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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왕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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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335

작성
13.09.2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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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북변경의 야노슈

DUMMY

루푸스는 왼손에 든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낮췄다. 본능적으로 발가락과 무릎의 힘이 조정되고, 신체의 무게중심에 겉보기보다 훨씬 큰 조정이 가해진다. 조정의 목표는 명백하다. 돌격. 상대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와 똑같은 자세를 취한 순간, 루푸스는 땅을 박차고 달렸다. 피멍이 들었을 허벅지와 어깨가 욱신거리고, 오른손에 든 검은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지만 그의 돌격은 번개와도 같이 빨랐다.


한 걸음, 갑옷과 검집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투구 때문에 기묘하게 왜곡되어 들려온다.


두 걸음, 상대도 방패를 내밀며 돌격하기 시작한다.


세 걸음, 자신처럼 완전 무장한 상대의 모습이 눈구멍의 좁은 세계를 가득 메운다. 상대가 오른손에 든 검의 번뜩임에, 그것이 날을 세우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네 걸음째,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


힘과 체격은 루푸스가 한 수 위였다. 그러니 루푸스가 밀려난 것은 체력이 먼저 바닥나서 그렇다는 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영리하게 싸우지 못한다'는 말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 했으나, 상대는 잡념, 즉 대련이 끝난 뒤의 꾸중에 대한 걱정 같은 것에 빠져있을 여유 같은건 주지 않았다. 균형을 잃고 뒷걸음질치는 루푸스의 투구에 상대의 검이 내리 꽂혔다. 그는 간신히 방패를 들어올려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무거운 방패를 들어올리고 강력한 일격까지 받아내자 도저히 균형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루푸스는 방패를 높이 쳐든채 계속 뒷걸음질 쳤고, 상대는 집요하게 추격하며 검격을 날려왔다. 단순한 내려찍기의 반복이었으나 그 기세가 거의 방패를 쪼개버릴 듯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매 공격마다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파편이 흩날렸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계속된 공격은, 상대가 공격법을 바꾸기 위해서 검을 거둬들이며 끝났다. 루푸스는 반격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후진을 멈추고, 왼발을 한보 내딛었다. 상대의 품에 곧장 뛰어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모두 예상했다는 듯, 루푸스가 왼발을 내딛자마자 곧장 그의 왼쪽 무릎을 방패로 내리찍었다. 거의 기다리고 있었던 수준의 반응 속도였다. 방패를 높이 들고 있어서 하체를 노출시킨 것이 패착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방패 때문에 상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받은 일격이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루푸스는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문장을 구성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내뱉으며 정원 바닥을 구르고 있자니, 어느 순간 한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푸스는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잠시 멍하게 올려다보다가, 그의 정체를 깨닫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침부터 노예들을 소란스럽게 만든 그 '손님'이었다. 도시 내에서 가장 키 큰 루푸스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듣던대로 키가 꽤 큰 편이었다. 옷은 색이 바랜 가죽 투니카에 소매가 긴 리넨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아마 갑옷 밑에 받쳐입는 용도처럼 보였다. 키도 그렇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갈색 머리에, 길게 기른 수염이 길쭉한 얼굴과 맞물려 전반적으로 길쭉길쭉한 인상이었는데, 그의 외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눈이었다. 크기나 형태에 별 특이한 점은 없고, 눈동자도 희귀하지 않은 녹색이건만 그의 눈은 유독 루푸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루푸스는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상대의 눈에 전혀 웃음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련으로 끓어 올랐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째서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눈은 저렇게 차가운데. 남자는 입으로만 웃으며 루푸스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푸스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방금 그를 때려눕힌 알쿠르였다.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는 루푸스의 눈에서 시선을 떼어 알쿠르를 바라보았다. 루푸스도 고개를 돌려 자신의 스승을 보았다.


알쿠르는 투구를 벗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검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남부의 고르디아 출신 흑인으로, 복잡한 과정 끝에 제국의 북단인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자였다. 피부도, 털도 숯처럼 새카만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루푸스는 이 기분 나쁜 손님이 알쿠르의 모습을 보고 놀라기를 내심 기대했다.


실망스럽게도, 플라비우스의 손님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나비아에서 왔나? 아님, 고르디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대에 루푸스가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상대는 플라비우스의 손님이고 그의 정체에 관해선 수상쩍은 소문만 나도는 상황이었다. 과연 억양이 조금 이상한 것을 보니 그가 들은 것 중의 일부는 헛소문만도 아닌 듯했다. 루푸스는 일단 말을 아끼기로 결심했다. 정작 당사자인 알쿠르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한 태도기도 했다.


"고르디아입니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통성명을 잊었군. 엘러드라고 하네. 자네는 알쿠르겠지? 방금 때려눕힌 이 금발 청년은 루푸스겠고. 영감이 후계자로 밀고 있는 녀석이라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플라비우스 본인이 말해줬거든."


