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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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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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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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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북변경의 야노슈 (10)

DUMMY

루푸스는 천막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싸늘한 침묵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그에게로 휙 돌아가는 모습이 거의 괴기하기까지 했다.


사령부 천막은 단순한 구조였다. 커다란 책상과 의자들. 책상과 의자 모두 나무판의 이음새와 곳곳에 박힌 못대가리들이 보일 정도로 투박한 물건들이었다. 루푸스가 어제 본 야노슈 군의 간부 전원이 그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중년의 행정관 네오피토스만이 애처로울 정도로 납작한 방석 하나를 깔고 앉고 있었다. 그는 루푸스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양피지들을 긁어 모았다. 얼핏 보기에 회계 장부처럼 보이는 양피지들이 기이할 정도로 크고 억센 손에 마구 구겨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루푸스가 들어선 뒤 사령부에서 들린 유일한 소리였다. 나머지는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루푸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기는커녕 숨소리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적대적이었다. 안내자 하나 보내지 않은 것에 항의하려던 루푸스였지만, 눈 앞의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푸스의 마음 속에는 이 침묵이 과연 자신 때문에 유발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등장 때문에 대화가 멈춘 것이 아니라 그가 천막에 들어선 순간에 이미 분위기가 싸늘했던 것 같았던 것이다. 과연, 상석에 앉아 있던 엘러드가 일어나며 한 말은 루푸스의 의심을 해결해줬다.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다가 손님도 까먹었군."


엘러드는 억양이 약간 어색한 제국어로 말하며 독살스런 눈빛을 네오피토스에게 보냈다. 행정관은 엘러드의 말과 시선 양쪽 모두 무시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정수리에 불끈 솟아오른 핏줄만이 그의 분노를 증언하고 있었다. 네오피토스가 엘러드의 말을 무시했듯, 엘러드도 네오피토스의 정수리를 무시했다. 루푸스는 지금 이것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동했으나, 최근에 생긴 대부분의 의문이 그렇듯 이번 것도 해결이 되지 않을 듯했다.


"어쨌든, 스테파누스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자넬 환영하는 바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이 유익한 협력으로 가득하길."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따위로 대답하려던 루푸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가까스로 되삼키고, 제대로 된 답을 기억해냈다.


"친구란 이득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니, 유익한 협력이 아니라 진실된 헌신으로 임하겠습니다."


방금 엘러드는 제국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었다. 죽은지 3세기도 넘게 지난 어떤 장군들 사이에서 오간 맹세를 황제의 이름만 야노슈의 세례명으로 바꿔 읊은 것이다. 루푸스의 교양 수준을 떠보려는 것이었나본데, 어린 시절에 못 배운게 한이었던 플라비우스는 루푸스만은 고전 문학 따위를 악착 같이 교육시켜 놓은 터였다. 루푸스는 플라비우스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사소한 것으로 사람을 시험하려드는 엘러드에게 분노를 느꼈다. 상대가 파놓은 함정을 재치있게 넘어간 것이라 평할 수 있는 것이고, 보통 뿌듯함을 느끼는게 정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푸스에겐 한발짝 늦게 분노가 찾아왔다. 가슴 속에서 뜨겁고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 목으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손발이 찌릿찌릿했다. 야만의 산골짜기에서 굴러먹다 온 잡놈이 제국의 시민권자와 맞먹으려고 든다는 말이 목구멍을 통과해 혀뿌리 즈음에 걸렸다.


사실 루푸스는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제국의 '정통' 시민들이 보기엔 그나 엘러드나 똑같은 부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푸스가 엘러드에게 폭언을 퍼붓지 않은 이유는 그런 자각 때문이 아니었다. 루푸스를 자제시킨 것은, 지금 막 쇳소리를 울리며 천막에 들어온 알쿠르의 존재였다. 모두의 시선이 루푸스에게서 알쿠르로 옮겨갔다. 걸을 때마다 쇳소리를 울리는 우악스러운 무장을 한 그는 엘러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더니, 투구를 벗어들고 루푸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쪽 구역에 천막을 쳐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거랑, 칼을 맡기고 온 것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지도도 갖고 왔습니다."


