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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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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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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0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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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북변경의 야노슈 (3)

DUMMY

전략도시. 제국 행정부에서 레분툼 시를 정의할때 쓰는 용어다. 거의 반세기 동안 끊이지 않은 랑골족의 약탈로 쑥대밭이 된 북변경의 생존자들을 긁어모아 방어가 유리한 지점으로 집단이주시킨 것이 이러한 전략도시들의 시초로, 레분툼은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세워진 부류였다. 넓게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뜬금없이 솟아있는 언덕을 목책과 경비탑 네개가 둘러싸고 있고, 그렇게 보호받는 구역 안에 천 명이 조금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원래가 가난한 북변경인데다가, 전란의 와중에 오직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급히 건설된 도시인지라 제국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복지 시설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전차 경주장이나 검투 경기장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극장은 여기까지 공연을 올 극단도 없고, 말로니우스 주교가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해서-공연이랍시고 자행되는 것들 대부분이 음란하고 상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극장 건설 지지자들에겐 유감스럽게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워지지 않았다. 상수도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우물물을 사용해서나마 목욕장은 한동안 운영이 되었으나, 연료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지기 시작하자 물을 데울 수 없어서 폐쇄되었다. 목욕장 건물 자체는 문만 잠가둔채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지역 사회가 계도를 포기한 무뢰배들이 한 불운한 여인을 그곳으로 끌고가 밤새 윤간한 사건이 벌어진 뒤로는 모든 창문을 막고 문에는 사슬과 자물쇠를 채워둬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볼거리나 재미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레분툼인들이었기에, 야노슈와 그의 수행원들이 도시 남문에서 플라비우스 저택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걷는 것을 수백명의 사람들이 나와 구경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야노슈는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루푸스는 야노슈를 맞이하기 위해 저택 문 앞에 나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남문까지는 그렇게 짧은 거리가 아니었건만 관문이 열리고 방문객들이 걸어 들어온 그 순간부터 루푸스는 야노슈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로, 온 몸에 갑옷을 두르고 가죽 망토까지 걸친터라 그 풍채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무장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허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각기 다른 색의 보석이 박힌 검대를 차고 있었는데, 버클을 비롯한 금속 부분은 모두 도금되어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갑옷은 사슬을 꿰어 만든 것이었는데, 강철 사슬 사이에 황동으로 만든 사슬이 섞여 있었고 모두 번쩍번쩍하게 광을 내놓은지라 그가 움직일때마다 온몸에서 은빛과 금빛 물결이 이는 듯 했다. 목에는 황금 사슬을 이어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고, 팔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갑옷 소매 밑으로도 묵직해 보이는 황금 팔찌가 드러나 보였다. 사슬 갑옷 밑에 받쳐입은 감청색 리넨 상의가 검대 밑으로 드러나 있었고, 상의와 같은 색깔과 재질의 바지에는 황동으로 된 철판이 왼쪽과 오른쪽 허벅지 각각에 네개씩 붙어 있었다. 그 밑으로는 검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그 부드러움과 윤기가 느껴지는 특등품이었다.


뒤를 따르고 있는 야노슈의 일행들도 화려하다면 화려한 차림이었지만, 야노슈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루푸스는 태어나서 한번도 저렇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구경꾼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은 아니라서, 야노슈가 지나는 곳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과 탄성 소리가 남았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거리에 배치된 민병대원들도 멍하니 선채로 야노슈를 바라보거나, 자신의 초라한 가죽 갑옷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한번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더러운 야만족 어쩌구 하는 외침이 나왔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기에 곧 수그러들었다.


긴장 때문인지, 루푸스에겐 야노슈 일행이 순식간에 저택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야노슈는 이제 거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와 있었다. 루푸스는 시선은 그대로 야노슈에게 고정시킨채로 왼손을 들어올려 뒤로 신호를 보냈다. 곧 그의 뒤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노예 마니우스일테였지만 굳이 확인해볼 필요는 없었다.


