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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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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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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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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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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북변경의 야노슈 (11)

DUMMY

네오피토스가 지도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그만둔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동안 그는 방금전까지 엘러드와 싸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던게 맞나 싶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루푸스는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순수한 면이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네오피토스가 최근에 등장한 등고선이란 개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 놓는 동안, 마르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알쿠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갈 때가 된 것이다. 루푸스는 네오피토스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지도를 돌돌 말았다. 네오피토스의 끝도 없는 설명이 대충 멈췄다 싶은 시점에서, 루푸스는 지도를 알쿠르에게 넘겼다. 두루마리가 가벼운 소리와 함께 통에 들어가고, 루푸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쿠르는 먼저 천막에서 나갔다. 네오피토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드는 듯한 자세였다. 그래서, 간단한 인사를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나려던 루푸스는 그가 한 말을 거의 놓칠뻔했다.


"스테파누스가 도시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네오피토스를 돌아본 루푸스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의심했다. 행정관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지된 자세가, 방금 그가 말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는 네오피토스가 플라비우스의 안부를 물었나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야노슈의 세례명이 스테파누스라는 사실은 뒤늦게 떠올랐다. 그가 도시에서 뭘 하는지 알고 있냐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되묻고 싶은 루푸스였지만, 네오피토스는 대답이나 질문을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루푸스는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과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그를 덮쳤다. 알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무기를 돌려 받은 듯, 검대를 허리에 다시 메고 있었다. 맞은편 천막 앞에 서 있는 경비가 그들에게 심드렁한 눈빛을 보내더니, 하품을 했다. 루푸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천막으로 가지."


루푸스와 알쿠르, 노예들의 천막은 사령부 천막에서 남서쪽으로 마흔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자그마한 모닥불 주위에 큰 천막 하나와 작은 천막 둘이 세워져 있었는데, 각각 큰 천막은 루푸스, 작은 천막 하나는 알쿠르, 나머지 하나는 노예 셋이 쓰는 것이었다. 노예 하나가 모닥불을 들쑤시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가져온 짐들을 알쿠르와 루푸스의 천막 사이에 정리하고 있었다. 루푸스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공간은 충분했다. 정오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시간도 충분했다. 네오피토스가 한 수상쩍은 소리를 알쿠르에게도 전해줘야겠지만,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알쿠르를 쳐다보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준비됐습니다."


루푸스는 노예들을 불렀다. 플라비우스가 준 갑옷을 입어볼 때였다.


플라비우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특히 의복에 관해서는 단순히 검소한 수준이 아니라 기이할 정도로 장식이 없는 편을 선호하는 것이 그였다. 그랬기에, 플라비우스의 평복 차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가 무장한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곤 했다. 그의 갑옷은 화려함의 극을 달렸기 때문이다. 제국의 중심부라면 모를까,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화폐조차도 찾아보기 힘들게 된 북변경에서 플라비우스의 갑옷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물건이었다. 루푸스는 자신이 그런 갑옷을 받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제일 먼저, 루푸스는 신고 있는 샌들 위에 가죽 장화를 다시 신었다. 이중으로 된 가죽 사이에는 사각형의 철판 여러개가 박혀 있어 방패 밑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창검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현재 입고 있는 평복 위에 가죽 외투와 바지를 걸쳤다. 경화 과정을 거친 이 가죽 옷 하나만으로도 멀리에서 쏘아진 화살이나 큰 힘이 실리지 않은 검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갑옷 밑에 받쳐 입는 내의에 불과했다. 진정한 걸작은 그 위에 걸칠 금속 갑옷이었다. 알쿠르는 그것이 '비늘 갑옷'이라 불린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 외양은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작은 철판 수백개를 가죽끈으로 꿰어 만든 갑옷 자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철판들 하나하나가 모두 법랑이 입혀져 백색으로 빛난다는 것이었다. 믿는 종교에 따라 신의 일곱 천사, 마이트라의 전사 같은 존재들이 연상될 정도로, 온통 희게 빛나는 그 갑옷에는 천상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녹슬지 않아서 편하지요."


알쿠르의 건조한 품평이었다. 과연, 법랑 처리된 철판은 쉽게 녹슬지 않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갑옷을 걸친 루푸스는 팔을 들어올리고 팔짱을 끼어보는 등 갖가지 몸짓을 해보았다. 수평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으나, 비늘들의 역방향, 즉 위로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굉장히 불편했다. 어깨를 으쓱해보이던 루푸스는 등에서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팔을 돌려 손을 갖다 대보려고 시도했지만 꽉 맞물린 비늘들 때문에 손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등에는 비늘이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없어?"


"철판이 파손되거나 떨어져 나가도 새 철판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된겁니다. 등쪽의 끈에서 한 조각, 두 조각씩 빼내서 수리가 필요한 곳에 꿰어 놓고 하다보니 어느새 휑하니 구멍이 났지요. 그 외에도 옆구리나 허리 같은 곳에 잘 보시면 법랑 처리되지 않은 그냥 철판들도 몇개씩 끼워져 있을겁니다. 예전에 구한 다른 비늘 갑옷에서 빼온 것들이죠."


