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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작품등록일 :
2012.09.24 12:55
최근연재일 :
2016.12.22 04:05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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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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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글자수 :
4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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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2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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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발화 (1)

DUMMY

라디오에 너무 심취했었나. 갯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던 성진은 문득 주변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모의 저녁을 챙겨야할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성진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서둘러서 짐을 꾸렸다.

“하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이를 어쩐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된 거래. 우리 어머니 이제나저제나 아들 오기만 기다리겠네.”

이미 검푸른 밀물이 밀려와 갯바위를 절반 가까이 집어삼켰다. 이대로 물에 완전히 잠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칫하다간 꼼짝없이 갇혀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놈들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

괜히 오싹해진 성진은 짐을 대충 챙겨서는 허둥지둥 갯벌로 뛰었다. 어차피 오늘은 잡은 물고기도 없었다.

성진은 숨을 고르며 조금 전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갯바위를 쳐다보았다. 그사이에 갯바위는 밀물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습게도 섬에서 태어났지만 수영에는 젬병이었다.

“후우,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도 못간 성진은 치매에 걸린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섬을 떠나지 못했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지만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다며 몇 년째 코빼기도 안 비쳤다.

서울대를 나온 큰형은 서울에서 5급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고, 둘째와 셋째형은 각각 태안과 서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몇 해 전에 부도를 맞은 둘째형은 그렇다쳐도 큰형이나 셋째형은 형편이 나쁘지 않은데도 생활비 한번 보내질 않았다. 다들 쪼들려서 그런다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형들을 원망한 적은 없다.

‘그래, 다 내 복이지. 내 복이야. 나 같은 개차반이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어.’

집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성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픽 하고 쓰게 웃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문제만 일으키던 사고뭉치 막내가 이제는 고향집을 지키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니 인생이란 참 얄궂다.

성진이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다녀온 게 5년 전이다. 그때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잘난 형들은 어머니의 간병을 서로에게 미뤘다.

형편만 되면 당장 데려가서 모셨을 거라면서도 요리조리 온갖 핑계를 대는 형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우스워졌다.

성진은 형들 앞에서 선언하듯 자기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면목이 없다며 그렇게만 해주면 생활비를 보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학교를 중퇴한 성진은 스무 해 가까이 건달로 살았다. 배운 재주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건달들뿐이었다. 결국 성진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섬에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서 성진의 어린 시절만을 기억할 뿐이지, 뭍에서 건달로 살았던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성진은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비록 풍족하진 않았지만 섬에서의 생활이 나쁘진 않았다.

가끔 이렇게 고기를 잡아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여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남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린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는 일도 험난했던 건달 생활에 비하면 그리 고달픈 것도 아니었다.

“어이, 성진이. 낚시를 다녀오는 겨?” “그래, 뭐가 좀 잡혔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창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쪽을 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낮부터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멜빵이 달린 청바지에 장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양식장에서 오는 길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창수의 양식장은 작년 구월에 찾아온 태풍 때문에 쑥대밭이 되었다. 아직 복구가 한창인데 비용이 너무 들어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그래서 늘 술타령인데 착각인지 몰라도 오늘은 어딘가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니, 오늘도 허탕이야. 요새는 고기가 잘 안 잡히네. 떼놈들이 죄다 잡아가서 그런지 아주 씨가 말랐나봐.”

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려? 헛심만 썼구먼. 기분도 그럴 텐데 울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할려?”

창수가 손에 들고 있는 소주병을 흔들어보였다.

“맘은 굴뚝같은데 집에 가서 어머니 밥 차려드려야 해.”

“아, 그래? 아쉽구먼. 모처럼 너하고 한잔 할까 했는디. 할 수 없제. 아! 맞다. 아까 방송 들었어?”

“방송?”

“오늘 계약이 성사되었다는구먼. 아마 자네 통장에도 돈이 꽉꽉 찼을 텐데? 그 미국 양반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송금을 해줬다나.”

“그랬어? 가만? 규철이 형님이 끝까지 반대한다고 들었는데 그새 맘이 바뀌었나? 별일이네. 그 황소고집을 꺾을 때도 다 있고.”

성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러. 그 형님도 뭐 돈 앞에서 맘이 흔들렸겠지. 사람 맴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감. 솔직히 말해서 규철 형님 서울서 빚만 져서 왔잖여. 아무리 머리 좋고 학벌 좋으면 뭐에 쓰겄어. 돈 없으면 말짱 헛거여, 헛거.”

“그래도 그 형님 성격상 절대로 맘 바꿀 거 같지 않았는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뭐 우리야 돈 생기고 좋지. 이제 나도 양식장이고 뭐고 다 청산하고 뭍에 가서 새장가나 갈란다. 인생 뭐 있간디. 도망간 마누라 찾아봐야 이제사 아무 의미 없고. 시방부터라도 떵떵거리며 잘 살믄 되제.”

창수가 그렇게 말하며 성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술에 취해선지 힘 조절을 못해서 퍽 소리가 났다.

“엇, 미안.”

