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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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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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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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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글자수 :
7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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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09 18:2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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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북변경의 야노슈 (5)

DUMMY

루푸스는 엄청난 한기에 눈을 떴다. 어째선지 그는 풀 냄새 가득한 숲 한 가운데 누워 있었다. 두통을 압도하는 당혹감이 가슴을 옥죄어왔다. 여기는 어디지? 그는 황급히 일어나려고 팔을 휘두르다, 벽 같은 무언가에 오른손을 찧었다. 화들짝 놀란 그는 자신의 손이 닿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았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숲이 아니라 안뜰 구석에 누워 있었고 그가 손으로 친 것은 안뜰 벽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그는 멀리에서 비쳐오는 불빛과, 아스라히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 소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은 아닌지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푸스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잠 들었다면 정말 위험할뻔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안뜰 구석에서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되는 식의 최후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북변경의 늦가을 추위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상상외의 무력감에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고, 그래서 막 근처까지 접근해온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넓기도 하군. 이쯤이면 되겠어."


잠시 멍하니 있던 루푸스는, 그것이 야노슈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지금이라도 인기척을 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웬지 모를 호기심이 동했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걸까. 마침 말소리가 들려온 쪽과 루푸스가 누운 곳 사이에는 관목 몇 그루와 전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어서 들킬 확률도 거의 없었다.


"안뜰 때문에 겨울이면 추워서 문제라는데, 저한텐 벌써부터 춥군요."


이번에는 조금 더 금방 알아차리는데 성공했다. 이건 엘러드의 목소리였다.


"고향은 이보다 더 춥다. 벌써부터 추위를 타서 어쩌려고?"


"후우, 저한텐 상상도 안되는군요. 간다면 가는거긴 하지만."


제 3의 목소리. 아마 야노슈의 부하 중 하나인 마르쿠스 같았다. 그의 목소리까지 들은 뒤에야 루푸스는 저들이 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마 마르쿠스가 야노슈와 엘러드의 모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잡설은 여기까지 해두고..엘러드, 노인장이 뭔가 낌새를 챈 눈치는 없던가?"


저것은 또 무슨 소린가. 머리가 지끈거려웠다. 루푸스는 야노슈가 제국 정부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고향인 고산지대로 돌아가는 길이고, 국경과 고산지대 사이를 장악하고 있는 랑골족들과 통행 협상을 맺기 위해 통역을 필요로 한다는 것 외엔 그의 목적에 대해 들은 것이 없었다. 이런 간단한 사실 외에, 그들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라도 있는 것일까.


"아직은 없습니다. 혹시나 공문서쪽으로 얘기가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더군요. 어쨌든 관료는 아니니까요."


"제국 법률이란게 알기 쉬운 물건은 아닙니다. 제가 변호사 교육도 받았다고 얘기 했습니까?"


"거의 천 번 가까이 했네, 마르쿠스."


세 사람은 조용히 웃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빨리 떠나는게 최선이다. 적당히 보급품만 구입하고, 가는 길의 랑골 놈들만 매수하면 끝이야. 괜히 강 이쪽편에서 소란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보급품 말인데, 굳이 우리 돈 줘가면서 사야하는겁니까? 강 건너에 몇개 부족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나중가서 푼돈도 아쉬울 수 있습니다. 가는 길에 너무 많이 뿌리면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도 문제고. 이 도시가 가난해 보이긴 하지만 밑바닥까지 긁어내면 없는 것보단 훨씬 나을겁니다. 아예 도시를 장악해버리는건 어떻습니까?"


마르쿠스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 변호사 운운할때와는 달리 묘하게 차갑고 무감각하여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그 차이가, 웬지 말의 내용보다도 더 섬찟했다.


"그간 랑골 놈들이 조용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경계 태세가 한심하기 짝이 없더군요. 제일 중요한 남문에 불침번이 한 명만 서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화롯불만 쳐다보다가 눈 뜬 장님이 되서 제가 접근하는걸 발견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칼만 뽑으면 많이 죽일 필요도 없이 압도할 수 있을겁니다."


루푸스는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낮에 본 엘러드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정말 위험한 자들이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남을 죽여서 생활을 영위하는 칼잡이들이었다. 제국의 깃발을 들고 있긴 하지만 그 실체는 대부분 이민족들로 구성된 용병들이고, 마침 주변에는 그들을 감시할 정규 제국군도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안일했을까. 플라비우스와 알쿠르는 이들이 배신할 때를 대비는 하고 있을까?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럴 일은 없다. 대안이나 가능성으로서도 생각하지 말도록. 이건 명령이다."


듣고 있는 루푸스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야노슈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루푸스만이 아니었는 듯,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한 침묵이 참을 수 없는 침묵으로 변하기 직전, 야노슈가 다시 말을 꺼냈다.