그는 비어있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나무로 된 원통이 들려 있었다. 두루마리를 넣을때 쓰는 물건이었다.


"그럼, 자리를 내주시겠습니까."


루푸스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소한 장난에 일일이 날뛰는 것은 체통이 없는 짓이라는 자각도 뒤늦게나마 찾아들고 있었다.




루푸스는 지도를 서에서 동으로 훑었다. 그의 손가락이 굵은 푸른 선 밑을 지나가다, 고풍스러운 필체로 '크레놀룸'이라고 쓰인 곳에서 멈추었다. 그 곳에는 역시나 고풍스러운 그림체로 작은 도시가 그려져 있었고, 그림 위에는 투박한 X표가 붉은색으로 그려져있었다.


"상류로 올라가면, 이 곳에서 도보로 8일 정도 거리에서부터 켈두스 산맥에 들어서며 계곡이 시작됩니다. 물이 깊고 빠른데다 골짜기가 굉장히 깊기 때문에 통행이 어렵습니다. 크레놀룸의 폐허 북쪽에 놓여 있는 다리가 근방에서는 유일한 통행로인데, 랑골의 일파인 칼트족이 강의 북안을 차지한 뒤로도 어느 정도의 교역은 이어져 오다, 5년 전 겨울 크레놀룸까지 북상한 제국군이 이듬해 봄에 철수하며 다리를 끊은 뒤로는 그것도 끝났습니다."


의자가 내어져오고, 간단한 인사치레가 이어진 뒤-그가 아침 식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단순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이 곳의 분위기가 험악했던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루푸스는 그가 이 곳에 온 본래의 목적, 즉 주변 지리의 안내를 시작했다. 그는 강의 도하 가능 지점을 위주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붉은 표시는 폐허를 의미하는건가?"


기병대장 마고의 질문이었다. 그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리자 오른쪽 뺨에 새겨진 흉터도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루푸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붉은색 X는 폐허입니다. 지도는 백년쯤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위에 그려진 표시들은 모두 최근에 더해진 것들이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그려진 표시들은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어색하고 투박했다. 응접실 벽 같은 곳에 걸어둬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원판과는 달리, 옛날에 그려진 지도를 현재 실정에 맞게 수정한 사람은 기호들의 미적인 가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제국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문명을 누려온 엘레니 지역 출신인 네오피토스는 지도의 한심한 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도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루푸스도 심기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야노슈 군의 다른 간부들도 제각기 허, 하는 소리를 내거나 고개를 내젓는 등 반응은 좋지 않았다.


제국의 모든 것은 몰락하고있다.


"폐허가 많은 편인데. 아니, 엄청나게 많아."


마르쿠스는 턱의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면도를 하다 베인 듯해보이는 상처를 긁는 동작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으나, 루푸스에겐 그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실린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그는 야노슈 군의 간부들 중에서 유일한 정통파 제국인이었다.


"제국의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정말로 무덤덤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알쿠르의 목소리였다. 언젠가 한번, 루푸스는 알쿠르가 검투사 시절에 자신의 감정도 죽여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에 충실하게, 최소한 루푸스가 보는 앞에서 알쿠르가 감정적인 언행을 보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엘러드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부나 남부에서도 폐허는 많이 봤지. 여태껏 옛날 지도를 보면서 현재와 비교해 본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다들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구동성으로 퇴락했다는 도시가 내가 보기엔 부귀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것도 봤고, 이웃 도시가 파괴된 와중에도 예전보다 더 부강해진 도시도 봤지. 물론 전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잘 풀린 곳보단 그렇지 않은 곳이 많은 것 같긴 하다만."


그렇게 말하며, 엘러드는 루푸스에게 계속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루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 중류 부분을 짚었다.