창수가 화들짝 놀라며 성진을 쳐다봤다.

“괜찮아.”

성진은 괜찮다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녀, 정말 미안혀.”

성진에게 창수는 섬에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동갑내기 친구 중 하나다.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사이이지만 이 나이 먹도록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진짜 괜찮다니까.”

“그려.”

창수는 겸연쩍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계약도 성사되었고 섬을 언제까지 비워야 한대?”

성진이 어깨를 문지르며 물었다.

“이장님 말씀으로는 이달 말까지는 비워야한다는구먼.”

“이달 말이라. 좀 빠듯하긴 하네. 이사 갈 집도 알아봐야하고. 창수, 넌 무슨 계획이라도 잡았냐?”

“나? 나는 뭍에 가면 노래방이나 하나 차릴 생각인디.”

창수는 별 고민 없이 말했다.

“노래방?”

“응.”

“너, 그거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그려? 그럼 너가 나 좀 도와주던가.”

“내가?”

“어. 너는 그래도 왕년에······.”

성진이 갑자기 손을 들어 창수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창수야. 너, 내 친구지? 나는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창수야 친구끼리 괜히 감정 상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창수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넌 착한 놈이니까 내가 하는 말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그려, 그럴게.”

“고맙다.”

성진이 다시 표정을 바꾸고 피식 웃어보였다.

창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거 같다?”

성진이 그때서야 깨달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 맞다. 아까 이장님이 불러서 죄다 이장님 댁으로 몰려갔어.”

“그건 왜?”

“몰러. 뭐 정력에 좋은 주사를 놔준다고 하더라. 나는 아까 양식장에서 일 좀 보느라 못 갔구먼. 맞다. 그러고 보니 너희 엄니도 아마 갔을걸. 그 누구냐. 김 영감이 모시고 가는 거, 지나는 길에 봤어.”

“김 영감님이? 아, 그 양반 참.”

“하여간에 나이든 양반들이 더 해. 그거 맞아서 어디에 힘을 쓰겄다고 그 난리들인지 말이여.”

창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게.”

성진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수의 소매가 붉게 물들어있는 걸 발견했다.

“너, 그 팔은 왜 그러냐?”

“내 팔? 아아, 이거.”

“다쳤냐?”

“그게 좀 황당한 일이 있었어.”

“황당한 일? 야, 소매 좀 거둬봐.”

경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매를 걷었다.

성진의 눈이 커졌다.

팔꿈치에서 팔목까지 열상(裂傷)이 있었다. 언뜻 보니 뭔가에 물린 것 같기도 했다. 뼈가 허옇게 보일 정도로 상처가 심각했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거 심각하잖아. 뭐에 물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 이렇게 상처가 크게 났는데 아프지도 않아? 이 답답한 인간아, 다쳤으면 치료를 해야 할 거 아녀.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야?”

“그게 말이여. 물려버렸어.”

경수가 난처하다는 듯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물려? 뭐에 물려? 개한테 물렸냐? 이 정도면 저기 곽 씨 아저씨가 키우는 그 똥개 같은데. 맞다, 그놈은 저번 초복 때 잡았지. 그럼 이 섬에 개는 한 마리도 없잖아.”

“개는 아녀.”

“뭐라고?”

“개는 아니라고.”

“그럼 뭐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사람이 그랬어. 이거 사람이 물은 거라고.”

“그게 뭔 소리야. 사람이 물다니, 누가? 어떤 미친 새끼가 이 모양이 되도록 물어뜯었단 거야.”

“서산댁이 물었구먼.”

“서산댁? 그 이장네 과부 며느리?”

성진이 다그치듯이 묻자, 창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서산댁이라면 성진이 섬으로 돌아온 첫해에 이장의 외서산댁이라면 성진이 섬으로 돌아온 첫해에 이장의 외아들한테 시집온 여자를 말했다.

고향이 서산이라서 다들 서산댁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작년에 태풍이 왔을 때 남편을 잃은 여자다.

풍문으로는 뭍에 있을 때 술집에서 일했다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보기 드문 글래머인데다가 올해로 서른두 살이니 아직 한창 때라서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이 많았다. 창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 여자가 널 왜 물어? 너, 뭔 짓을 했는데?”

성진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녀, 그런 거.”

창수가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억울해선지 아니면 켕기는 데가 있어선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멀쩡한 여자가 팔을 이 모양이 되도록 물었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성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친구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진짜 아니라니까.”

창수가 펄쩍 뛰며 완강히 부인했다. 억울하다는 듯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아니긴 새끼야.”

“진짜 아녀. 돌아가신 우리 엄니 걸고 맹세하는데 난 진짜로 아무 짓도 안했구먼. 그냥 여기 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어디가 아픈지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끙끙 앓더라고. 내 딴에는 걱정스러우니까 다가가서 어디 아프냐고 물었는디 아니 이 여자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살쾡이처럼 달려들지 뭐여.”

“이상한 소리?”

성진이 되물었다.

“그게 말이여. 꼭 이런 소리였어.”

창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까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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