"알쿠르한테 병사들 해산시키라고 해. 알부스도 풀어줘도 된다고 하고."


루푸스는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루푸스가 -플라비우스가 그렇게 닥달해댄 것처럼- 드디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건지, 상대가 집안의 노예라서 그런건지는 두고 볼 일이었지만. 어쨌든 여태껏 루푸스가 해온 '어른인척하는 어린애의 어설픈 지시' 보다는 훨씬 나은 발성이었다. 그것에서 새로운 자신감을 얻은 루푸스는, 재빨리 뒷걸음질치며 물러나는 마니우스를 뒤로 하고, 그가 접대할 손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얼굴엔 거의 미소 비슷한 것까지 걸려 있었다.


"플라비우스 저택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네만치크 가문의 스테파누스님."


준비된 대사도 일단 지금까지는 아무 탈 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루푸스의 성취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노슈도 -거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신청. 상대를 자신과 동격으로 인정한다는 제스쳐다. 이 경우엔 과분한 친절이라고 할 수 있을터였다. 루푸스는 약간 당황했지만,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손을 들어 너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게 상대의 손목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야노슈의 묵직한 팔찌에 루푸스가 낀 팔찌가 살짝 부딪히며 가벼운 금속성을 냈다.


"반갑다. 네..플라비우스는 잘 지내고 있느냐?"


아마 '네 주인'이라고 말하려다 루푸스의 차림새를 보고 그만둔 것이리라. 야노슈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루푸스가 입고 나온 옷도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투니카와 반바지를 모두 붉게 물들였고, 가장자리엔 금사로 수를 놓은 물건이었으니까. 노예가 입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노예로 착각당한 것이 씁쓸하긴 했지만, 루푸스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노예들에게 손짓했다. 저택의 두꺼운 문이 열리고, 저택의 남쪽 모서리 전체를 차지하는 현관 겸 연회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푸스는 야노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대략 이십보 정도 앞에는 저택의 주인 플라비우스가 아무 장식은 없지만 아주 집요하게 주름잡히고 가장자리에 은사를 두른 토가를 입고 서 있었고, 그 우편에는 레분툼 주교 말로니우스가 길고 치렁치렁한 원통형의 제의를 입고 서 있었다. 플라비우스의 왼편에는 도시 각 구역의 장 네명이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 몇 보 뒤에는 열댓명의 노예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대기하고 있었다. 루푸스는 빠른 걸음으로 말로니우스의 오른쪽에 가서 섰다.


"경외하라! 알케트의 왕, 산왕 전당의 주인, 스테파누스 네만치크가 납시었다!"


야노슈가 문지방을 넘자마자 벽력같은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루푸스는 잠시나마 움찔했을 정도였다. 그 말을 외친 것은 현관 바로 왼쪽에 마치 포고관처럼 서 있던 엘러드로,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땅바닥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디서 갖고 온 것인지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가 무릎을 꿇자 찰랑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곧바로 플라비우스와 말로니우스가 무릎을 꿇었고, 루푸스를 포함한 일동 모두가 뒤를 따랐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저는 이 집에 손님으로 온 것이지 주인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야노슈가 말했다. 그의 어조는 평안했지만 그 목소리는 연회장 전체에 크게 울렸는데, 말로니우스 주교에게 여러 차례 발성을 배운 루푸스는 저것이 절대 보통의 담화에서처럼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루푸스는 야노슈를 바라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는 엘러드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플라비우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아직 정정하시군요."


"정정하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몸일세."


두 남자는 손목을 마주잡았다. 루푸스는 플라비우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에 전율했다. 플라비우스는 쉽게 웃지 않는 남자다.


"엘게쿰 전투에 있었다고?"


야노슈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 얘기 뿐입니다. 황송해서 이거 원."


"들을 이야기가 많겠군. 아, 소개를 잊었지. 미안하오."


