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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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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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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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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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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북변경의 야노슈 (12)

DUMMY

루푸스는 검을 들어올려봤다. 젖은 쇠붙이가 낮의 햇볕을 받고 서늘하게 빛났다. 날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문질러봤지만 소설 같은데서 묘사되는 것처럼 피가 터져나오진 않았다. 알쿠르가 말하기를, 칼에 닿기만 해도 물건이 잘려나갈 정도로 날을 바짝 세우는 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검투사들처럼 맨 살을 드러낸 적을 상대하는게 아니고서야 칼의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무기와 전투에 관한 다른 모든 일들처럼, 루푸스는 알쿠르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다뤄야 할 물건이 플라비우스의 검 같은 물건이면 절대 소홀할 수도 없다.


루푸스의 시선이 번쩍이는 칼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갑옷과 검을 내주며 플라비우스가 취한 태도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어엿한 무장을 갖춰줄 때도 되었다는 식의 말만 했을 뿐, 이 물건들을 그에게 완전히 주겠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은퇴를 준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루푸스는 차마 그런 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평범한 갑옷을 요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루푸스는 옆에 내던져두었던 마른 수건과 숫돌을 왼손으로 집어들며 일어섰다. 어제 알쿠르에게 얻어 맞은 왼쪽 무릎이 비명을 질러댔고, 오늘 오전에 새로 생긴 멍들도 참기 힘들 정도로 욱신거렸지만 루푸스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검을 흩뿌렸다. 붕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들이 밝게 빛나며 날아갔다. 그는 숫돌을 검대 중앙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 넣고, 수건으로 검을 닦아냈다. 그의 옆에 앉아 같이 검을 갈던 알쿠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에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루푸스는 알쿠르에게 수건을 넘겨줬다. 알쿠르는 꼼꼼하게 검을 닦으며, 루푸스의 이야기를 품평했다.


"굳이 플라비우스 대장님에게 전달할 정도는 아니군요."


전날 밤 정원에서 들은 이야기와, 네오피토스의 일견 의미심장해보이는 말을 전해들은 알쿠르의 반응이었다. 사실 루푸스의 생각과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루푸스도 그렇게 판단했기에 플라비우스가 아니라 알쿠르에게 먼저 말한 것이다. 마르쿠스와 엘러드가 야노슈에게 했던 제안은 사실 놀랄만한 것도 아니고, 야노슈가 확실히 거절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민병대측에서도 어설프게 맘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경계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조치들은 이미 모두 취해져 있었다. 조금 걸리는 것은, 행정관 네오피토스의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엘레니인의 말은 조금 걸립니다. 왕자가 도시에서 하고 있는 일이 뭐가 어쨌다는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루푸스는 그 부분에서 설명이 필요했다. 사실 그는 야노슈가 도시에서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짐을 옮기고 어쩌고하는 얘기를 왕자 본인에게서 다소 두서없이 들은 것이 루푸스가 아는 전부였다.


"문제의 소지라도 있는 일인가?"


알쿠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목욕장 건물을 빌려서 잠시 창고처럼 쓰는 것입니다. 엊그제 밤에 엘러드가 도착하자마자 요구한 것 중 하나였고, 오늘 아침에는 야노슈 본인이 그곳에 초병 열두명을 배치해도 되겠냐고 질의해왔었습니다. 그의 병사들은 도시 입장이 금지되어 있는데, 그래도 자신의 짐은 자기들이 지켜야하지 않겠냐는 얘기였지요. 상식적인 요구였고 허가되었습니다."


루푸스는 마르쿠스의 제안을 떠올렸다.


"그 열두명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혹시라도 도시가 공격 받을때 내응한다던가?"


"없습니다. 목욕장을 감시하고, 도시에서 소란 비슷한 것만 생겨도 곧바로 그 곳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마흔명을 소(小)회관에 배치해뒀습니다."


알쿠르의 대답은 칼같이 바로 나왔다. 본인도 그런 위험 정도는 고려해뒀다는 증거였다. 과연, 조치는 완벽해보였다. 소회관은 목욕장 바로 맞은편의 건물이었다. 목욕장의 입구는 회관을 향해 난 것 하나뿐이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패악질을 저지른 무뢰배들처럼 깨진 창문으로 드나든다면 다른 방향의 출구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창문들도 모조리 벽돌로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루푸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았고, 그를 둘러싼 상황은 완전히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여태껏 별 불만 없이 그런 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최근의 일은 유독 답답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그가 변한 것인가, 상황이 너무 비정상적인 것인가. 그는 답답한 생각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숙영지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루푸스를 따라온 노예들도 물을 끓이고 있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알쿠르는 칼집에 검을 꽂아넣었다. 그는 둥그런 폼멜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멀쩡한 숙영지가 있는데 왜 굳이 도시에 창고를 하나 빌려쓰려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보관하려는 물건이..."


그는 어중간하게 말을 끊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루푸스는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야노슈 군 3중대장, 마르쿠스가 오고 있었다. 그는 루푸스와 알쿠르의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멈춰섰다. 광대뼈와 턱선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깡마른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렸다.