"통역을 맡기로 한 루푸스에 대해 듣고 싶군. 플라비우스가 별 말은 없던가? 양자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는데. 술을 엄청나게 못 마신다는 것 외엔 아는게 없어."


주제를 바꾸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듣고 있는 루푸스는 호기심이 동할 수 밖에 없었다. 남들이 자기 얘기 하는걸 엿듣는 것만큼 짜릿한 일도 드물다.


"저희가 떠난 직후에 주운 아이라고 하더군요. 왜, 랑골족은 전쟁이라도 나갈라치면 여자들이랑 아이들도 뒤에 졸졸 따라오지 않습니까? 우리들한테 종군자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런 식으로 어마어마하게 뭉쳐서 건너온 랑골족 행렬을 플라비우스가 싹 쓸어버렸는데,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가족도 뭣도 없이 황야에 애 혼자 돌아다니는걸 주웠답니다. 늑대(lupus)들한테 둘러쌓여 있는걸 구해준거라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는군요. 그때 사로잡힌 랑골족 중에서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은 유일한 경우랍니다."


누군가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쿠스 같았다.


"거 참 억수로 운 좋은 녀석입니다. 용케 목숨도 구하고, 노예로 팔려나가도 할 말 없을 상황에서 도련님 대접 받으며 여태 호의호식 했으니."


마르쿠스의 말은 기분 나쁠 정도로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루푸스는 자신의 내력이 딱히 부끄럽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걸 남들이 굳이 끄집어내어 왈가왈부하는 것도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시절, 루푸스는 알쿠르에게 그런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알쿠르는 루푸스의 하소연에 '그런 자들에겐 매에게 알이었던 시절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되물어라'라고 말 했지만, 지금의 루푸스가 그런 말을 해봤자 비웃음거리만 될 뿐일터였다. 그리고, 루푸스는 자신이 과연 매의 알인지 뻐꾸기 알인지도 확신이 없었다.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눈치 빠르거나 똑똑한 놈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야노슈의 말이었다.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을 두고 하는 말 치고는 굉장히 이상했지만, 루푸스는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에겐 뭔가 숨겨야 할 것이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루푸스를 데리고 다니게 됐지만, 그 와중에 그가 알아선 안될 것을 알게되거나 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숨기려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플라비우스의 제안은 받아들이실겁니까? 싸움이 터지면 1열에 배치해준다는 것 말입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 덩치를 보면 영 못쓸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까. 만약 밥값을 못해도 같이 온다는 그 흑인 친구가 그 녀석 몫까지 해주면 될 일이다. 그것도 전투가 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다. 전투는 없을거야. 랑골족 상대로 낭비할 전력은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놈들이 달라는 만큼 집어줄 생각이다. 지금 강 너머엔 적당한 대가를 받아 놓고도 공격을 감행할만큼 뱃심 좋은 녀석은 없으니까. 그런 놈들은 벨티움에서 다 죽었다."


사박사박, 풀 위를 걷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들도 멀어져갔다.


"앞으로 이틀 정도는 ... 나 혼자 뿐이니 되도록이면 지금 ...."


"6군단은... ... ... 있..니까?"


"동부.. ... 킬리아쿠스가 ...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서야 루푸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바닥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더니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잠시 남쪽으로 걷다보니, 야노슈 일행이 아마 이 방향으로 갔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루푸스의 방도 저택 서관에 있었다. 그는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안뜰의 서쪽 출구를 향했다. 달빛과 남관의 불빛이 비치는 안뜰과는 달리, 저택의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벽에는 곳곳에 벽감이 파여 있고, 벽감 하나마다 양초 세네개가 놓여 있었지만 불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빛이라고는 몇 개 안되는 작은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달빛이 다였지만, 그것이 없었다해도 루푸스가 길을 찾는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는 루푸스의 집이었고, 그는 모든 모퉁이와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번도 벽에 부딪히거나 길을 잘못 드는 일 없이 자기 방으로 가는 마지막 모퉁이에 도착했다. 그는 그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등불을 손에 든 소녀였다. 루푸스의 머리와 같은 금발이 불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키는 루푸스의 가슴까지 올까말까 한 정도. 그림자가 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 듯, 그녀는 오른손에 든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언제나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는 눈매, 작고 오똑한 코가 드러났다. 목에는 노예의 구리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루푸스를 부축해주려고 했던 노예, 알리아였다.


"도련님?"


알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등불을 조금 더 들어올렸다. 아직도 루푸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는데, 가벼운 물건도 그렇게까지 높이 들어올리면 무거운 법이었다. 루푸스는 손을 내밀어 등불을 뺏어들었다.