말로니우스 주교가 플라비우스의 곁에서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라쿠스 말로니우스. 레분툼 시의 주교 되시는 분이오. 덕망이 높지."


종교적 열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긴 했으나, 플라비우스는 어쨌든 이교 신앙을 공공연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편 말로니우스는 레분툼 시민은 물론이고 민병대 내에서도 과반을 차지하는 보편교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에 둘 사이의 관계는 애매하고 위태위태 했으나, 양측이 모두 극단적인 충돌은 피해온지라 큰 문제가 벌어진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오늘의 연회는 형식상으로는 플라비우스가 손님인 야노슈를 받는 식이었으나, 야노슈가 지금 레분툼의 목책 바로 바깥에 진을 친 대군의 수장인만큼 연회는 공적인 행사에 가까웠다. 제국의 관료가 아무도 없는 레분툼에서 이 자리에 모인 자들 -민병대장과 주교, 각 도시 구역의 장들-이 바로 도시의 대표였고, 그래서 말로니우스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신의 가호가 그대와 그대의 사람들에게 있으라. 그대와 같은 전사들 덕분에 제국도, 참된 신앙도 영원히 번영할 것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주교님."


야노슈는 플라비우스와는 악수를 했지만, 주교에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평신도로서 겸허함을 보인 것이리라. 말로니우스는 뭔가 한마디 더 하려는 눈치였으나, 플라비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다음은 내 양자, 루푸스일세."


루푸스는 얼굴에 열기가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교의 바로 다음에 소개되다니.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야노슈는 이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누구인가 궁금했었지. 만나서 반갑다."


"영광입니다."


루푸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야노슈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곧바로 도시 각 구역의 대표들이 소개되고, 그 다음으로는 야노슈가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을 소개할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면면이 모두 루푸스의 호기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부사령관과 2중대 중대장을 겸하고 있는 엘러드가 제일 먼저 소개되었다. 키가 크고 깡마른 3중대장 마르쿠스는 제국 출신으로, 제국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수염도 깔끔히 면도한 상태였다. 기병대장 마고는 동방의 기마민족인 하르마트족 아버지와 제국의 적인 랑골족 출신의 어머니를 둔 혼혈이었는데, 오른쪽 뺨에 큰 흉터가 있었다. 행정관 네오피토스는 중키에 머리가 벗겨진 엘레니인이었는데, 유독 손이 큰 것이 눈길을 끌었다. 창병 키르낙은 야노슈와 같은 고산지대 출신 창병으로, 원래 이런 장소에 참석할 급은 되지 않았으나 네만치크 부대가 가장 최근에 치른 전투인 벨티움 포위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가 랑골족 연합군의 일파인 세피다이 왕 살리쿠스의 친위대를 최초로 돌파하고 살리쿠스의 깃발을 탈취하는 무공을 세웠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야노슈의 수행원들은 엘러드와 키르낙을 제외하면 모두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무기는 차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야노슈와 함께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한 인물들로, 하나하나가 영웅호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어째서 이런 자들이 그렇게 대중의 미움을 받는 것인지 루푸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마 그들이 야만인 출신들이고 제국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겠지만, 글쎄. 이들 용병들이 제국의 군사 체계를 무너트린 것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용병이 대신 활약하고 있는 것이고, 용병이 아니었으면 제국은 더 큰 위기에 빠졌을 것이 아닐까. 루푸스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모든 주요 인사들이 소개되고, 인사를 나누는 것까지 끝나자, 플라비우스가 크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연회를 시작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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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변경의 야노슈 (13) 13.11.24 230 4 11쪽
1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7 4 11쪽
13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7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8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4 6 12쪽
9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4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1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8 7 10쪽
»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4 북변경의 야노슈 (2) 13.10.03 369 7 9쪽
3 북변경의 야노슈 13.09.22 616 15 10쪽
2 프롤로그 2 13.09.21 514 9 11쪽
1 프롤로그 1 +2 13.09.20 656 1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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