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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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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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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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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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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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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북변경의 야노슈 (13)

DUMMY

마르쿠스가 데리고 온 노예는 자루의 내용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루푸스가 보는 앞에서 나무 꼬챙이, 작은 양파, 버섯, 나뭇잎에 싸인 고깃 덩어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마르쿠스가 갖고 온 음식은 꼬치 구이인 듯했다.


"고기는 가져왔나?"


마르쿠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소리였다. 루푸스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겨울 도살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마르쿠스의 표정이 거의 희극적일 정도로 시무룩해졌다. 표정이 다양하면서도 묘하게 위엄은 유지하던-최소한 루푸스는 그렇게 느꼈다- 야노슈와는 달리, 마르쿠스는 웃을 때면 우습고 시무룩해지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루푸스는 이 자가 레분툼을 무력 점거하자고 진지하게 주장했다는 사실도 거의 잊을뻔했다. 루푸스는 그날밤 그의 싸늘한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끌어와, 눈 앞의 인물에 대해 형성되가는 호감을 지워나갔다. 법 공부는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변호사로서의 자질은 충분했을 것이다. 겉과 속이 이리도 다르고, 얼굴 근육 몇 개 비트는 것만으로 이렇게 친근감을 주고 있으니.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힌 루푸스는 겨울 도살에 대해 생각했다. 매년 겨울이 되면, 내년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가축들을 골라내어 도축하는데 이것이 겨울 도살이다. 가을에 모아둘 수 있는 건초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한정된 건초로 감당할 수 없는 숫자를 끌어안고 가려다 가축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반토막난 가축들이나마 건지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게 한번에 많은 가축들을 도살하면 상당수를 보존식으로 전환한 뒤에도 가난한 이들조차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고기가 흔한 시기가 잠시 생긴다. 고기가 많이 먹고픈-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하는- 마르쿠스에겐 유감스럽게도 레분툼은 아직 겨울 도살을 하지 않았고, 루푸스가 챙겨온 5일치 식량에도 고기는 한 점도 들어있지 않았다.


"고기가 부족하십니까?"


알쿠르는 투구의 턱끈을 풀며 질문했다. 마르쿠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저게 충분해 보이나? 고기가 모자라서 꼬치 몇개는 양파랑 버섯만 끼워야 할 지경인데? 남자가 고기를 먹고 다녀야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알쿠르의 투구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는 보호구를 끼지 않은 왼쪽 손목으로 얼굴의 땀을 훑었다. 그것을 보자 루푸스도 웬지 투구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갑을 벗고, 투구의 턱끈을 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고기를 많이 드셨나보군요?"


알쿠르의 어조는 평안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땀을 닦아내면서 별 생각 없이 해보는 평이한 질문 같은 어조였다. 그 평이함이 정신없이 턱끈을 풀던 루푸스의 손가락을 멈추게 만들었다. 알쿠르는 평이하게 말할때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


"먹을 수 있으면 언제나 먹었지. 고기는 힘의 원천이니까. 나야 뭐, 키는 타고났고 너희 둘도 덩치는 부족하지 않지만... 보통 제국 사람들이 랑골 놈들보다 덩치가 밀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끼니랍시고 밀죽에 올리브나 먹어대고, 어쩌다 돈이라도 생기면 고기는 뒷전이고 일단 굴부터 찾아대니까 그런거지."


알쿠르는 거의 미소 비슷한 것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푸스는 차마 그 얼굴을 오래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다시 턱끈을 풀기 시작했다.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르쿠스는 씩 웃어보였다.


"원정 중에는 고기를 어디서 구하십니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육포만 주구장창 드시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루푸스는 알쿠르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대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에 종군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데리고 다니다가 그때그때 도축해서 잡아먹는 가축들도 한 무더기 정도는 있어야 정상이다. 둘의 공통점은 지금 이 곳에는 없다는 것. 군대가 이럴 수는 없다. 알쿠르는 지금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갔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루푸스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마르쿠스의 눈치를 살폈다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돌멩이가 소리도 잔향도 없이 잔잔한 물에 가라 앉는 것처럼, 마르쿠스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얼굴 거죽 밑으로 침잠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국 정부랑 맺은 계약이 끝난건 알지?"


마르쿠스의 목소리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쪽에서 어떻게 대답하느냐를 보고 대응하겠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푸스는 거의 안타까운 기분을 느끼며 모닥불가의 노예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푸스의 노예들과 마르쿠스의 노예는 그새 친해진건지 웃고 떠들며 꼬챙이에 음식 재료들을 꿰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스테파누스 왕자가 제국 정부와 맺은 계약 기한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마르쿠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지만, 알쿠르의 어조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부드러운 말투가 가장이었다는걸 이런 식으로 드러내도 되는 것인가 생각하는 루푸스였지만, 알쿠르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알쿠르의 태도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마르쿠스도 눈에 띄게 생각을 오래 한 뒤에야 대답하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갱신을 거부했지. 다른 외인부대들이랑은 다르게, 우리 부대는 땅이나 관직 같은 부담스러운 것들은 요구하지 않아서 정부측에서 거부할 이유는 없거든. 왕자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고 결정하신거였지."


