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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왕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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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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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프롤로그 2

DUMMY

엘러드는 플라비우스의 응접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난 11년 동안 그가 엄청난 거물이 되었음을 실감케 해주는 방이었다. 엘러드가 앉아있는 의자 바로 앞에는 오직 제국의 장인들만이 깎아낼 수 있는 우아한 곡선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엔 향초 하나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촛대는 놀랍게도 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벽에는 전쟁과 사냥을 묘사한 모자이크화가 그려져 있었고, 남쪽 벽에 작은 창문이 뚫려 있었는데, 이 지방의 추운 기후를 반영하듯 창문의 안과 밖으로 덧창이 있었고, 창문의 위에는 두꺼운 가죽이 돌돌 말려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이 되어도 안팎의 덧창을 모두 닫고 가죽을 커튼처럼 풀어 내리면 한기가 실내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서쪽 벽에는 작은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두루마리 몇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함보다는 아늑한 인상을 주는 방이었다. 사실 엘러드가 이보다 화려한 방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국경 너머의 산악지역 출신이긴 하나, 제국의 외인부대로 복무하며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제국의 중심지와 변방을 전전하며 온갖 기상천외한 경험을 한 그였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엘러드의 견문은 웬만한 제국 시민권자보다 넓었으며, 그런 넓은 견문을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플라비우스의 응접실은 썩 호화롭거나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지역 유지의 저택 치고는 오히려 검소한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플라비우스의 응접실에는 오히려 견문이 넓고 극한의 화려함도 겪어본 자의 눈에만 보이는 가치가 있었다. 안정감과, 소박하지만 비루하지는 않은 품위가 그것이었다. 특히 엘러드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은 그 안정감이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자수성가한 노병의 인생이 응집되어 있는 듯한 이 방에서, 고향도 가족도 잃고 타지에서 경멸스런 눈빛을 받으며 칼밥을 벌어먹고 사는 용병은 묘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 스며드는 나약한 감정을 지워나가던 그 순간, 방문객을 오래 기다리게 한 주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스테파누스 플라비우스. 나이는 마흔 다섯이다. 그렇게까지 많은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레부르 강이 보이는 장소에서 살아왔고, 농민의 단칸방에서 돼지들이 보는 가운데 태어났으며, 스물을 넘기기도 전에 창병이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마흔 다섯은 기적과도 같은 나이다. 그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살을 넘기 전에 죽거나, 강을 건너온 랑골족에게 살해 당하거나, 용케 칼날을 피했으면 노예로 붙잡혀가 혹사 당하다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일반적이다. 변경의 가난한 농부도 제국 정부가 지원하는 연금과 의료 혜택을 받으며 천수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엘러드는 그런 허황된 말은 믿지 않았다. '좋았던 옛날' 운운하는 헛소리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국은 가장 늙은 노인의 기억 속에서도 지금과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경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마흔 살 이상을 살기 위해선 신들의 가호가 필요하다.


11년만의 재회에서, 엘러드는 그 가호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누스 플라비우스는 강철 같은 의지의 사나이였다. 검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단단하던 풍채도 물렁해졌고, 또렷하던 눈빛도 물기가 차올랐지만, 그래도 형형한 안광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아, 강인하고 매서운 정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것은 아무 장식 없는 짧은 투니카에 반바지로, 바로 뒤에서 물그릇을 들고 따라오는 노예-엘러드에게 문을 열어주고 응접실로 안내한 바로 그 노예였다-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지만, 노예가 손에 든 물그릇을 내려놓는다해도 누가 노예고 누가 주인인지 헷갈릴 사람은 없으리라. 그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엘러드를 쳐다보지도 않은채 무성의한 손짓만으로 앉히고, 노예가 들고 온 물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손을 닦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노예의 손목에 걸려 있던 수건으로 입가를 훔친 뒤였다.


"목 마른가?"

여전히 엘러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조금 그렇군요."

스테파누스는 노예가 든 물그릇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걸 마시진 않았겠지?"


가장 부유한 주들의 총독궁에도 드나들어본 엘러드였다. 그 정도로 제국 방식에 무지할 리가 없다. 그는 애매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이 없자, 스테파누스는 곁눈질로 엘러드를 흘깃 보더니, 그의 미소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예에게 명했다.


"두 잔 데워오거라. 계피만 넣어서. 저번처럼 끓여놓고 데웠다고 거짓말하면 코로 끓는 물을 마실 줄 알아라."


"예, 주인님."


"치즈도 조금 꺼내오거라. 혹시 남은 빵이 있으면 그것도 챙겨오고."


"예, 주인님."


노예가 깊숙히 목례를 하고 물러가는 것을, 엘러드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끓인 포도주와 데운 포도주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플라비우스도 그런 부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가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미소는 노병이 엘러드 앞의 의자에 앉을 때도 입가를 떠나지 않았고, 그가 꺼내놓은 첫 말의 내용에 더욱 커졌다.


"스테파누스라고?"


"세례명이라는거지요."


노인은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안 받은 세례를 그 놈이 먼저 받았군. 스테파누스 네만치크라니."


