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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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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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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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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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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북변경의 야노슈 (7)

DUMMY

루푸스는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땀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플라비우스의 말대로 아침 식사에 나가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다. 어느 정도인게냐?"


플라비우스는 식사를 마친 상태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빵 부스러기와 치즈, 올리브 따위가 남아 있는 접시가 그의 앞에 하나, 루푸스가 서 있는 쪽에 하나 놓여 있었다. 루푸스가 서 있는 쪽 의자에선 야노슈가 앉았지 싶었다. 지금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방에서 아침 식사를 끝낸 루푸스가 (거의 예상하고 있던) 호출을 받고 왔을 때 야노슈는 이미 없었다. 아침부터 어디 간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루푸스는 양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


물기 때문에 연푸른색으로 보이는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가히 플라비우스의 평소 모습이라 할만했다.


"아마 숙취겠지. 야노슈 말로는 한 잔만 마셨는다데 그 모양이구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진 얼굴에는 표정 비슷한 것조차 없었으나, 루푸스는 그 얼굴에서 실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쨌든 10년 넘는 세월을 아들로서 살아온 것이다.


"개인차라는게 있는거겠지.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말거라."


루푸스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숙취 운운은 아마 야노슈나 마니우스가 둘러대준 모양이었다. 졸지에 술 한잔 마시고 다음날까지 앓아눕는 약골이 되어버렸으나, 아침엔 괜찮았다치더라도 어젯밤엔 정상이 아니었으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왜 그런 변명을 스스로 떠올리지 못했는가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거기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말할 기회도 없어졌다는 생각이 더해져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전 이런걸 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같은 말이 목구멍에 턱하고 걸린 느낌이었다. 가슴속에는 불만감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지만 그것도 역시 목구멍 위로 올라오진 못했다. 이대로 있다간 빽하고 소리라도 질러버릴 것 같았기에, 루푸스는 끈적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라비우스는 그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다.


"몸은 괜찮은 모양이구나."


루푸스의 얼굴에 떠오른 불만을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한 듯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루푸스는 플라비우스에게 사실을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플라비우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루푸스는 조금 긴장했다.


"어제, 알부스를 억류 했었다고?"


알부스는 레분툼에 남은 마지막 불량배였다. 그의 동료들이 지금까지도 레분툼 시민들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는 목욕장 윤간 사건을 벌였을 때, 그는 목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배회하다 체포되었었다. 모두들 그가 동료들을 위해 망을 보고 있었을거라 생각했지만 본인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었고, 딱히 야간 통행 금지령 같은건 시행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그는 평소 어울려 다니던 불한당 동료들이 목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비루한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야노슈의 일행이 도시에 들어오기 직전, 루푸스는 알쿠르와 민병대원들을 보내어 알부스를 억류해두도록 했었다. 그는 3년 전에도 북변경 총독의 사자에게 순전히 재미로 돌을 던져 플라비우스를 곤경에 빠트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푸스는 자신의 조치가 매우 적절했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별로 위축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누가 플라비우스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는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예, 왕자의 일행이 지나가는 동안만 그렇게 해뒀습니다."


플라비우스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이 두번째였다.


"물론 너에게 교통 정리 권한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야노슈가 올 길에 성난 군중이 야만인 운운하면서 뛰어드는 것을 막으라고 한 것이었지 아직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무고한 시민을 감금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너에겐 그럴 권한이 없었다. 알겠느냐? 알부스 그 놈이 평소에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녀석은 노예도 외국인도 아니야. 제국 시민권자가 낳은 정식 시민권자란 말이다."


그 놈이 또 재미로 돌을 던질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말이냐고 반박하려던 루푸스는, 곧바로 검지를 펴보이는 플라비우스의 손짓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플라비우스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리 가르쳐주지 않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고, 그런 명령을 수행해놓고 나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알쿠르에게도 잘못이 있다. 알쿠르도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모양이지. 이제부터라도 알아 두거라."


알쿠르가 일러바친건 아닌 모양이었다.