루푸스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았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했던 플라비우스의 갑옷에 그런 비밀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상념을 밀어내고, 노예의 도움을 받아 검대를 찼다. 알쿠르의 조언에 따라 숨을 완전히 내뱉고 검대를 꽉 조이니, 어깨에 가해지던 무게가 줄어들며 그럭저럭 편한 상태가 되었다. 투구는 철판 둘을 리벳으로 연결해 놓은 것으로, 위에서 내려치는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 작은 챙이 달려 있었고, 목을 보호하기 위해 달아놓은 사슬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뺨가리개는 안쪽에 가죽 안감이 붙어 있어 볼에 와닿는 느낌이 푹신했는데, 편의성과 방어력 모두를 고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슬로 된 목가리개는 오른쪽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꿰어진 부위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왼쪽 끝에 달린 가죽끈을 왼쪽 목가리개에 달린 끈과 묶으면 목구멍도 완전히 방어가 되는 구조였다. 막대한 힘을 실은 찌르기가 아니면 그 사슬을 뚫고 취약한 목을 노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죽 장갑을 꼈다. 대체적으로 좌우 대칭인 갑옷에서 이 장갑만이 그렇지 않았는데, 방패를 쥐는 왼쪽은 장갑의 길이도 짧고 아무런 보호구도 덧대어지지 않은 반면, 오른쪽은 그 길이가 거의 하완의 절반 정도를 덮고 있었고, 손등과 하완에 철판들이 박혀 있었다. 혹시나하여 루푸스는 주먹을 몇번 쥐었다 폈다 해보았지만, 교묘하게 배열된 손등의 철판들은 손의 움직임에 거의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았다. 그는 주위에 어색하게 서 있는 노예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검대 왼쪽에 달린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서늘한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져 나왔다. 한 손으로 다룰 수 있는 한계에 정확히 근접해 있는 긴 검이었다. 칼뿌리와 칼 끝의 폭 차이가 크지 않은 보통 검들에 비해, 플라비우스의 검은 끝부분으로 갈수록 검신의 폭이 줄어들며 뾰족해졌다. 일반적인 검들과의 차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플라비우스의 검은 날밑(crossguard)이 비정상적으로 컸다. 손이 날쪽으로 미끄러지는 것 정도만 방지할 정도의 테가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플라비우스의 검에는 긴 직사각형의 쇠막대가 두 개 달려 있었다. 검을 곧게 세워 본 루푸스는, 날밑의 형태 때문에 검의 모습이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성광교에 대한 플라비우스의 경멸을 생각해보면 그의 무기가 성광교의 상징과 모양이 같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알쿠르에게 시선을 돌린 루푸스는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방어와 공격 양방향으로 두루 쓰일 수 있는 부위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생긴 검을 주워온건지는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나쁘진 않습니다. 저걸 이용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을 몇개 가르쳐드리지요."


"넌 이런거 안 써?"


"전 익숙한 것만 씁니다."


알쿠르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짤막하고, 두꺼운 검신에서 급작스럽게 뾰족해지는 칼 끝, 둥그런 날 밑. 전형적인 검의 모습이었다.


"날은 안 세워뒀지?"


루푸스는 자신의 검날을 만지며 말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어서 지금 날이 세워진건지 아닌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에 대고 베어보는 것은 꺼림칙했다.


"진검은 언제 써보려고 그러십니까?"


알쿠르의 얼굴엔 미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루푸스는 사납게 마주 웃어 보였다.


"진검으로 하게?"


알쿠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노예에게 손짓하여 자신의 방패를 받아 들고는, 방패로 상체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루푸스는 자신도 방패를 들어 올리고, 방패 너머로 칼끝을 내밀어 보였다. 알쿠르의 방패 뒤에서도 검이 나왔다. 두 검이 예의 바르게 서로의 칼끝을 매만지고, 회수되었다. 대련의 시작이었다.


작가의말

피곤한 한 주였습니다. 글 늦어서 죄송합니다 ㄲㄲ 신체적으로 힘드니 글도 잘 안쓰여지고, 막상 써놓고 봐도 좀 불만족스러운 뜨뜻미지근한 물건만 나오는군요. 그래도 절정과의 거리를 착실히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루푸스가 받은 검은 사실 중세 중후기에나 나올법한 모양입니다. 크로스가드의 개념 비슷한 것이 도입된게 바이킹 검이었고, 진짜 크로스가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용된 것은 10세기부터였죠. 검들이 갈수록 뾰족해진 것도 대충 그 비슷한 시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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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변경의 야노슈 (13) 13.11.24 231 4 11쪽
1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8 4 11쪽
»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8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9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9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5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2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9 7 10쪽
5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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