왕자가 세례를 받은 것이 꽤 옛날 일이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떨떠름하기론 엘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요즘 중앙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보편교도가 아니면 관직은 꿈도 꿀 수 없죠. 이 근방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엘러드의 마지막 말은 플라비우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노인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관직은 무슨. 내 지위는 철저히 비공식적인거다. 그리고, 주교놈이 얼마나 쪼아대는지 미칠 지경이다. 완전히 멍청한 놈은 아니라 다행이다만. 옛날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옛날이라니 퍼뜩 엘러드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옛날 하시니 생각난건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플라비우스의 기준으론 그렇게 옛날은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엘러드는 말을 이었다. "경비가 입고 있던 그거," 엘러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거 칼디치 망토 아닙니까?"


플라비우스는 웃음기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야노슈가 낸 구멍들도 그대로 있지. 열한개였나?"


"열세개입니다."


칼디치라는 랑골 족장이 있었다. 혹한의 겨울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와 약탈 행진을 벌이며 북변경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던 그를 저지한 것이 바로 플라비우스의 민병대였다. 꿀술과 강간과 전리품에 취해있던 야만족들은 플라비우스의 용의주도한 기습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전투의 향방이 결정된 뒤에도 거대한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자신의 백곰가죽 망토를 제국인들의 피로 붉게 물들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칼디치였다. 마지막에 나선 야노슈가 열세번이나 창을 찔러넣은 뒤에야 그 괴물은 숨을 거뒀었다. 아직 엘러드의 왕자가 야노슈 네만치크로 불리던 때였다. 그도, 엘러드도 플라비우스의 식객이자 창병이었고, 어느정도 명성과 경험을 쌓은 망명왕자가 독립하여 자신의 군대를 일으키려면 아직 몇년의 시간이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 그때는 모두들 얼마나 젊었던지. 아니, 젊었던 것은 플라비우스고 엘러드와 왕자는 애송이에 불과했었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 것이다. 플라비우스가 들으면 코웃음 칠 생각이지만, 젊은이들에게도 추억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엘러드는 머릿속으로 몰려드는 추억들을 털어냈다.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얼굴로, 목소리는 떨리지 않게. 말 실수 한번에 천오백 명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왕자님의 전갈입니다."


엘러드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두루마리를 꺼냈다. 회색 봉랍으로 봉인하고, 네만치크 가문의 상징인 늑대 인장을 찍은 물건이었다. 플라비우스는 의외라는 듯 인장을 들여다봤다.


"세례 받고 글도 배우고 인장까지 갖고 다닌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제 무일푼의 망명자가 아닙니다."

사실 이 정도 말로는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했지만, 엘러드는 말을 아꼈다. 어차피 플라비우스의 호의가 아니었으면 야노슈와 엘러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니, 그들이 살아서 일궈낸 모든 업적의 일부는 플라비우스의 공인 것이다. 그리고, 왕자는 지금 옛 은인에게 한번 더 호의를 부탁하는 입장이다. 괜히 허세를 부려서 좋을 것이 없다.


플라비우스는 대꾸가 없었다. 때마침 노예가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권했지만, 그는 손짓으로 물리치고 편지에만 집중했다. 엘러드는 노예가 공손히 내미는 쟁반에서 잔을 집어들고, 향을 음미하는 척하며 노인을 주시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엘러드는 편지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애초에 쓰여질 단계에서부터 몇번이고 읽어 봤기 때문이다. 편지에 쓰인 내용 중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엘러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플라비우스는 어디까지 알아챌까. 거짓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엘러드는 긴장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잔을 입에 갖다댔다. 은은히 올라오는 계피향이 썩 그럴듯했다. 꽤 먹을만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엘러드는 주저없이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잠시 후에 넘겼다. 뜨끈한 포도주가 여행과 긴장으로 굳은 목을 따라 내려간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플라비우스도 편지를 내려놓고 탁자 위의 접시에서 빵 한덩이를 집어들었다.


노예가 빵을 놓고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던 엘러드는 조금 당황했다. 참 조용히도 놓고 나갔다는 말을 웅얼거리는 사이, 플라비우스는 집어든 빵을 반으로 찢고 한 쪽을 엘러드에게 권했다. 빵을 받아든 엘러드는 그 부드러운 감촉에 놀랐다. 사실 수확기로부터 그렇게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니 밀빵이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니지만, 플라비우스는 춘궁기에도 호밀이나 보리는 입에 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포도주는 괜찮던가?"

엘러드의 놀람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태평한 목소리였다.


"집에 정향은 있습니까? 전 정향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사실 정향은 두 번 밖에 먹어보지 못했지만 엘러드는 되는대로 말하며 빵을 베어물었다. 플라비우스는 네 취향은 그렇냐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쟁반에서 치즈 조각을 집어들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할 말이 많겠군. 많이 먹어두게."


엘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은 빵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었지만, 엘러드는 자신이 있었다. 엘러드는 협상하는 법을 좀 안다.


단지,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을 뿐.


작가의말

올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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