잖아!'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강체술을 창시하고 그 힘으로 키마이라를 때려잡은 뒤 요리하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그렇게 만들어진 천년비전 키마이라 커리의 레시피를 손에 넣는 자만이 강체술의 시조가 남긴 절대케익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루그는 백작가를 내팽개치고 인도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스파이시한 매력을 가진 신비로운 소녀로 위장한 볼카르를 만나게 되니 인간과 드래곤, 그리고 그 원천인 드래곤은 미각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극의를 두고 요리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볼카르 :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이 맛은 열사의 사막에 꽃을 피우며 춤추는 붉은 옷의 소녀가 떠오르는 맛이다!
루그 : 그게 도대체 무슨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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