"제국 시민권자는 그가 거주하는 촌락, 혹은 도시의 장 급 이상이 직접 서명한 영장이 있거나, 제국법을 위반하는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이상 어떠한 구속도, 수사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알겠느냐?"


루푸스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니,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던가? 사안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주변에서 누구도 그런 규정을 언급하거나 신경쓰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실 루푸스는 저렇게 말하고 있는 플라비우스 본인도 그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왔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는 제국의 행정부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북변경 거의 전역이 그래왔지. 우리가 그런 까다로운 법률 몇개쯤 어겼다고 그걸 알아차릴 사람도, 처벌할 사람도 없는게 사실이다."


플라비우스의 어조는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도 열변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과묵한 평소의 그를 생각해보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푸스는 말의 내용보다 익숙치 않은 그 어조에 압도되었다. 그는 거의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이냐? 법률을 놓아버리면 그 다음엔 무엇을 포기하겠느냐? 우리는 신앙을 잃었다.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해 고문 받다 처형된 나약한 신에 눈이 멀어 조상들의 신을 내다버렸지. 그뿐이더냐? 지금도 우리는 야만인들처럼 싸우고 있다. 용병들로 가득 채워진 요즘의 제국군만 그런게 아니야. 내가 내 대원들을 이끌고 싸운 방식도 우리보다는 적들의 방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앙, 싸우는 법, 법률, 그 다음은 아마 옷과 음식, 도시, 검투 경기, 연극이 되겠지. 우리를 문명인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 말이다. 루푸스,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된다."


플라비우스는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두 눈이 방금의 격한 발언 때문에 지쳤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돼."


루푸스는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으나, 솔직히 플라비우스의 말을 납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비우스의 말을 엄밀히 적용해보자면, 레분툼인들은 이미 문명인도, 제국인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레분툼인들의 과반수는 주말에 교회에 나가는 보편교도다. 플라비우스 본인도 인정했듯이, 레분툼 민병대는 군단병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오늘따라 평소의 행동과 반대되는 언행을 보이곤 있지만, 어쨌든 플라비우스 같이 권세를 가진 개인들의 의지가 법을 대신한다. 어젯밤의 연회도 제국식이 아니었다. 레분툼에는 검투 경기도, 연극도 없다. 플라비우스가 젊었던 시절, 아직 북변경에 '전략도시'들이 아닌 제대로 된 도시들이 산재해 있던 시절에는 그런 것들의 존재가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푸스의 세대는 플라비우스가 그렇게 강조하는 '문명적'인 것들을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루푸스의 출신도 출신이지만, 그가 살아온 세대 자체가 그런 세대인 것이다. 루푸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양부가 강요하는 것, 기대하는 것들 중에 그가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태까지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랬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플라비우스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들어와라!'고 외쳤다.


"야노슈의 부하들은 오늘 오전 중으로 떠난다. 강 주변을 정찰하고, 도하 지점을 찾아볼 계획이라더구나. 네가 안내를 해줘야겠지."


플라비우스는 잠시 말을 끊더니, 자신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원래는 조금 더 시일을 기다렸다 줄 생각이었는데, 야노슈가 워낙 서둘러대서 이것도 빨리 줘야겠더구나."


루푸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겼는지, 플라비우스는 방금 전까지 열을 올리던 것도 잊은 듯 미소를 지었다. 루푸스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고, 노예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플라비우스의 갑옷이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쉬는 주말을 앞두고, 가볍고 짧은 한 편. 제가 봐도 전개가 극단적으로 느리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에서 승으로 뛰어 오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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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변경의 야노슈 (13) 13.11.24 231 4 11쪽
1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7 4 11쪽
13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7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8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5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2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8 7 10쪽
5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4 북변경의 야노슈 (2) 13.10.03 369 7 9쪽
3 북변경의 야노슈 13.09.22 617 15 10쪽
2 프롤로그 2 13.09.21 515 9 11쪽
1 프롤로그 1 +2 13.09.20 656 1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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