후계자 어쩌고 하는 얘기에 루푸스는 조금 당황했다. 루푸스를 비롯해서 도시 사람 전체가 아는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걸 그렇게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알쿠르가 눈짓을 보낸 뒤에야 루푸스는 배운대로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엘러드는 자신도 오른손을 내밀어 루푸스의 손목을 붙잡고 위아래로 한번 흔들더니,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왼손으로 루푸스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저돌적으로 싸우더구나. 알쿠르에게 배운거니?"


갑작스럽게 친밀감을 표시해오는데 당황한 루푸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먼저 나선 것은 알쿠르였다.


"뭉툭한 검으로만 수련한 놈 특유의 자살적 방식입니다. 실전은 커녕 진검조차 대면해본 적이 없어서 겁이란게 없죠. 고약한 것이 덩치와 힘을 타고나서 어거지로나마 밀어붙이면 또래들 사이에선 먹혀들어가니 자기가 잘난 줄 알아서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엘러드는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쿠르는 원래 성격이 무뚝뚝했고, 루푸스는 상대의 헤픈 웃음이 모두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에 쉽게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심히 어색한 상황이었는데, 엘러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노예 알리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그는 계속 혼자 웃어댔다. 엘러드는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저었다.


"집 주인이나 식솔들이나 똑같구나. 칼밥 먹고 사는 무뢰배들보다 웃음이 없어서야 원."


루푸스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또 어색하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엘러드가 잡고 있던 어깨를 휙 잡아 당기며 얼굴을 바싹 당겨왔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였다.


"꼬마야, 방패벽에서 싸우는 법은 배웠냐?"


불편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엘러드의 입에서 정향 냄새가 훅 끼쳐올 정도였으니. 불편한 것은 거리뿐만이 아니라, 이제 엘러드의 표정은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에 웃음기가 없었다. 루푸스는 상대의 갑작스런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엘러드의 말 자체는 이전 것들보다 대답하기 쉬운 것이었기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없습니다."


엘러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전히 눈가엔 웃음기 하나 없는채였다.


"방패벽끼리 부딪치면, 양측의 선두열은 이 거리에서 싸우지. 보통 3열이나 4열까지가 일반적인데, 네 뒤에 선 동료들이 온 힘을 다해 네 등을 밀고있는거야. 그리고, 똑같이 자기 동료들에게 등이 떠밀리고 있는 상대는 이 거리에서 너와 방패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검이고 뭐고 휘두를 공간조차 없이 악다구니만 쓰며 밀치기만 반복하는거지. 서로 침을 뱉고 욕지거리를 하기도 한다. 아니, 거의 매번 그러지. 가끔 상대 수염에 붙어 있는 이가 내 수염에 옮겨오는게 보일 때도 있어. 난장판이지. 그렇지 않냐?"


그는 루푸스를 놓아주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뒤에야, 루푸스는 자신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엘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곤란한데."


루푸스는 도대체 무엇이 곤란한지 묻고 싶었다. 어째선지 이번에도 엘러드에게 대꾸한 것은 알쿠르였다.


"아이의 배움이 부족한건 아닙니다. 저흰 원래 방패벽을 쓰지 않으니 가르치지도 않은 것이죠."


알쿠르가 루푸스를 옹호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엘러드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제국식으로 싸우지도 않겠지. 우리 때도 그랬으니까. 제대로 무장을 한 인원이 거의 없으니 방패 밀치기 같은 건 자살 행위일테고."


도대체 뭐가 곤란한지에 이어, '우리 때'가 무슨 말인지도 의아한 루푸스였다. 엘러드는 계속해서 루푸스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꺼내놓고 있었다.


"플라비우스 영감한테 한번 말해봐야겠어. 루푸스, 넌 지금 따라와야겠다. 괜찮겠지?"


루푸스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쿠르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것을 동의를 구하는 것으로 착각한건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루푸스는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엘러드를 쳐다봤지만, 엘러드는 이제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복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푸스도 그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플라비우스가 서 있었다.


"루푸스, 네게 할 말이 있다. 알쿠르, 자리를 비워주게."


알쿠르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검과 방패를 챙겨서 자리를 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루푸스는 뭔가 큰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사실이었다.


작가의말

엘러드는 결국 정향 넣은 포도주를 마셨슴미다


루푸스는 많이 얼타는 시기입니다. 주인공이 내내 멍청할거라고 지레짐작하진 말아주시길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 아직 덜 나왔슴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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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7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8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10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9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4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1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8 7 10쪽
5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4 북변경의 야노슈 (2) 13.10.03 369 7 9쪽
» 북변경의 야노슈 13.09.22 617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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