"그래, 나야."


알리아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녀는 루푸스와 등불을 계속 번갈아 보다가,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루푸스는 등불을 돌려줬다.


"연회는 끝났어? 여기서 뭐하는거야?"


말 해놓고 보니 웬지 다그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리아도 비슷하게 느낀건지 눈에 띄게 안절부절 못했다.


"예, 저는 도련님이 방으로 잘 돌아가셨는지 확인해보러...바로 방으로 가신게 아니셨나요?"


루푸스는 잠시 대답을 고민해보다가, 자신이 뭘 해명하거나 해야하는 상황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응, 안뜰에서 바람 좀 쑀지."


아, 하고 대답 아닌 대답을 한 알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리아는 그를 지나쳐갔다. 루푸스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다시 부르기가 애매했다.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 루푸스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알리아!"


그녀의 걸음이 딱 멈췄다. 뒤돌아보는 얼굴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방에 불 좀 켜줄래?"



루푸스의 책상 위에는 두루마리 일곱 개가 놓여 있었다. 모두 이 일대의 지리를 묘사한 지도들이었는데, 루푸스는 자신이 야노슈와 동행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에 노예를 시켜서 지도들을 모아오게 했었다. 루푸스는 자기 전에 간단히 지도들을 검토해보고, 야노슈에게 가져갈 것을 골라둘 생각이었다.


사실, 내일 해도 될 일이었지만 굳이 지금 하기로 마음 먹은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 이유를 보았다. 그녀는 손에 불 켜진 초 하나를 들고, 다섯개째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루푸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막 불 붙은 초를 집어들고 다른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알리아는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루푸스는 손가락을 들어 다른 초를 가리킬 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른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웬지 그녀를 직시할 수 없었기에, 루푸스는 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리아, 여기 오기 전 일 기억해?"


알리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훽 돌려 루푸스를 보았지만, 루푸스는 차마 시선을 되보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처음보는 물건인냥 초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알리아가 대답한 것은 한참 후였다.


"많이는 기억 못해요. 그래도 부모님이랑 오빠가 있었다는건 기억나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알리아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와 루푸스가 공유하는 모국어, 랑골어였다.


"그 날 전의 일들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일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 날..."


알리아의 목소리도, 몸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루푸스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다. 11년 전 어느 겨울 날, 플라비우스는 랑골의 일파인 보흐탄족의 이민 행렬을 급습했다. 무고한 제국 시민들의 목숨과 재물을 빼앗고 이제는 땅까지 빼앗을 작정이었던 야만족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미친 듯한 살육, 눈 덮힌 평원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피.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모두 겁탈했다. 분노한 민병대원들의 칼날을 피한 생존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플라비우스가 악당인 것은 아니다. 랑골족은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질러왔고, 만약 보흐탄족이 저지되지 않았으면 그들이 북변경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을거니까. 그렇다고 그 날 벌어진 일이 끔찍하지 않다는 것 역시 아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날, 순전히 운과 인간의 변덕 때문에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 있다.


루푸스는 고개를 돌려, 그의 동족이지만 지금은 노예인 소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촛불 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직도 불 붙은 초를 든 채였다. 촛농이 그녀의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푸스는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초를 뺏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등에 달라붙은 촛농을 떼어냈다. 어린 나이부터 노동에 시달려 거칠어진 손이다. 루푸스의 손도 부드럽지는 않지만, 손이 거칠어진 경위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충동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이 놀라움으로 경련했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는 않았다.


"난 가끔..."


루푸스는 랑골어로 말하려다, 자신이 까마귀처럼 꺽꺽대고 있음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들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너나 나나 똑같이 노예가 될 뻔 했는데 나만 호강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것인가. 이유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그렇게 혼란에 빠진 사이, 그녀는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살포시 빼내고는,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도련님. 도련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한 분이 되셨을 거에요. 모든건 신들의 뜻인걸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 날 같이 노예가 된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


루푸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리아는 그런 그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 가볼게요."


루푸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지금쯤이면 연회의 뒷정리를 하고 있을건데, 늦었다가는 그녀가 무슨 욕을 먹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난 방에서, 루푸스는 책상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책상에는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지도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가는 것 하나를 집어들었다.


작가의말

사실 좀 다른 장면을 써보고 싶었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31 nuga
    작성일
    13.10.09 21:09
    No. 1

    우와 이거 이거 세계관부터가 대박.
    다른 장면 요청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 콤니노스
    작성일
    13.10.10 20:13
    No. 2

    재밌게 보셨다니 기쁩니다. 곧 휴가인데다 그 '다른 장면'은 구상 단계에서만 그쳤기 때문에 아마 당분간 세상의 빛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슴미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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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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