"모두가 귀향을 바란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아, 이 경우엔 귀향이 아니군요."


마르쿠스의 입꼬리에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루푸스에겐 그것이 사람의 웃음이라기보단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지?"


알쿠르는 -루푸스가 보기에는- 의도적으로 침묵했다. 그는 잠시 동안 마르쿠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종군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지 않습니까?"


마르쿠스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알쿠르를 노려보았다. 알쿠르는 말린 대구의 눈알 만큼이나 무감정한 시선을 상대에게 되돌려줬다. 긴장해서일까, 루푸스의 입에 마른 침이 고였다. 꼴깍 소리조차 낼 수 없었기에 루푸스는 침을 삼키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된 분위기도 잠시, 마르쿠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루푸스는 알쿠르의 입가에도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당황했다. 루푸스는 당황했지만 마르쿠스는 그렇지 않았다. 터져나온 헛웃음이 곧 파안대소가 되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 웃겠다는 듯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둘러 앉아서 꼬치를 만들던 노예들이 뭔 일인가하고 이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루푸스는 이런 웃음도 설마 연기인가하는 생각에 한기를 느꼈다. 아니, 어쩌면 방금 투구를 벗어든 탓에 찬 공기가 땀으로 젖은 머리칼에 닿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다 떨어져나갔지. 불편한 것도 불편한데다가 병사들 불만도 보통 문제가 아니야."


마르쿠스는 알쿠르에게서 고개를 돌려 숙영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문제가 아니지."


그 말을 끝으로 마르쿠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맛도 다 떨어졌군. 가봐야겠다. 꼬치는 너희들이 먹어."


그는 발걸음을 내딛으려다, 다시 멈춰섰다. 뭔가 중요한 것이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희 둘, 왕자가 도시에 갖고 들어간게 무엇인지 아나?"


네오피토스가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마치 뭔가 수상쩍은게 있으니 얼른 조사해보라고 부추기는 듯한, 질문의 탈을 쓴 밀고. 하지만 마르쿠스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무섭게 고민하는 루푸스의 귀에, 갑작스런 소란이 들려왔다. 노예들이었다. 물을 끓이던 냄비를 쏟은 듯, 냄비가 엎질러져 있고 노예 하나가 손을 감싸쥐고 있었다. 루푸스의 노예 중 하나였다. 루푸스가 데리고 온 다른 노예들과 마르쿠스의 노예가 그를 둘러싸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소란을 일별하고는, 자신의 노예를 불렀다. 루푸스와 알쿠르에겐 아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 듯, 그는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대로 떠났다.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저것이었군요."


알쿠르는 마르쿠스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루푸스는 동의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같이 일할 사이니 식사나 같이 하면서 친해져보자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굉장히 노골적입니다. 우리가 목욕장을 뒤져보길, 혹은 그곳에 반입되고 있는 물품을 확인해보길 원하는거죠. 중요한 것은 의도인데, 그럴싸한 것들 몇개는 떠오르지만 아직 저들의 성격이나 목표 같은 것들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루푸스가 하려던 말을 알쿠르가 전부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망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종군자들은 떨어져나간게 아니라 떼어놓고 온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이건 추측입니다만 가축들도 모두 버리고 온 모양입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일단 꼬치가 생겼으니 그것부터 먹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얼빠진 녀석이 손에 화상을 입은 것 같은데 저택으로 돌려보내야겠고."


루푸스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가져온 음식은 5일치였지만, 상황에 따라선 그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밖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손에 화상을 입은 노예는 쓸모가 없을 뿐더러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목욕장 건까지 있으니, 오늘 오후엔 시내에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루푸스는 거의 고개를 끄덕일뻔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알쿠르를 쳐다보았다.


"길안내는 혼자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욕장을 조사하려면 제가 직접 나서거나 대장한테 보고를 해야하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보고하기엔 모자랍니다."


"굳이 오늘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알쿠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을 잘못 했군요. 목욕장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입되고 있는 짐을 조사하는 겁니다. 그럴려면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지요."


그럴싸한 말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루푸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작가의말

진행에 박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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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7 4 11쪽
13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7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8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9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4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2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8 7 10쪽
5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4 북변경의 야노슈 (2) 13.10.03 369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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