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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작품등록일 :
2012.09.24 12:55
최근연재일 :
2016.12.22 04:0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20,196
추천수 :
136
글자수 :
42,755

작성
16.10.19 20:35
조회
957
추천
15
글자
8쪽

여름방학 (1)

DUMMY

기영은 한숨을 푹푹 쉬며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다. 약속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화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나마 미리 버스표를 끊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아직도야?”

화장실을 다녀온 승민이 손에 묻은 물기를 바지에 슥 문지르며 물었다. 하얀 면바지에 얼룩이 생겨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민도 대합실의 벽시계를 흘끗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화영이 걔는 시간 맞춰 나오는 꼴을 못 보네. 그러니까 매번 시합 때마다 지각해서 성적이 그 모양이지.”

승민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화영이가 선발전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지각 때문이 아니잖아.”

기영이 다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화영은 두 사람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양궁부 에이스였다. 실력만 놓고 보면 전국 톱 클래스인데도 이상하게 상복이 없었다.

“하긴. 걔, 어울리지도 않게 무대 울렁증이지. 그 괄괄하고 낯 두꺼운 애가 무대 울렁증이라니 참 희한해. 그냥 떨어져서 쪽 팔리니까 핑계 대는 건 아니겠지?”

“그 얘기, 화영이 오면 전해줄게.”

기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야야, 친구끼리 왜 그러냐. 걔, 성격 몰라서 그래? 기영아, 나 오래 살고 싶어. 못해도 장가는 가고 죽어야지 않겠냐. 최소한 연애라도 해보자. 총각귀신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니 나 좀 살려줘라.”

승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생각 좀 해보고. 그나저나 정말 늦네.”

“전화 안 받아?”

“해봤지. 열 번은 더 했겠다. 그럼 뭐해. 전원이 꺼져있는데.”

기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화영답군. 걔 또 충전 안하고 그냥 잤네. 뻔하다, 뻔해. 이런 분위기면 아무래도 다음 버스를 타야겠지?”

“그러게. 제때 배 타려면 다음 버스는 꼭 타야하는데······.”

“저기 납셨다.”

버스시간표를 검색하던 승민이 기영의 어깨를 툭 치며 에스컬레이터를 가리켰다. 화영이 커다란 배낭도 모자라 양궁장비까지 챙겨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기영과 승민은 화영에게 손을 흔들다가 먼가를 발견하고는 동시에 굳은 표정을 지었다.

“어, 어?”

“뭐냐, 저건.”

승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늦은 이유가 있었네. 기영이 너도 알고 있었어?”

“설마.”

기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화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이 있었다. 그것도 다섯 명이나. 기영이나 승민이나 사전에 들은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전형적인 마이페이스인 화영은 언제나 일벌이기를 좋아한다. 문제는 언제나 그 수습은 기영와 승민의 몫이라는 거다.

“얘들아!”

화영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해, 웃어라.”

기영이 승민을 툭 치며 잇새로 내뱉었다.

승민은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귓속말로 기영에게 슬며시 물었다.

“저 뒤에 오는 거, 시아 아니냐? 저 마법변신소녀가 웬일이래. 얼레, 오늘은 안경도 안 썼네?”

두 사람과 같은 반인 시아는 학생 모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이 된 이후로 줄곧 모델 활동을 했고 최근에는 기획사에 들어가 하드트레이닝을 받으며 가수로 데뷔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법변신소녀’는 평소에는 안경을 쓰고 다니다가 연예 활동을 할 때만 렌즈를 끼는데 그 전과 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서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학교에서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라 수수하게 다녔는데 지금은 챙 넓은 비치모자에 원색인 레드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려서 눈에 확 띄었다.

“둘이 친했어? 화영이랑 시아?”

기영이 승민에게 물었다. 승민은 유치원 때부터 친구인 화영에 대해서라면 거의 모든 걸 꿰고 있었다.

“당근 친하지. 몰랐냐? 둘이 초등학교 때부터 죽 같은 학교 다녔잖아.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난 중학교는 남학교로 진학했었지만, 초등학교는 쟤들이랑 육 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흐으, 지금 생각하면 참 지겨운 인연이다. 헐, 반장도 있다.”

키 큰 화영과 시아에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나타나자 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부반장인 기영은 반장과 의견충돌이 잦아서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아하하하. 시아나 채린이는 그렇다 치고 대승이랑 장석이는 또 왜 낀 거냐.”

여자애들 뒤로 사내아이 둘이 보였다. 한 명은 옆의 아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덩치도 상당했다.

“너 진짜 몰랐어?”

승민이 비난 섞인 말투로 물었다. 승민이 화영과 어릴 적부터 같이 놀던 소꿉친구라면, 화영과 기영은 작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 양궁부 에이스와 축구부 스트라이커, 전교생이 다 아는 공식커플.

“내 표정 보면 모르냐? 진짜 들은 거 없었어. 어젯밤에도 통화했는데 이런 얘긴 전혀 하지 않았다고.”

기영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글치. 그게 오화영이지.”

코흘리개 시절부터 화영을 알았던 승민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민이 아는 화영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마이페이스.

“어이쿠. 석균이까지? 뭐야, 이 이해할 수 없는 멤버 구성은.”

두 사내아이에 이어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인상의 깡마른 아이까지 나타자자 승민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기영은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그저 쓰게 웃기만 했다.

“미치겠네, 정말.”

보충수업이 지난주에 끝났으니 이제부터가 진짜 본격적인 여름방학이었다. 기영은 내년이면 고3이 되니까 사실상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이번 방학에 뭔가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궁리하다가 아버지의 고향이지 삼촌댁이 있는 섬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애초에 계획은 승민과 화영, 이렇게 세 사람이서만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영이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을 벌였다. 갑자기 불어난 인원에 기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반장도 그렇지만 특히 장석은 일진인데다가 기영하고 예전부터 앙숙이었다. 대체 어떤 얘기를 해서 저 골칫덩이까지 쫓아왔는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고.

기영과 눈이 마주친 장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찰나 동안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제의 당사자인 화영은 마냥 즐겁다는 얼굴이다.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말과는 달리 화영은 생글생글 웃었다.

“기영아. 아슬아슬하지만 5분 정도 여유 있다. 이번 버스 탈 수 있을 거 같은데?”

승민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긴 나중에 듣고, 일단 표부터 끊자.”

기영이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먼저 끊어. 일일이 돈 걷을 시간 없잖아. 시간 없다며? 나중에 돈 거둬서 주면 되잖아.”

시아가 핸드백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기영에게 내밀었다.

“아빠 카드, 훔쳐왔냐?”

옆에서 승민이 놀리듯이 물었다. 그러자 시아가 사납게 쏘아봤다. 옛날부터 여자한테 약한 승민은 버티지 못하고 얼른 사과했다.

“쏴리.”

시아가 기영에게 고개를 돌리고 다시 카드를 건넸다.

“뭐해? 5분밖에 안 남았다더니?”

기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카드를 받아 매표소로 뛰어갔다.

“빨리 다녀와.”

화영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기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승민이 못 말리겠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여왕님이셔.”

기영이 카드 결제 승인을 기다리다가 문득 아이들을 쳐다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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