"무르밀로와 마이트라의 성전사이신가?"


마이트라의 성전사는 루푸스를 보고 하는 말일터였다. 과연, 온통 희게 빛나는 갑옷은 용사의 신인 마이트라의 전사들을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아마 알쿠르를 가리켰을 '무르밀로'는 검투사들의 병종 중 하나였다. 방패와 팔 보호구, 투구로 완전 무장하였으나 무기는 짧은 칼을 사용하여 저돌적으로 싸우는 것이 무르밀로 검투사들로, 무장의 화려함과 지루할 틈이 없는 싸움 방식 때문에 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병종이기도 했다. 검투사 시절에 대해선 되도록이면 언급을 피하려드는 알쿠르였으나, 그가 현역 시절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레부르 강 하류의 북변경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무르밀로였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차고 있는 팔 보호구도 그때의 물건인 것이다. 물론 그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지독한 결례일 것이었다. 루푸스는 그 점을 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이트라의 성전사는 과분한 호칭이고, 여기 있는 알쿠르는 레분툼 민병대의 부대장이지 일개 검투사가 아닙니다. 물론 농담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마르쿠스는 핏,하고 웃음 비슷한 것을 터뜨렸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네. 그런 의도는 없었어. 산맥 남쪽으로 내려와보면 알겠지만, 요즘 제국에서 평민이 돈깨나 만질려면 방법이 몇가지 없거든. 똑똑한 놈들은 법 공부해서 공무원이나 변호사 되는거고, 머리 나쁜데 힘 좋은 놈들은 군인이 되거나 검투사가 되는 수 밖에 없지. 둘 다 전자보단 후자가 벌이도 좋고 인기도 좋지. 요즘 계집들이 검투사들 지나가는 것만 봐도 자지러지는 꼴 좀 보면 검투사라고 불리는게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을걸."


알쿠르는 무표정한 상태 그대로 말이 없었다. 그가 마르쿠스의 말에 처음부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사과를 받아들인 것인지도 짐작할 길이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상황이 참 어색해질 것 같았기에 루푸스는 되는대로 말했다.


"그래서 군인이 되신겁니까?"


마르쿠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인은 해야겠고, 제국군 입대 가능 연령은 지나버렸고해서 마침 지나가던 외인부대에 지원한거지. 그것도 벌써 5년 전이군."


"군단병 선발 기준이 크게 완화됐다고 들었습니다만."


알쿠르가 끼어들었다. 루푸스는 그의 어조가 묘하게 비꼬는 듯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이 먹을 때까지 뭐하다가 그때서야 입대를 결심했냐 같은식의 비아냥이 그의 말에 묻어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믿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알쿠르가 자신의 과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겨우 그를 검투사로 불렀다는 이유로 그 목석 같은 알쿠르가 누군가를 비아냥대고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루푸스는 알쿠르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는 것인지, 자신이 그저 평범한 질문을 비아냥으로 착각한 것인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혼란은 차치해두고, 지적 자체는 옳았다. 레분툼이 고립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뭄에 콩나듯 들르는 상인들에게서 주워 듣는 것들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한때 신체 강건한 젊은이들만 모병하던 제국군은 이제 모병 기준이 비참할 정도로 완화되었고, 그나마도 지원자가 부족할 때가 많아 일부 지역에선 강제 징집까지 시행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 마르쿠스의 나이는 많이 쳐줘봐야 30대 중반. 5년 전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라면 충분히 입대할 수 있는 나이였다.


"킬리아쿠스 알지? 황제를 손에 쥐고 흔드는 그 개새끼 말이야. 그때 한창 그 친구가 군법에 이리저리 손대던 때였거든. 그 놈이 군대가 약해지고 있다면서 한번 크게 선발 기준을 올려버렸었어. 내가 여기 입대하고 딱 반년인가 지나니까 다시 완화되더라. 그즈음에 팔마 왕국한테 한번 크게 깨지고 서쪽에선 황제 참칭자까지 나와서 거의 6개 군단을 새로 편성해야 할 일이 생겼었거든. 기준을 낮춰서라도 일단 대가릿수를 맞춰야 했던거지. 나만 엿먹었고. 아, 점심 좀 같이 먹어도 되겠지? 그러려고 온거라서."


루푸스는 알쿠르를 돌아보았다. 알쿠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것을 본 마르쿠스는 씩 웃으며 뒤따라온 자신의 노예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뭔가가 가득 든 자루를 손에 든 노예는 모닥불쪽에 있는 루푸스의 노예들에게 합류했다.


"먹을 것도 좀 가져왔지. 앉아도 될까?"


마르쿠스는 방금 전까지 루푸스와 알쿠르가 앉아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푸스는 얼마든지 그러시라고 대답하고는, 자신도 다시 풀밭에 주저앉았다. 마침 야노슈 군의 간부들과 이것저것 대화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어쩌면 이 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을터였다.


작가의말

노트에 써 놓은걸 끊어서 올리자니 인터넷 연재글처럼 딱 깔끔하게 끝나진 않는군요.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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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8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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