"이 근방에서는 유속이 느리고 물도 얕기 때문에 간단한 뗏목으로도 도하가 가능합니다. 랑골족들의 약탈대들이 보통 그런식으로 오고가곤 하지요. 이 방법의 문제점은, 아마 직접 보셨겠지만, 강 이쪽편에는 쓸만한 나무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레분툼 일대의 숲은 완전히 초토화된 상태였다. 도시를 건설하고, 농지를 만들고, 연료를 채취하며 어쩔 수 없이 베어낸 것들도 많지만, 일부러 불을 놓아가며 숲을 파괴한 경우도 거의 그와 맞먹게 많았다. 이유는 단 하나, 랑골족들에게 은신할 장소를 주지 않고, 설령 그들이 접근해와도 발견이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년에 쓸 목재는 어디까지 가서 베어와야 할까. 루푸스는 암울한 생각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 시기엔 상류에서 물이 얼기 때문에 강의 유량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 곳, 버려진 군단 기지에서 이 곳, 로크벨로룸의 폐허 사이에 걸어서도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이 몇 군데 있습니다. 물론 어제는 건널 수 있던 곳이 오늘은 불가능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확실한 것은 직접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만."


랑골족도 그런 식으로 오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3년 전의 대규모 침공이 격퇴된 뒤로 북변경은 조용했지만, 그것은 레부르 강 너머의 부족들 중 일부가 남동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동북 변경을 침공한 랑골족 연합군이 저지된 저 유명한 엘게쿰 전투에서, 제국군의 절반은 랑골 용병이었고 그 중 또 삼분의 일은 루푸스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레부르 유역의 부족 출신이었다. 그에 맞서 싸운 랑골족 연합군도 역시 거의 절반 가까운 숫자는 레부르 유역 출신이었다.


"이것도 폐허인가?"


마르쿠스는 루푸스의 손가락이 멈춘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끝에는 검은 세모 표시가 그려져 있었고, 바로 밑에 역시 검은 글자로 '로크'라고 쓰여져 있었다.


"검은 세모는 전략도시를 의미합니다. 3년 전 겨울에 완전히 파괴된 곳인데 지도에는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군요. 레분툼에는 이 도시의 생존자들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꼴 나지 말라고 짓는게 전략도시 아니었나?"


마르쿠스의 지적에 루푸스는 쓴웃음 말고는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지도에 그려진 세모 표시들 중에는 X 표시가 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엘러드가 헛기침을 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럼 당장 오늘 오후에 정찰대를 보내야겠군. 방금 루푸스가 말한 군단 기지와 도시 폐허 사이의 지점에서 도하가 가능한 곳을 찾는다. 마고, 점심 식사를 끝내고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서른 명을 추려라. 너를 포함해서 서른이다. 아까 나온 사안에 대해선 남은 사람들끼리 오후에 따로 논의하도록 하지. 전원 해산."


그 말과 함께, 엘러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말 없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잠시 후 마고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며 엘러드의 뒤를 따랐다. 마르쿠스는 별로 편하지도 않아 보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기지개를 펴더니, 눈을 감고 명상인지 졸음인지를 시작했다. 루푸스가 그 모든 과정을 보고 있었던 이유는, 네오피토스가 그의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년의 행정관은 상당히 흥미가 돋는다는 눈빛으로 지도를 훑어보고 있었다.


"제논의 세계전서의 일부일 수도 있겠군. 아님 그걸 베껴 그렸거나. 어쨌든 원판은 나쁘지 않은 물건이야. 이 글씨들 보이나? 이건 올로고스가 개발한 서체지. 이렇게 빗겨 올라가는 획처리를 보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


루푸스는 엘레니인에 대해 들은 것이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옛 것에 관심이 많은 족속들, 제국에서 '교양'이라 일컬어지는 것의 대부분이 바로 엘레니인들의 문화에 기반을 둔 것들이었다. 제국은 엘레니인들의 땅을 정복했지만 엘레니인들은 제국인들의 정신을 정복했다고 말한 것이 누구였던가.


"이 덧칠들은 정말 최악이야...조금만 더 공을 들인다고 손해보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어찌 이리 무심한지. 이건 동그라미도 세모도 가위표도 아닌데, 호수인가?"


"아마 얼룩일겁니다."


자신의 침자국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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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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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2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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